視之能必見하고 聽之能必聞하고 行之能必至하고 思之能必得은 是誠之所至也라
不聽而聰하고 不視而明하고 不思而得하고 不行而至는 是性之所固有요 而神之所自生也니 盡心盡誠者之所至也라
賢者는 盡誠以立性者也요 聖人은 盡性以至誠者也라
神生於性하고 性生於誠하고 誠生於心하고 心生於氣하고 氣生於形하나니 形者는 有生之本이라
故養生은 在於保形하고 充形은 在於育氣하고 養氣는 在於寧心하고 寧心은 在於致誠하고 養誠은 在於盡性하니 不盡性이면 不足以養生이니라
能盡性者는 至誠者也요 能至誠者는 寧心者也요 能寧心者는 養氣者也요 能養氣者는 保形者也요 能保形者는 養生者也니 不養生이면 不足以盡性也니라
生渾則蔽性하고 性渾則蔽生이 猶志一則動氣하고 氣一則動志也니라
禮樂者는 先王所以養人之神하고 正人氣하야 而歸正性也라
是故로 大禮之極은 簡而無文하고 大樂之極은 易而希聲하니 簡易者는 先王建禮樂之本意也니라
世之所重은 聖人之所輕이요 世之所樂은 聖人之所悲니 非聖人之情이 與世人相反이라 聖人은 內求하고 世人은 外求니라
衣食은 所以養人之形氣요 禮樂은 所以養人之性也라
禮反其所自始요 樂反其所自生이니 吾於禮樂에 見聖人所貴其生也至矣로다
世俗之言에 曰 養生은 非君子之事라하니 是는 未知先王建禮樂之意也니라
養生以爲인仁하고 保氣以爲義하며 去情却欲하야 以盡天下之性하고 修神致明하야 以趨聖人之域이니라
耳非取人而後聰이요 目非取人而後視요 口非取諸人而後言也요 身非取諸人而後動也라
其守至約하고 其取至近하야 有心有形者는 皆有之也라
非禮勿聽은 非謂掩耳而避之라 天下之物이 不足以干吾之聰也요 非禮勿視는 非謂掩目而避之라 天下之物이 不足以亂吾之明也요 非禮勿言은 非謂止口而無言也라 天下之物이 不足以易吾之辭也요 非禮勿動은 非謂止其躬而不動이라 天下之物이 不足以干吾之氣也니라
不聽之時에 有先聰焉하고 不視之時에 有先明焉하고 不言之時에 有先言焉하고 不動之時에 有先動焉이니
是故로 非耳以爲聰이니 而不知所以聰者는 不足以盡天下之聽이요 非目以爲明이니 而不知所以明者는 不足以盡天下之視니라
聰明者는 耳目之所能爲나 而所以聰明者는 非耳目之所能爲也라
是故로 待鐘鼓而後樂者는 非深於樂者也요 待玉帛而後恭者는 非深於禮者也니라
然大裘無文하고 大輅無飾이어늘 聖人獨以其事之所貴者는 何也오
증자曾子謂맹경자孟敬子호대 君증자子之所貴乎道者三이니 動容貌에 斯遠暴慢矣며 正顔色에 斯近信矣며 出辭氣에 斯遠鄙倍矣니
이라하니 觀此言也
하면 증자曾子而不知道也則可
하니 使
증자曾子而爲知道
면 則道不違乎言貌辭氣之間
이니 何待於外哉
아
是故로 古之人이 目擊而道已存하고 不言而意已傳하며 不賞而人自勸하고 不罰而人自畏는 莫不由此也라
是故로 先王之道 可以傳諸言 效諸行者는 皆其法度刑政이요 而非神明之用也니라
이라하니 去情却欲
이면 而神明生矣
요 修神致明
이면 而物自成矣
라
齊明其心하고 淸明其德이면 則天地之間의 所有之物이 皆自至矣니 君子之守至約이나 而其至也廣하고 其取至近이나 而其應也遠이니라
不失色者는 容貌精也요 不失口者는 語黙精也요 不失足者는 行止精也라
