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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王安石(2)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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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증역점曾易占歷宦坎坷 而荊公點次有生色이라
公諱역점易占이요 불의不疑증씨曾氏 건창建昌남풍인南豐人이라
其世出 有公之考 贈간의대부諫議大夫치요致堯之碑하니 간의대부大夫태종太宗태종世爲名臣이라
公少以廕補 태묘재랑太廟齋郞이라가무주撫州의황宜黃임천臨川현위縣尉하다
擧三司法하고 中進士第하야진동군鎭東절도추관節度推官이라가하야무승군절도장서기武勝무승군절도장서기節度掌書記 숭주군사판관崇州軍事判官호되 皆不往하다
用擧者감당관진주眞州裝卸米倉하고태자중윤太子中允 태상승太常丞 박사博士라가 지사태주泰州여고如皐 신주信州옥산玉山二縣하다
지신주知信州전선지錢仙芝者 有所丐於지옥산현사玉山호되 公不與하니 卽誣公하다
吏治之하야 得所以誣公者하니 전선지仙芝則請出어사
當是時하야 전선지仙芝蓋有所挾이라 故雖坐誣公抵罪 而公亦卒失박사博士하고 歸不仕者十二年이라 復如경사京師라가남경南京하야 遂卒하다
주씨周氏오씨吳氏하고 最後주씨朱氏숭안현군崇安縣君하다 子男六人이니 女九人이라
公以단공端拱己丑生하야 卒時경력慶曆丁亥也 後卒之二年而葬하니 其墓在남풍南豐之先塋하니라
公以문장文章有名이러니 及試於事 又愈以有名하다
임천臨川之治 能不以威호되 而使惡人之豪帥 其黨數百人 皆不復爲惡하다
월주越州 其守之合者 倚公以治하고 其不合者有所不可正之하다
장헌태후莊獻太后用道士言하야 作乾明觀할새 匠數百人 作數歲不成이어늘
公語道士曰 吾爲汝成之호리라하고 爲之捐其費태반太半하야 役未幾而罷하다
여고현지사如皐歲大饑어늘 固請於태주하야 而越海以糴하야 所活數萬人이러라
明年 稍已熟하니 태주欲收租賦여고현이어늘 公獨不肯聽이러니 歲盡而태주여고현 有復亡者로되여고현如皐爲完이러라
旣又作공자孔子하고여고현人興于學하다
옥산현玉山之政 旣除其大惡하고 而至於橋梁廨우역 無所不治하니
之已試於事者能如此 旣仕不合이어늘 卽自放하고 爲文章十餘萬言하고
시의時議十卷 尤行於世하니
시의時議 懲已事하고 憂來者 不以一身之窮으로 而遺天下之憂
以爲其志不見於事 則欲發之於文하고 其文不施於世 則欲以傳於後하니
後世有行吾言者 而吾豈窮也哉아하니 蓋公之所爲作之意也
天子獨憂之하사 詔天下有能言者 皆勿諱하라하시다 於是 言者翕然論兵以進호되
公獨以謂天下之安危 顧吾自治不(否)耳
吾已自治 夷狄無可憂者 不自治 憂將在於近이니 而夷狄豈足道哉리오하고
卽上書言數事하야 以爲事不爾 後當如此라하더니 旣而 皆如其云이러라
公之遭誣 人以爲寃하고 退而貧 人爲之憂也로되 而公所爲十餘萬言 皆天下事 古今之所以存亡治亂이요 至其寃且困하야는 未嘗一以爲言이러라
公沒 而其家得其遺疏하니
此可謂明白之論으로 切於今者니이다
夫夷狄動於外하고 百姓窮於下 臣以謂尙未足憂也라하노니
臣之所謂可憂者 特在分諸臣之忠邪而已니이다하니
其大略如此 而其詳有人之難言者하니
蓋公旣病而爲之하야 未及上而終云이라 嗚呼
其尤可以見公之志也로다
夫諫者 貴言人之難言이나 而傳者則有所不得言하니
讀其略하고 不失其詳이니 後世其有不明者乎
公之事親 心意幾微하야 輒逆得之하고 好學不怠하야 而不以求聞於世하다
所見士찬선대부大夫之喪葬二人하면 逆一人之柩以歸하고 又字其孤하며 又一人者 재상宰相 嘗爲찬선대부贊善大夫로되 死三十年猶殯하야 殯壞어늘 公爲增修하고 又與재상宰相하야 責使葬之하니 此公之行也
蓋公之試於事者小하야 而不盡其材 而行之所加又近이니 唯其文 可以見公之所存이요 而名後世
故公之故人子왕모王某 取其尤可以銘後世者하야 而爲銘曰
夫辨邪正之實하고 去萬事之例하야 而歸재상宰相之責이요
하고 合兵爲農하야 以立天下之本이라
設學校하고 獎名節하야 以材天下之士
正名分하며 定考課하며 通財幣하야 以成制度之法이라
古之所以治者 不皆出於此乎시의時議之言如此하니
讀其書以求其志 嗚呼
公之志何如也


08. 태상박사를 지낸 증공의 묘지명
증역점曾易占이 벼슬살이하는 동안에 겪은 고난을, 형공이 차례로 기술하여 산뜻하게 드러내었다.
