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唐宋八大家文抄 王安石(1)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1)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小小結搆 自有遠山景態
招僊觀 在安仁郭西四十里하니 始作者 與其歲月 予不知也로라 祥符中 嘗廢하야 廢四五十年
而道士全自明 以醫游其邑하니 邑之疾病者賴以治하야 而皆憂其去
人相與言州하고 出材力하야 因廢基하야 築宮而留之하니 全與其從者一人으로 爲留하야 而觀復興이라
全識予舅氏하니 而因舅氏하야 以乞予書其復興之歲月하다
夫宮室器械衣服飮食 凡所以生之具 須人而後具
而人不須吾以足이면 惟浮屠道士爲然이라
而全之爲道士 人須之而不可以去也하니 其所以養於人也 視其黨 可以無媿矣 予爲之書 其亦可以無媿焉이라
慶曆七年七月 復興之歲月也


11. 무주撫州 초선관招僊觀중축重築
짧게 구성한 문장 속에 원산遠山경태景態가 잘 드러나 있다.
초선관招僊觀안인현安仁縣 성곽城郭 서쪽 40 되는 곳에 있는데, 처음 세운 사람과 그 시기는 내가 알지 못하고, 상부연간祥符年間에 무너져서 무너진 채로 4, 50년을 지내왔었다.
그 후 도사道士 전자명全自明이 그 고을을 돌아다니며 환자들을 치료해 주어 고을 안의 병들었던 사람들이 그 덕택으로 병이 치유治癒되니, 모두들 그가 혹 떠나지나 않을까 근심하게 되었다.
이에 고을 사람들이 고을에 건의하고 자재와 노동력을 출연하여 무너진 옛 초선관招僊觀의 기초 위에 건물을 다시 축조하고 그곳에 머물게 하니, 전자명全自明이 시종 한 사람과 함께 머물게 되어 초선관招僊觀부흥復興되었다.
전자명全自明은 나의 장인어른과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였는데, 장인어른을 통하여 초선관을 다시 일으키게 된 사연과 시기를 글로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대저 궁실宮室기물器物들과 의상衣裳음식飮食은 생활을 위하여 갖추어야 할 것들이고, 사람이 필요로 한 이후에야 갖추어지는 것이다.
사람의 경우도 우리가 필요로 하지 않으면, 설령 스님과 도사道士라 할지라도 두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전자명이 도사노릇을 하는데 사람들이 그를 필요로 해서 떠나지 못하게 한 것이니, 그가 사람들에게 봉양奉養을 받는 것이 그 동류들에 비교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고, 내가 그를 위해 글을 짓는 것도 또한 부끄러울 것이 없다.
〈그 때문에 그를 위해 이 글을 지은 것이다.〉
경력慶曆 7년 7월이 초선관招僊觀을 다시 세운 연월年月이다.


역주
역주1 撫州招僊觀記 : 이 記는 撫州 招僊觀을 重築하여 낙성한 慶曆 7년(1047) 7월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지은 것으로, 王安石이 知鄞縣事로 근무하던 시기이다.
역주2 故爲之書 : 저본에는 없으나 《唐宋八大家文鈔 校注集評》에 의거하여 補入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