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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王安石(2)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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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當與구공歐公墓碑參看 而구공爲勝이라
公諱덕용德用이요 원보元輔 其先 眞定人也
世以財雄북변北邊하고 皆倜儻하야 喜赴人急하야 歲饑所活以千計러라
태종太宗 貴寵任事하야전전도지휘사殿前都指揮使 受遺詔하고진종眞宗이러니
葬其先公하남河南밀현密縣한대 밀현後分屬정주鄭州관성管城이라 故今爲관성인管城人하니라
公先喪其母한국부인韓國夫人주씨朱氏하고 事繼母노국태부인魯國太夫人장씨張氏하야 以孝聞하다
지도至道二年 태종太宗五路出師하야 以討이계천李繼遷之叛할새무강공武康公하주夏州하다
當是時하야 무강공서두공봉관西頭供奉官하야 而在무강공武康之側하니 年十七이라 自護兵當前하야 所俘斬及得馬羊功爲多하다
及歸 公又請殿將하야 至隘 公以爲歸之至隘而爭先이면 必亂이니 亂而이계천繼遷薄我하면 必敗하리라하여
於是又請以所護兵으로 馳前至隘而陣하다
무강공武康무강공令於軍하야 曰至陣而亂行者斬하리라하고 무강공亦令曰 至吾陣而亂行者 吾亦如무강공하리라하다
至陣하니 士則帖然하야 以次[此]行而무강공武康公亦爲之按轡하다
이계천繼遷兵相隨屬하야 左右望무강공호되 莫敢近하니 於是무강공武康公嘆曰 왕씨王氏有兒矣로다하다
及論功 무강공武康公曰 吾爲大將하야 不可使子弟 與諸將分功이라하고무강공不列하다
三年동두공봉관東頭供奉官하고
함평咸平二年내전숭반內殿崇班하고
三年어전충좌마군부도두御前忠佐馬軍라가 경덕景德二年마군도두馬軍都頭하다
대중상부大中祥符元年형주명주자주상주하다
男子장홍패張鴻霸聚黨界中爲盜어늘 朝廷以名捕호되 久之不得이러니
公以氈車載壯士하고 僞服爲婦人하야 誘之於野하야 於是장홍패鴻霸與其黨三十二人皆得하다
朝廷以爲能하야섬서동로제거착적陝西東路提擧捉賊하니섬서동로제거착적섬서동로제거착적爲盜者 聞公擒장홍패鴻霸하고 皆惴恐逃去하니라
五年환경로지휘사環慶路指揮使하야
奏事上前이라가 忤旨하야 責授운주마보군도지휘사鄆州馬步軍都指揮使하다
是歲 무강공武康公하니 天子命무강공乘驛護喪歸京師하고 已而還其舊職하다
七年산도두散都頭하고 八年산원散員內殿直하고
천희天禧四年전전좌반도우후殿前左班都虞候유주자사柳州刺史하고 건흥乾興元年봉일좌상도지휘사捧日左廂都指揮使영주단련사英州團練使하다
천성天聖三年박주단련사博州團練使지강신군하다
어늘 公使금군禁軍爲築하니 築者久之로되 而無敢竊言望公使己以非其事者
天子賜書獎諭하다
五年기주冀州마보군도부서馬步軍都部署
是歲강주방어사康州防禦使용신위사상도지휘사龍神衛四廂都指揮使하고 又除봉일사상도지휘사捧日하다
六年시위친군보군도우후侍衛親軍步軍都虞候하야 歸就職이라가 又除환경로부도부서環慶路副都部署호되 不行하다
八年병주대주代州마보군부도부서馬步軍副都部署라가 又除전전도우후殿前都虞候하다
十年계주관찰사桂州觀察使시위친군보군부도지휘사侍衛親軍步軍副都指揮使하야마군도지휘사馬軍都指揮使하다
장수皆遷 與士之請馬者 皆不求有司而得하고 故事 取糞錢於軍하야 以給公使러니 自公始罷之하야 使各置庫하야 以待其軍用하다
명도明道元年복주관찰사福州觀察使하니
公爭曰 軍人敢挾詔以干軍制 後不可復治 且軍吏 不可使求而得이니 得則軍人必大受其侵이라호되
固使與之하고 公固不奉詔러니 已而명숙태후太后亦寤하야 卒聽公하다
及太后崩 有司請위사衛士皆坐甲한대 公又不奉詔하야 曰故事 無爲太后喪坐甲也라하니
於是天子心賢公하야 以爲可用이러니
及閱검교태보后官得爭軍吏첨서추밀원사하고 遂以公검교태보檢校太保첨서추밀원사簽署樞密院事하다
