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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王安石(2)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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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이라
君姓사씨謝氏경평景平이요 사재師宰
상서병부원외랑尙書兵部員外郞 지제고知制誥 양하공陽夏公 증예부상서贈禮部尙書태자빈객 태자빈객太子賓客 진류공陳留公 증예부상서贈禮部尙書之孫이요 태령군장서기泰寧태령군장서기掌書記 증상서이부시랑贈尙書吏部侍郞숭례崇禮之曾孫이라
以祖父蔭으로 라가 旣而 中進士第하야첨서숭신군절도판관청공사書崇信軍節度判官廳公事하고 감초주서하전반창監楚州西河轉般倉이라가첨서숭신군절도판관청공사비서승秘書丞하다
年三十三치평治平元年十二月庚申하다
윤씨尹氏 生男女四人호되 皆前死하다
其兄 以某年某月某日 葬君등주鄧州양현穰縣오롱산五隴山하다
사씨謝氏故家하남河南구지현緱氏러니 君六世祖仕오월국吳越이라 故自진류공陳留公以上三世항주부양富陽하고 至君始葬양하공陽夏公등주하야 爲穰人하니 而今以君祔葬하니라
君於忿不忮하고 於欲不求하니 雖學之力이나 亦其天性이라
故其孝弟忠信 寬柔遜讓 莊靜謹潔 稱於兒童이라
以至壯長하야 而成不充其志하고 施不盡其材하니 此學士대부大夫所以哀其死하야 而多爲之出涕也
然君문학文學政事言語 已能自達於一時 其於道德之意 性命之理 則求之而不至하고 聞矣而不疑 嗚呼
可謂賢已로다
銘曰
양하공陽夏四子 皆賢而材
季也早死하야 吾銘其埋러니
今又銘叔하니 嗚呼可哀로다
古之死者 以死爲息이나
嗟叔方剛이어늘 何愒之亟
昭昭者逝하고 嶷嶷者藏이라
爲識在斯하니 銘則不亡이라


02. 비서승을 지낸 사사재의 묘지명
법도에 맞는 글이다.
사씨謝氏이고, 경평景平이며, 사재師宰이다.
상서병부원외랑尙書兵部員外郞 지제고知制誥 양하공陽夏公 증예부상서贈禮部尙書 의 아드님이고, 태자빈객太子賓客 진류공陳留公 증예부상서贈禮部尙書 손자孫子이며, 태령군장서기泰寧軍掌書記 증상서이부시랑贈尙書吏部侍郞 숭례崇禮증손曾孫이다.
처음 조부祖父의 벼슬 덕으로 음보蔭補시비서성교서랑試秘書省校書郞 수장작감주부守將作監主簿가 되었다가, 그 후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여 첨서숭신군절도판관청공사簽書崇信軍節度判官廳公事가 되고 감초주서하전반창監楚州西河轉般倉이 되었다가, 여러 벼슬을 거쳐서 비서승秘書丞에 이르렀다.
나이 33세 되던 해인 치평治平 원년元年 12월 경신일庚申日하였다.
부인夫人윤씨尹氏이고 아들과 딸 4인을 낳았으나 모두 일찍 사망하였다.
그의 모년某年 모월某月 모일某日등주鄧州 양현穰縣 오롱산五隴山 남쪽에 안장安葬하였다.
사씨謝氏의 선조들은 하남河南 구지현緱氏縣에 살았는데, 의 6세조世祖오월국吳越國에서 벼슬한 일이 있으므로, 진류공陳留公으로부터 위로 3항주杭州부양富陽묘소墓所가 있고, 에 이르러 양하공陽夏公을 처음으로 등주鄧州안장安葬하여 양인穰人이 되었으므로, 이제 등주鄧州선산先山부장祔葬한 것이다.
은 분한 일을 당해도 원망하지 않았고, 욕심을 추구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비록 학문을 닦아서 이루어진 교양의 힘이라 할 수 있지만, 또한 그의 천성天性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효성孝誠, 공경恭敬, 충성忠誠, 신의信義와 너그러움, 부드러움, 겸손謙遜, 사양심辭讓心 및 점잖음, 조용함, 삼가함, 깨끗함 등은 어렸을 때부터 이미 칭송을 받았던 것이다.
장년壯年에 이르러서 성취成就한 일이 그의 뜻을 충족시키기에는 부족하였고, 맡아 시행한 일이 그의 재능을 다 발휘하기에는 부족하였으니, 바로 이것이 학사學士 대부大夫들이 의 죽음을 슬퍼하고, 많은 이들이 을 위해 눈물을 흘린 이유였다.
그러나 문학文學정사政事언어言語는 스스로 한 시대에 이룬 바가 있었고, 그가 도달한 도덕의 의의와 성명性命의 이치는 이제 추구하고자 해도 이를 수가 없고, 들어보면 의심할 것이 없으니, 아아!
현명한 분이라 이를 수 있을 뿐이로다.
은 다음과 같다.
양하공陽夏公의 네 아드님, 모두 현명하고 재능이 있었네.
막내 아드님이 일찍 사망하여, 내가 그의 무덤에 을 지어 부장附葬하였는데,
이제 또 셋째 아드님의 을 짓게 되었으니, 아아! 슬프도다.
옛말에, 죽는 것은 죽음으로 휴식을 취하는 것이라 하였으나,
아아! 셋째는 아직 강장强壯한 나이인데, 어찌 그다지도 빨리 쉬려 하였는가.
밝디밝았던 사람이 서거逝去하여, 우뚝하게 드높았던 사람이 유택幽宅에 잠들었네.
그를 위해 기록한 것이 여기에 있으니, 이 은 없어지지 않으리라.


역주
역주1 秘書丞謝師宰墓誌銘 : 墓誌銘 가운데 墓主가 治平 元年(1064) 12월 庚申(29)日에 卒했다 한 것으로 보아, 本 墓誌銘은 治平 2년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역주2 : 저본에는 ‘君’으로 되어 있는데, 《臨川集》에 근거하여 바로잡았다.
역주3 試秘書省校書郞 守將作監主簿 : 관직명 앞에 붙인 ‘試’는 정식이 아닌 임시직을 뜻하고, ‘守’는 낮은 품계에 있으면서 높은 품계가 맡을 직책을 담당함[位卑職高]을 표시한 것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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