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지고儂智高反광남廣南하야 攻破諸주장州에 주장州將之以義死者二人이니 而강주康州조군趙君은 余嘗知其爲賢者也라
君用叔祖蔭하야 시장작감주부試將作監主簿하고 選허주許州양적현陽翟縣시장작감주부主簿와 담주潭州사법참군司法參軍하다
數以公事抗전운사轉運使하야 連劾奏君호되 而주장州將爲君訟於朝하야 以故得無坐하다
用擧者爲온주溫州낙청현령樂淸縣令하고 又用擧者就除영해군절도추관寧海軍節度推官이라가 지사知구주衢州강산현江山縣하다
斷治出己하야 當於民心하고 而吏不能得民一錢하니 棄物道上호되 人無敢取者러라
余嘗至구주衢州러니 而君之去江山이 蓋已久矣로되 구주衢人尙思君之所爲하야 而稱說之不容口러라
又用擧者改
대리시승大理寺丞이라가 지사知서주徐州팽성현彭城縣하고 祀
恩
으로 改
라가 移
지사知강주康州하다
至二月하야 而농지고儂智高來攻이어늘 君悉其卒三百以戰하니 농지고智高爲之少却하다
至夜하야 君顧夫人取州印佩之하고 使負其子以匿曰 明日賊必大至리니 吾知不敵이라 然不可以去니
明日에 戰不勝하야 遂抗賊以死하니 於是에 君年四十二러라
병마감압兵馬監押마귀馬貴者 與卒三百人亦皆死하고 而無一人亡者러라
初에 君戰時에 마귀馬貴惶擾하야 至不能食飮호되 君獨飽如平時하다 至夜하야 마귀貴臥不能著寢호되 君卽大鼾이라가 比明而後寤하다
君死之後二日에 而州사리참군司理담필譚必始爲之棺斂하고 又百日에 而君弟至하야 遂護其喪歸葬하다
至江山하니 江山之人이 老幼相携扶祭哭하고 其迎君喪이 有數百里者러라
而강주康州之人도 亦請於安안무사撫使하야 而爲君置屋以祠하니
安안무사撫使以君之윤주녹사참군사事聞天子하니 贈君광록소경光祿少卿하고 우시금관官其一子근覲우시금관右侍禁官하며 其弟子시장작감주부試將作監主簿하고 又以其弟윤주녹사참군사潤州錄事參軍師를 陟爲대리시승大理寺丞이라가 첨서판관청공사簽書태주군사泰州軍事첨서판관청공사判官廳公事하다
君諱사단師旦이요 자字잠숙潛叔이니 其先은 단주單州之成武人이라
曾祖諱
성晟이니 贈
태사太師요 祖諱
화和니 으로 贈
광록소경光祿少卿이요 考諱
응언應言이니 태상박사太常博士로 贈
상서비부낭중尙書屯田
상서비부낭중郞中이라
自君之祖로 始去성무成武하야 而葬초주楚州之산양山陽이라 故今爲산양山陽人이라
而君弟以
五年正月十六日
에 葬君
산양山陽상향上鄕인화仁和之原
하니 於是
에 夫人
왕씨王氏亦卒矣
라 遂擧其喪以祔
하다
이 글은 가을 물처럼 맑아서 한 움큼 움켜 마실 만하다.
농지고儂智高가 광남廣南에서 반란을 일으켜 여러 고을을 공격하여 함락시켰을 때에, 주장州將으로 절의節義를 지키다가 사망한 사람이 둘 있는데, 그 가운데 강주康州의 주장州將이었던 조군趙君은 내가 일찍부터 어진 분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군君은 숙부叔父의 벼슬 은덕으로 음보蔭補로 시장작감주부試將作監主簿가 되었다가, 허주許州 양적현陽翟縣 주부主簿와 담주潭州 사법참군司法參軍에 선발되었다.
여러 차례 공적公的인 일로 전운사轉運使와 대립하게 되니, 전운사가 연이어 군君을 탄핵하는 글을 올렸지만, 주장州將이 군君을 위하여 조정에 변호해주어서, 이 때문에 죄에 걸리지 않을 수 있었다.
천거하는 사람이 있어서 온주溫州 낙청현령樂淸縣令에 임용되었다가, 또 추천하는 자가 있어서 영해군절도추관寧海軍節度推官으로 취임하였고, 구주衢州 강산현江山縣의 지사知事가 되었다.
그에게서 나온 판단과 다스림은 민심民心에 합당하였고, 관리들이 백성으로부터 일전一錢도 취하지 못하게 하니, 길가에 물건을 버려두어도 감히 가져가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내가 과거 구주衢州를 방문하였을 때에는 군君이 구주衢州의 강산江山을 떠난 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도, 구주衢州 사람들이 아직도 군君이 행한 일을 생각하여 칭찬하는 말이 입에서 끊이지 않았다.