역점易占이고 불의不疑이며 증씨曾氏이고 건창建昌 남풍인南豐人이다.
그의 가세家世출신出身부친父親증간의대부贈諫議大夫 치요致堯비문碑文에 기록되어 있으니, 부친父親 간의대부諫議大夫태종太宗진종眞宗 때의 명신名臣이었다.
은 젊어서 음보蔭補태묘재랑太廟齋郞이 되었다가, 무주撫州의황宜黃임천臨川 등 두 현위縣尉를 역임하였다.
삼사三司법령法令에 대한 답변으로 진사시進士試급제及第하여 진동군鎭東軍절도추관節度推官으로 옮겼다가, 돌아와서 무승군절도장서기武勝軍節度掌書記 숭주군사판관崇州軍事判官으로 전임轉任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천거薦擧가 있어서 진주眞州 장사미창裝卸米倉감당관監當官이 되었고, 태자중윤太子中允 태상승太常丞 박사博士로 옮겼다가, 태주泰州여고如皐신주信州옥산玉山지사知事가 되었다.
지신주知信州로 있던 전선지錢仙芝라는 지옥산현사知玉山縣事에게 어떤 일을 청탁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자, 무고誣告하였다.
관리官吏가 이 일을 처리하면서 을 무고하게 된 이유를 밝혀내니, 전선지錢仙芝어사御使로 내보내주기를 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전선지錢仙芝를 돕는 당여黨與가 있어서, 을 무고한 죄에 상응하는 벌을 받았으나 도 끝내 박사博士의 자리를 잃고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게 된 것이 12년이었으며, 다시 경사京師로 돌아오고자 남경南京에 이르렀다가 병을 얻어 드디어 하게 되었다.
주씨周氏오씨吳氏에게 장가들었고, 마지막 부인夫人주씨朱氏숭안현군崇安縣君책봉冊封되었으며, 아들이 여섯이었으니, 등이고, 딸이 아홉이었다.
단공端拱 기축년己丑年(989)에 출생出生하여 경력慶曆 정해년丁亥年하였으며, 한 지 2년 후에 하장下葬하였는데, 그 남풍南豐선영先塋에 있다.
처음에 문장文章하여 명성名聲을 드날렸고, 일을 맡기고 시험해봄에 이르러서 더욱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임천臨川을 다스릴 때에는 위엄威嚴으로 다스리지 않으면서도 악인惡人괴수魁首와 그 당여黨與 수백數百 이 모두 다시는 악행惡行자행恣行하지 못하게 할 수 있었다.
월주越州에 있을 때에는 그 지주사知州事가 마땅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의 힘을 빌어서 처리하니, 합당하지 않은 일은 이 즉시 이를 바로잡았다.
장헌태후莊獻太后께서 도사道士의 말을 듣고 건명관乾明觀을 지었는데, 목수木手 수백數百 이 몇 년을 걸려 지어도 완성하지 못하였다.
이에 도사道士에게 말하기를 “내가 그대를 위해 이를 완성시켜주겠다.” 하고, 이 일을 맡아 그 경비經費태반太半을 줄이고도 얼마 안 되어 일을 완료하였다.
여고현지사如皐縣知事로 있던 해에 큰 흉년凶年이 들자 상급上級 고을인 태주泰州에 간절히 청하여 대여양곡貸與糧穀을 바다를 통해 들여와서 살려준 사람이 수만數萬 이었다.
