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姓심씨沈氏요 諱구遘요 자字문통文通이니 世爲항주杭州錢塘人이라
曾祖諱某
니 皇贈
병부상서兵部尙書요 祖諱某
니 皇贈
이부상서吏部尙書요 父
부扶는 今爲
병부상서尙書이라
公初以祖廕補교사재랑郊社齋郞이라가 擧進士하고 於廷中爲第一이나 大臣疑已仕者는 例不得爲第一이라 故以爲第二하다
除대리평사大理評事하고 강녕부통판通判강녕부통판江寧府하니 當是時하야 公年二十이라 人吏少公이나 而公所爲卓越하야 已足以動人이나
祀
에 恩遷
비서성저작좌랑秘書省著作佐郞이라가 歲滿召歸
하야 除
태상승太常丞 집현교리集賢校理 판등문고원判登聞鼓院 하고 이라가 又
판도리흠判都理欠 빙유사憑由司하니 於是
에 집현교리校理八年矣
라
平居閉門하야 雖執政이라도 非公事면 不輒見也라 故雖執政이라도 初亦莫知其爲材러라
동수기거주居久之에 乃始以동수기거주同修起居注로 召시지제고試知制誥러니 及爲시지제고制誥하야 遂以문학文學稱天下하다
김부군金部君坐免歸에 求월주지사知월주지사越州하고 又移월주지사知항주지사杭州하야 鉏治姦蠹하고 所禁無不改하며 崇獎賢월주지사知하야 得其歡心하니 兩월주지사州人皆畫像祠之하니라
영종英宗卽位
하사 召還
하야 에 兼
제거提擧兵吏司封官告
집현원판사院하고 兼
집현원판사判집현원판사集賢院하야 廷見勞問甚悉
하다
심공公初至에 개봉開封指以相告曰 항주지사杭州심공沈公也라하더니 攝항주지사事에 吏皆屛息이러라
旣而오 以지심관원知審官院으로 遂以용도각직학사龍圖閣直學士권지개봉부權知開封府하다
公旦晝視事라가 日中則庭無留人하고 出謝諸客하야 從容笑語하니
客皆怪公獨有餘日호되 而畿內翕然稱治하고 人人如公坐視其左右러라
於是에 名實暴耀振發하야 賢臨一時하니 自天子大臣으로 皆論以爲國之器하고 而閭巷之士奔走談說하야 讙呼鼓舞하야 以不及爲恐이러라
明日에 除한림학사翰林學士 지제고知制誥하야 충군목사充群牧使하고 兼권판이부유내전權判吏部流內銓 판상서예부判尙書禮部하다
公雖去
개봉開封이나 然皆以爲朝夕且大用矣 而遭母夫人喪以去
하다 영종英宗聞公去
하고 尤悼惜
하야 하시고 而以
김부군金部君지소주知蘇州하시다
公居喪致哀하야 寢食如禮러니 以某年某月에 得疾항주杭州之墓次하야 某日至소주蘇州라가 而以某日卒하니 年四十有三이러라
三男子六女하니 中男공사恭嗣는 後公六日卒하고 융사隆嗣정사廷嗣與六女는 皆尙幼하다
우간의대부夫人육씨陸氏는 封안정군군安定郡君하고 公산관조산대부官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산관조산대부散官朝散大夫요 勳경거도위輕車都尉요 爵장안현개국백長安縣開國伯으로 食邑八百戶라
公平居不常視書호되 而文辭敏麗可喜하고 强記精識하야 長於議論하니 世所謂老師宿學無所不讀하고 通於世務者라도 皆莫能屈也러라
與人甚簡하야 而察其能否賢不肖尤詳하야 視遇之各盡其理러라
爲政號爲嚴明호되 而時有所縱舍하고 於善良貧弱에 撫恤之尤至하다
在항주지사杭州에 待使客多所闊略이나 而항주지사州人之貧無以葬及女子失怙恃而無以嫁者는 以公使錢葬嫁之 凡數百人이니 於其卒에 항주지사知與不항주지사知 皆爲之歎惜이러라
공公의 성姓은 심씨沈氏이고, 휘諱는 구遘이며, 자字는 문통文通이니, 대대代代로 항주杭州 전당인錢塘人이었다.
