其先著望태원太原하니 而公之曾大考諱某요 考諱某니 皆葬무주撫州之임천현臨川縣하다
旣壯
에 起
진사進士하야 爲
한주군사추관漢州軍事推官하다 至則以材任劇
으로 在上者交擧之
하야 遷
대리시승大理寺丞 지대명현知大名대명부府지대명현大名縣하고 就除
흔주통판通判흔주통판忻州라가 又
흔주통판通判眞定
대명부府하다 恃氣
하야 侮折其屬
하고 爲不法
하니 以故久之莫敢爲
흔주통판通判者
러라
公行에 왕사종嗣宗固不懌하야 稍侵公以氣호되 公恬然不爲校也하고 以禮示之而已하니 왕사종嗣宗詘服하다
居十餘日에 公請視獄하니 獄中繫者常數百人이어늘 왕사종嗣宗意慍하야 輒久之不問하고 吏亦不敢言治러라
公視獄하니 所當者數十人而已라 餘悉當釋하야 無所坐하니
於是
에 왕사종嗣宗有司
하야 如公指
하고 卽日斷出之
하니
公
分別可否
하야 而使其政皆由
사종嗣宗以出
하니 雖府人
이라도 或不知公於
사종嗣宗日有助也
라
始公中進士時에 同進有常陵公者嫉公하야 先以被酒하야 取公勅牒裂燒之어늘 公爲諱其事하고 以失亡告有司而已라
及後陵公者爲屬吏어늘 公擧遷之한대 或非公以德報怨하니
公曰 受詔擧京官하야 彼今爲吾屬而任京官하니 吾則擧之어늘 何報怨之謂哉리오
居一歲에 移지보주知保州라가 又以擧者移지심주知深州하고 又以選移지제주知齊州하니 二지보주州之人皆曰 公愛我라하더니
已而오 제점형옥提點刑獄회남淮南 兼권농사勸農事하다
公於爲獄에 務在寬民하고 而以課田桑爲急하야 按渠陂之故하야 誘民作而修之하니 利田至萬九十頃이라
而當是時
하야 爲
재상宰相이라 先是
에 정위謂以二人
으로 屬公善視之
하야 曰 皆能吏也
라하더니 至則皆有罪
어늘 公發其狀以聞
하니
而久之에 公所任吏亦有贓坐하니 卽絀公監지주池州순안현順安鎭酒稅러니 會今上卽位하야 移저주滁州하고 又移지흥원부知興元府하다
自
으로 論者皆以公宜復用
이러니 而公亦且得疾不起矣
하니 享年六十二
요 官至尙書主客郞中
하다
明年천성天聖七年에 葬화주和州之역양현歷陽縣이라가 後若干年에 公夫人장씨張氏葬할새 而公墓墊하야 乃改卜合葬於진주眞州양자현揚子縣만녕향萬寧鄕동산銅山之原하다
公子六人에 於是存者二人이니 曰某는 爲전중승殿中丞이요 曰某는 爲진사進士라
其四人은 皆已卒하니 曰某는 開封진사士曹參軍이요 曰某는 초주楚州보응현주부寶應縣主簿요 曰某 曰某는 爲진사進士니
而公以전중군殿中君積贈官至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하다
銘而次公之行事不能詳者는 以不得事公이요 而公之沒에 叔父皆尙少故也라
於公之行事는 雖不得其詳이나 而其略所聞如是하니 蓋可以考公德矣리아
사망한 지가 이미 오래되어 그 치적을 상세히 기술할 수가 없으나 기술한 글 속에 절로 그 대략이 나타나 있다.
공公은 왕씨王氏로 휘諱는 모某이고 자字는 모某이다.
그 선조先祖가 태원太原 지방의 저명한 망족望族이었고, 공公의 증조고曾祖考는 휘諱 모某이고 선고先考는 휘諱 모某이니 모두 무주撫州의 임천현臨川縣에 장례를 모셨다.