君子之道也는 語其大면 則天地不足容也요 語其小면 則不見秋毫之末이요 語其强이면 則天下莫能敵也요 語其約이면 則莫能致傳記니라
大禮는 性之中이요 大樂은 性之和니 中和之情은 通乎神明이라
故聖人
이 儲精九重而儀鳳凰
하고 修
而關陰陽
하니 是天地位而
明
이요 四時行而萬物和
니라
天下之言養生修性者 歸於浮屠노자老子而已니 浮屠노자老子之說行이면 而天下爲禮樂者 獨以順流俗而已니라
特禮樂之意
는 大而難知
하고 노자老子之言
은 近而易
일새라
聖人之道는 得諸己하야 從容人事之間而不離其類焉이요 浮圖는 直空虛窮苦하야 絶山林之間하고 然後足以善其身而已라
由是觀之컨대 聖人之於釋老에 其遠近難易를 可知也라
是故로 賞與古人同이나 而勸不同하고 罰與古人同이나 而威不同하며 仁與古人同이나 而愛不同하고 智與古人同이나 而識不同하며 言與古人同이나 而信不同하니
今王公大人은 有요堯순舜이윤伊尹之勢어늘 而無복자천子賤一邑之功者는 得非學術素淺而道未明歟아
夫天下之人이 非不勇爲聖人之道나 爲聖人之道者 時務速售諸人하야 以爲進取之階라
今夫進取之道는 譬諸鉤索物耳니 幸而多得其數면 則行爲王公大人하고 若不幸而少得其數면 則裂逢掖之衣하고 爲商賈矣라
由是觀之하면 王公大人은 同商賈之得志者也니 此之謂學術淺而道不明이라
由此觀之컨대 得志而居人之上하야 復治聖人之道而不捨焉이 幾人矣오
內而好愛之容하야 蠱其欲하고 外有便嬖之諛하야 驕其志하니 向之所能者는 日已忘矣요 今之所好者는 日已至矣니라
夫안회顔子之所學者는 非世人之所學이니 不遷怒者는 求諸己요 不貳過者는 見不善之端而止之也라
世之人所謂退는 안자顔子之所謂進也요 人之所謂益은 안자顔子之所謂損也니
耳損於聲하며 目損於色하며 口損於言하며 身損於動이 非先難歟아
及其至也하야는 耳無不聞하며 目無不見하며 言無不信하며 動無不服이니 非後得歟아
是故로 君子之學은 始如愚人焉하며 如童蒙焉이나 及其至也하얀 天地不足大요 人物不足多요 鬼神不足爲隱이요 諸子之支離 不足惑也라
是故
로 天
高也
의 日月星辰
과 陰陽之氣
를 可端策而數也
요 地至大也
의 山川丘陵
과 萬物之形
과 人之常産
을 可指籍而定也
라
是故로 星曆之數와 天地之法과 人物之所는 皆前世致精好學한 聖人者之所建也니 後世之人이 守其成法이나 而安能知其始焉이리오
故로 古之人言道者는 莫先於天地하고 言天地者는 莫先乎身하고 言身者는 莫先乎性하고 言性者는 莫先乎精하니
精者는 天之所以高요 地之所以厚며 聖人所以配之라
故御
는 人莫不盡能
이나 而
獨得之
는 非車馬不同
이라 조보造父精之也
요 射
는 人莫不盡能
이나 而
獨得之
는 非弓矢之不同
이라 예羿精之也
니라
今之人與古之人
이 一也
나 然而用之則二也
하니 조보造父用之以爲御
하고 예羿用之以爲射
하며 用之以爲賊
이니라
문장文章 속에 명언名言이 많고, 써 내려간 문장文章은 순경荀卿의 문장과 유사하다.
기氣가 명命을 받아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 심心이다.
