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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王安石(1)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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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荊公學本經術이라 故其記文 多以經術爲案이라
儂智高反南方하야 出入十有二州
하니 十有二州之守吏 或死或不死하야 而無一人能守其州者하니 豈其材皆不足歟
蓋夫城郭之不設하고 甲兵之不戒 雖有智勇이라도 猶不能以勝一日之變也
唯天子亦以爲任其罪者 不獨守吏 故特推恩褒廣死節하고 而一切貸其失職하시다
於是 遂推選士大夫所論以爲能者하야 付之하니 而今尙書戶部侍郞 當廣西焉하니라
寇平之明年 蠻越接和하고 乃大城桂州하니 其方六里 其木甓瓦石之材 以枚數之하면 至四百萬有奇 用人之力 以工數之하면 至一十餘萬이오 凡所以守之具 無一求而有不給者焉하니라
以至和元年八月 始作하야 而以二年之六月하니 夫其爲役 亦大矣로다
蓋公之信於民也久하야 而費之欲以衛其材하고 勞之欲以休其力하니 以故 爲是有大費與大勞로되 而人莫或以爲勤也니라
古者 君臣父子夫婦兄弟朋友之禮失이면 則夷狄橫而窺中國이라
方是時하야 中國非無城郭也로되 卒於陵夷毁頓陷滅而不捄하니
然則城郭者 先王有之 而非所以恃而爲存也로다
及至喟然覺悟하야 興起舊政인댄 則城郭之修也 又嘗不敢以爲後니라
蓋有其患이로되 而圖之無其具하고 有其具로되 而守之非其人하며 有其人이로되 而治之無其法이면 能以久存而無敗者 皆未之聞也
此二臣之德 協於其君하야 於爲國之本末 與其所先後 可謂知之矣
慮之以悄悄之勞하야 而發赫赫之名하고 承之以翼翼之勤하야 而續明明之功하야 卒所以攘戎狄하니 而中國以全安者 蓋其君臣如此하고 而守衛之有其具也니라
今余公亦以文武之材 當明天子承平日久하야 欲補弊立廢之時 鎭撫一方하야 修扞其民하야 其勤於今 與周之有南仲仲山甫 蓋等矣 是宜有紀也
故其將吏相與謀而來取文하야 將刻之城隅하야 而以告後之人焉하니라
至和二年九月丙辰 群牧判官太常博士 王某하노라
荊川曰 但爲築城作記로되 而歸之根本上說하니 此是大議論이라하니라


06. 계주성桂州城 신축기新築記
형공荊公학문學問경술經術에 근본을 두고 있으므로, 그의 기문記文경술經術을 근거로 하여 문안文案을 작성한 것이 많다.
농지고儂智高남방南方에서 반란叛亂을 일으키고 열두 고을을 들락거릴 때에, 열두 고을을 수호하던 관리들 가운데 더러 죽은 사람도 있고 산 사람도 있었지만 그 고을을 지켜낼 수 있었던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으니, 혹 그들의 재능才能부족不足해서였던가?
대체로 성곽城郭이 설치되어 있지 않고 무장한 병사들로 경계를 하게 하지 않으면, 비록 지혜와 용맹을 갖추었어도, 오히려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는 변란變亂에 승리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오직 천자天子께서는 또한 그 을 받아야 할 책임責任이 고을을 지키던 관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여기시고, 그 때문에 특별히 절의節義를 지키다가 사망한 사람들에게 은전恩典을 베풀어 널리 포장褒獎하시고, 고을 수호의 직무職務실추失墜시켰던 책임 일체를 너그러이 면해 주셨다.
이에 사대부士大夫들이 의론議論하여 유능하다고 선발하여 추천한 사람에게 경략안무사經略按撫使의 직책을 맡기셨으므로, 지금의 상서성尙書省 호부시랑戶部侍郞 여정공余靖公광남서로안무사廣南西路按撫使의 직책을 담당하게 되었다.
적군敵軍을 평정한 이듬해에 남방南方 오랑캐의 화의和議를 받아들이고 계주桂州에 큰 을 쌓았는데, 그 사방이 6씩이고, 축성築城에 쓰인 목재, 벽돌, 기와, 석재石材들을 숫자로 헤아려보니 4백만百萬 남짓이 되기에 이르렀고, 동원된 인력과 기술자들을 헤아려 보니 10여만餘萬에 이르렀으며, 성벽 수호를 위한 기물器物들을 하나라도 찾아서 갖추어 놓지 않은 것이 없었다.
지화至和 원년元年 8월에 공사工事를 시작하여 2 6월에 완공完工하였으니, 대저 그 일이 또한 큰 역사役事였다.
대체로 이 백성들에게 신뢰를 얻은 지 오래되었고, 축성 경비의 집행에는 재물을 절약하고자 노력하였으며, 노역勞役을 시킬 때에는 민력民力이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으니, 이 때문에 이와 같이 큰 경비와 큰 노동력을 동원하였는데도 사람들이 이를 피곤해하거나 고생스럽게 여기는 일이 거의 없었다.
옛적부터 군신君臣, 부자父子, 부부夫婦, 형제兄弟, 붕우朋友 사이에 를 잃게 되면, 변방邊方의 오랑캐들이 횡행橫行하며 중국中國을 엿보았다.