공公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썼고, 효성과 우애로 향리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장년이 되어 진사進士로 발신發身하여 한주군사추관漢州軍事推官이 되었는데, 부임하자 재능이 있다 하여 번잡한 사무를 담당하게 되었으며, 상관上官들이 서로 천거하여 대리시승大理寺丞 대명부大名府 지대명현知大名縣으로 전임되었다가, 곧 흔주통판忻州通判에 제수되었고, 다시 진정부통판眞定府通判이 되었는데, 진정부의 부수府帥인 왕사종王嗣宗이 호기豪氣를 부리며 그의 속료屬僚들을 모멸하고 불법을 자행하니, 이 때문에 오래도록 감히 부府의 업무를 판정하고 감독하려는 자가 없었다.
공公이 그곳에 통판으로 가자, 왕사종王嗣宗은 처음부터 탐탁하게 여기지 않으면서, 슬슬 기세氣勢를 과시하고 공公에게 능욕을 가하였지만, 공公은 태연하여 이를 괘념掛念하지 않고 예禮에 맞는 행동을 보여주니, 왕사종王嗣宗이 드디어 굴복하였다.
부임한 지 10여 일 만에 공公이 옥사獄事를 처리하겠다고 청하였는데, 감옥 안에 갇혀 있는 자들이 늘 수백數百 인人에 이르렀으나, 왕사종王嗣宗은 마음속에 노여움을 품어 오래도록 문초조차 하지 않았으며, 옥리들도 감히 죄를 다스리도록 건의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공이 구속된 죄수들을 살펴보니, 마땅히 치죄治罪해야 할 자들은 수십數十 인人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모두 범법을 한 것이 없어서 석방해야 마땅한 사람들이었다.
이에 왕사종王嗣宗은 담당관서擔當官署에 재촉하여 공公이 지적한 대로 처리하여, 그날로 즉시 결단을 내려서 이들을 석방하였다.
이 일이 있은 이후로는 사안事案의 처리에 공公이 하는 바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없었다.
공公은 즉시 가부可否를 판별하여 처리하면서도 그 정사政事가 모두 사종嗣宗이 행行한 것으로 하여 공功을 그에게 돌리니, 비록 부중府中 사람이라도 더러는 공公이 사종嗣宗에게 날마다 도움을 주고 있음을 모르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되어 드디어 온 부중府中이 잘 다스려지니, 선비들이 이 때문에 공公을 훌륭한 어른이라고 칭찬하게 되었다.
처음 공公이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을 때에 동년급제자同年及第者 가운데 늘 공公을 능멸陵蔑하며 공公을 질시嫉視하고, 전前에 술에 취하여 공公의 임명장을 빼앗아 찢어서 불태운 일이 있었는데, 공公은 그를 위해 그 사실을 숨기고 임명장을 잃어버렸다고 담당관청에 보고하였다.
그 후 공公을 능멸했던 자가 공公의 속리屬吏가 되자, 공公이 그를 높은 자리에 천거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공公이 원한怨恨을 덕德으로 보답하였다고 비난하였다.
이에 공公이 말하기를 “칙명勅命을 받아 경관京官을 천거하게 되었고, 그가 이제 나의 속료屬僚가 되어 경관京官을 맡고 있으므로 내가 그를 천거한 것일 뿐인데, 어찌 원한怨恨을 덕德으로 갚았다고 이를 것이 있겠는가?
그리고 나와 그는 애당초 서로 원한이 없었다.” 하였다.
대체로 공公이 행行한 일에 이와 같은 것이 많았다.
1년 만에 지보주知保州로 옮겼다가, 다시 천거하는 사람이 있어서 지심주知深州로 옮겼고, 다시 뽑아 가려는 사람이 있어서 지제주知齊州로 옮겼는데, 두 고을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공公이 우리를 아껴주셨다.” 하였다.
그 후 회남淮南의 제점형옥提點刑獄 겸兼 권농사勸農事가 되었다.