시각視覺으로는 반드시 볼 수 있고, 청각聽覺으로는 반드시 들을 수 있고, 가면 반드시 도달할 수 있고, 사고思考하면 반드시 얻을 수 있는 것, 이것은 성誠이 도달한 지극한 경지境地이다.
청각聽覺을 동원하지 않아도 들을 수 있고, 시각視覺을 동원하지 않아도 볼 수 있으며, 사고思考하지 않고도 얻고, 가지 않고도 도달하는 것, 이것은 성性에 본시 존재하는 것이고 정신精神의 근원根源에서 나온 것이니, 심心을 극진히 하고 성誠을 극진히 한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이다.
그러므로 성誠이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 성性이다.
현자賢者는 성誠을 극진히 하여 성性을 확립한 사람이고, 성인聖人은 성性을 극진히 하여 성誠에 도달한 사람이다.
정신精神은 성性에서 생기고, 성性은 성誠에서 생기며, 성誠은 심心에서 생기고, 심心은 기氣에서 생기며, 기氣는 육체肉體에서 생기니, 육체肉體라는 것이 생명生命을 존재하게 하는 근본이다.
그러므로 생명을 기르는 것은 육체를 보존함에 있고, 육체를 충실하게 하는 것은 기氣를 기름에 있으며, 기氣를 기르는 것은 심心을 편안하게 하는 데 있고, 심心을 편안하게 하는 것은 성誠을 극진하게 하는 데 있고, 성誠을 기르는 것은 성性을 극진히 하는 데 있으니, 성性을 극진히 하지 않으면 생명을 기르기에 부족하게 된다.
성性을 극진하게 하는 것이 성誠에 도달하는 것이요, 성誠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심心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요, 심心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기氣를 기르는 것이요, 기氣를 잘 기르는 것이 육체를 잘 보존하는 것이요, 육체를 잘 보존하는 것이 생명을 기르는 것이니, 생명을 기르지 못하면 성性을 극진히 하기에 부족하게 된다.
그러므로 생명生命과 성性이 서로 이어받아 따르고, 심心에서 일어난 지志가 기氣와 서로 표리表裏가 되는 것이다.
생명生命이 혼탁混濁해지면 성性이 피폐疲弊해지고, 성性이 혼탁하면 생명이 피폐해지는 것이, 지志가 순일純一하면 기氣를 동動하게 하고 기氣가 순일純一하면 지志를 동動하게 하는 것과 같다.
선왕先王들이 그렇게 된 원리原理를 알아서, 이 때문에 천하 사람들의 천성天性을 근본으로 하여 예禮를 제정하고, 천하 사람들의 천성天性을 조화調和시키고자 하여 악樂을 제정하였으니, 예禮는 천하 사람들이 행할 알맞는 법도가 되는 것이고, 악樂은 천하 사람들이 심중心中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을 조화롭게 드러내는 것이다.
예禮와 악樂은 선왕이 사람의 정신精神을 기르고 사람의 기氣를 바르게 하여 올바른 성性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대례大禮의 지극한 경지는 간결簡潔하여 꾸밈이 없게 되고, 대악大樂의 지극한 경지는 평이平易하고 소리가 완만하게 되나니, 간결簡潔하고 평이平易하게 한 것이 선왕先王이 예禮와 악樂을 세운 근본 뜻이다.
세속世俗에서 중重하게 여기는 것을 성인聖人은 가볍게 여기고, 세속世俗에서 즐거워하는 것을 성인聖人은 슬프게 여기니, 성인聖人의 마음이 세속世俗 사람들과 서로 반대가 되어서가 아니라, 성인聖人은 내심內心으로 추구하는 것이 있고 세속 사람들은 외면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있어서이다.
내심으로 추구하는 사람은 천성天性에 합당한 것을 얻는 것을 즐거워하고, 외면적으로 추구하는 사람은 그 욕망慾望을 이루는 것을 즐거워한다.
