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안인德安정식鄭湜이 書其父태상박사太常博士諱이詒字정신正臣주개지之行治伐閱世次하야 因其妹壻광릉인廣陵주개지朱介之하야 以來請曰
정씨鄭氏故家형양滎陽이라가 有선과善果者卒於唐강주자사江州刺史하야 而子孫爲덕안인德安人이라
自선과善果至胵七世니 生예裔하야 爲낙청현령樂淸縣令하니 君之大父也라
예裔生간柬하니 君之父也요 以詩書敎授鄕里하고 而終不仕라
君以경우景祐四年進士로 爲홍주洪州도창현都昌縣주부主簿에 於是현령令老矣하야 事皆決於君하니 而도창현都昌至今稱以爲能하고 又爲여주廬州합비合肥현위縣尉에 盜發輒得이라 故其後無敢爲盜者하다
又爲同州
조읍현령朝邑縣令에 當
하니 案簿書
하야 度民力所堪以均賦役
하야 而人不困
하고
又장서기掌집경군集慶軍장서기書記할새 歲旱호되 전운사轉運使不欲除民租하고 以屬其수령守하며 而전운사使君出視어늘 君以實除民租如法하다
又遷비서성저작좌랑秘書省著作佐郞하고 지사知남강군南康軍남강현南康縣이라가 移지사知오주梧州하다
方是時
에 하니 吏多避匿
하야 卽不往
이어늘 君獨亟往
하야 治城塹
하고 集吏民以守
하야 而州無事
하니
경략사經略使擧君以지사知빈주賓州하고 再遷至태상박사太常博士而歸하다
爲
능대령陵臺令에 召見
하니 言事稱旨
하야 賜
한대 未赴
하고 以
가우嘉祐三年三月二十四日卒
하니 年六十
이라
君前夫人장씨張氏요 後夫人오씨吳氏라 子男三人이니 其長則식湜也요 次연沿이요 次심深이며 女四人이니 其三人已嫁矣하니 동진董振하지何贄주개지朱介之는 其壻也라
君爲人이 孝友諒直하야 得人一善이면 若己出하고 能振窮急호되 而自養尤儉約하다
自빈주賓州歸에 所齎無南方一物하니 其平生所爲如此라
今旣以某年某月某日에 葬君덕안德安개지之영태향永泰鄕곡보리谷步里호되 而未有以碣諸墓也일새 敢因개지介之以告하노라
개지介之於余爲外姻이요 而其妻能道君개지之實하야 將懼泯沒而無聞하야 數涕泣屬其夫하고 求得余개지之一言以表개지之墓上이라
蓋余嘗奉使강동江東하야 泝구강九江하고 上여산廬山하야 愛其여산山川하야 而問其州人士大夫之賢而可與游者호되 莫能言也러니 今식湜能言其父之賢如此하니 問其州人與之游仕於此者면 乃以爲良然이로다
而其子男與女子 又能如此라 故爲序次其說하야 使表之墓上하노라
형공荊公이 끝까지 그를 인정하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그 사이에 지극히 세세한 내용이 함축되어 있다.
덕안인德安人 정식鄭湜이 그의 부친인 태상박사太常博士 휘諱 이詒 자字 정신正臣이 행行한 일, 공적功績 및 경력經歷, 이어 내려온 가계家系의 차서次序 등을 기록해서, 그의 매부妹夫인 광릉인廣陵人 주개지朱介之에게 주어 보내어 다음과 같이 청請하였다.
“정씨鄭氏가 과거過去에 형양滎陽에 살았는데, 선과善果라는 분이 계셔서 당대唐代에 강주자사江州刺史로 계시다가 사거死去하였으므로, 자손子孫이 덕안인德安人이 되었습니다.
선과善果로부터 질晊에 이르기까지 7대代이고, 그분이 예裔를 낳았는데, 낙청현령樂淸縣令을 지냈으니, 군君의 조부祖父가 됩니다.
예裔가 간柬을 낳았으니, 그분이 군君의 부친父親이고, 향리鄕里에서 시서詩書를 가르치고 끝내 벼슬을 한 일이 없었습니다.
군君은 경우景祐 4년(1037)에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여 홍주洪州 도창현都昌縣의 주부主簿가 되었을 때에 현령縣令이 늙어서 일을 모두 군君에게 결정하도록 위임하였는데, 도창都昌에서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유능함을 칭찬하고 있으며, 또 여주廬州 합비合肥의 현위縣尉로 있을 때에 도둑이 일어나면 즉시 잡아들이니, 그 때문에 그 뒤부터는 감히 도둑질하는 자가 없게 되었습니다.