公固辭호되 武人不學하야 不足以當大任이라한대 天子使으로 趣公入院하다
公於朝廷臨義慷慨하야 言無所顧計하고 至於親戚故舊 待之亦皆當理而有恩하다
故人爲人求官於公이어늘 公問其得謝幾何하니 故人辭窮하야 以實對어늘
公亦不拒也하고 歸而使家人으로 以銀與之하야 曰爾所求者在此矣
官非吾有 不可得이라하다
居頃之추밀부사樞密副使하다
三年명주봉국군절도관찰유후明州奉國軍節度觀察留後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하고
四年안덕군절도사安德軍節度使하고
五年 검교태위檢校太尉충선휘남원사充宣徽南院使하다
보원寶元보원 이원호李元昊하다
公嘗請將以扞邊한대 天子不許하고 曰吾以公謀可也라하더니 卒所以鎭撫扞治者 亦多公計策이러라
人或以公威名聞天下하고 疑非人臣之相이라한대 어사중승御史中丞공도보孔道輔 因以爲人言如此하니 公不宜典機密하야우천우위상장군우천우위상장군라하니 天子不得已 以公爲武寧우천우위상장군節度使서주대도독부장사徐州大都督府長史하야 赴本鎭하고 賜手詔慰遣이나 而言者皆尙論公未止也하니 又以公爲우천우위상장군右千牛衛上將軍지수주知隨州하다
人爲公懼호되 恬然唯不接賓客而已러라
조주曹州 或聞공도보孔道輔하고 以告曰 是嘗害公者 今死矣라한대 公愀然口[曰] 공중승孔中丞豈害某者乎
彼其心所以事君 當如此也
惜乎 朝廷無一忠臣이로다하니 言者服公하야 以謂有德하고 而終身自愧其言하니라
조주人喜鬪하고 多盜하야 他日獄未嘗空也러니 公在조주 嘗無一人囚者數矣러라
경력慶曆二年검교사공檢校司空보정군절도사保靜軍節度使하고 天子以手詔賜公하야 曰賜重地하니 勉視事하고 毋以人言爲憂하라
有傷라도 朕不聽호리라하다
거란契丹使유육부劉六符전주澶州라가 喜曰 유육부六符聞公久矣러니 遇於此하니 豈非幸也
今此州歲大熟하니 豈非公仁政之效也아하니 公謝曰 明天子在上하시니 固常多豐年이라 此豈吾力也리오
今朝廷多賢士대부大夫可畏者하고 吾老矣 備位於此하니 不足以累公稱數라하니라
是歲진정부등로眞定府等路 駐泊馬步軍都部署하다
求奏事京師하니 天子선휘남원사使中貴人으로 諭公入覲하고선휘남원사宣徽南院使판성덕군判成德軍한대 固辭不得이러니 未行거란契丹선휘남원사使선휘남원사使후주세종世宗所取三關故地하고 聚兵유주계주하야 爲若侵邊者하다
乃移公판정주判定州삼로도부서三路都部署하야 聽以便宜從事하고 而以양숭훈楊崇勳지성덕군知成德軍하다
양숭훈崇勳使客問公所以戰한대 公曰 吾患不仁이요 不患不威하며 患不知 不患無功하노니
蓋見敵而後勝可制 吾所戰 豈可以豫言也리오하다
公至정주定州하야 則明賞罰以敎戰하니 거란契丹使人來覘이어늘 或以告하고 勸公執殺한대
公置之不問하고 曰吾視士卒皆樂戰하니 可用矣
使彼得歸以告其主 是伏人之兵以不戰也니라하다
明日 大閱于郊할새 公提桴鼓誓師하고 進退坐作호되 終日不戮一人而畢하다
乃下令하야 具糗糧하고 聽鼓於中軍이라가 將盡以汝行호되 唯吾其所鄕하라하니 거란契丹聞之震恐하다
已而天子密詔問公方略한대 公上書하야 論近世用兵之失 與今所以料敵制勝之方甚備하다
會兵罷하고 徙公지진주知陳州하야 過都할새 天子使中貴人勞賜하고 問公欲見否아하니
公辭謝호되 備邊無功이어늘 幸蒙上恩赦誅하고 徙內郡하야 非有公事當對者하니 不敢見이라하다
三年맹주孟州라가 召還하야 서선휘원사署宣徽院事하고 已而出판상주判相州하다
六年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판전주判澶州하고
七年정주鄭州하고기국공祁國公하다
八年 還除하고 又除검교태사檢校太師판정주判鄭州하야
過都할새 天子召見慰勞하다
황우皇祐二年집경군절도사集慶軍節度使하고 進封기국공冀國公하다
三年 以年老求致仕하니 詔以태자태사太子太師致仕하고 綴中書門下班하다
公威名 雖老矣 尙爲四夷所憚하고 而天子亦賢公하야 以爲可屬大事也러라
四年 復强起公하야 以爲하양삼성절도사河陽三城節度使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판정주判鄭州하다
