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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王安石(1)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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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思周匝而亦巉畫
晉陵 治信之明年 皇祐二年也 姦彊帖柔하고 隱詘發舒하니 旣政大行하야 得以寧息하니라
夏六月乙亥 大水어늘 徙囚於高獄하고 命百隷戒하야 不共有常誅러니
夜漏半 水破城滅府寺하고 苞民廬居
公趨譙門하야 坐其下하야 敕吏士以桴收民하니 鰥孤老癃與所徙之囚 咸得不死하니라
丙子 水降이어늘 公從賓佐按行隱度하고
符縣調富民水之所不至者하야 夫錢戶七百八十六하고 收佛寺之積材一千一百三十有二 不足하니
則前此公所命富民出粟以賙貧民者 二十三人이라
自言曰 食新矣하야 賙可以已 願輸粟直하야 以佐材費호리이다하다
七月甲午 募人하야 城水之所入하고 垣群府之缺하며 하고 立司理之獄하며 營州之西北亢爽之墟하야 以宅屯駐之師하고 除其故營하야 以時敎士刺伐坐作之法하니 故所無也러라
作驛曰饒陽이요 作宅曰廻車 築二亭於南門之外하야
하야 以通車徒之道하다
築一亭於州門之左하야 曰宴月吉하니 所以屬賓也
凡爲梁一이요 爲城垣九千尺이요 爲屋八이니 以楹數之 得五百五十二 自七月九日하야 卒九月七日하니 爲日이요 爲夫一萬一千四百二十五
中家以下 見城郭室屋之完이나 而不知材之所出하고 見徒之合散호되 而不見役使之及已러라
凡故之所有必具하고 其所無也 迺今有之호되 故其經費 卒不出縣官之給하니
公所以捄災補敗之政 如此하니 其賢於世吏遠矣로다
今州縣之災相屬이나 民未病災也 且有治災之政出焉일새라
施舍之不適하고 裒取之不中하야 元姦宿豪 舞手以乘民이면 而民始病하고 病極矣 吏乃始謷然自喜 民相與誹且笑之而不知也
吏而不知爲政하야 其重困民 多如此하니 此予所以哀民하고 而閔吏之不學也니라
由是而言하면 則爲公之民 不幸而遇害災 其亦庶乎無憾矣리라
十月 二十日 臨川 王某하노라


07. 신주信州재건再建을 기록한
생각이 광범廣範하면서도 또한 준엄峻嚴하다.
진릉晉陵 장공張公께서 신주信州를 다스린 지 2년째 되는 해가 황우皇祐 2인데, 간교奸巧하고 억센 사람들도 을 신뢰하여 유순柔順하게 순종順從하게 되었고, 물러나 숨어 있던 사람들도 나타나 활동하게 되었으며, 교화敎化가 크게 행해지니 백성들은 이 때문에 편안하게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여름 6월 을해일乙亥日(20일)에 큰 홍수洪水가 나자, 죄수罪囚들을 높은 땅에 있는 감옥으로 옮기고, 여러 아전衙前들에게 경계를 철저히 하도록 명하여 공손하게 따르지 않는 사람은 규정대로 징치懲治하도록 하였다.
한밤이 되자 물이 을 파괴하고 관부官府를 무너뜨리고 백성들의 거주지도 함몰시켰다.
이에 망루望樓로 달려가 그 아래에 앉아서 관리와 군사들을 독려督勵하여 뗏목으로 백성들을 구제하니, 홀아비, 고아, 늙은이, 수족을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환자 등과 옮겨 놓은 죄수들이 모두 죽음을 면할 수 있게 되었다.
병자일丙子日(21일)에 물이 빠지자 막료幕僚보좌관輔佐官들에게 순시巡視하며 조사하게 하고,
을 내려서 부자富者들 가운데 수해水害를 입지 않은 자들을 조사하여 786전화錢貨를 모으고, 불사佛寺에서 축적해 놓은 재목 1132을 모아 구휼救恤에 썼으나 이것으로는 부족하였고,
이보다 앞서 부민富民에게 하여 곡식을 내어 빈민貧民을 구휼하도록 한 사람이 23인이었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새로 난 곡식을 먹게 되어서 구제할 일을 그치게 되었으니, 곡식 값을 수송하여 이로써 수화水禍 복구의 자재를 구입할 비용에 보태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칠월七月 갑오일甲午日에는 사람들을 모집하여 물이 들어왔던 곳에 을 쌓고 관청의 허물어진 곳에는 담장을 쌓고, 감군監軍건물建物을 세워서 감옥監獄의 일을 처리하게 하고, 고을 군영軍營의 서북쪽 높고 넓은 땅은 주둔한 군대의 막사幕舍로 사용하게 하고, 과거의 군영軍營 건물은 없앴으며, 때에 맞추어 군사들에게 찌르고 치고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 전법戰法을 가르치니, 이전에는 시행하지 않았던 것들이었다.