또 같은 주州의 조읍현령朝邑縣令이 되었을 때에, 때마침 섬서陝西 지방에 전쟁이 일어났는데, 문서文書를 살펴보고 백성들 능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정도를 헤아려서 부역을 고르게 부과하여, 인민이 곤고困苦를 겪지 않게 하였습니다.
다시 집경군集慶軍의 장서기掌書記가 되었을 때에, 한발旱魃이 들었는데도, 전운사轉運使가 백성들의 조세租稅를 면제해주려 하지 않고, 그 수령守令들에게 징수徵收를 재촉하면서 군君으로 하여금 나가서 이를 살피도록 하니, 군君이 실상實狀을 따져서 법에 정해진 규정대로 백성들의 조세를 감면해주었습니다.
다시 비서성저작좌랑秘書省著作佐郞으로 옮겼고, 남강군南康軍 남강현南康縣의 지사知事가 되었다가 오주梧州의 지사知事로 옮겼습니다.
바로 그때에 농지고儂智高가 난亂을 일으키니, 관리官吏들 가운데 이를 피해 숨고 나아가지 않는 사람이 많았는데, 군君은 홀로 즉시 부임하여 성참城塹을 수리하고 관리와 백성을 모아서 성城을 지켰으므로 고을이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경략사經略使가 군君을 빈주賓州의 지사知事로 천거하였고, 다시 옮겨서 태상박사太常博士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능대령陵臺令이 되었을 때에 황상皇上께서 불러 보시고, 그가 하는 말과 일이 뜻에 맞았으므로, 비의緋衣와 은銀으로 장식한 어대魚袋를 하사하셨는데 미처 부임하지 못하고 있다가, 가우嘉祐 3년 3월 24일에 졸卒하니, 향년享年이 60이었습니다.
군君의 전부인前夫人은 장씨張氏이고, 후부인後夫人은 오씨吳氏이며, 아들이 셋인데, 장남長男이 식湜이고, 다음이 연沿이고, 다음이 심深이며, 딸이 넷인데, 그 가운데 셋은 이미 출가出嫁하였으니, 동진董振과 하지何贄와 주개지朱介之가 그 사위들입니다.
군君은 사람됨이 효성孝誠과 우애友愛가 있고 신실信實하고 정직正直하여, 남의 한 가지 선행善行을 얻게 되면 마치 자기에게서 나온 것처럼 받아들이고, 곤궁困窮하고 위급危急한 사람을 구제救濟하면서도 자신의 생활은 더욱 검약儉約하게 하였습니다.
빈주賓州에서 돌아올 때에 남방南方의 물건을 하나도 휴대하고 온 것이 없었으니, 그가 일생 동안 행한 바가 이와 같았습니다.
이제 그해 모월某月 모일某日에 군君을 덕안德安의 영태향永泰鄕 곡보리谷步里에 안장安葬하였으나, 무덤에 묘갈墓碣을 세우지 못하였으므로, 감히 개지介之를 통해서 이를 아룁니다.” 하였다.
개지介之는 나와 인척姻戚간이고, 그의 부인夫人이 군君의 행적行績을 말하면서 장차 묻혀 없어져버려서 전해지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자주 눈물을 흘리면서 남편에게 부탁을 하였고, 나의 한마디 말을 얻어서 무덤 위에 묘표墓表를 세울 수 있게 해주기를 청한 것이다.
내가 일찍이 사명使命을 받들고 강동江東 땅을 지날 때에, 구강九江을 거슬러올라가 여산廬山에 올라서는 그 산천山川을 사랑하여, 그 고을 출신의 사대부士大夫 가운데 훌륭한 사람으로, 함께 유람할 만한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으나 대답하는 자가 없었는데, 이제 식湜이 그 부친父親의 현명賢明함이 이와 같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 고을 사람으로 이곳에서 벼슬하고 유람할 수 있는 사람을 묻는다면 곧 진실로 이와 같은 이를 천거하였을 것이라고 여긴다.
정군鄭君이 진실로 이와 같았으니, 어찌 다만 한 고장의 훌륭한 선비에 그칠 뿐이겠는가?
그리고 그 아들과 딸이 또 능히 이와 같이 원하고 있으니, 그 이야기를 차례로 서술하여, 그들로 하여금 무덤 위에 묘표墓表를 세위 이를 드러내게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