강릉현江陵縣에 有合葬용산龍山之西者하니 爲송宋용천령龍川令증상서형부시랑贈尙書刑部侍郞王公之墓라
公之卒에 得年七十一이요 其葬之歲在辛卯하니 爲황우皇祐三年十二月甲申이라
용천龍川은 其所卒也
요 以
형부시랑刑部侍郞贈公者
는 曰公之子
주周라
승상丞相十有六世之孫검儉이 爲당唐정의대부正議大夫 명주자사刺명주자사明州하니 始去장안長安之만년현萬年하야 爲명주자사明之봉화인奉化人하다
정의대부大夫之兄曰총潨이니 총潨生신紳하고 신紳生소韶하며 소韶生公하니 四世咸爲현령縣令하다
國除에 遷於경사京師하다 復掾밀주密州라가 위尉기주夔봉절현奉節하고 爲형주邢之임현任현령令이러니
擧者二十餘人호되 不用하니 歎曰 吾旣其衰矣로다 而爲是하니 是不可以已耶아하고 卽以疾去하다
去之八年토록 無復言進이러니 仕黨故强起之한대 復嘆曰 仕不仕는 惟義也니 吾敢自必於其間耶아하고 起현령令용천龍川이라가 遂卒하다
始公尙少에 以文稱於士友하고 嘗渡절강浙江할새 有忘白金百근斤於舟러니 公最後獨見之하고 留三日하야 得忘者歸之而後去호되 而不告以名하다
今兩縣吏民이 皆曰賢令也라하더니 旣亡에 皆哀焉하다
合葬于
용산龍山者
는 천수군태군天水郡太君권씨權氏니 善草隷書
하고 誦數經
하며 能略通其說
하니 실實당唐之十七世孫云
이라
子男四人이니 향向類고高爲진사進士하야 充其業하고 其季는 광록군光祿君也라
광록군光祿君方潔勤審하고 下賢好學하니 人以爲광록군君子之子焉이러라
士
정의대부大夫之家 流落顚頓
하야 不常其世
하니 後雖有振起者
라도 多不知其族之所出
이어늘 獨
광록군光祿卿之家 爲世其家
하야 而能自道尤詳
하야 自
으로 至公四世之告命
이 皆具在
하니라
문장文章 가운데 구句나 자字를 도치倒置하여 나열한 곳이 많은데, 이는 형공荊公이 문장을 기이奇異하게 짓기를 좋아하였음을 드러낸 부분이다.
강릉현江陵縣 용산龍山의 서쪽에 합장合葬한 분이 계시니, 송宋 용천령龍川令 증상서형부시랑贈尙書刑部侍郞 왕공王公의 묘墓이다.
공公이 졸卒할 때의 연세가 71세였고, 장례葬禮를 모신 해는 신묘년辛卯年으로, 황우皇祐 3년 12월 갑신일甲申日이었다.
용천龍川은 그분이 졸卒한 곳이고, 형부시랑刑部侍郞으로 공公을 증직贈職한 것은, 공公의 아들인 광록경光祿卿 주周의 벼슬에 의해서였다.
공公의 휘諱는 문량文亮이고, 자字는 소원昭遠이니 그의 선조先祖는 진晉에서 승상丞相을 지낸 도導이다.
승상丞相의 16세손世孫인 검儉은 당唐의 정의대부正議大夫 명주자사明州刺史를 지냈으니, 처음에 장안長安의 만년현萬年縣에 살다가 이주하여 명주明州의 봉화인奉化人이 되었다.
정의대부正議大夫의 형兄이 총潨이었는데, 총潨이 신紳을 낳고, 신紳이 소韶를 낳았으며, 소韶가 공公을 낳았는데, 4대代가 모두 현령縣令을 지냈다.
전씨錢氏가 오월국吳越國의 왕王으로 있을 때에 공公이 책문策問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에 들어, 오월吳越에 속屬한 주州의 연掾이 되었다.