六年 遂以爲추밀사樞密使하니
거란契丹使至 부공伴射할새 使曰 南朝以부공使樞密而재상부공富公 可謂得人矣라하니 天子聞之하고부공御弓一 矢五十以寵焉하다
가우嘉祐九年 進封노국공魯國公하니
以年老求去位하야 至六七호되 天子爲之不得已하야 猶以爲충무군절도사忠武軍節度使경령궁사景靈宮使라가 又以爲同群牧制置충무군절도사使하다
有詔五日 一會朝하고 給扶者以一子若孫一人하니 是歲公年七十八矣
明年二月辛未 公以疾薨하니 天子至其第하야 爲之罷朝一日하고 又爲之素服發哀苑중서령하다 而以태위太尉중서령中書令으로 告其第하고 又賜以黃金水銀龍腦等物하며 出內人撫其諸子하다
公忠實樂易하야 與人不疑하고 不詰小過하며 望之 毅然有不可犯之色호되 及就之하며 溫如也러라
平生少玩好하고 不以名位驕人하며 而所得祿賜 多施之親黨하다
善治軍旅하야 寬仁愛士卒하니 士卒樂爲之盡하고
與士大夫遊 士大夫亦多服其度하야 以爲莫能窺也러라
안정군부인夫人송씨宋氏 무승군절도사武勝軍節度使연악延渥之女也 累封안정군부인安定郡夫人하고 先公卒하다
後以子追封榮영국부인國夫人하고 孝慈恭儉하야 有助於公하다
男子함희咸熙 동두공봉관東頭供奉官으로 早卒이러니 以子故累贈至우천우위장군右千牛衛將軍하고함융咸融 서경좌장고사西京左藏庫使과주단련사果州團練使함서咸庶 내전숭반內殿崇班으로 早卒하고함영咸英 공비고부사供備庫副使함강咸康 내전승제內殿承制
女四人이니 長嫁尙書駕部郞中장숙첨張叔詹하고 其次嫁태상박사太常博士정사공程嗣恭 국자박사國子博士구인寇諲러니 皆早卒하다
孫七人이니 내전숭반內殿崇班합문지후閤門祗候 좌시금左侍禁이요 좌반전직左班殿直이요 우반전직右班殿直이요 좌시금左侍禁이요 未仕하고 皆早卒하다
曾孫二人이니 좌시금侍禁이요 未仕하다
公子卜以五月甲申하야관성管城之先塋하야영국부인國夫人하고 謹具公歷官行事狀하야 請牒考功태상太常議諡하고 幷史館하다


08. 노국공 증태위 중서령을 지낸 왕공의 행장
의당 구공歐公의 묘비문을 참조하며 읽어야 하는데, 구공의 글이 이보다 더 낫다.
덕용德用이고, 원보元輔이며, 그 선조先祖진정인眞定人이었다.
대대代代북변北邊의 으뜸가는 재산가財産家였으며, 증조부曾祖父 장공蔣公조부祖父 형공邢公이 모두 활달 호방하여, 타인의 위급함을 구제해주는 것을 기쁘게 여겨서, 흉년이 들었을 때에 살려준 사람이 수천 명이었다.
선공先公무강공武康公께서 태종太宗 때에 총애寵愛를 받아 귀질貴秩에 올라 중임重任을 맡으셨고, 전전도지휘사殿前都指揮使로 있으면서 유조遺詔를 받고 진종眞宗보필輔弼하셨다.
선공先公하남河南 밀현密縣하장下葬하였는데, 밀현密縣정주鄭州관성管城분속分屬되었으므로, 그 때문에 이제 관성인管城人이 된 것이다.
은 일찍이 어머님이신 한국부인韓國夫人 주씨朱氏를 여의고, 계모繼母 노국태부인魯國太夫人 장씨張氏를 모셨는데, 효자孝子로 소문이 났다.
지도至道 2년(996)에 태종太宗께서 오로군五路軍을 동원하여 이계천李繼遷반군叛軍을 칠 때에, 무강공武康公께서는 하주夏州로 출동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서두공봉관西頭供奉官이 되어 무강공武康公을 곁에서 모셨는데, 나이가 17세였음에도 군사들을 거느리고 선봉을 담당하여, 사로잡거나 죽인 적군 및 말과 양을 빼앗은 공이 매우 컸다.
철군할 때에는 이 또 마지막 철수하는 군대의 이 되기를 청하여 험준한 관소關所에 이르자, 은 ‘철수하면서 험준한 지역에 이르러 먼저 철수하기를 다투게 되면, 반드시 대오隊伍가 흐트러져 어지러워질 것이니, 어지러울 때에 이계천李繼遷의 군사가 우리를 공격하면, 반드시 패배하게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여,
이에 거느린 군대를 이끌고 말을 달려서 험준한 관소關所에 이르러 을 치겠다고 청하였다.