욕망慾望은 쉽게 드러나지만 성性은 알기가 어려우니, 이것이 성인聖人과 속인俗人의 정성情性이 정반대正反對가 되는 근본 원인이다.
옷과 음식은 사람의 육체와 기氣를 기르는 근원이고, 예禮와 악樂은 사람의 성性을 기르는 근원이다.
예禮는 그 성性의 시초가 된 근원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이고, 악樂은 생명生命의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니, 우리는 예禮와 악樂을 통하여 성인聖人이 그 생명生命을 귀貴하게 여김이 지극하였음을 보게 된다.
세속의 말에 이르기를 “생명生命을 기르는 것은 군자君子가 할 일이 아니다.”라고 하는데, 이는 선왕先王이 예禮와 악樂을 제정制定한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생명生命을 기르는 것으로 인仁을 삼고, 기氣를 보존하는 것으로 의義를 삼으며, 정情과 욕欲을 제거하고 물리쳐서 천하 사람들의 천성天性을 극진하게 하고, 정신精神을 수양하여 밝게 터득해서, 이로써 성인聖人이 이룩한 경지境地를 뒤따르는 것이다.
성인聖人의 말씀은 안연顔淵과의 문답에 드러난 것보다 중대한 것이 없다.
“예禮에 맞지 않으면 보지 말고, 예禮에 맞지 않으면 듣지 말고, 예禮에 맞지 않으면 말하지 말며, 예禮에 맞지 않으면 행동하지 말라.” 하였으니, 인仁을 행하는 도道도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귀는 타인他人의 말이 있은 이후에야 듣는 것이 아니고, 눈은 타인의 행위가 있은 이후에야 보는 것이 아니며, 입은 타인의 반응이 있은 이후에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몸은 타인의 반응이 있은 이후에야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지키기를 지극히 간략하게 하고, 취하기를 지극히 가까운 곳에서 하여, 마음과 육체를 소유한 사람은 누구나 이렇게 할 능력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안자顔子도 오히려 이것을 실천하는 일을 근심하였으니, 이는 무엇 때문인가?
대체로 사람이 행할 도道 가운데 이보다 중대한 것이 없어서이다.
예禮에 맞지 않으면 듣지 말라는 것은 귀를 막고 피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천하의 만물이 나의 총명을 막기에 부족하다는 것이고, 예禮에 맞지 않으면 보지 말라는 것은 눈을 가리고 피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천하의 만물이 나의 밝음을 어지럽히기에 부족하다는 것이고, 예禮에 맞지 않으면 말하지 말라는 것은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천하의 만물이 내 바른 말을 바꾸기에 부족하다는 것이며, 예禮에 맞지 않으면 움직이지 말라는 것은 그 몸을 정지시키고 움직이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천하의 만물이 나의 정기正氣를 어지럽히기에 부족하다는 것이다.
천하의 만물이 어찌 유독 육신肉身에만 그렇게 한다는 것이겠는가.
그 근원으로부터 유래한 것이 대체로 매우 은미隱微하다.
귀로 듣지 않을 때에 먼저 밝게 들을 능력을 보유하였고, 눈으로 보지 않을 때에 먼저 밝게 볼 능력을 보유하였고, 말을 하지 않을 때에 먼저 말할 내용을 지니고 있으며, 몸을 움직이지 않을 때에 먼저 움직일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성인聖人의 제자弟子들 가운데 오직 안연顔淵만이 이 말에 합당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귀로 듣는 것으로 총명함을 삼지 않는 것이니 총명함의 근원을 알지 못하는 자는 천하의 말을 극진하게 듣기에 부족하기 때문이고, 눈으로 보는 것으로 밝음을 삼지 않는 것이니 밝게 보는 근원을 알지 못하는 자는 천하의 볼 것을 극진하게 보기에 부족하기 때문이다.
