夫君子는 有窮苦顚跌이로되 不肯一失詘己以從時者니 不以時勝道也라
故其得志於君이면 則變時而之道 若反手然하니 彼其術素修而志素定也일새라
如孟韓者는 可謂術素修而志素定也니 不以時勝道也언마는 惜也不得志於君하야 使眞儒之效不白於當世라 然其於衆人也에 卓矣로다
予觀今之世하니 圓冠峩如하야 大裙襜如하고 坐而堯言하야 起而舜趨로되 不以孟韓之心으로 爲心者면 果異衆人乎아
曰孫正之라 正之行古之道하고 又善爲古文하니 予知其能以孟韓之心으로 爲心而不已者也라
北轅而首之하야 苟不已면 無不至니 孟韓之道去吾黨이 豈若越人之望燕哉아
一日得志於吾君이라도 而眞儒之效不白於當世는 予亦未之信也로라
正之之兄이 官於溫하야 奉其親以行할새 將從之하야 先爲言以處予하니 予欲黙이나 安得而黙也리오
두 사람이 서로 경계하며 바로잡아줌과,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주는 심정이 손에 잡힐 듯하다.
시속時俗에서 옳다고 여기는 것을 옳게 여기는 사람은 보통 사람들이고,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옳게 여기는 사람은 군자君子이다.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옳게 여긴다는 것은 자신의 사욕私慾을 옳게 여긴다는 것이 아니라, 신조에 성인聖人의 도道가 존재해서인 것이다.
대저 군자는 곤궁하고 괴롭고 굴러 엎어지고 좌절되는 일이 있다 해도, 자신의 신조를 꺾고서 시속을 따르는 실수를 한번이라도 하려 하지 않나니, 이런 시속이 도道를 이길 수 없다고 여겨서이다.
그러므로 그가 군주君主에게 뜻을 얻게 되면, 그릇된 시속時俗을 바꾸어 도道로 나가게 하는 것이 마치 손바닥 뒤집듯이 쉽게 이루어지나니, 그러한 군자는 그 방책을 평소에 닦아 놓았고 목표를 평소에 확정해 놓았기 때문인 것이다.
양주楊朱, 묵적墨翟의 이론理論을 시속時俗에서 따를 때에 자신의 신조를 지키며 시속을 옳지 않다고 여긴 사람은 맹가씨孟軻氏뿐이었고, 불교佛敎와 노장老莊을 시속에서 따를 때에 자신의 신조를 지키며 시속을 옳지 않다고 여긴 사람은 한유씨韓愈氏뿐이었다.
그러니 맹자孟子와 한유韓愈 같은 사람은 그 방책方策을 평소에 닦아 놓았고 목표目標를 평소에 확정해 놓아서, 시속時俗이 도道를 이길 수 없도록 한 사람이라고 이를 수 있는데도, 애석하게도 군주에게 뜻을 얻지 못하여 참다운 유학儒學의 효과를 당세當世에 밝게 드러나게 하지를 못하였지만, 그러나 보통 사람들보다는 크게 뛰어났던 것이다.
내가 현現 시대時代를 관찰해 보니, 둥근 갓을 드높이 쓰고 넓은 하의下衣를 너풀거리면서, 앉아서는 요堯임금처럼 말하고 일어나서는 순舜임금처럼 행동을 하지만, 맹자孟子와 한유韓愈의 마음을 자기의 마음으로 삼는 자가 아니면 과연 시속을 따르는 보통 사람들과 다를 것이 있겠는가?
내가 양주揚州 땅에서 벼슬할 때에 손정지孫正之라는 벗을 얻었다.
정지正之는 옛날의 도道를 실천하고 또한 고문古文을 잘 지었으니, 나는 그가 맹자孟子와 한유韓愈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알게 되었다.
대저 남방南方 월越나라 사람이 북방北方 연燕나라를 바라본다면 지극히 먼 땅일 것이다.
그러나 수레를 북방으로 향하게 하여 진실로 중단함이 없이 나아간다면 이르지 못할 것이 없으니, 맹자孟子와 한자韓子가 깨달은 도가 우리들과의 거리가 어찌 월越나라 사람이 연燕나라를 바라보는 것만큼 멀 수 있겠는가.
정지正之가 자신을 바로잡기를 중단하지 않는다 해도 맹자孟子와 한자韓子의 도道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라는 주장을 나는 믿지 않는다.
어느 날 우리 군주에게 뜻을 얻게 된다 해도, 참다운 유학儒學의 효험效驗이 이 시대에 밝게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도, 나는 또한 믿지 않는다.
정지正之의 형님이 온주溫州에서 벼슬하게 되어 그 양친兩親을 모시고 떠나게 되자 정지正之도 따라가려 하면서, 미리 부탁을 하며 내가 글을 지어 주기를 바라고 있으니, 내가 말을 아니 하고자 하나 어찌 말을 아니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