오월吳越이 송宋에 귀속되자 경사京師로 돌아왔고, 다시 밀주密州의 연掾이 되었다가 기주夔州 봉절현奉節縣의 위尉가 되었으며, 다시 형주邢州 임현任縣의 현령縣令이 되었는데,
경관京官으로 추천한 사람이 20여 명에 이르렀으나 임용되지 않자, 탄식하기를 “내가 이미 노쇠하였는데, 이런 지위에 있으니, 어찌 사직辭職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하고, 즉시 병을 이유로 물러났다.
물러난 지 8년 동안 다시 벼슬에 나가겠다는 말을 한 일이 없었는데, 같이 벼슬했던 동료들이 강제로 나오게 하니, 다시 탄식하기를 “벼슬을 하고 아니하는 것을 오직 의리義理에 맞게 할 뿐이니, 내가 감히 스스로 그 사이에서 내 신념만 기필期必할 수 있겠는가.” 하고, 다시 관계官界에 나아가 용천龍川의 현령縣令이 되었다가 졸卒하였다.
공公이 아직 어렸을 때에 문장文章으로 사우士友들 사이에서 칭찬을 받았고, 일찍이 절강浙江을 건널 때에 백금白金 100근斤을 배에 놓아두고 간 사람이 있었는데, 공公이 맨 마지막에 홀로 이를 발견하고, 3일을 머물면서 잃어버린 사람에게 돌려줄 수 있게 된 이후에야 그 자리를 떠나면서, 이름도 알려주지 않았다.
후일에 종자從者가 이 소문을 퍼뜨리니, 이에 또한 훌륭한 어른이라는 칭예稱譽를 얻게 되었다.
지금 그가 다스렸던 두 현縣의 관리와 백성들이 모두 어진 수령이었다고 말하였는데, 그가 사망死亡하자 모두 슬퍼하였다.
용산龍山에 합장合葬한 부인夫人은 천수군태군天水郡太君 권씨權氏로, 초서草書와 예서隷書를 잘 썼고, 경서經書 여러 권을 암송暗誦하였으며, 그 이론理論에 대체로 통달하였으니, 실實은 당唐나라 정효공貞孝公 고皐의 17세손世孫이었다.
아들이 넷이니, 향向과 빈頻과 고高는 진사進士로서 각자의 사업을 실현하고 있고, 막내는 광록군光祿君이다.
딸이 셋인데 모두 유명한 사람들에게 출가하였다.
광록군光祿君은 청렴하고 부지런하며 일을 조리있게 처리하고, 어진 사람을 섬기고 배우기를 좋아하니, 사람들이 군君의 아들로 손색이 없다고 여겼다.
진晉 땅이 어지러워지고부터 오랑캐들이 도적질하며 황하黃河 유역 일대를 점거하고 있어서, 한때 빼앗겨 어지러워졌다가 한때 수복하여 다스려졌다 한 것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천 년이 되었다.
이 때문에 사대부士大夫의 집안들도 유락流落하고 전복顚覆되어 계속 사대부로 남아 있을 수가 없게 되어, 후세後世에 비록 가문家門을 떨쳐 일으킨 사람이 있다 해도 그 씨족氏族의 세계世系를 모르게 된 사람이 많은데, 오직 광록군光祿君의 집안만은 그 가계家系를 대대로 매우 상세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으며, 정의대부正議大夫 형제兄弟분부터 공公에 이르기까지 4대代 동안의 황제皇帝의 임명장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
같은 문중門中 사람인 모某에게 공公의 묘墓에 명銘을 지어 올리도록 명命한 사람이 바로 광록군光祿君이다.
공公의 선대先代는 진秦 땅에 본적을 두었고 승상丞相 도導까지 올라갈 수 있으며,
대부大夫 승상丞相의 후손後孫인 검儉은 태수太守가 되었었네.
그분의 형님 총潨이 해변海邊에 머물러 있었고,
그분의 아드님 신紳과 손자 소韶가 공公의 조부祖父와 부친父親이었네.
동쪽에서 4대代를 이어오며 심히 드날리지 않은 것은,
집안에 인의仁義를 간직해두었다가 후손에게 물려주려 한 것이었네.
후손이 번성蕃盛하고 창성昌盛하여 기어이 그 공효功效를 드러내게 되어,
이제 광록경光祿卿이 공公의 업적業績을 명銘으로 추술追述하여 그 묘墓에 세우게 된 것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