石門者는 名山也니 古之人이 咸刻其觀遊之感槩하야 留之山中하고 其石相望이라
君至而爲亭하고 悉取古今之刻하야 立之亭中하고 而以書與其甥之壻王某하야 使記其作亭之意하니라
其亦憐夫人之刻이 暴剝偃踣而無所庇障하야 且泯滅乎아
廣大茂美하고 萬物附焉以生이로되 而不自以爲功者山也니 好山이 仁也라
去郊而適野하고 升高以遠望이면 其中必有槩然者하니 書不云乎아
夫環顧其身에 無可憂어늘 而憂者는 必在天下요 憂天下는 亦仁也니 人之否也敢自逸가
至卽深山長谷之民하야 與之相對하고 接而交言語하야 以求其疾憂면 有其壅而不聞者乎아
政不有小大히 不以德則民不化服하나니 民化服然後에 可以無訟이니 民不無訟이면 令其能休息無事하야 優遊以嬉乎아
古今之名者 其石幸在하고 其文信善이면 則其人之名與石이 且傳而不朽하야 成人之名而不奪其志도 亦仁也라 作亭之意 其然乎아
기록한 것이 비록 작은 일이지만, 이를 근거로 의론한 경지境地는 매우 중대重大하다.
석문정石門亭은 청전현靑田縣의 치소治所에서 몇 이里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데, 현령縣令이었던 주군朱君이 지은 것이다.
석문石門은 이름이 알려진 산山이고, 옛사람들이 모두 유람하고 느낀 감흥을 새겨서 산중에 남겨 놓아, 그 돌들이 서로 바라보며 늘어서 있다.
주군朱君이 부임하여 정자亭子를 세우면서 예부터 지금까지 새겨 놓은 글들을 모두 모아서 정자의 경내에 세워 놓고, 그의 생질서甥姪婿인 왕안석王安石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 정자를 세운 의의意義에 대한 기記를 짓게 하였다.
대저 정자亭子를 세우게 된 뜻이 다만 산山을 좋아해서였는가?
또한 유람遊覽하고 조망眺望하기에 좋아서였는가?
또한 여기에서 백성들의 고통과 근심을 알아보고자 해서였는가?
또한 이곳에서 스스로 휴식을 취하며 한가함을 누리고자 해서였는가?
또한 사람들이 새겨놓은 글들이 풍우風雨에 마멸磨滅되고 기울어지고 무너지는데도 비호庇護하여 막아줄 건물이 없어서 장차 없어져버릴 것을 염려해서였는가?
대저 사람이 사물事物에 대하여 좋아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하는 것은 반드시 그 사람의 성향性向과 일치하게 된다.
광대廣大한 장관壯觀이 성盛하게 펼쳐져 있고 만물萬物이 그에 의탁하여 삶을 영위하고 있는데도 스스로 자신의 공로功勞로 여기지 않는 것이 바로 산山이니, 이런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 바로 어진 사람이다.
시외市外의 들판으로 나아가 높은데 올라서 멀리 바라보게 되면 그 심중心中에 반드시 강개慷慨한 느낌을 갖게 되나니, 《서경書經》에 말하지 않았던가?
“내가 마음이 어지러워서 저 황야荒野에 은둔隱遁하고자 하노라.”라고!
“말에 멍에를 매어 수레를 타고 나가 유람하면서 나의 수심愁心을 풀으리라.”라고!
대저 그 자신을 돌아보아도 근심할 것이 없지만, 그런데도 근심을 하는 것은 반드시 천하天下를 걱정함이 있어서이고, 천하를 걱정하는 것은 어진 마음을 드러낸 것이니, 사람이 되어서 그렇게 하지 아니하고 감히 스스로 방자放恣하게 편안히 지낼 수 있겠는가?
이 정자亭子에 와서 깊은 산 긴 골짜기에 사는 백성들과 만나 그들과 서로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면서 그들의 고통과 근심을 찾는다면 그들과의 정이 막혀서 듣지 못하는 것이 있겠는가?
백성들의 고통과 근심을 해결해 주는 것 또한 어진 행동이다.
정사政事는 크던 작던 따질 것이 없이 덕德으로 처리하지 않으면 백성들을 교화敎化 순복順服시킬 수가 없고, 백성들이 교화敎化 순복順服하게 된 연후에야 쟁송爭訟이 없어지는데, 백성들이 쟁송爭訟하는 일이 없어지지 않으면 그들로 하여금 편안히 놀면서 즐기게 할 수가 있겠는가?
정자를 세운 현령縣令의 이름을 새겨 놓은 돌이 다행히 남아있고 거기에 쓰여진 글 또한 진실로 훌륭하니, 그 사람의 이름과 비석碑石이 장차 영원토록 전해져서 어질었다는 이름을 이루게 하고 그가 하고자 했던 뜻을 빼앗지 않는 것도 또한 어진 일이니, 정자를 건립한 뜻이 그런 데에 있었던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