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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王安石(2)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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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以虛景感慨起案하야 而誌特略하니 又一調也
임천臨川왕모王某曰 俗之壞久矣
自學士대부大夫多不能終其節이온 況女子乎
當是時하야 선거현僊居縣태군太君위씨魏氏 抱數歲之孤하고 專屋而閒선거현하야 躬爲桑麻以取衣食하며
窮苦困阨久矣로되 而無變志하니라
卒就其子以能有家하야 受封于朝하고 而爲里賢母하니
嗚呼
其可銘也로다
於其葬 爲序而銘焉하노라
序曰
위씨魏氏 其先江寧人이니
태군太君之曾祖諱某 광록시경光祿寺卿이요 祖諱某 지주자사池州刺史 考諱某 이니時也
이씨李氏國除유덕공諭德易名거중居中이라가 退거중상주常州러니
태군太君爲賢으로 而選所嫁할새강음江陰심군沈君諱某하고 曰 此可以與吾女矣라하다
於是時 태군太君年十九심씨沈氏하다
歸十年 生兩子하고심군沈君以進士甲科광덕군廣德軍판관判官以卒하다
태군太君親以시경논어論語효경孝經敎兩子하니 兩子就外學 時數歲耳로되 則已能誦此三시경러라
其後子爲進士하고전중승殿中丞이라가 연주군지주연주군지주連州軍연주군지주러니태군太君年六十有四 以終于연주군지주之正寢하니황우皇祐二年六月庚辰也
가우嘉祐二年十二月庚신항 兩子葬태군太君강음江陰신항申港之西회인리懷仁里하다
於是 태상박사太常博士라가 통판지사通判건주군建州軍건주군통판지사하니심군沈君贈官至태상박사太常博士하다
銘曰
山朝于躋인댄 其下惟谷이라
纘我박사博士 夫人之淑이라
其淑維何 博士其家
二子翼翼하야 萼跗其華
詵詵諸孫 其實其葩
孰云其昌
其始萌芽
皇有顯報하니 曰維在後
碩大蕃衍하야 刲牲以告
視銘考施하면 夫人之效


09. 선거현 태군 위씨의 묘지명
세속을 개탄하는 생각으로 글을 시작하여 실제의 사적事蹟은 특별히 간략하게 기술하였으니, 이 또한 문장을 짓는 격식의 하나이다.
임천臨川 왕모王某가 말하기를 “훌륭한 풍속이 무너진 지 오래되었도다.
학사學士 대부大夫들도 그 절의節義를 끝까지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데, 더구나 여자임에랴.” 하였었는데,
이때를 당하여 선거현僊居縣 태군太君 위씨魏氏가 아비를 잃은 두서너 살짜리 아이들을 안고 집안에서 홀로 지내면서 몸소 누에치고 길쌈해서 의식衣食을 해결하였고,
가난하고 고생스러운 곤액困厄을 오래 겪으면서도 수절守節할 뜻을 바꾼 일이 없었다.
끝내는 그 아들을 출세시켜서 가문家門을 일으킬 수 있었고, 조정朝廷으로부터 태군太君으로 책봉冊封을 받아 마을에서 현모賢母로 소문나게 되었다.
아아!
그런 분은 묘지명墓誌銘을 지어드릴 만하도다.
이에 그분을 하장下葬할 때에 를 짓고 을 썼노라.
는 다음과 같이 지었다.
위씨魏氏는 그 선조先祖강녕인江寧人이었다.
태군太君증조曾祖 광록시경光祿寺卿이었으며, 조부祖父 지주자사池州刺史였고, 선고先考 태자유덕太子諭德이었는데, 이들이 벼슬한 것은 모두 강남江南 땅을 이씨李氏가 세운 남당南唐이 다스릴 때였다.
이씨李氏남당南唐이 망하자 유덕공諭德公은 이름을 거중居中으로 바꾸고 상주常州로 은퇴하여 살았는데,
따님인 태군太君을 현명하다고 여기고 출가할 곳을 고르다가 강음江陰심군沈君 를 얻고는 말하기를 “이 사람이 내 딸과 짝이 될 만하다.” 하고,
이때에 19세 된 태군太君심씨沈氏에게 출가시켰다.
출가한 지 10년에 두 아들을 낳았고, 심군沈君진사시進士試갑과甲科로 급제하여 광덕군廣德軍판관判官으로 있다가 하였다.
태군太君은 《시경詩經》, 《논어論語》, 《효경孝經》 등을 두 아들에게 몸소 가르쳤으므로, 두 아들이 밖에 나가 공부할 때에 겨우 몇 살 되지 않았는데도 이미 이 삼경三經을 암송할 수 있었다.
그 후 아들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아들 전중승殿中丞으로 연주군지주連州軍知州가 되었는데, 태군太君께서 향년 64세로 연주부連州府정실正室에서 사망하니, 그때가 황우皇祐 2년(1050) 6월 경진일庚辰日이었다.
가우嘉祐 2년 12월 경신일庚申日에 두 아들이 태군太君강음江陰 신항申港의 서쪽 회인리懷仁里안장安葬하였다.
이때에 태상박사太常博士건주군建州軍통판지사通判知事로 있었으며, 선친先親 심군沈君도 벼슬이 증직贈職되어 태상박사太常博士에 이르렀다.
은 다음과 같이 지었다.
산에 향을 올리려 오르려면, 낮은 골짜기에서부터 시작해야지.
우리 집안이 박사博士를 계승한 것은 현숙賢淑부인夫人이었어라.
그 현숙함이 어떠하였기에, 그 집안에 박사가 연이었는가?
두 아들이 나란히 뛰어나서, 꽃받침에 꽃이 피듯 하였네.
많고 많은 여러 손자들은, 이미 그 꽃이 열매를 맺은 것이네.
누가 그 창성昌盛함만을 이르는가?
그것은 새싹에서 시작된 것이네.
황천皇天이 드날리게 보답함이 있다면, 그 후손에게 있을 것이로다.
이에 크게 번창하게 되었음을, 소와 양을 잡아서 제사를 올리며 아뢸 것이로다.
을 보고 베풀어진 은혜를 고찰한다면, 부인夫人의 덕택임을 알게 될 것이로다.


역주
역주1 僊居縣太君魏氏墓誌銘 : 本 墓誌銘의 墓主 魏氏는 殿中丞 沈遵의 母親으로, 嘉祐 2년(1057)에 下葬하였다고 하였으니 本文도 그즈음에 지은 것으로 보이며, 당시 作者가 魏氏가 거주했던 常州知事였으므로 이 글을 짓게 된 것으로 보인다.
역주2 太子諭德 : 官名으로 太子의 잘못을 諷諫하고 바로잡는 일을 담당하였다.
역주3 江南李氏 : 李昇이 세웠던 南唐으로, 五代十國 중의 한 나라였다.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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