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서사봉원외랑尙書司封員外郞 충비각교리充秘閣校理 新差通判永州軍州兼管內勸農事
로 賜緋魚袋
진릉晉陵丁君卒
하니 임천臨川왕모王某曰 噫
라
方吾少時에 輔我以仁義者라하고 乃發哭弔其孤하고 祭焉而許以銘하다
少與其兄
으로 皆以文行稱鄕里
하야 號爲二丁
이라하니라
君爲峽
섬주군사판관州軍事判官하야 與
여릉廬陵游
하야 相好也
러라
又爲회남절도장서기淮南節度掌書記하야 或誣富人以博하고 주장州將은 貴人也라 猜而專하니 吏莫敢議어늘 君獨力爭하야 正其獄하다
又爲항주관찰판관杭州觀察判官하야 용거자用擧者兼주학교수州學敎授하고 又용거자用擧者遷태자중윤太子中允이라가 지섬현사知월주越州지섬현사剡縣하다
蓋其始至에 流大姓一人하니 而섬현縣遂治라 卒除弊興利甚衆하니 人至今言之라
於是에 再遷爲태상박사太常博士라가 移단주지사知단주지사端州하다
농지고儂智高反하야 攻至其治所어늘 君出戰하야 能有所捕斬이나 然卒不勝하야 乃與其州人으로 皆去而避之하니
坐免一官하야 徙황주黃州러니 會恩除태상승太常丞 감호주주監湖州酒하다
又以大臣有解擧者하야 遷박사博士라가 就差지사知월주越州제기현諸曁縣하야
其治제기현諸曁如섬현剡하니 월주越人이 滋以군君爲循吏也러라
영종英宗卽位하야 以상서둔전원외랑尙書屯田員外郞으로 編교리校秘閣상서둔전원외랑書籍이라가 遂爲교리校理 동지태상례원同知太常禮院하다
君質直自守하야 接上下以恕하며 雖貧困이라도 未嘗言利하며 於朋友故舊에 無所不盡이라
故其不幸廢退면 則人莫不憐하고 少進也면 則皆爲之喜러라
夫驅未嘗敎之卒하야 臨不可守之城以戰虎狼百倍之賊하니 議今之法이면 則獨可守死爾나 論古之道하면 則有不去以死하며 有去之以生이라
吏方操法以責士하니 則君之流離窮困하야 幾至老死하니 尙以得罪於言者도 亦其理也로다
군君以치평治平三年에 待闕於상주常州라가 於是에 再遷상서사봉원외랑尙書司封員外郞이러니 以四年四月四日卒하니 年五十八이라 有文集四十卷하다
明年二月二十九日에 葬于무진현武進縣회덕懷德북향北鄕곽장郭莊之原하다
子男우隅는 태묘재랑太廟齋郞이요 제除제隮는 爲진사進士요 其季은아恩兒는 尙幼라
女嫁비서성저작좌랑秘書省著作佐郞 집현교리集賢校理 同縣호종유胡宗愈하고 其季未嫁하며 嫁호씨胡氏者도 亦又死矣라
당형천唐荊川曰 中論避寇단주端州事는 比구공歐公爲簡이라
감개하며 몹시 슬퍼하는 가운데, 풍자하는 내용이 많다.
조봉랑朝奉郞 상서사봉원외랑尙書司封員外郞 충비각교리充秘閣校理 신차통판영주군주겸관내권농사新差通判永州軍州兼管內勸農事 상경거도위上輕車都尉 사비어대賜緋魚袋 진릉晉陵 정군丁君이 졸卒하니, 임천臨川 왕모王某가 말하기를 “아아!
바야흐로 내가 젊었을 때에, 나를 인의仁義로 보필하였던 분이로다!” 하고 이에 곡哭을 발하고 그 아들을 위로하였으며, 제祭를 마치자 명銘을 지어주기로 약속하였다.
3개월이 지나서 군君의 사위가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서 청하기에, 이에 묘지墓誌의 서敍와 명銘을 지어서 부장赴葬하게 하였다.
군君의 휘諱는 보신寶臣이고, 자字는 원진元珍이다.
젊어서는 그의 형兄 종신宗臣과 함께 문장文章과 행실行實로 향리鄕里에서 칭송을 받았으므로, 이 형제兄弟를 ‘이정二丁’이라 불렀다.
경우景祐 연간年間에 함께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집안을 일으키게 되었다.
군君이 섬주군사판관陝州軍事判官으로 있을 때에 여릉廬陵 구양공歐陽公(歐陽脩)과 교유交遊하면서 서로 친하게 지냈다.
또 회남절도장서기淮南節度掌書記로 있을 때에는 어떤 사람이 어느 부자富者가 도박賭博을 한다고 무고誣告를 하고, 주장州將은 귀貴한 집안사람으로 의심이 많고 이 일의 처리에 전횡專橫을 일삼으니, 관리들 가운데 감히 이를 따지는 사람이 없었는데, 군君이 홀로 힘을 다해 싸워서 그 옥사獄事를 바로잡았다.
또 항주관찰판관杭州觀察判官이 되어서는 용거자用擧者 겸兼 주학교수州學敎授로 있다가 다시 용거자用擧者로서 태자중윤太子中允으로 옮겼고, 월주越州 지섬현사知剡縣事가 되었다.
