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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王安石(2)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범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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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通篇以相感慨하고 而多沈鬱之思
吾友심보深父 書足以致其言하고 言足以遂其志하며 志欲以聖人之道爲己任하야 蓋非至於命이면 弗止也
故不爲小廉曲謹하야 以投衆人耳目하고 而取舍進退去就 必度於仁義
世皆稱其學問文章行治 然眞知其人者不多 而多見謂迂闊하야 不足趣時合變하니
嗟乎
是乃所以爲심보深父심보深父而有以合乎彼 則必無以同乎此矣리라
嘗獨以謂天之生夫人也 殆將以壽考成其才하고 使有待而後顯하야 以施澤於天下 或者誘其言以明先王之道하야 覺後世之民호라
嗚呼
孰以爲道不任於天하고 德不酬於人이어늘 而今死矣 甚哉
聖人君子之難知也
至於양웅揚雄하야는 尤當世之所賤簡이요 후파양웅書以爲勝주역周易이라하니 주역不可勝也 후파尙不爲知양웅로다
而人皆曰 古之人 生無所遇合이라가 至其沒하야 久而後世莫不知라하니맹가양웅 其歿 皆過千歲로되 讀其書하고 知其意者甚少하니
則後世所謂知者 未必眞也
夫此兩人 以老而終하고 幸能著書하야 書具在로되 然尙如此하니
嗟乎심보深父
其智雖能知맹가 其於爲양웅 雖幾可以無悔 然其志未就하고 其書未具어늘 而旣早死하니 豈特無所遇於今이리오 又將無所傳於後
天之生夫人也 而命之如此하니 蓋非余所能知也로다
심보深父하남河南왕씨王氏 其後광주光州고시현복주福州후관현候官하니후관인候官人者三世
曾祖諱某 某官이요 祖諱某 某官이요 考諱某 상서병부원외랑尙書兵部員外郞이라
병부원외랑兵部葬潁영주여음현汝陰하니 故今爲여음현汝陰하니라
심보深父嘗以진사進士박주亳州위진현주부衛眞縣主簿라가 歲餘 自免去하고 有勸之仕者 輒辭以養母하다
其卒以치평治平二年七月二十八日하니 年四十三이라
於是 朝廷用薦者하야 以爲某軍절도추관節度推官이라가 지사진주陳州남돈현南頓縣지사하니 書下而심보深父死矣러라
夫人증씨曾氏 先若干日卒하고 子男一人이니 女二人이니 皆尙幼
諸弟以某年某月某日심보深父某縣某鄕某里하고증씨曾氏하다
銘曰
嗚呼심보深父
維德之하야 以迪祖武
厥艱荒遐 力必踐取
莫吾知庸이나 亦莫吾侮로다
神則尙反이리니 歸形此土로다


09. 왕심보의 묘지명
글 전체가 허경虛景으로 자신의 감개感慨를 드러냈고 침울한 생각을 표현한 것이 많다.
나의 친구 심보深父는, 글은 그의 말을 표현하기에 하고, 말은 그의 의지를 이루기에 족하였으며, 의지는 성인聖人를 자신의 임무로 삼아 천명天命을 아는 데 미치지 않으면 중지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소소한 청렴淸廉이나 세세한 일에 삼가는 것 따위로 중인衆人이목耳目을 끄는 일은 하려 하지 않았고, 취사取捨진퇴進退거취去就에 반드시 인의仁義를 기준으로 삼았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의 학문과 문장과 재능과 처신을 칭찬하였지만, 그의 인물됨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많은 이들에게 우활迂闊해서 시속時俗에 맞추어 임기응변을 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아아!
바로 이 점이 심보深父의 됨됨이의 근본이니, 심보深父로 하여금 저들에게 영합하는 일이 있게 하였다면, 반드시 이와 같게 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일찍이 홀로 생각하기를, 하늘이 그 사람을 낼 적에, 아마도 그의 재능을 이룰 수 있을 만한 수명壽命을 줄 것이고, 재능이 이루어짐을 기다린 이후에 현달顯達함이 있게 하여 이로써 천하에 은택恩澤을 베풀며, 더러는 그의 말을 통하여 선왕先王를 밝혀서, 후세後世의 백성을 깨닫게 하기도 한다고 여겼다.
아아!
도를 하늘에서 미처 위임받지도 않았고 덕을 사람들에게 베풀지도 않았는데, 이제 사망하였으니 누가 이렇게 한 것인가. 심하도다!
성인聖人 군자君子의 알기 어려움이여.