무강공武康公께서 을 위해 군령軍令을 내리기를 “에 이르러 행군의 대오를 어지럽히는 자가 있으면 목을 베리라.” 하였고, 도 명령하기를 “내가 쳐놓은 군진軍陣에 이르러 행군의 대오를 어지럽히는 자는, 나도 무강공武康公의 명령대로 행하겠다.” 하였다.
이에 에 이르자 군사들이 침착하여 이 명령대로 행군하니, 무강공武康公도 말고삐를 잡고 편안하게 철군할 수 있었다.
이계천李繼遷의 군사들이 계속하여 좌우左右에서 의 철군을 염탐하면서도 감히 가까이 오지를 못하니, 이에 무강공武康公께서 탄복하시기를 “우리 왕씨王氏 집안에 훌륭한 자식을 하나 두었도다!” 하였다.
전공戰功할 때에 이르러 무강공武康公께서 “내가 대장大將이니 내 자식이 여러 장수들과 을 나누어 가지게 해서는 안 된다.” 하고, 을 배제하여 전공자戰功者 명단에 넣지 않았다.
3년에 동두공봉관東頭供奉官으로 옮겼다.
함평咸平 2년(999)에 내전숭반內殿崇班으로 옮겼다.
3년에 어전충좌마군부도두御前忠佐馬軍副都頭중앙中央으로 불러들였다가, 경덕景德 2년(1005)에 마군도두馬軍都頭가 되었다.
대중상부大中祥符 원년元年(1008)에 형주邢州, 명주洺州, 자주磁州, 상주相州순검제거착적巡檢提擧捉賊이 되었다.
장홍패張鴻霸라는 남자가 무리를 모아 지경地境 안에서 도둑질을 하였는데, 조정朝廷에서 지명수배指名手配하며 체포逮捕하도록 하였으나, 오래도록 잡지를 못하였다.
께서 휘장을 친 수레에 부녀자의 복장으로 위장한 장사壯士들을 태우고 들판으로 유인하여, 이곳에서 장홍패張鴻霸를 비롯한 그 당여黨與 32을 모두 사로잡았다.
조정朝廷에서 이에 능력을 인정하여 섬서동로제거착적陝西東路提擧捉賊으로 벼슬을 옮겨주니, 섬서陝西 이동以東에서 도둑질하던 자들이 께서 장홍패張鴻霸를 사로잡았다는 소문을 듣고, 모두 두려워하여 달아나버렸다.
5년에 환경로지휘사環慶路指揮使가 되었다.
황상皇上 앞에서 일을 아뢰다가 황제의 뜻을 거슬려, 문책問責당하여 운주마보군도지휘사鄆州馬步軍都指揮使제수除授되었다.
이해에 무강공武康公께서 하시니, 천자天子께서 에게 명하여 역마驛馬를 타고 서울로 돌아와서 상례喪禮를 치르도록 하고, 얼마 후에 상기喪期를 채울 때까지 있지 말고 즉시 옛 직책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7년에 산우후散虞候 산도두散都頭로 옮기고 8년에 산원散員 내전직內殿直 도우후都虞候로 옮겼다.
천희天禧 4년(1020)에 전전좌반도우후殿前左班都虞候 유주자사柳州刺史가 되고, 건흥乾興 원년元年(1022)에 봉일좌상도지휘사捧日左廂都指揮使 영주단련사英州團練使가 되었다.
천성天聖 3년(1025)에 박주단련사博州團練使 지강신군知康信軍으로 바뀌었다.
강신康信이 무너지자 께서 금군禁軍을 시켜서 수축修築하였는데, 수축하는 일에 오랜 시일이 걸렸어도 감히 께서 자기들의 직무 외의 일을 시킨다고 불평하거나 원망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 완성되자 천자天子께서 격려하는 글을 내리셨다.
5년에 기주冀州마보군도부서馬步軍都部署로 옮겼다.
이해에 강주방어사康州防禦使 용신위사상도지휘사龍神衛四廂都指揮使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봉일사상도지휘사捧日四廂都指揮使에 제수되었다.
6년에 시위친군보군도우후侍衛親軍步軍都虞候에 제수되어 직무를 맡기 위해 중앙中央으로 돌아왔다가, 또 환경로부도부서環慶路副都部署에 제수되었지만 취임하지 않았다.
8년에 병주幷州 대주代州 마보군부도부서馬步軍副都部署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전전도우후殿前都虞候에 제수되었다.
10년에 계주관찰사桂州觀察使 시위친군보군부도지휘사侍衛親軍步軍副都指揮使에 제수되어, 마군도지휘사馬軍都指揮使를 임시로 담당하였다.