공公이 옥사獄事를 처리할 때에는 백성을 너그럽게 대하고자 노력하였고, 경전耕田과 양잠養蠶의 관리 감독을 급선무로 여겨서 농수로農水路와 제방 가운데 오래된 것을 살펴서 백성을 인도引導하여 이를 수리修理하니, 그 혜택을 입게 된 땅이 1만萬 90경頃에 이르렀다.
이에 천자天子께서 장려獎勵하는 유시諭示의 글을 내리시고 후에 씨명氏名(姓名)을 대신大臣에게 내려보내어 불러 쓰도록 당부하셨다.
이때를 당하여 정위丁謂가 재상宰相이 되었는데, 이보다 앞서서 정위丁謂는 두 사람을 공公의 속리屬吏로 보내면서 잘 보살펴주도록 당부하고 말하기를 “이들은 모두 유능한 관리이다.” 하였으나, 부임한 후에 보니 모두 죄罪가 있었으므로, 공公이 그 죄상罪狀을 들춰내어 이를 보고하였다.
이 때문에 정위丁謂가 공公을 해치고자 하여 불러 쓰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오랜 후에 공公이 임명한 관리 또한 횡령죄에 걸리게 되자, 즉시 공公을 지주池州 순안현順安縣의 감주세監酒稅로 좌천시켰는데, 때마침 금상今上께서 즉위하시니 저주滁州로 옮겼다가 다시 지흥원부知興元府로 옮기게 되었다.
정위丁謂가 죄를 범하여 남방으로 좌천되자, 말하는 사람들이 모두 공公이 당연히 다시 등용되리라고 하였는데, 공公 또한 병病을 얻어서 일어나지 못하였으니, 향년享年이 62세였고, 벼슬은 상서주객낭중尙書主客郎中에 이르렀다.
이듬해인 천성天聖 7년에 화주和州의 역양현歷陽縣에 안장安葬하였고, 그 후 몇 년이 지나서 공公의 부인夫人 장씨張氏의 장례葬禮를 치를 적에 공公의 묘墓에 합장合葬하려 하면서, 이에 점占을 쳐서 개장改葬하여 진주眞州 양자현揚子縣 만녕향萬寧鄕 동산銅山의 언덕에 합장合葬하였다.
공公은 아들이 6인人이었으나, 이때에 생존해 있는 사람은 2인人이었으니, 모某는 전중승殿中丞이고 모某는 진사進士였다.
4인人은 모두 이미 졸卒하였는데, 모某는 개봉부사조참군開封府士曹參軍을 지냈고, 모某는 초주楚州 보응현주부寶應縣主簿였으며, 모某와 모某는 진사進士였다.
그리고 공公은 전중군殿中君에서 계속 증직贈職되어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에 이르렀다.
모某(王安石 자신)는 공公의 형兄의 손자孫子로서, 숙부의 명命을 받아 이 명銘을 짓게 되었다.
명銘을 지으면서 공公께서 행行하신 일을 차례대로 상세히 기술하지 못하는 것은 공公을 모신 일이 없었기 때문이고, 공公께서 몰沒하셨을 때에 숙부叔父들이 모두 아직 어렸기 때문이다.
공公이 행行하신 일에 대하여 상세히 기술할 수가 없지만, 그 들은 바가 대략 이와 같으니, 이것만으로도 대체로 공公의 덕행德行을 살펴볼 수가 있다.
왕씨王氏는 진晉 땅의 봉토封土를 잃고, 멀리 남녘 땅에 이르렀었네.
공公이 비로소 가묘家廟를 갖게 되어, 그곳에서 선고先考와 선조고先祖考의 제사를 지내게 되었네.
누가 억센 기세氣勢로 꺽으려 하였으며, 누가 꺼리면서 다투려 하였던가?
나의 겸손謙遜함과 관후寬厚함을 굳게 지키니, 막혔던 일이 형통亨通하게 되었네.
내가 허물이 있어서 쫓겨난 것이지, 원수怨讐가 나를 해쳐서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네.
선행을 하면서 이름나지 않게 피하셨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소문 없어지지 않았네.
새로 이장移葬한 무덤에 명銘을 새겨놓으니, 이 업적業績 오래도록 남아 있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