을 지어 요양역饒陽驛이라 하고, 사택舍宅을 지어 회거택廻車宅이라 하고, 남문南門 밖에 두 정자亭子를 지어 왼쪽에 있는 것을 인정仁亭, 오른쪽에 있는 것을 지정智亭이라 하였으니, ‘지자요수知者樂水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는 말을 인용하여 물 가까이에 있는 것을 지정智亭, 산 가까이에 있는 것을 인정仁亭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배 42으로 배다리를 놓아서 두 정자 사이를 배다리를 통하여 운행하도록 하여 병거兵車보졸步卒들이 통행하는 길로 삼았다.
주문州門의 왼쪽에 한 정자亭子를 세워서 한 날에 연회를 베풀게 하였으니, 이로써 빈객賓客들과 함께 모이는 곳으로 삼은 것이다.
이를 모두 포괄하여 말한다면 교량橋梁 하나를 세우고, 과 담장 9천 척을 쌓았으며 건물 8동을 지었던 것이고, 기둥 수로 헤아린다면 552이 되는데, 7월 9일에 시작하여 9월 7일에 끝냈으니, 58일이 걸린 것이고, 인부 1만 1천 425명을 동원한 것이었다.
중등中等 이하以下가정家庭은 담장이나 건물이 온전한 집들은 재물의 출연과 관계가 없었고, 노역勞役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일을 당할 때에도 역사役事에 동원하여 부리는 일이 그들에게는 미치지 않았다.
과거에 있던 모든 건물들은 반드시 다 갖추어졌고, 과거에 없던 것들도 이제는 갖추어지게 되었으며, 그러므로 그 경비經費도 끝까지 조정朝廷의 공급에서 나온 것이 없었다.
재난災難을 구제하고 무너진 것을 보완한 정치가 이와 같을 수 있었던 원인은, 세상의 일반 관리들보다 현명賢明함이 원대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제 재난災難이 연잇고 있지만 백성들이 재난 때문에 곤핍困乏을 겪지 않게 된 것은, 또한 재난을 다스리는 정치가 출중함이 있기 때문이었다.
베푸는 것이 적합하지 않고 모아 거두어들이는 것이 알맞지 않으면, 크게 간악하고 불법不法을 자행하는 매우 한 무리들이 각종 수단을 동원하여 백성들을 속이고 능욕凌辱하는 짓을 하게 되어 백성들의 고통은 이에서 시작되며, 그 고통이 극에 달하면 관리들은 이에 비로소 오만하게 자신이 은덕을 베푸는 듯이 처리하지만, 백성들은 서로 더불어 비난非難하고 비웃으면서 알아주지를 않게 된다.
관리官吏가 되어서 올바른 정사政事를 알지 못하고 그들이 거듭 백성들을 괴롭힘이 이와 같이 많으니, 이것이 내가 백성들을 불쌍하게 여기고, 관리들이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을 근심하는 근본 이유인 것이다.
이런 점을 근거로 하여 말한다면, 의 백성이 된 사람들은 불행하게도 재해를 만나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또한 다행하게도 유감은 없을 것이니라.
10월 22일에 임천臨川 왕모王某를 지었노라.


역주
역주1 信州興造記 : 本 記는 皇祐 2年(1050) 10월 20일에 지은 것으로, 洪水를 겪은 信州城과 각종 건물을 重建하면서, 백성들에게 累를 끼치지 않은 知信州事 張鑄의 賢行을 讚美한 것이다. 信州는 現 江西省 上饒 西北에 위치했던 고을이다.
역주2 張公 : 張鑄를 稱한다. 네 고을의 知事를 역임하며 治績이 있었고, 벼슬이 光祿卿에 이르렀다. 왕안석이 그의 門下에서 修學한 일이 있으므로 公이라는 敬稱으로 부른 것이다.
역주3 考監軍之室 : 考는 建城을 의미한다. 監軍은 官名으로, 지방에 설치한 兵甲과 訓練을 담당한 기관이다.
역주4 左曰仁……山水之所附也 : 《論語》 〈雍也〉에 “지혜 있는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知者樂水 仁者樂山]”라 한 것을 亭子의 이름을 붙이는데 援用하여 亭子名을 智(知와 通)亭, 仁亭으로 하였다는 말이다.
역주5 梁四十有二 舟於兩亭之間 : 배 42隻으로 배다리를 놓아 두 亭子 사이를 통행하게 하였다는 뜻이다.
역주6 五十八 : 저본에는 ‘五十二’로 되어 있으나, 문맥을 살펴 바로잡았다.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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