모든 장수들이 옮겨갈 때와 군사들 가운데 말을 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 담당 관서에 요청하지 않고 가져갔는데 상주上奏하여 이를 중단하게 하였고, 부터 전해오는 관례에 각 군영軍營에서 말똥을 팔아 벌어들인 돈을 장수將帥가 쓰도록 바쳤는데, 께서 이를 중단시키고 각각 창고에 보관하여 군용軍用으로 쓸 수 있도록 대비하게 하였다.
명도明道 원년元年(1032)에 복주관찰사福州觀察使에 제수되었다.
군인軍人 가운데 내조內詔를 가지고 와서 군리軍吏가 되기를 요구하자,
께서 간쟁諫爭하기를 “군인軍人이 감히 내조內詔를 가지고 와서 군제軍制를 어지럽히면, 이후로 다시는 통솔할 수가 없게 될 것이고, 또한 군리軍吏 자리는 요구한다고 얻을 수 있게 해서는 안 되니, 그렇게 해서 얻게 되면 군인들이 반드시 크게 침모侵侮를 받게 될 것입니다.” 하였지만,
명숙태후明肅太后는 끝까지 군리軍吏 자리를 주려 하였고, 은 끝내 내조內詔를 받들지 않았는데 얼마 후 태후太后께서도 깨달으시어 마침내 간언諫言을 들어주셨다.
태후太后께서 붕어崩御하시자 담당 관서에서 위사衛士를 동원하여 경비警備하도록 청하였는데, 이 또 내조內詔를 받들지 않고 말씀하시기를 “부터 전해오는 관례慣例태후太后위사衛士들이 경비한 일에 없었습니다.” 하니,
이에 천자天子께서 마음속으로 을 현명하다고 생각하여 쓸 만한 인물이라고 여기셨는데,
태후궁太后宮에서 군리軍吏의 문제로 간쟁한 글을 열람해보시고는, 드디어 공을 검교태보檢校太保 첨서추밀원사簽署樞密院事에 제수하였다.
이에 고사固辭하기를 “무인武人이라 학문을 닦지 않아서 대임大任을 맡기에 부족합니다.” 하니, 천자天子께서 총애하는 환관宦官을 시켜서 에게 추밀원樞密院으로 출근하도록 재촉하였다.
조정朝廷에서 공의公議에 임하게 되면 의분에 불타서, 말씀하실 때에 후일에 받게 될 불이익을 고려하는 일이 없었고 친척이나 친구를 대할 때에도 모두 이치에 합당하게 하면서도 자애롭게 대하였다.
어떤 친구가 다른 사람을 위해 에게 벼슬을 주도록 청탁하자, 이 이 일을 성사시키면 사례금을 얼마를 받기로 하였는가 물으니, 친구가 말이 막혀서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공은 또한 이를 거부하지 않고 돌아와 집안사람을 시켜서 을 그에게 주며 말씀하시기를 “자네가 원하는 것이 여기에 있네.
벼슬자리는 내 개인 소유가 아니어서 줄 수가 없네.”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추밀부사樞密副使에 제수되었다.
3년에 명주봉국군절도관찰유후明州奉國軍節度觀察留後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에 제수되었다.
4년에 안덕군절도사安德軍節度使에 제수되었다.
5년에 검교태위檢校太尉 충선휘남원사充宣徽南院使에 제수되었다.
보원寶元 원년元年(1038)에 이원호李元昊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 일찍이 장수가 되어 변경邊境을 방어하게 해주기를 청하였으나, 천자께서 불허하시며 “나는 에게 계책計策을 도모하게 함이 옳다고 여긴다.” 하셨는데, 마침내 진무鎭撫하고 방어防禦하는 데 의 계책에 근거한 바가 많았다.
처음에 사람들 중에는 더러 위명威名이 천하에 소문이 났고, 외모外貌가 기이하게 빼어났으므로, 인신人臣이 아니라고 의심하기도 하였는데, 어사중승御史中丞 공도보孔道輔가 사람들의 여론輿論이 이와 같음을 근거로 대면서 이 기밀을 관장하며 황상皇上의 곁에 있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하니, 천자天子께서도 어쩔 수 없이 무령군절도사武寧軍節度使 서주대도독부장사徐州大都督府長史로 임명하여 본진本陣으로 부임하도록 하고, 손수 조서詔書를 내려 위로하며 보내주셨지만 말하는 자들이 오히려 모두 에 대한 비판을 그치지 않으니, 다시 우천우위상장군右千牛衛上將軍 지수주知隨州에 제수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을 위해 두려워하였지만, 빈객賓客의 접대만 중단했을 뿐 말이나 행동이 평시와 다름이 없었다.
조주曹州로 옮기셨을 때에, 어떤 사람이 음해陰害하던 공도보孔道輔가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이를 알리면서 “이 사람이 일찍이 을 음해했던 사람인데 이제 죽었습니다.” 하니, 공께서 슬픈 모습으로 “공중승孔中丞이 어찌 이 사람을 모해謀害하려 했겠소.
