當是時하야 선거현僊居縣태군太君위씨魏氏 抱數歲之孤하고 專屋而閒선거현居하야 躬爲桑麻以取衣食하며
卒就其子以能有家하야 受封于朝하고 而爲里賢母하니
태군太君之曾祖諱某
니 광록시경光祿寺卿이요 祖諱某
니 지주자사池州刺史요 考諱某
니 이니 皆
時也
라
이씨李氏國除에 而유덕공諭德易名거중居中이라가 退거중居于상주常州러니
以태군太君爲賢으로 而選所嫁할새 得강음江陰심군沈君諱某하고 曰 此可以與吾女矣라하다
歸十年에 生兩子하고 而심군沈君以進士甲科로 爲광덕군廣德軍판관判官以卒하다
태군太君親以시경詩논어論語효경孝經敎兩子하니 兩子就外學에 時數歲耳로되 則已能誦此三시경經矣러라
其後子형逈爲進士하고 子준遵爲전중승殿中丞이라가 연주군지주知연주군지주連州軍연주군지주州러니 而태군太君年六十有四로 以終于연주군지주州之正寢하니 時황우皇祐二年六月庚辰也라
가우嘉祐二年十二月庚신항申에 兩子葬태군太君강음江陰신항申港之西회인리懷仁里하다
於是에 준遵爲태상박사太常博士라가 통판지사通判건주군建州軍건주군州통판지사事하니 而심군沈君贈官至태상박사太常博士하다
세속을 개탄하는 생각으로 글을 시작하여 실제의 사적事蹟은 특별히 간략하게 기술하였으니, 이 또한 문장을 짓는 격식의 하나이다.
임천臨川 왕모王某가 말하기를 “훌륭한 풍속이 무너진 지 오래되었도다.
학사學士 대부大夫들도 그 절의節義를 끝까지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데, 더구나 여자임에랴.” 하였었는데,
이때를 당하여 선거현僊居縣 태군太君 위씨魏氏가 아비를 잃은 두서너 살짜리 아이들을 안고 집안에서 홀로 지내면서 몸소 누에치고 길쌈해서 의식衣食을 해결하였고,
가난하고 고생스러운 곤액困厄을 오래 겪으면서도 수절守節할 뜻을 바꾼 일이 없었다.
끝내는 그 아들을 출세시켜서 가문家門을 일으킬 수 있었고, 조정朝廷으로부터 태군太君으로 책봉冊封을 받아 마을에서 현모賢母로 소문나게 되었다.
이에 그분을 하장下葬할 때에 서序를 짓고 명銘을 썼노라.
태군太君의 증조曾祖 휘諱 모某는 광록시경光祿寺卿이었으며, 조부祖父 휘諱 모某는 지주자사池州刺史였고, 선고先考 휘諱 모某는 태자유덕太子諭德이었는데, 이들이 벼슬한 것은 모두 강남江南 땅을 이씨李氏가 세운 남당南唐이 다스릴 때였다.
이씨李氏의 남당南唐이 망하자 유덕공諭德公은 이름을 거중居中으로 바꾸고 상주常州로 은퇴하여 살았는데,
따님인 태군太君을 현명하다고 여기고 출가할 곳을 고르다가 강음江陰의 심군沈君 휘諱 모某를 얻고는 말하기를 “이 사람이 내 딸과 짝이 될 만하다.” 하고,
이때에 19세 된 태군太君을 심씨沈氏에게 출가시켰다.
출가한 지 10년에 두 아들을 낳았고, 심군沈君은 진사시進士試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여 광덕군廣德軍의 판관判官으로 있다가 졸卒하였다.
태군太君은 《시경詩經》, 《논어論語》, 《효경孝經》 등을 두 아들에게 몸소 가르쳤으므로, 두 아들이 밖에 나가 공부할 때에 겨우 몇 살 되지 않았는데도 이미 이 삼경三經을 암송할 수 있었다.
그 후 아들 형逈은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아들 준遵은 전중승殿中丞으로 연주군지주連州軍知州가 되었는데, 태군太君께서 향년 64세로 연주부連州府의 정실正室에서 사망하니, 그때가 황우皇祐 2년(1050) 6월 경진일庚辰日이었다.
가우嘉祐 2년 12월 경신일庚申日에 두 아들이 태군太君을 강음江陰 신항申港의 서쪽 회인리懷仁里에 안장安葬하였다.
이때에 준遵은 태상박사太常博士로 건주군建州軍의 통판지사通判知事로 있었으며, 선친先親 심군沈君도 벼슬이 증직贈職되어 태상박사太常博士에 이르렀다.
산에 향을 올리려 오르려면, 낮은 골짜기에서부터 시작해야지.
우리 집안이 박사博士를 계승한 것은 현숙賢淑한 부인夫人의 덕德이었어라.
그 현숙함이 어떠하였기에, 그 집안에 박사가 연이었는가?
두 아들이 나란히 뛰어나서, 꽃받침에 꽃이 피듯 하였네.
많고 많은 여러 손자들은, 이미 그 꽃이 열매를 맺은 것이네.
황천皇天이 드날리게 보답함이 있다면, 그 후손에게 있을 것이로다.
이에 크게 번창하게 되었음을, 소와 양을 잡아서 제사를 올리며 아뢸 것이로다.
이 명銘을 보고 베풀어진 은혜를 고찰한다면, 부인夫人의 덕택임을 알게 될 것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