兼
본로권농사本路勸農事 상서사봉원외랑尙書 육군陸君의 諱
광廣이요 자字언박彦博이니 其先吳郡人也
라
至君之고조高祖하야 始遷복주福州之후관현候官하야 以避唐末之亂하다
曾祖諱
경천景遷이니 仕
하야 爲
효기상장관驍騎上將官 검교태부檢校太傅하고
祖諱숭의崇扆니 以위무군관찰추관威武軍觀察推官으로 從其王歸京師하야 위무군관찰추관官至전중승殿中丞하고 歷지사知노주瀘도주道조주潮귀주貴四노주州以卒하다
君以
二年
에 進士起
하야 至
四年某月
하야 以使走
제주齊州라가 某甲子
에 卒於
운주鄆之
평음현平陰하다
君子장천長倩等이 以가우嘉祐四年某月某甲子에 葬君항주杭州之전당현錢塘某所之原하고 而書君繫世官職行能勞烈卒葬之地하야 一時以來求誌墓하다
지誌에서는 세계世系의 대략을 상술詳述하는 데 그치고, 명銘에서 일생의 업적을 포괄하여 돋보이게 서술하였다.
제점제주군형옥공사提點諸州軍刑獄公事 겸兼 본로권농사本路勸農事 조봉랑朝奉郞 상서사봉원외랑尙書司封員外郞 충집현교리充集賢校理 상경군도위上輕軍都尉 사비어대차자賜緋魚袋借紫 육군陸君의 휘諱는 광廣이고, 자字는 언박彦博이니, 그의 선조先祖는 오군인吳郡人이었다.
군君의 고조高祖 때에 이르러 비로소 복주福州 후관현候官縣으로 옮겨서 당말唐末의 난리를 피하였다.
증조曾祖 휘諱 경천景遷은 오월吳越에서 벼슬하여 효기상장관驍騎上將官 검교태부檢校太傅가 되었다.
조부祖父 휘諱 숭의崇扆는 위무군관찰추관威武軍觀察推官으로 그가 모시던 왕을 따라 송宋나라로 귀순하여 벼슬이 전중승殿中丞에 이르렀고, 노주瀘州, 도주道州, 조주潮州, 귀주貴州 등 네 주州의 지사知事를 역임한 후 졸卒하였다.
선고先考의 휘諱는 중화中和이니, 벼슬한 일이 없고, 군君의 연고로 관직을 추증追贈받아서 상서직방원외랑尙書職方員外郞에 이르렀다.
군君은 천성天聖 2년(1024)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후 벼슬을 시작하여 황우皇祐 4년(1052) 모월某月에 이르러 제점경동형옥提點京東刑獄으로 제주齊州에 달려가 죄수를 취조하다가 모갑자일某甲子日에 운주鄆州의 평음현平陰縣에서 졸卒하였다.
군君의 아들 장천長倩 등이 가우嘉祐 4년(1059) 모월某月 모갑자일某甲子日에 군君을 항주杭州 전당현錢塘縣 모소某所의 언덕에 안장安葬하고, 군君의 세계世系와 관직官職과 훌륭했던 행실과 세웠던 공로와 졸卒하고 하장下葬한 지역 등을 적어 가지고, 언젠가 찾아와서 묘지명墓誌銘을 지어주기를 청하였다.
육씨陸氏들은 관향貫鄕이 오군吳郡에서 시작되었고,
복주福州의 후관현候官縣은 근래 당唐나라 때에 옮겨온 곳이네.
오월吳越에서 벼슬하여, 우리 황제의 배신陪臣이 되었으며,
태부太傅의 아드님 때에, 비로소 우리 황제께 내부來附하여,
전중殿中의 승丞이 되고, 네 고을의 지사知事를 역임하였다가,
졸卒하여 후관候官에 안장安葬하였는데, 그분이 처사군處士君을 낳으셨고,
처사군處士君이 직방원외랑職方員外郞에 추증되었으니, 군君이 바로 그분의 아들이네.
군君의 휘諱는 광廣이고, 자字는 언박彦博이니,
문장文章으로 갑과甲科에 합격하여, 사부四府에서 벼슬에 종사하였네.