저 사람은 그의 마음속에 군주를 섬기는 일은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일 것이오.
애석하게도 조정에 충신 한 사람이 없어졌구려.” 하시니, 말해주었던 사람이 의 행동에 감동하여 있는 분이라고 여기고, 죽을 때까지 자신이 했던 말을 스스로 부끄럽게 여겼다.
조주曹州 사람들은 싸우기를 좋아하고 도둑이 많아서, 과거에는 감옥이 빌 날이 없었는데, 조주曹州에 부임하고부터는 일찍이 한 사람의 죄수도 감옥에 넣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경력慶曆 2년(1042)에 검교사공檢校司空 보정군절도사保靜軍節度使에 제수하고 천자天子께서 손수 쓰신 조서詔書에게 내려서 “에게 중요한 지역을 맡겼으니 부지런히 일을 처리하고, 사람들의 말 때문에 근심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중상中傷하는 자가 있다 해도 은 이를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하셨다.
거란契丹사신使臣 유육부劉六符전주澶州 땅을 지나게 되자 기뻐하며 말하기를 “육부六符의 소문을 들은 지 오래 되었는데 이곳에서 뵙게 되니 어찌 행운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이 고을에 대풍년이 들었으니 어찌 인정仁政을 베푼 효험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께서 사양하시기를 “명철明哲하신 천자天子께서 위에 계셔서 본시 늘 풍년이 드는 것이지, 이것이 어찌 나의 능력 때문이겠는가.
지금 조정朝廷에 두려워할 만한 현사賢士대부大夫가 많고, 나는 늙어서 이곳에서 자리만 채우고 있을 뿐이니, 이 손꼽아 헤아리기에는 부족합니다.” 하였다.
이해에 진정부등로眞定府等路주박마보군도부서駐泊馬步軍都部署로 옮겼다.
서울로 올라가서 황상皇上께 아뢸 일이 있음을 청하니, 천자天子께서 총애하는 환관宦官을 시켜서 이 들어와 알현謁見하도록 유시諭示하였고, 선휘남원사宣徽南院使 판성덕군判成德軍에 제수되자, 굳게 사양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미처 떠나기도 전에, 거란契丹에서 사신을 보내어 후주後周세종世宗이 빼앗았던 삼관三關의 옛 땅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면서 유주幽州계주薊州에 군사들을 집결시키고 변방邊方을 침범할 것 같은 기색을 보였다.
이에 판정주判定州 삼로도부서三路都部署로 옮겨 편의便宜에 따라 전권全權을 행사할 것을 허락하고, 양숭훈楊崇勳지성덕군知成德軍에 임명하였다.
양숭훈楊崇勳을 시켜서 에게 전쟁에 임하는 근본 자세에 대하여 물으니 은 “나는 인자仁慈하지 못함을 근심할 뿐이요 위엄威嚴이 없음은 근심하지 않고, 지혜롭지 못함을 근심할 뿐이요 이 없음은 근심하지 않소.
대체로 을 본 이후에야 승리를 결정할 수 있으니, 내가 전장戰場에서 어찌 승리를 예언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정주定州에 이르러 전투 훈련을 하면서 주고 주는 것을 분명하게 하였는데, 거란契丹첩자諜者를 시켜서 이를 엿보자, 어떤 사람이 이를 보고하면서 잡아 죽이도록 권하였다.
은 이를 불문에 붙이고 “내가 사졸士卒들을 보니 모두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이제 쓸 만하게 되었소.
첩자諜者가 돌아가서 이를 그의 군주에게 보고하게 한다면, 이는 그들의 군대를 굴복시켜서 싸우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오.” 하였다.
이튿날 교외에서 크게 열병閱兵을 할 적에 이 북채를 들고 북을 치면서 군사들과 준수해야 할 규칙을 약속하고, 나아가고 물러나고 앉고 일어나는 훈련을 하는데, 종일토록 〈군령의 위반자가 없어서〉 한 사람도 처벌한 일이 없이 마쳤다.
이에 명을 내리기를 “마른 양식을 갖추고 중군中軍의 북소리를 듣다가 장차 북소리가 끝나면 너희들이 출격하게 될 것이니, 오직 내가 하는 바에 따르라!” 하니, 거란契丹이 이를 듣고 크게 두려워하였다.
그리고 나서 천자天子께서 비밀히 조서詔書를 보내어 방략方略에 대하여 묻자, 이 글을 올려서 근세近世용병用兵에 실수가 있었던 점과, 을 헤아려 제압制壓 승리勝利할 수 있는 방략方略을 자상하게 갖추어 보고하였다.
그때에 전쟁 계획을 중단하고 지진주知陳州로 전임시켜, 임지任地로 가기 위해 도성을 지날 때에 천자天子께서 총애하는 환관을 시켜서 위로의 말씀을 내리시고, 에게 알현謁見을 원하는가 원하지 않는가를 물으셨다.