증조曾祖는 휘諱 모某로서 병부상서兵部尙書에 증직贈職되었고, 조祖는 휘諱 모某로서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증직贈職되었으며, 부父는 휘諱 부扶로서 현재 상서금부원외랑尙書金部員外郞이다.
공公은 처음 조부祖父의 공덕으로 교사재랑郊社齋郞에 음보蔭補되었다가,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정시廷試에도 제일第一로 합격하였으나, 이미 벼슬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관례상 1등等을 줄 수 없다고 대신大臣이 이의異議를 제기하였으므로 2등等이 되었다.
대리평사大理評事에 제수除授되고 강녕부통판江寧府通判이 되었는데, 이때에 공公의 나이가 20세에 불과하였으므로 하급관리들이 공公을 어리다고 깔보았는데, 공公의 업무처리가 탁월卓越하여 이로써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공公이 과연 어떤 일을 하였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
명당明堂에서 제사祭祀를 지낼 때에 은전恩典을 내려서 비서성저작좌랑秘書省著作佐郞으로 옮겼다가, 만기滿期를 채운 후 불러들여서 태상승太常丞 집현교리集賢校理 판등문고원判登聞鼓院 이부남조吏部南曹를 제수하였고, 권삼사도지판관權三司度支判官이 되었다가 다시 판도리흠判都理欠 빙유사憑由司가 되었으니, 이에 교리校理를 8년이나 지냈다.
평소에 문을 닫고 지내며 비록 집정자執政者라 해도 공적公的인 일이 아니면 만나지를 않았으므로, 집정자라 해도 처음에는 그의 재능을 알 수가 없었다.
오래 지나서 비로소 동수기거주同修起居注로서 시지제고試知制誥로 소환되었다가, 제고制誥가 됨에 이르러서야 드디어 문학文學으로 천하에 칭송을 받게 되었다.
김부군金部君께서 어떤 사건에 연좌되어 면직되어 돌아가니 월주지사越州知事가 되기를 청하였고, 다시 항주지사杭州知事로 옮겼는데, 간악奸惡하게 남의 재물을 침탈侵奪하는 자들을 가려내어 다스리고 금법禁法을 고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현명賢明하고 지혜智慧 있는 사람들을 추숭追崇하고 포장襃獎하여 그 고을 사람들의 환심歡心을 사니, 두 고을 사람들이 모두 공公의 초상화肖像畵를 그려 모시고 제사祭祀를 지내고 있다.
영종英宗께서 즉위卽位하시자 중앙으로 불러들여서 삼반원三班院의 구당句當에 군사軍事와 관리官吏와 봉증封贈을 관리하는 관고원官告院의 제거提擧를 겸하게 하였고, 아울러 집현원판사集賢院判事도 겸하게 하면서 천자天子께서 인견引見하시며 위로하고 묻기를 매우 자상하게 하셨다.
1개월이 지나자 권발견개봉부사權發遣開封府事가 되었다.
공公이 처음 수도首都에 이르자, 개봉開封 사람들이 그를 가리키며 서로 고하기를 “이분이 항주지사杭州知事로 있던 심공沈公이다.” 하였는데, 직무를 처리하자 관리들이 모두 숨을 죽이고 긴장하였다.
그 후 지심관원知審官院에서 용도각직학사龍圖閣直學士 권지개봉부權知開封府가 되었다.
공公은 아침 일찍부터 한낮까지 직무를 보고, 정오가 되면 관부官府의 뜰에 남아 있는 사람이 없게 하고, 나가서 여러 빈객들을 응대하여 조용히 담소를 나누었다.
빈객들이 공公이 유독 여유가 있음을 괴이하게 여겼으나, 기내畿內의 모든 이들이 흡연翕然히 잘 다스림을 칭찬하였고, 관리들마다 마치 공公이 그들의 곁에 앉아서 감시하는 것처럼 여겨 직무에 충실하였다.
