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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현태군源縣太君하후씨夏侯氏는 제주濟州鉅野人
이니 상서가부원외랑尙書駕部員外郞諱
성晟之子
요 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 상서호부시랑尙書戶部侍郞諱
교嶠之孫
이요 贈
선원현태군太子
선원현태군太師諱
포浦之曾孫
이요 상서병부원외랑尙書兵部員外郞 지제고知制誥 지등주군주사知鄧州軍州事 양하공陽夏公之夫人
이요 태상박사太常博士 통판분주군주사通判汾州軍州事之母
라
年二十三卒하니 後五年에 葬항주杭州之부양富陽하다
於是時에 양하공陽夏公爲태상시승太常태상시승丞 秘閣校理하고 태상박사博士는 生五歲矣요 而其女兄一人도 亦幼러라
又十五年강정康定二年에 박사博士擧夫人如등주鄧하야 以合於양하공陽夏公之墓하니 而임천臨川왕모王某書其碣曰
夫人以順爲婦하고 而交族親以謹하며 以嚴爲母나 而撫媵御以寬하다
양하공陽夏公之名이 天下莫不聞하니 而曰 吾不以家爲恤이나 六年於此者는 夫人之相我也라하다
故於其卒에 聞者欲其有後러니 而夫人之子 果以才稱於世하니라
양하공陽夏公之事는 在太史하니 雖無刻石이라도 吾知其不朽矣로라
若夫夫人之善은 不有以表之隧上이면 其能與公之烈로 相久而傳乎아
하니 蓋其法度之敎非一日
이니 而其習俗不得不然也
라
及至後世하야 自當世所謂賢者 於其家不能以獨化어늘 而夫人卓然如此하니 惜乎라 其蚤世也여
顧其行治
컨대 雖列之於
하야 以爲後世觀
이라도 豈愧也哉
아
세계世系를 서술敍述한 것 이외에는 다만 자신의 생각만을 묘갈墓碣에 기록하였을 뿐이니, 이는 또한 묘갈문墓碣文의 변체變體라 하겠다.
선원현태군仙源縣太君 하후씨夏侯氏는 제주濟州 거야인巨野人이니, 상서가부원외랑尙書駕部員外郞 휘諱 성晟의 따님이고, 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 상서호부시랑尙書戶部侍郞 초공譙公 휘諱 교嶠의 손녀孫女이며, 증태자태사贈太子太師 휘諱 포浦의 증손녀曾孫女이고, 상서병부원외랑尙書兵部員外郞 지제고知制誥 지등주군주사知鄧州軍州事 양하공陽夏公 사씨謝氏인 휘諱 강絳의 부인夫人이며, 태상박사太常博士 통판분주군주사通判汾州軍州事 경초景初의 어머님이다.
23세에 졸卒하니, 5년 후에 항주杭州의 부양富陽에 하장下葬하였다.
이때에 양하공陽夏公은 태상시승太常寺丞 비각교리秘閣校理로 있었으며, 태상박사太常博士는 태어난 지 5년이 되었을 때이고, 그의 손위 누님도 또한 어렸다.
그 후 15년이 지난 강정康定 2년에 박사博士가 부인夫人을 등주鄧州로 이장移葬하여 양하공陽夏公의 묘墓에 합장合葬하였는데, 임천臨川 왕모王某는 그 묘갈墓碣에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부인夫人은 순종順從으로 아내 노릇을 하였고, 친족들을 성심으로 대하였으며, 어머니 노릇은 위엄威嚴 있게 하였으나 비첩婢妾들은 관대하게 감싸주었다.
양하공陽夏公은 명성名聲이 천하에 알려지지 않은 곳이 없게 되자, 말하기를 “나는 집안일에 마음을 쓰지 않았는데도 결혼 6년 만에 이렇게 된 것은 아내가 나를 잘 도와주어서 된 것이다.” 하였다.
그러므로 부인이 졸卒하자, 소문을 들은 이들이 그 후손이 잘되었으면 하고 바랐는데, 부인의 아들이 과연 재능이 있는 인물로 세상의 칭찬을 받게 되었다.
양하공陽夏公의 사적事績은 역사 기록에 수록되었으므로, 비록 비석碑石에 새겨놓지 않는다 해도, 영원히 전해질 것임을 나는 안다.
그러나 부인夫人의 선행善行을 만약 묘도墓道에 새겨서 세워놓지 않는다면, 공公의 업적과 함께 영구히 전해질 수 있겠는가?
바로 이것이 박사博士가 나에게 묘갈문墓碣文 지어주기를 부탁한 이유인 것이다.
내가 《시경詩經》을 읽어보니, 주周나라 사대부士大夫와 후侯 및 공公의 부인夫人들이 몸을 수양修養하고 행동을 신칙申飭하여 예법禮法에 맞게 처신하고 그들의 부군夫君을 보좌하고 권면勸勉할 수 있었으므로, 왕도王道가 이에 힘입어서 이룩될 수 있었던 것이고, 대체로 그 법도法度의 교화敎化가 하루 이틀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으니, 그 습속習俗이 그렇게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후세後世에 이르러 이른바 현자賢者라는 사람들도 수신修身을 잘하여 그 집안을 교화敎化시키는 일이 없게 되었는데, 부인夫人만은 우뚝하게 뛰어남이 이와 같았으니, 그런 분이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이 애석할 뿐이다.
그분의 행실行實과 사적事績을 고찰해보건대, 비록 이를 《시경詩經》의 〈주남周南〉, 〈소남召南〉 속에 나열羅列하여, 후세後世의 귀감龜鑑으로 삼는다 해도, 어찌 부끄러울 것이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