이 감사드리고 사양하면서 “변방을 방비하여 을 세우지 못했는데도 다행히 황상皇上의 은혜를 입어서 처형處刑을 면하고 내지內地으로 옮기게 되었으므로, 공적公的인 일로 마땅히 뵈올 일이 없으니, 감히 알현하지 않겠나이다.” 하셨다.
3년에 맹주孟州전임轉任되었다가 중앙中央으로 소환되어 서선휘원사署宣徽院事가 되었고, 그리고 나서 다시 판상주判相州로 나갔다.
6년에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판전주判澶州에 제수되었다.
7년에 정주鄭州전임轉任되었고, 기국공祁國公책봉冊封되었다.
8년에 소환되어 회령관사會靈觀使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검교태사檢校太師 판정주判鄭州에 제수되었다.
도성都城을 지날 때에 천자天子께서 불러 위로해주셨다.
황우皇祐 2년(1050)에 집경군절도사集慶軍節度使에 제수되고 승진하여 기국공冀國公에 책봉되었다.
3년에 연로年老함을 이유로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청하니, 칙명을 내려 태자태사太子太師치사致仕하도록 하고, 중대한 명절名節천자天子께서 여러 신하들과 조회朝會를 하게 되면, 이에 참여하여 중서문하中書門下반열班列에 앉도록 하였다.
위명威名은 늙으신 후에도 오히려 사방四方 오랑캐들의 두려워하는 바가 되었고, 천자天子께서도 을 현명한 분으로 여겨서 큰 일이 있으면 자문을 받아야 할 분으로 삼으셨다.
4년에 다시 억지로 복직復職시켜서 하양삼성절도사河陽三城節度使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판정주判鄭州로 삼았다.
6년에 드디어 추밀사樞密使가 되었다.
거란契丹사신使臣이 이르자 께서 그와 함께 활쏘기를 하셨는데, 사신使臣이 “남쪽 나라 조정에서 으로 추밀樞密을 관장하게 하고 부공富公으로 재상宰相을 삼은 것은 적임자를 임용한 것이라고 이를 만합니다.” 하니, 천자天子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에게 어궁御弓 하나와 화살 50개를 하사하는 은총을 내리셨다.
가우嘉祐 9년에 노국공魯國公으로 진봉進封되었다.
연로年老함을 이유로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청함이 6, 7차에 이르렀으나, 천자天子께서는 그만두게 할 수가 없다고 여기셔서 오히려 충무군절도사忠武軍節度使 경령궁사景靈宮使로 삼았다가, 다시 동군목제치사同群牧制置使로 삼으셨다.
칙명勅命으로 5일에 한 번씩 조회朝會에 참석하되 아들 한 사람이나 또는 손자 한 사람이 부축하도록 하였으니, 이해에 연세年歲가 78세였다.
이듬해 2월 신미일辛未日이 병환으로 하니, 천자天子께서 그의 저택에 친림親臨하시고 을 위해 하루 동안 조회朝會를 중단하였고, 또 그를 위해 소복素服을 입으시고 원중苑中에서 슬픔을 표하셨으며, 태위太尉 중서령中書令으로 추증追增되었음을 그의 저택에 가서 고하게 하시고, 다시 황금黃金수은水銀용뇌龍腦 등의 물자를 하사下賜하시며 나인內人을 내보내어 여러 아들들을 위무慰撫하게 하셨다.
께서는 충실忠實하고 화락和樂하고 평이平易하셔서 남에게 일을 맡겼으면 의심하는 일이 없었고, 작은 허물은 꾸짖는 일이 없었으며, 멀리서 바라보면 꿋꿋하셔서 감히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위엄威嚴이 있었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온화溫和하셨다.
평생 오락娛樂을 즐기는 일이 적었고, 당신當身명위名位가 높다 하여 남을 교만驕慢하게 대하는 일이 없었으며, 봉록俸祿이나 하사下賜받은 것들을 대부분 가까운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셨다.
군려軍旅를 잘 다스려서 관후寬厚하고 인자仁慈하게 사졸士卒들을 사랑하니, 사졸士卒들도 그분을 위해 목숨을 바쳐 진력盡力함을 즐겁게 여겼다.
사대부士大夫들과 교유할 적에 사대부士大夫들 또한 그분의 도량度量에 감복하여 허점을 엿볼 수 없다고 여겼다.
부인夫人 송씨宋氏무승군절도사武勝軍節度使 연악延渥의 따님인데, 여러 차례 책봉冊封되어 안정군부인安定郡夫人이 되었고, 보다 먼저 하였다.
그 후 아드님의 벼슬에 의거하여 영국부인英國夫人추봉追封되었으며, 효성孝誠자애慈愛공손恭遜검소儉素함으로 내조內助하였다.