맹가孟軻스러움으로도 제자弟子들이 바란 바가 다만 관중管仲이나 안영晏嬰이 세운 업적을 기대하는 데 그쳤으니, 하물며 다른 사람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양웅揚雄에 이르러서는 더욱 그 시대 사람들의 천대와 멸시를 받았고, 그의 문하門下를 출입하던 제자도 후파侯芭 한 사람 뿐이니, 후파侯芭양웅揚雄의 글이 《주역周易》보다도 더 낫다고 찬양하였으니, 《주역周易》보다 더 나은 글은 있을 수가 없으니, 후파侯芭는 오히려 양웅揚雄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옛사람 가운데는 살아서는 뜻이 맞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였다가, 그가 사망하고 오랜 세월이 지난 이후에는 세상에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된다.” 하는데, 맹가孟軻양웅揚雄 같은 이들은 그들이 사망하고 모두 천 년을 지났는데도, 그들의 글을 읽고 그 뜻을 아는 자가 매우 적다.
그러니 후세에는 알게 된다고 이르는 것이, 반드시 진리眞理는 아니라고 본다.
이 두 사람은 늙어서 생을 마쳤고, 다행히 책을 지어서, 그 책이 모두 남아 있는데도 오히려 이와 같았던 것이다.
아아! 심보深父여.
그의 지혜가 비록 맹가孟軻를 이해할 수 있었고, 양웅揚雄에 대해서는 비록 거의 대등한 경지에 도달하여 부끄러워할 것이 없었으나, 그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글도 갖추어놓지 못하였을 때에 이미 일찍 사망하였으니, 어쩌면 이 시대에 이해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후세에도 전할 수가 없을 듯하도다.
하늘이 그 사람을 태어나게 하고 수명을 부여하기를 이와 같이 하였으니, 이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바가 아니로다.
심보深父이니, 본래 하남河南 왕씨王氏였는데, 그 후에 광주光州고시현固是縣에서 복주福州후관현候官縣으로 옮겨서 후관인候官人이 된 것이 3가 되었다.
증조曾祖 모관某官을 지냈고, 모관某官을 지냈으며, 선고先考 상서병부원외랑尙書兵部員外郞을 지냈다.
병부원외랑兵部員外郞영주穎州여음현汝陰縣안장安葬하였으므로 지금은 여음인汝陰人이 되었다.
심보深父는 일찍이 진사進士박주亳州위진현주부衛眞縣主簿가 되었다가 1년 남짓 지나서 스스로 사임하고 물러났으며, 그에게 벼슬하기를 권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때마다 모친의 봉양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그는 치평治平 2년(1065) 7월 28일에 하였는데, 향년享年이 43세였다.
이때에 조정에서 추천하는 자가 있어서 모군某軍절도추관節度推官으로 삼았다가 진주陳州 남돈현南頓縣지사知事에 임용되었으니, 임명장이 내려갔을 때는 심보深父가 이미 사망한 후였다.
부인夫人 증씨曾氏는 약간 먼저 하였고, 아들이 하나인데 이고, 딸이 둘인데 모두 아직 어리다.
여러 아우들이 모년某年 모월某月 모일某日심보深父모현某縣 모향某鄕 모리某里안장安葬하였고, 증씨曾氏합장合葬하였다.
이에 다음과 같이 을 지었다.
아아! 심보深父여.
오직 덕행德行자임自任하여, 이로써 선인先人의 업적을 계승하였네.
는 아득하게 멀어서 따르기 어려웠으나, 반드시 좇아서 하기에 힘썼네.
사람들이 나를 임용할 줄 몰랐으나, 또한 나를 모멸하지는 못하였네.
혼령이 장차 이곳에 돌아오리니, 이 땅에 육신肉身이 묻혔다오.


역주
역주1 王深父墓誌銘 : 本文에 墓主가 治平 2년(1065) 7월 28일에 卒했다 하였으므로, 本 墓誌銘도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지은 것으로 보인다.
역주2 虛景 : ‘想象 속의 景物’을 뜻하는데, 이곳에서는 墓主의 행적과 무관한 일반적인 이야기를 뜻한다.
역주3 以孟軻之聖……止於管仲晏嬰 : 《孟子》 〈公孫丑 上〉에 公孫丑가 말하기를 “선생께서 齊나라에서 요직을 담당하신다면 管仲이나 晏子가 세웠던 功業을 다시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夫子當路於齊 管仲晏子之功 可復許乎]”라고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管仲과 晏子는 춘추시대 齊나라의 名相들이었다.
역주4 其爲門人者 一侯芭而已 : 《漢書》 〈揚雄傳〉에 “당시 好事者 가운데 술과 안주를 싣고 와서 따라 배우기도 하였으나, 鋸鹿 侯芭만이 항상 揚雄을 따르고 함께 지내며, 그가 지은 《太玄經》과 《法言》 등을 배웠다.……天鳳 5年(A. D. 18) 揚雄이 卒하자 侯芭가 무덤을 써주고 3년간 喪主 노릇을 하였다.[時有好事者載酒肴從遊學 而鋸鹿侯芭常從雄居 受其太玄法言焉……天鳳五年卒 侯芭爲之起墳 喪之三年]”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역주5 仔肩 : 《詩經》 〈周頌 敬之〉의 ‘佛時仔肩’에서 따왔으며, ‘自任하다’라는 의미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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