이런 때라고 해서 중국에 성곽城郭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짓밟히고 파괴破壞되고 함몰陷沒됨으로 끝나게 됨을 구제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성곽城郭이라는 것을 선왕先王들도 가지고는 있었지만, 이것이 자신들을 보존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런 원리原理위연喟然히 깨달음에 이르러서, 옛 선왕들의 정사政事흥기興起시키려 한다면, 성곽의 수축修築은 또한 일찍이 감히 뒤로 돌릴 수가 없는 것이었다.
대체로 그 근심거리가 있어서 계책을 세우려 하면서 그 성곽을 갖추어놓지 않거나, 성곽을 갖추어 놓았다 해도 이를 수호하는 사람이 적임자適任者가 아니거나, 적임자를 두었어도 이를 다스리는데 에 적합하게 하지 않는다면, 이렇게 하고서 오랫동안 보존하면서 허물어뜨리지 않은 사례事例를 전혀 들어본 일이 없다.
그러므로 문왕文王이 나라를 일으킬 때에 사방四方 오랑캐의 이 있게 되자 북방北方을 쌓고 남중南仲을 시켜 지키게 하였고, 선왕宣王이 나라를 흥기시킬 때에 제후諸侯들이 하는 근심거리가 있게 되자 동방東方을 쌓고 중산보仲山甫를 시켜 지키게 하였던 것이다.
이 두 신하臣下덕망德望이 그 군주君主의 뜻과 조화를 이루어서 나라를 다스리는 본말本末선후先後의 순서를 적절하게 처리하였으니, 지혜智慧로웠다고 이를 만하다.
사려思慮깊게 처리함에 근심하는 수고를 다하였고, 이를 발현發現시킴에 명성名聲이 빛나게 드러나도록 하였으며, 이를 계승繼承함에는 공경恭敬하고 근신謹愼함에 부지런하여, 선왕先王의 밝은 공업功業을 이어서, 끝내는 이로써 오랑캐들을 물리치게 되었고, 중국中國이 이로써 안전을 보존하였으니, 대체로 그 임금과 신하가 이와 같았으며, 나라를 수호하는데 그 갖추어야 할 것이 있었던 것이다.
지금의 여공余公 또한 문무文武의 재능을 지닌 사람으로, 밝으신 천자께서 다스리는 태평성세太平盛世가 오래 지속되는 때를 당하여, 폐단弊端을 보완하고 피폐疲弊한 것을 바로 세우고자 해야 할 때인데, 한 지방地方진정鎭定 안무按撫하고 그 백성들을 휴양休養 보호保護하고자 이제 부지런히 노력하기를 나라의 남중南仲이나 중산보仲山甫와 같이 하고 있으니, 이를 기록으로 남겨 놓아야 마땅하다.
그러므로 그 휘하의 장수와 관리들이 서로 상의하여 나에게 와서 글을 얻어다가 장차 의 한 모퉁이에 이를 새겨 놓아서 이를 뒷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한 것이다.
지화至和 2 9 병진일丙辰日군목판관群牧判官 태상박사太常博士 왕모王某를 지었노라.
형천荊川(唐順之)이 하기를, “다만 축성築城에 대한 를 지을 뿐이면서 근본적인 문제로 설명을 귀착시킨 것, 이것이 바로 성대한 의논이다.” 하였다.


역주
역주1 桂州新城記 : 桂州는 現 廣西省 桂林을 지칭한다. 新城은 新築한 城을 의미한다. 本 記는 本文에 밝힌 바와 같이 至和 2년(1055) 9월 丙辰日(初一日)에 지은 것이다.
역주2 儂智高反南方 出入十有二州 : 儂智高는 越南人으로 南天國을 세우고 自號를 仁惠皇帝라 칭하며 皇祐 4년(1052)에 雍州(現 廣西省 南寧)를 점거하고 宋나라 남방을 공격하였던 인물이다. 이때에 농지고에게 失陷된 12州는 雍州, 橫州, 貴州, 龔州, 潯州, 藤州, 梧州, 封州, 康州, 端州, 昭州, 賓州 등이다.
역주3 經略 : 經略按撫使의 略稱으로, 한 路의 軍事와 民事를 아울러 다스리는 軍政長官이었다.
역주4 余公靖 : 余靖은 字를 安道라 하고, 知桂州事로 있을 때에 儂智高의 軍을 격퇴하는 큰 공을 세웠으며, 벼슬이 工部尙書에 이르렀던 인물이다.
역주5 文王之興也……而以南仲 : 이 事實은, 《詩經》 〈小雅 出車〉에, “王께서 南仲에게 명하시어 北方에 성을 쌓으셨네. 떠나는 수레소리 웅장하고 깃발이 선명하게 펄럭이네. 天子께서 내게 명하시어 北方에 성을 쌓게 하시니, 남중이 혁혁한 공을 세워 오랑캐를 물리쳤네.[王命南仲 往城于方 出車彭彭 旂旐央央 天子命我 城彼朔方 赫赫南仲 玁狁于襄]”라고 한 것을 援用한 것이다.
역주6 宣王之起也……而以仲山甫 : 이는 《詩經》 〈大雅 烝民〉에, “네 필의 숫말 씩씩하게 달리고 여덟 말방울 딸랑거리네. 왕께서 仲山甫에게 명하시어 저 동방에 성을 쌓으셨네.[四牡彭彭 八鸞鏘鏘 王命仲山甫 城彼東方]”라 한 내용을 원용한 것으로, 周 宣王(?~B.C. 782)이 중산보에게 명하여 동방 齊 땅에 성을 쌓아 국방을 튼튼히 하도록 한 것을 노래하였다. 중산보는 周 宣王을 보좌한 名臣으로 周나라의 중흥을 이룩한 인물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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