밝게 듣고 밝게 보는 것은 귀와 눈이 잘할 수 있는 것이나, 밝게 듣고 밝게 볼 수 있게 하는 근본은 육체의 일부인 귀와 눈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종소리와 북소리를 기다린 이후에야 즐거워하는 사람은 음악音樂의 원리를 깊이 터득한 사람이 아니고, 구슬과 비단(폐백)을 바치는 의식을 기다린 이후에야 공경恭敬에 대하여 아는 사람은 예禮의 원리를 깊이 깨달은 사람이 아니다.
풀을 묶어 만든 북채와 흙으로 만든 북 같은 원시적인 악기에 음악音樂의 도道는 갖추어져 있고, 곡식을 돌 위에서 익히고 고기를 손으로 뜯어 먹으며 구덩이를 술그릇으로 삼고 손으로 움켜 마시는 원시적인 의식에도 예禮의 근본은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자天子가 하늘에 제사 지낼 때에 입는 옷에는 무늬가 없고, 천자가 타는 수레에는 장식이 없었으니, 성인聖人이 오로지 그 일에서 귀하게 여긴 것은 무엇이었던가?
그러므로 “예禮는 인정人情에 가깝도록 하는데 있는 것이지, 극진하게 꾸미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증자曾子가 맹경자孟敬子에게 이르기를 “군자君子가 귀하게 여기는 도道가 세 가지 있으니, 용모容貌를 근엄謹嚴 신중愼重하게 움직이면 이로써 나에게 포만暴慢하게 대待함을 멀리할 수 있고, 안색顔色을 엄정嚴正하게 하면 이로써 나에게 신의信義에 가깝게 대하게 할 수 있고, 온공溫恭하게 말을 하면 이로써 나에게 천루賤陋하고 사나운 말을 하는 것을 멀리할 수 있다.
제사 음식을 차리는 일은 해당 관원이 있으니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하였는데, 이 말을 관찰해보면, 증자曾子도 도道를 알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옳으니, 가령 증자曾子가 도道를 알았다면 도道는 언어와 용모와 대화의 사이에서 떠나지 않으니, 어찌 도道가 외물에 의지하는 것이겠는가.
이 때문에 옛사람들은 눈으로 보게 되면 이미 도道의 소재를 알게 되고, 말하지 않아도 뜻이 이미 전해지며, 상賞을 주지 않아도 사람들이 스스로 분발하고, 벌罰을 주지 않아도 사람들이 저절로 두려워하게 되었으니, 이렇게 된 것은 이 도道를 근거로 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이다.
이 때문에 선왕先王의 도道가 말로 전해지고 행동으로 드러날 수 있는 것은, 모두 그 법도法度와 형정刑政을 통해서 된 것이지 고차적인 정신精神을 동원해야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정신精神이 신묘神妙해져서 밝게 되는 것은 그 사람에게 달려 있고, 소리 없이 이루고 말을 하지 않아도 믿게 되는 것은 덕행德行에 달려 있다.” 하였으니, 인정人情과 기욕嗜慾을 제거하면 신명神明함이 드러나고, 정신精神을 수양하여 밝음을 극진히 하면 만물이 저절로 이루어진다.
이 때문에 군자君子의 도道를 아는 사람이 드문 것이다.
그 마음을 잘 정리하여 밝게 하고 그 덕德을 맑고 밝게 하면, 천지天地 사이에 존재하는 만물이 모두 저절로 지극하게 되니, 군자君子가 고수固守하는 것이 지극히 간략하면서도 도달한 경지는 지극히 광범하고, 지극히 가까운데서 취하였는데도 멀리서도 호응하게 되는 것이다.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헤아려본 이후에 말하고, 따져본 이후에 행동하여, 헤아리고 따져서 그 변화의 도道를 이룰 수 있게 된다.” 하였으니, 변화에 적응함이 천리天理와 인도人道의 극치에 이르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서경書經》에서 하늘과 사람의 도에 대하여 말한 것은 〈홍범洪範〉의 기록보다 중대한 것이 없으니, 〈홍범洪範〉에서 천리天理와 인도人道를 따르는 도道에 대하여 말한 것은 “공손한 모습[貌], 순종하는 말[言], 분명하게 살핌[視], 총명하게 들음[聽], 지혜롭게 생각함[思]보다 중대한 것이 없다.”라고 한 것이다.