또 추천하는 사람이 있어서 대리시승大理寺丞으로 옮겼다가, 서주徐州 팽성현彭城縣의 지사知事가 되었었는데, 천자天子께서 명당明堂에서 제사를 지내시며 은전恩典을 베푸셔서, 태자우찬선대부太子右贊善大夫로 옮겨주었다가, 강주康州의 지사知事로 전임되었다.
2월에 이르러 농지고儂智高가 강주康州를 침공하자, 군君이 군졸 300명을 모두 영솔하고 맞서 싸우니, 농지고儂智高가 그 때문에 약간 퇴각하였다.
밤이 되자 주인州印을 찾아 패용佩用하고 부인夫人에게 자식을 업고 피하도록 하고 이르기를 “내일 적敵이 반드시 크게 침공해 올 것인데, 내가 맞서 이길 수 없음을 알지만 물러날 수가 없소.
그대마저 여기에 남아서 죽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오.” 하였다.
이튿날 전쟁에 이기지 못하고 적과 맞서 싸우다가 전사하니, 이때에 군君의 연세가 42세였다.
병마감압兵馬監押 마귀馬貴라는 사람도 군졸 300인과 함께 또한 전사하였고, 군졸들 가운데 한 사람도 살려고 도망간 사람이 없었다.
처음 군君이 전투를 할 때에 마귀馬貴는 당황하여 음식을 먹지 못하였으나, 군君은 홀로 평시와 다름없이 배불리 먹었고, 밤이 되자 마귀馬貴는 누워서도 잠을 이루지 못하였으나, 군君은 즉시 코를 크게 골고 자다가 날이 밝을 때에 이르러서야 깨었다.
대저 죽고 사는 것이 또한 큰 일인데도 군君이 이에 대처함이 이와 같이 대범했던 것이다.
그가 의리와 운명에 합당하게 대처한 것은, 천명天命을 편안한 마음으로 따를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이를 수 있다.
군君이 사망한 이틀 후에 주州의 사리참군司理參軍 담필譚必이 시신屍身을 거두어 입관入棺하고, 다시 100일이 지나 군君의 아우가 이르러서, 드디어 그 시신屍身을 모시고 돌아가서 하장下葬할 수 있었다.
상여喪輿가 강산江山에 이르자 강산江山에 사는 사람들이 늙은이 어린이를 가릴 것 없이 서로 이끌고 부축하고 와서 제사에 참여하며 곡哭을 하였고, 군君의 상여喪輿를 맞이하는 사람들이 수백數百 이里에 뻗쳐 있었다.
그 후 강주康州 사람들이 또 군君을 위해 사당祠堂을 짓고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해달라고 안무사按撫使에게 요청하였다.
이에 안무사按撫使가 군君의 일을 천자天子께 보고하니, 군君에게 광록소경光祿少卿을 추증追贈하고, 그의 외아들 근覲에게 우시금관右侍禁官의 벼슬을 주고, 그 아우의 아들을 시장작감주부試將作監主簿로 삼고, 또 그의 아우를 윤주녹사참군사潤州錄事參軍師에서 대리시승大理寺丞으로 올려주었으며, 태주군사泰州軍事의 첨서판관청공사簽書判官廳公事에 임명하였다.
군君의 휘諱는 사단師旦이고, 자字는 잠숙潛叔이니, 그 선조先祖는 단주單州의 성무현인成武縣人이었다.
증조曾祖 휘諱 성晟은 태사太師에 추증追贈되었고, 조고祖考 휘諱 화和는 상서비부낭중尙書比部郞中으로 광록소경光祿少卿에 추증追贈되었으며, 부친父親의 휘諱는 응언應言이니, 태상박사太常博士로 상서둔전낭중尙書屯田郎中에 추증追贈되었다.
군君의 조부祖父 대代부터 비로소 성무成武를 떠나서 초주楚州의 산양山陽에 안장安葬하였으므로 지금은 산양인山陽人이 된 것이다.
군君의 아우가 가우嘉祐 5년(1060) 정월 16일에 군君을 산양山陽 상향上鄕 인화仁和의 언덕에 안장安葬하였는데, 이때에 부인夫人 왕씨王氏도 졸卒하였으므로 상례喪禮를 치르고 합장合葬하였다.
화禍를 입지 아니하고, 때가 이르면 공功을 세울 수 있었도다.
군君이 편안하고 영광되게 죽은 것은, 주변을 둘러보아도 다른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었도다.
누가 그 죽음을 보기를, 고상하게 여겨 의심하지 않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