通篇亦無一實事하고 俱虛語相點綴하니 형공荊公所自爲本色이 在此요 형공荊公所自爲可喜處도 亦在此하니
他日에 有問予先君之壻어늘 而予告以심자沈子하니 其知심자沈子之家者는 必曰是其父能文學이라하다
他日에 從심자沈子於동릉현銅陵하야 而遊觀其동릉현縣이러니 동릉현縣人得심자沈子하면 必曰是其父能政事라하다
已而요 予求其父所爲書於심자沈子하니 심자沈子曰 先君卒於逆旅하야 其書悉爲人取去하야 無在者라하다
又問其政事하니 曰 吾嘗聞於祖母矣호니 先君爲지주池州귀지현貴池縣주부主簿에 현령令不能而귀지현縣大治者는 先君之力也라하고
嘗攝동릉현銅陵縣지사事에 동릉현縣人有兄弟爭財者러니 先君能爲辨其曲直하야 而卒使之感寤讓財하고 相與同居하니
심자沈子遂言曰 先君事生嚴하고 喪死哀하며 自族人至於婚友히 無所不盡其心하시다
終身好書하야 未嘗一日不讀하고 而於酣樂嫚戱에 未嘗豫也하시다
循道守官하야 以不諂其上하야 而幾至於殆者數矣라 故其仕嘗有去志하야 而無留心하시다
唯不得壽考富貴나 以卒其學問하고 究其施設이라 故其문장文章不多見이나 而獨爲士友所知요 其行義不博聞이나 而獨爲親黨所稱이요 其政事不大傳이나 而獨爲邑人所記니라
日月行矣니 不卽論次면 懼將卒於無傳也일새 吾願以此屬子矣로라
子之先君固賢하고 而又有賢子하야 其後世將必大하리니 不可使無考也라하고 於是에 爲之論次曰
君諱某요 자字某니 再世家於항주杭州之전당錢塘이나 而其先은 호주湖州之武康人也라
무강武康之族顯久矣니 至唐有기제旣濟者하니 爲상서예부원외랑尙書禮部員外郞이요 生전사傳師하니 爲상서이부시랑尙書吏部侍郞하고 贈이부상서吏部尙書라
상서尙書生순詢하니 爲노주자사潞州刺史 소의군절도사昭義軍節度使라
自소의군절도사昭義以上三世는 皆有名迹하야 열전列於國史하고
소의군절도사昭義生단丹하니 爲서주단련판관舒州團練判官이요 서주단련판관舒州生뇌牢하니 강남江南이씨李氏時에 爲요주자사饒州刺史라
요주자사饒州生廷연빈蘋하니 爲호주군사추관濠州軍事推官이요 호주군사추관濠州生승해承誨하니 大宋爲명주明州정해현주부定海縣主簿하야 累贈광록경光祿卿하다
광록경光祿生옥玉하니 尙書屯田郞中하고 지사知진주眞州지군주사軍州事하니 君은 진주眞州之子라 천성天聖二年에 以進士起家하야 초주楚州사법참군司法參軍하고 再調爲지주池州귀지현주부貴池縣主簿러니 年三十六에 疾卒於경사京師之逆旅하니라
夫人원씨元氏로 生男子백장伯莊계장季長숙통叔通하니 皆爲진사進士요 而계장季長則予先君之壻也라
문장文章 전체에 실제의 사적事蹟을 기술한 것이 하나도 없고 모두 논리에 맞추어 돋보이게 드러냈을 뿐이니, 형공荊公이 문장文章 본래의 면목面目으로 삼은 근본根本이 여기에 있고, 형공荊公이 스스로 기쁘게 여긴 부분도 여기에 있다.
옛 명가의 행적을 비갈碑碣에 실어 기술한 문장에, 구차하지 않은 점이 이와 같다.
나의 선친先親께서 딸 셋을 두셨는데, 그 막내가 심씨택沈氏宅 아드님에게 출가出嫁하였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선친께서 어떤 사람을 사위로 삼았느냐고 내게 묻기에, 내가 심자沈子라고 대답해주었는데, 심자沈子의 집안을 아는 사람들은 반드시 말하기를 “이 사람을 사위로 삼은 것은 그의 부친이 문학文學에 능能해서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後에 동릉현銅陵縣에서 심자沈子를 따라 그 현縣을 유람한 일이 있는데, 고을 사람들 가운데 심자沈子를 만나는 사람들은 반드시 말하기를 “이 사람을 사위로 삼은 것은 그의 부친이 정사政事에 능해서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에 내가 심자沈子에게 그의 부친이 지은 글을 보기를 원하니, 심자沈子가 말하기를 “선친께서 여행 중에 작고하셔서 지으신 글들은 다른 사람이 모두 가져가고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또 그분이 행하신 정사政事에 대하여 물으니, 대답하기를 “제가 전에 할머니께 들었는데, 선친께서 지주池州 귀지현貴池縣의 주부主簿로 계실 때에 현령縣令이 무능無能했는데도 현縣이 크게 잘 다스려진 것이 선친의 능력 때문이었다고 하셨고,
일찍이 동릉현銅陵縣 지사知事의 직무職務를 대행代行할 때에, 현인縣人 가운데 형제兄弟가 재물을 다투는 사람이 있었는데, 선친께서 그 곡직曲直을 잘 판별判別해주셔서, 마침내 그들로 하여금 감동하고 깨닫게 하여, 재물을 서로 사양하면서 함께 살게 되었으며,
선친께서 떠나시자 두 현縣 사람들이 멀리까지 뒤따르며 눈물을 흘리다가 돌아갔다 합니다.