성인聖人께서 홀로 깨달은 이치와 마음을 전하신 말씀이여!
정신精神에 함축含蓄되어 길러지고,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 기氣를 잘 길러서 신명神明과 통하게 된 것이로다!
군자君子가 실수를 범하지 않고자 하는 것이 세 가지 있으니, 남에게 낯빛을 변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으려 하고, 남에게 말을 잘못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으려 하고, 남에게 거동을 장중하게 하지 못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낯빛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용모가 순일純一한 것이고, 말을 잘못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하고 침묵함이 순일純一한 것이며, 처신을 장중하게 하지 못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은 가고 그침을 순일純一하게 하는 것이다.
군자君子의 도道는 그 큰 것을 말한다면 천지天地로도 포용하기에 부족하고, 그 작은 것을 말한다면 가을 터럭의 끝보다도 작아서 보이지 않으며, 그 굳셈을 말한다면 천하에 대적할 상대가 없고, 그 간략함을 말한다면 문자文字로 표현하여 전할 수가 없다.
성인聖人이 남기신 말씀에 “대례大禮는 천지天地와 더불어 그 법도法度를 함께하고, 대악大樂은 천지와 더불어 그 조화調和를 함께한다.” 하였으니, 이는 성性에 대하여 말한 것이다.
대례大禮는 성性의 중도中道에 맞는 것이고 대악大樂은 성性이 조화롭게 발현發現된 것이니, 중용中庸의 도道에 맞고 조화롭게 발현된 인정人情은 천지天地의 신명神明에 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이 대례大禮 대악大樂의 정수精髓를 간직하여 이에 맞게 연주하자 봉황鳳凰이 내려와 춤을 추었고, 오사五事를 잘 닦자 음양陰陽이 형통亨通하게 되었으며, 이에 천지天地가 바르게 자리를 잡고 삼광三光이 밝게 빛났으며, 네 계절이 순조롭게 운행되어 만물이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고 한 것이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학鶴이 굽이굽이 펼쳐진 깊숙한 소택沼澤에서 우니, 그 소리가 하늘에까지 들렸노라.”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나는 나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잘 기르니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차게 되었다.”라고 한 것이며, 양자揚子가 이르기를 “모貌와 언言과 시視와 청聽과 사思는 천성天性으로 소유所有한 것이다.”라고 하고, “하늘에 마음을 기울이면 하늘의 이치를 알고, 땅에 마음을 기울이면 땅의 이치를 안다.” 한 것이다.
예악禮樂의 본의本意가 전해지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도다.
천하天下 사람들 가운데 양생養生과 수성修性을 말하는 자들은 불교佛敎나 노장老莊으로 돌아갈 뿐이니, 불교佛敎나 노자老子의 학설이 행해지면 천하의 예악禮樂을 행하는 자들은 저속한 유행流行만을 따르게 될 뿐이다.
대저 천하 사람들을 예악禮樂의 형식形式만을 준수하는 쪽으로 몰아가서, 이로써 저속한 유행을 따르는 것만을 일삼게 하면서 국가國家를 잘 다스리고자 하는 것은, 바로 양梁나라와 진晉나라의 군주君主가 패망敗亡의 화禍에 이르게 되었던 방법方法을 취取하여 그대로 따르는 것이로다.
그런데도 세상에서 이를 알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는 다만 예악禮樂의 의의意義는 커서 이해하기가 어렵고, 노자老子의 말은 친근하여 이해하기가 쉬워서일 뿐이다.