이듬해 약간 풍년이 들자 태주泰州에서 피폐疲弊한 각 의 조세 징수에 보통 때와 같은 을 납부하게 하려 하였으나 만이 이를 따르지 않았는데, 한 해가 지나자 태주泰州에 속한 다른 현 백성 가운데는 다시 도망간 사람들이 있었으나, 이 다스리던 여고현如皐縣만은 온전하게 되었다.
그 후 또 공자孔子사당祠堂을 짓고 여고현如皐縣 사람들에게 완곡하게 권하여 학교學校를 일으켰다.
옥산현玉山縣을 다스릴 때에는 큰 악행惡行을 우선적으로 제거한 후, 교량橋梁관부官府우역郵驛에 이르기까지 정비해놓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 이미 사안事案의 처리에 대하여 시험해본 것이 이와 같았으나, 그 후 벼슬살이가 뜻대로 되지 않자, 자신의 뜻을 드러내는 문장文章 10여만餘萬 을 지었다.
그 가운데 《시의時議》 10은 세상에 더욱 널리 퍼졌다.
시의時議》에서는, 지나간 일을 경계하고 앞으로 올 일을 근심하니, 일신一身궁곤窮困 때문에 천하에 대한 근심을 빠트리는 일이 없었다.
그의 뜻을 일 처리를 통하여 드러낼 수 없으면 이를 문장으로 드러내고자 하였고, 그의 글이 세상에 시행되지 못하게 되면 이를 후세에 전하고자 하였다.
“후세에 나의 말을 실천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니 내가 어찌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할 수 있으리오?”라고 하였으니, 아마도 이런 것이 이 《시의時議》를 지은 동기였던 듯하다.
보원寶元 연간年間서하西夏이원호李元昊가 배반하여 내침來侵하였고, 거란契丹 또한 군사력을 변경 가까이에 집결시키고 우리 나라가 맹약盟約을 어기려 하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내세웠다.
천자天子께서 홀로 이를 근심하시어 천하天下조서詔書를 내려서, 이를 해결할 방안을 건의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꺼리지 말고 건의하도록 하니, 건의하는 사람들이 모두 군사력을 동원하여 나아가 싸우기를 주장하였다.
이에 만은 홀로 “천하天下안위安危는 우리 자신을 잘 다스리느냐 그렇지 못하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이미 스스로를 잘 다스린다면 오랑캐들을 근심할 것이 없고, 스스로를 잘 다스리지 못한다면 근심거리가 가까운 내부에서 일어나게 될 것이니 오랑캐들의 위협이야 어찌 족히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며
글을 올려 몇 가지 사안에 대해 언급하면서, 일이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후에도 마땅히 이와 같게 될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후 모든 일이 그가 말한 바와 같게 되었다.
무고誣告를 당하여 파직되자 사람들이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여겼고, 물러나 빈곤하게 지내자 그를 위해 이를 근심하였으나, 이 지은 10여만餘萬 문장文章은 모두 천하天下의 일들로서 고금古今존망存亡치란治亂의 이유를 밝힌 것뿐이요, 그 자신의 억울함과 궁곤窮困에 대하여는 일찍이 단 한마디도 언급한 것이 없었다.
한 후에 그의 집에서 그가 남긴 상소문上疏文이 발견되었는데,
상소문에 이르기를 “유향劉向이 말하기를 ‘모함謀陷하는 사람과 사악邪惡한 사람들이 현인賢人과 뒤섞여서 조정朝廷에 진출하게 되는 것은 황상皇上이 의심이 많기 때문이니, 현인賢人을 임용하여 선정善政을 시행한다 해도 만약 혹 그를 참소讒訴하는 사람이 있게 되면, 현인賢人은 떠나게 되고 선정善政도 거두어진다.’ 하였으니,
이는 명백한 이치로 현재에도 절실한 것입니다.
대저 오랑캐들이 나라 밖에서 준동하고 백성들이 아래에서 궁곤해진 것에 대하여는 신은 족히 근심할 것이 못 된다고 여깁니다.
신이 이른바 근심해야 할 일이라고 보는 것은, 다만 제신諸臣이 충성스러운지 사악한지를 분별하는 일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그 주장한 대략이 이와 같았으며, 그 상세한 내용 가운데는 보통 사람들이 말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었다.