그가 섬현剡縣에 처음 이르러서 그곳 대성大姓에 속한 세력가勢力家 한 사람을 유배流配 보내자 드디어 현縣의 질서가 확립되었으며, 마침내 폐단을 제거하고 이로운 일을 일으킨 것이 매우 많으니, 사람들이 지금까지 이를 칭송하고 있다.
이에 다시 태상박사太常博士로 옮겼다가, 단주지사端州知事가 되었다.
농지고儂智高가 반란反亂을 일으켜서 반군反軍의 공격이 그의 치소治所에까지 이르자, 군君이 출전出戰하여 반군反軍을 사로잡기도 하고 죽인 일도 있었으나, 끝내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그 고을 사람들과 함께 모두 퇴각하여 반군을 피하였다.
이 때문에 관등官等이 한 등급 강등降等되어 황주黃州로 옮겨가게 되었는데, 때마침 은사恩赦를 받아서 태상승太常丞 감호주주監湖州酒에 제수除授되었다.
다시 군君의 사정을 잘 아는 대신大臣의 천거가 있어서 박사博士로 옮겼다가, 월주越州 제기현諸曁縣의 지사知事로 차출되어 취임하였다.
제기현諸曁縣을 다스릴 때에 섬현剡縣을 다스릴 때와 같게 하니, 월주越州 백성들이 군君을 법法과 이치理致에 맞게 다스리는 청백淸白한 관리라 하여 더욱 신뢰하게 되었다.
영종英宗께서 즉위하시자 상서둔전원외랑尙書屯田員外郞으로 비각秘閣의 서적書籍들을 편교編校하는 직임職任을 담당하였다가, 드디어 교리校理 동지태상례원同知太常禮院이 되었다.
군君은 곧은 바탕으로 자신을 잘 관리하여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을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세(恕의 자세)로 대하였으며, 빈곤하게 지낼지언정 이익에 대하여 언급하는 일이 없었고, 붕우朋友와 옛 친구들을 극진하게 대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가 불행하게 되거나 관직에서 쫓겨나게 되면 이를 동정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조금이라도 승진하게 되면 모두 이를 기뻐하였다.
교리校理로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어사御史가 군君이 과거에 죄를 지어 쫓겨난 일이 있는데 다시 임용한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여, 드디어 지방관인 영주통판永州通判으로 나가게 되니, 세상 사람들은 모두 군君의 허물을 말한 자가 합당하지 않은 짓을 했다고 여겼다.
대저 일찍이 훈련을 제대로 받은 일이 없는 군졸을 거느리고 지키기가 불가능한 성城에 임해서, 범이나 이리처럼 사납고 백 배나 되는 다수의 적敵과 싸웠으니, 지금의 법으로 따진다면 지키다가 죽었어야 옳거니와, 옛 도道를 적용해본다면 떠나지 않고 죽는 것도 도道에 합치됨이 있고 떠나서 백성들을 살리는 것도 도道에 합치됨이 있는 것이다.
관리가 이제 법조항에 근거하여 사士의 책임을 물어서, 이에 군君이 궁곤하게 떠돌아다니면서 거의 늙어 죽음에 이르렀으니, 오히려 그를 비판한 자의 말 때문에 죄를 얻었다고 여기는 것도 이치에 맞다고 할 수 있다.
군君이 치평治平 3년(1066)에 상주常州에서 빈자리에 보임되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상서사봉원외랑尙書司封員外郞으로 다시 옮겼고, 4년 4월 4일에 졸卒하였는데 향년享年이 58세였으며 문집文集 40권을 남겼다.
이듬해 2월 29일에 무진현武進縣 회덕懷德 북향北鄕 곽장郭莊의 언덕에 안장安葬하였다.
군君의 증조曾祖는 휘諱가 요耀이고, 조부祖父는 휘諱가 량諒이니 모두 벼슬을 한 일이 없다.
부친父親은 휘諱가 간지柬之이고 상서공부시랑尙書工部侍郞에 증직贈職되었다.
부인夫人 요씨饒氏는 진릉현군晉陵縣君에 봉封해졌으며, 군君보다 먼저 사망하였다.
아들 우隅는 태묘재랑太廟齋郞이고, 제除와 제隮는 진사進士이며, 막내 은아恩兒는 아직 어리다.
딸은 비서성저작좌랑秘書省著作佐郞 집현교리集賢校理 동현同縣 호종유胡宗愈에게 출가出嫁하였고, 막내딸은 아직 출가하지 않았으며, 호씨胡氏에게 출가하였던 딸은 이미 사망하였다.
문장文章은 의미가 명확하게 통通하였고, 행실行實은 덕德에 충실充實하였네.
도道는 옛 법法에 합당하였으나, 운명運命은 이 시대時代에 곤궁困窮하였네.
아아! 이승의 일 모두 끝나서, 이 새 유택幽宅에 복거卜居하게 되었도다!
당형천唐荊川이 말하기를 “문장文章 가운데서 단주端州에서 적을 피했던 일을 논論한 것이, 구공歐公의 글에 비하여 간략하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