성인聖人의 도道를 자기 몸에 체득體得하고, 인사지간人事之間에서 안온安穩하게 조화調和를 이루어 그것이 사람들 무리에서 떠나지 않아야 하는 것인데, 불도佛徒들은 세계世界를 다만 공허空虛한 것으로 보아 고행苦行을 유도誘導하고, 인사人事를 피하여 산림 속으로 은둔한 연후에야 그 몸을 선善하게 보존하기에 족足하게 된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하여 관찰해본다면, 성인聖人은 불교佛敎 및 노장老莊과는 그 원근遠近과 난이難易의 차원次元이 다름을 알 수 있게 된다.
이 때문에 상賞 주기를 옛사람들이 한 것과 같게 하여도 분발奮發하는 것은 같지 않게 되었고, 벌罰 주기를 옛사람과 같게 하여도 두려워하는 것은 같지 않게 되었고, 인덕仁德을 옛사람과 같게 베풀어도 사랑을 느낌은 같지 않게 되었고, 지혜智慧가 옛사람과 같아도 식견識見은 같지 않게 되었고, 말을 옛사람과 같게 하여도 신의信義는 같지 않게 되었다.
도道는 예나 이제나 동일한데 심心이 동일하지 않아서인 것이다.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진실로 도통道通한 성인聖人이 아니라면, 도道가 공허空虛하게 되어 행할 수 없게 된다.” 하였다.
옛적 복자천宓子賤이 선보單父 고을의 읍재邑宰가 되자 선보單父 고을 사람들이 교화敎化되었다.
그런데 지금의 왕공王公과 대인大人들은 요堯와 순舜과 이윤伊尹과 같은 권세權勢를 가지고 있는데도 복자천宓子賤이 한 고을에서 세웠던 업적만큼의 공功도 세우지 못하고 있으니, 그들이 배운 치국治國의 학문學問이 본시 천박淺薄하여 도道가 밝혀지지 않은 것이 아니겠는가?
대저 천하 사람들이 성인聖人의 도道를 실천하기에 용맹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성인聖人의 도道를 행하는 사람이, 왕왕往往 사람들에게 재간을 부려서 빨리 인정받기만을 추구하여, 이렇게 하는 것으로써 벼슬에 나아가는 단계로 삼고 있다.
지금의 벼슬에 나아가는 도道는 갈고리로 물건을 낚아 올리는 것에 비유할 수 있으니, 요행히 낚은 숫자가 많으면 왕공王公과 대인大人이 되고, 만약 불행하게도 낚은 숫자가 적으면 선비가 입는 옷을 찢어버리고 장사꾼이 된다.
이를 근거로 관찰해본다면 왕공王公과 대인大人이 된 방법이 장사꾼이 돈을 많이 벌어서 뜻을 이룬 것과 같으니, 이를 학문이 천박하여 도道가 밝혀지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관찰해본다면 뜻을 얻어 남의 윗자리에 있으면서, 성인聖人의 도道를 회복하기 위한 정치를 중단함이 없이 행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안에는 애교를 띤 모습의 여인이 있어서 그 정욕情欲을 유혹하고, 밖에는 총애寵愛하는 간신奸臣이 있어서 그 마음을 교만하게 만드니, 지난날 도를 지녀 능력이 있던 사람은 날로 잊게 되고, 오늘날 아첨하여 좋아하는 사람은 날마다 가까이 오게 된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안회顔回라는 사람이 있는데 배우기를 좋아하여, 노여움을 남에게 옮기지 아니하고 같은 과오를 거듭 범하는 일이 없습니다.” 하셨고, 또 말씀하시기를 “나는 그가 점차 발전해가는 것은 보았고, 중지하는 것은 보지 못하였다.” 하셨다.
저 안회顔回가 배운 학문은 세속 사람들이 배운 것이 아니니, 노여워할 일이 있어도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 것은 그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는 것이고, 같은 과오를 거듭 범하지 않는 것은 불선不善한 단서를 보면 바로 그치는 것이다.