이 상소문은 아마도 이 이미 병이 든 이후에 지어서 황상皇上께 올리지 못하고 을 마친 듯하니, 아아!
그것을 통하여 의 뜻을 더욱 잘 알 수 있게 되도다.
대저 간언諫言이란 남이 말하기 어려운 것을 말함을 귀하게 여기지만, 그 말을 전하는 자는 말을 할 수 없는 바가 있을 수 있다.
그 큰 방략을 읽고 그 상세한 면을 빠뜨리지 않아야 하니 후세後世에 어찌 밝지 못한 사람이 있겠는가?
이 부모를 섬길 때에는 마음을 미리 파악하여 즉시 이에 맞게 해드렸으며, 학문學問 닦기를 좋아하여 게을리 한 일이 없었으나 세상에 알려지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사대부士大夫 두 사람의 상장喪葬에 대하여 처리한 바를 보면, 한 사람은 을 맞이하여 고향에 안장安葬하게 하고 그 자식들을 양육해주었으며, 또 한 사람은 재상宰相외숙外叔으로 일찍이 찬선대부贊善大夫를 역임했던 사람인데도 죽은 후 30년이 지나도록 빈장殯葬만 한 채로 놔두어서 빈장한 곳이 허물어지자, 이 이를 증수增修해주고 재상에게 편지를 보내어 꾸짖어서 정식으로 안장安葬하게 하였으니, 이런 것들이 의 평소 행위였다.
대체로 에게 어떤 사안의 처리를 맡겨 시험해본 것들은 자질구레한 일들뿐이어서 그의 재능을 다 발휘할 수가 없었고, 그가 행한 업적이 미친 곳도 가까운 주변뿐이었으니, 오직 그가 지은 문장文章을 통해서만 이 간직했던 뜻을 알 수 있을 뿐이고, 이를 통해서만 후세後世에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의 옛 친구의 아들 왕모王某가 후세에 더욱 명심銘心할 만한 것만을 취하여 묘지명墓誌銘을 지었으니, 다음과 같다.
“대저 사악邪惡정의正義를 분별하고 만사萬事를 처리하는 규정規程을 만드는 일을, 재상宰相의 책임으로 돌렸고,
불교佛敎도교道敎이단異端을 타파하고 병기兵器를 모아 농기구農器具를 만들어서, 이로써 천하의 근본을 바로 세웠으며,
학교를 설치하고 명분名分절조節操추장推獎하여, 이로써 천하의 선비들이 유능한 인재가 되게 하였고,
명분名分을 바로잡고 업적業績평정評定하여 재화財貨가 유통하게 하는 것으로 제도制度의 기준을 이루었도다.
옛날에 잘 다스려진 소이所以가 모두 이런 데서 나온 것이 아니었던가?”라고 하였으니, 그가 지은 《시의時議》에서 한 말이 이와 같았도다.
그 글을 읽고 이로써 그 뜻을 궁구窮究해본다면, 아아!
공의 뜻이 어떠하였는가.


역주
역주1 太常博士曾公墓誌銘 : 本 墓誌銘에서 墓主가 慶曆 丁亥年(1047)에 卒했다고 하고, 2년 후에 安葬하면서 銘을 지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 글은 皇祐 元年(1049)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역주2 : 저본에 ‘輕’으로 되어 있는데, 《臨川集》에 근거하여 바로잡았다.
역주3 寶元中 李元昊反 : 寶元은 仁宗의 年號(1038~1040)이다. 寶元 元年 12월에 西夏의 君主 李元昊가 皇帝라 稱하고 3년간 宋의 西邊을 공격하였다.
역주4 契丹亦以兵近邊 陽爲欲棄約者 : 慶曆 2년(1042)에 契丹이 武力을 동원하여 宋을 위협하면서 아울러 使臣을 보내어, 宋이 ‘澶淵의 盟約’을 어겼으니 領土의 일부를 割讓하라고 劫迫한 것을 말한다.
역주5 劉向有言……則賢人捨而善政還 : 《漢書》 〈劉向傳〉에 登載된 말을 인용한 것이다.
역주6 破佛與老 : 저본에는 없는데, 《臨川集》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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