아들 함희咸熙동두공봉관東頭供奉官으로 있다가 일찍 하였는데, 아들의 벼슬에 의거하여 여러 차례 추증追贈되어 우천우위장군右千牛衛將軍에 이르렀으며, 다음 아들 함융咸融서경좌장고사西京左藏庫使 과주단련사果州團練使이고, 다음 아들 함서咸庶내전숭반內殿崇班으로 있다가 일찍 하였고, 다음 아들 함영咸英공비고부사供備庫副使이며, 다음 아들 함강咸康내전승제內殿承制이다.
따님이 넷인데 맏딸은 상서가부낭중尙書駕部郎中 장숙첨張叔詹에게 출가出嫁하였고, 다음 따님들은 태상박사太常博士 정사공程嗣恭국자박사國子博士 구인寇諲 등에게 출가出嫁하였는데 모두 일찍 하였다.
손자孫子가 여덟인데, 은 모두 내전숭반內殿崇班 합문지후閤門祗候이고, 좌시금左侍禁이고, 좌반전직左班殿直이고, 우반전직右班殿直이며, 좌시금左侍禁이고, 은 아직 벼슬에 나가지 않았으며, 는 모두 일찍 하였다.
증손曾孫이 둘인데, 좌시금左侍禁이고, 는 아직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의 아드님들이 5월 갑신일甲申日로 날을 잡아 관성管城선산先山에 장례를 모셔서, 먼저 모셨던 영국부인英國夫人합장合葬하였고, 께서 역임歷任하셨던 관직官職하신 일들을 적은 사장事狀을 삼가 갖추어서, 고공考功태상太常이첩移牒하여 시호諡號를 의논하기를 청하고, 아울러 사관史館에 이첩하여 편록編錄하기를 청하였다.


역주
역주1 魯國公贈太尉中書令王公行狀 : 王公은 王德用을 지칭하며, 魯國公은 그의 封號이고, 太尉는 三公의 하나로 宰相級에 해당하는 관직이다.
역주2 蔣公邢公 : 王德用의 神道碑에 “曾祖父 諱 方은 蔣國公에 追封되었고, 祖父 諱 玄은 荊國公에 추봉되었다.[曾祖諱方 追封蔣國公 祖諱玄 追封邢國公]” 한 것으로 보아, 曾祖父 蔣國公과 祖父 邢國公을 지칭한다.
역주3 武康公 : 河西軍節度使 殿前都虞候를 歷任했던 王超를 지칭하며, 諡號가 武康이므로 武康公이라 칭한 것이다.
역주4 副都頭 : 武官職으로 副司令官을 지칭한다.
역주5 巡檢提擧捉賊 : 士兵을 統轄하고 地方의 치안과 도둑의 체포를 담당하는 관직이다.
역주6 散虞候 : 散祗侯의 誤記인 듯하다. 《宋史》 〈職官志〉 및 〈兵志〉의 어느 곳에도 散虞候는 없다. 《宋史》 〈職官志〉에 “騎軍에는 殿前指揮使, 內殿直, 散員, 散指揮, 散都頭, 散祗候를 두었다.[騎軍有殿前指揮使 內殿直 散員 散指揮 散都頭 散祗候]”라고 되어 있다.
역주7 都虞候 : 侍衛馬步親軍司의 副司令官이다.
역주8 康信軍 : 廣信軍의 誤記이다. ‘神道碑’ 및 〈本傳〉에 모두 廣信軍으로 記載되어 있고, 宋代에 康信軍은 설치된 일이 없다.
역주9 四廂都指揮使 : 宋代에 捧日軍과 天武軍을 左廂과 右廂으로 나누었는데, 이 두 부대의 都指揮使가 四廂都指揮使로, 실권이 없는 虛銜이었다.
역주10 軍人挾內詔 求爲軍吏 : 內詔는 外朝를 거치지 않고 宮中에서 직접 내려보낸 詔書이고, 軍吏는 軍中의 將帥를 보좌하는 官員이다.
역주11 明肅太后 : 眞宗의 皇后로서, 眞宗이 병약해진 말년부터 어린 仁宗이 즉위한 이후까지 11년간 국정을 垂簾聽政하였다.
역주12 中貴人 : 帝王의 寵愛를 받아 顯貴한 지위에 오른 宦官을 지칭한다.
역주13 狀貌奇偉 : 王德用의 象이 宋을 建國한 太祖 趙匡胤을 닮았으므로 帝王의 象을 타고난 것으로 본 것이다.
역주14 會靈觀使 : 會靈觀使는 宮觀使의 一員이다. 眞宗代에 궁관사를 설치하고 宰相 등 官位가 높은 사람을 임명하여 예우하였다. 會靈觀은 輯禧觀의 舊名이다.
역주15 大朝會 : 冬至나 元旦 같은 중대한 節日에 天子가 王臣들과 성대한 잔치를 여는 것을 말한다.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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