그러나 선친께서 시행施行하고 베푸신 방략方略에 대해서는 제가 세세한 면까지는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심자沈子가 이어서 말하기를 “선친께서 부모님이 생존해 계실 때에는 섬기기를 법도에 맞게 엄격하게 하셨고, 돌아가시자 상례喪禮를 치를 때에는 슬픔을 극진하게 하셨으며, 친족親族으로부터 인척姻戚과 붕우朋友에 이르기까지 극진한 마음으로 대하지 않은 일이 없습니다.
생生을 마치실 때까지 글을 좋아하셔서 일찍이 하루도 독서를 중단하신 일이 없고, 술에 취해 흥겨워하며 난잡한 행동을 하는 무리에 일찍이 동참하신 일이 없습니다.
도道에 합당하게 직무를 수행하시고 그 윗사람에게 아첨하는 일이 없어, 거의 위태로운 지경에 이른 일도 자주 있었으며, 그 때문에 벼슬하시는 동안 항상 떠날 생각을 지니시고 머물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셨습니다.
다만 장수長壽와 고종명考終命과 부富와 귀貴를 누리지는 못하셨으나 이로써 그 학문學問을 이룰 수 있었고, 시행施行하고 베푸는 일에만 진력하였기 때문에 그 문장文章을 많이 볼 수는 없었으나 사우師友들에게는 알려졌고, 그분의 행실과 의리가 널리 소문나지는 않았으나 친족과 고장 사람들에게는 칭송받았으며, 그분이 행하신 정사政事가 크게 전傳해지지는 않았으나 고을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세월은 흘러가는데 선후先後의 사적事績을 논정論定해놓지 않는다면 장차 끝내는 전傳해지는 일이 없게 될까 두렵기에, 저는 이 일을 그대에게 위촉委囑하고자 합니다.” 하였다.
그대의 선군先君께서 진실로 어지셨고 또한 어진 아들을 두셨으므로, 그 후세後世에 장차 반드시 크게 될 것이니, 이를 고찰하여 기록해놓지 않으면 안 될 것이오.” 하고, 이에 선후先後의 사적事績을 다음과 같이 논정論定하였다.
군君의 휘諱는 모某이고, 자字는 모某이며, 두 대代 동안 항주杭州의 전당錢塘에 살았고, 그 선조先祖들은 호주湖州의 무강인武康人이었다.
무강武康 심씨沈氏들은 오래도록 현달顯達하였으며, 당대唐代에 이르러 기제旣濟라는 분이 계셨는데, 상서예부원외랑尙書禮部員外郞을 지냈고, 전사傳師를 낳으니 상서이부시랑尙書吏部侍郞을 지내고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추증追贈되었다.
상서尙書께서 순詢을 낳으니, 노주자사潞州刺史 소의군절도사昭義軍節度使를 지냈다.
소의군절도사昭義軍節度使 위로 3대代는 모두 명성과 업적이 있어서 국사國史의 열전列傳에 수록되었다.
소의군절도사昭義軍節度使께서 단丹을 낳으니, 서주단련판관舒州團練判官을 지냈고, 서주단련판관舒州團練判官께서 뇌牢를 낳으니, 강남江南의 이씨李氏가 세운 남당南唐에서 요주자사饒州刺史를 지냈다.
요주자사饒州刺史께서 연빈延蘋을 낳으니, 호주군사추관濠州軍事推官을 지냈고, 호주군사추관濠州軍事推官께서 승해承海를 낳으니, 대송대大宋代에 명주明州 정해현주부定海縣主簿를 지냈으며, 여러 차례 증직贈職되어 광록경光祿卿이 되었다.
광록경光祿卿께서 옥玉을 낳으니, 상서둔전낭중尙書屯田郎中 진주眞州 군주軍州의 지사知事를 지냈는데 군君이 바로 진주眞州 지군주사知軍州事의 아드님으로, 천성天聖 2년(1024)에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아가 초주楚州의 사법참군司法參軍이 되었으며, 다시 선발되어 지주池州의 귀지현주부貴池縣主簿가 되었다가 향년享年 36세로 경사京師의 여관방에서 병사病死하였다.
부인夫人은 원씨元氏이고, 아들 백장伯莊과 계장季長과 숙통叔通이 모두 진사進士들이니, 계장季長이 바로 내 선친先親의 사위이다.
군君을 모년某年 모월某月 모갑자某甲子에 진주성眞州城 북쪽의 언덕에 안장安葬하였다.
대체로 그의 의義로운 행실行實과 문학文學과 정사政事는 모두 그 아드님이 한 말을 그대로 기술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