이는 세상 사람들이 이른바 퇴보退步한다고 여기는 것은 안자顔子의 이른바 발전發展한다는 것이고, 사람들이 이른바 이익利益이 된다고 여긴 것은 안자의 이른바 손실損失이라는 것이다.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손괘損卦의 의의意義는 어려운 일을 먼저 행한 후에 얻기를 도모함에 있다.” 하였으니, 이는 바로 안자顔子의 행위를 이른 것이로다!
귀는 들리는 소리를 줄이고, 눈은 보이는 대상을 줄이고, 입은 말을 줄이고, 몸은 행동을 줄이는 것이 어려운 일을 먼저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행위가 지극한 경지에 이르게 되면 귀에는 들리지 않는 것이 없고,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없으며, 말은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행위는 복종하지 않는 사람이 없게 될 것이니, 이것이 뒤에 얻은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까닭으로 군자君子의 학문學問은 처음에는 어리석은 사람 같고 어린아이 같지만 그것이 지극한 경지에 도달하게 되면 천지天地도 그보다 더 클 수가 없고, 천하天下 모든 사람과 만물萬物도 그보다 더 많을 수가 없고, 귀신도 그보다 더 은미할 수가 없고, 제자백가諸子百家들의 번다繁多한 모든 이론理論들이 그를 미혹迷惑시킬 수가 없다.
이 때문에 지극히 높은 하늘의 일월성신日月星辰과 음양陰陽의 기운을 기록하여 두 손으로 간책簡策을 들고 헤아릴 수 있게 하고, 지극히 웅대한 땅의 산천구릉山川丘陵과 만물萬物의 형상形象과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생산한 것을 전적典籍에 수록하여 정定해놓을 수 있게 하였다.
이 때문에 성신星辰의 수數와 천지天地의 법法과 인물人物의 도리道理는 모두 전세前世에 지극히 순일純一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였던 성인聖人이 세워놓은 것이니, 후세後世 사람이 성인聖人이 이루어놓은 법도法度를 지킬 수는 있지만 어찌 그 근원根源을 알 수가 있겠는가?
전傳에 이르기를 “온갖 기술자들의 일은 모두 성인이 이루어놓은 것이다.”라고 한 것이 이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날 사람으로 도道에 관하여 말한 사람 가운데 먼저 천지天地에 관하여 말하지 않은 이가 없고, 천지天地에 대하여 말한 사람 가운데 먼저 육신肉身에 대하여 말하지 않은 이가 없으며, 육신肉身에 관하여 말한 사람 가운데 먼저 성性에 대하여 말하지 않은 사람이 없고, 성性에 관하여 말한 사람 가운데 먼저 순일純一한 정精에 대하여 말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바로 순일純一한 정精이 하늘이 높게 된 소이所以이고, 땅이 두터워진 소이所以이며, 성인聖人이 그 천지天地와 짝을 이루게 된 소이所以인 것이다.
그러므로 수레를 모는 일은 사람들이 다 잘할 수 있는 일이지만 조보造父만이 홀로 그 지극한 경지에 이르렀으니, 그의 수레와 말이 다른 사람의 수레나 말과 달랐던 것이 아니라, 조보造父만이 그 도道의 정묘精妙함을 극진히 하였기 때문인 것이요, 활쏘기는 사람들이 다 잘할 수 있는 것이지만 예羿만이 홀로 지극한 경지에 이르렀으니, 그의 활과 화살이 다른 사람의 활이나 화살과 달랐던 것이 아니라, 예羿만이 그 도道의 정묘精妙함을 극진히 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지금 사람들이 옛사람들과 사람은 같지만 이 도道를 쓰는 방법은 다르니, 조보造父는 이를 써서 훌륭한 마부馬夫가 되었고, 예羿는 이를 써서 훌륭한 사수射手가 되었으며, 도척盜跖은 이를 써서 도적盜賊의 두목이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