이에 명성과 실적이 밝게 드러나고 크게 떨치게 되었으며, 어진 분이 한 시대를 굽어보고 있다고 여겨서, 천자天子로부터 대신大臣들까지 모두 나라를 다스릴 큰 인물로 여기고, 민간民間의 선비들은 달려와서 담론하고 고무되어 환호하면서, 그런 분을 만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그때 마침 모부인母夫人이 질병에 걸리자, 동남東南 지방의 한 고을을 맡아서 병환을 보살필 수 있게 해주기를 청하니,
영종英宗께서 말씀하시기를 “학사學士를 어찌 조정朝廷에서 떠나게 할 수 있겠는가?” 하시고,
이튿날 한림학사翰林學士 지제고知制誥를 제수하시고, 충군목사充群牧使 겸兼 권판이부유내전權判吏部流內銓 판상서예부判尙書禮部를 제수하였다.
공公이 비록 개봉開封에서 떠난다 해도, 가까운 시일 안에 장차 크게 쓰이게 될 것이라고 모두들 생각하였는데, 모부인母夫人의 상喪을 당하여 떠나게 되니, 영종英宗께서 공公이 떠났음을 들으시고 매우 애석해하시면서 특별히 사자使者를 보내어 추가로 황금 100냥兩을 하사下賜하시고, 김부군金部君 지소주知蘇州를 제수하셨다.
공公이 상주喪主 노릇하면서 지극히 슬퍼하여 침식寢食을 예법禮法대로 하였는데, 모년某年 모월某月에 항주杭州의 묘소墓所에 머물다가 병病을 얻어서, 모일某日에 소주蘇州에 이르렀다가, 모일某日에 졸卒하니 향년享年이 43세였다.
아들 셋에 딸 여섯을 두었는데, 둘째아들 공사恭嗣는 공公이 졸卒한 지 6일 만에 졸卒하였고, 아들 융사隆嗣와 정사廷嗣 및 여섯 딸들은 모두 아직 어리다.
부인夫人 육씨陸氏는 안정군군安定郡君에 봉封해졌고, 공公의 벼슬은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산관조산대부散官朝散大夫에 이르렀으며, 훈勳은 경거도위輕車都尉이고 작爵은 장안현개국백長安縣開國伯으로 식읍食邑이 800호戶였다.
공公은 평소에 항상 책을 읽지는 않았지만, 문장을 짓게 되면 민첩하고 아름다워서 볼 만하였으며, 읽은 것을 잘 기억하고 정확하게 알고 있으면서 의론議論에 익숙하니, 세상의 이른바 노련한 선생이나 오랜 기간 학문을 연구한 사람으로 세상 일에 정통한 사람들도 모두 그의 논리를 꺾을 수가 없었다.
사람을 매우 잘 가려 쓸 줄 알아서, 그 사람이 잘하는 일과 잘못하는 일, 현명함과 불초함을 매우 자세하게 살펴서 쓰고, 그들을 대우함이 각기 그 정도에 합당하게 하였다.
정무政務를 처리함이 엄격 분명하다고 이름이 났으나 때로는 너그럽게 풀어주기도 하였으며, 가난하고 약한 사람에게는 선량하게 대하고 위무慰撫하고 구제救濟해주기를 매우 극진하게 하였다.
항주지사杭州知事로 있을 때에는 사자使者나 빈객賓客의 접대는 소홀히 하면서도, 고을 사람 가운데 가난하여 장례를 치를 수 없거나 여자가 부모를 여의어 시집갈 수 없는 사람에게는 관비官費로 장례를 치르게 하거나 출가出嫁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 수백數百 인人이었는데, 그가 졸卒하자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모두 그를 위해 탄식하고 안타까워하였다.
모년某年 모월某月 모일某日에 공公을 항주杭州의 모향某鄕 모리某里에 하장下葬하였다.
심공沈公께서 거동이 정숙하니, 그 덕의德義를 당시 사람들이 크게 칭양稱揚하였네.
동방東方에서 발신發身하시니, 그 밝음이 누가 그보다 더 현저할 수 있으랴.
우러러보고 탄복하며 찬양할 뿐, 우리가 감히 비난할 것이 없도다.
한창 나이에 돌아가셨으니, 아아! 슬픈 일이로다.
사서史書에 행적을 입전立傳해놓았고, 또한 업적을 명시銘詩에도 실어놓았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