소무邵武에서 벼슬을 시작하여, 다시 서주徐州로 뽑혀 갔고,
드디어 감세주監稅酒가 되어, 진류陳留에서 임기를 채웠네.
허창현許昌縣으로 불려갔다가, 영해현寧海縣에서 종사하였고,
오정烏程의 현령縣令이 되었다가, 개봉開封의 승丞이 되었으며,
처음에 저작좌랑著作佐郞이 되었다가, 옮겨서 위씨현尉氏縣의 지사知事가 되니,
아이와 어른을 가릴 것 없이 어질고 밝음을 노래하였네.
공주邛州의 대읍현大邑縣으로 옮겼다가, 모부인母夫人이 연로年老하심을 이유로 사양하니,
촉蜀 땅의 수령을 면해주고 고향땅에서 봉양할 수 있도록 하여, 천주泉州의 상세商稅를 담당하게 하였고,
다시 도강현導江縣으로 옮겼을 때에, 흉년으로 곡식 한 말이 천千 전錢으로 폭등하니,
군君께서 공전公田에서 수확한 곡식으로 기민饑民을 구제하도록 명하였네.
도둑이 민가民家를 도륙하자, 현위縣尉가 이를 체포해 왔는데,
죄수가 실제로 도둑질한 사람을 말하였으므로, 군君이 석방하도록 명하니,
현위는 힘을 다해 항의하고, 모든 관리들도 군君의 말에 반대하였으나,
후에 진범을 체포하게 되니, 과연 군君의 깊은 사려思慮가 들어맞은 것이네.
이퇴離堆 땅의 강江 제언堤堰의 혜택을, 권세權勢 있는 호족豪族들이 독차지하니,
군君이 제언堤堰과 농수로農水路를 수리修理하여, 비로소 그들이 독차지하였던 수리水利를 억제하게 되었네.
농지에 관개시설을 하니, 혜택을 입은 농토가 일만칠천一萬七千이었고,
수리水利의 규약을 새겨놓아 후세에도 볼 수 있게 하니, 후대에도 흉년 드는 일이 없게 되었네.
정문숙공鄭文肅公이 항주지사杭州知事로 부임하여 다스릴 때에,
군君이 통판通判으로 따라가서 그 휘하麾下에 있었는데,
고을 사람들이 관부官府의 건물에 세貰들어 살면서 낸 집세를 관리들이 가로채자,
군君이 법法을 만들어서 이를 금하니, 이에 세금을 횡령하는 일이 없어졌네.
중서성中書省에서 군君을 경관京官으로 선발하여, 어사추직御史推直에 임명하니,
조정에 진언進言한 말이 지금도 준수하는 법도가 되었네.
겨울에 교외郊外에서 수렵을 하여, 대대적으로 군사훈련을 할 적에,
잠箴을 지어 바쳐서, 황음荒淫과 일락逸樂에 빠지는 것을 예방하였네.
지방관으로 나아가 무주지사婺州知事가 되어서는, 못된 관리부터 먼저 제거하였고,
유능한 사람을 임용하고 약한 자를 구제하니, 백성들이 수탈을 면하게 되었네.
무주婺州를 다스린 이듬해에, 전근되어 천주泉州를 다스리게 되자,
천주泉州 사람들이 군君의 소문을 익히 들은지라, 노래를 부르며 환영하였고,
남강南江에 다리를 놓아서, 물을 건너는 사람들이 배가 전복되는 일을 면하게 되었으며,
늠주廩州에 학교를 세우니, 선비들이 잘 길러주었다고 고맙게 여겼네.
어떤 사람이 군중群衆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보고하자, 군은 때마침 연회宴會를 베풀고 있었는데,
체포하도록 명하여 바로 잡아들이되, 연회에 참여했던 이들은 알지도 못하였고,
굶주리는 사람을 소생시켜서 곤궁함을 면하게 하고, 각종 폐단을 제거하니,
사신使臣이 이를 보고하면서, 태수太守의 정사政事가 더욱 뛰어나다고 하였네.
농지고儂智高가 거느린 오랑캐가 변방을 어지럽히되, 그때 관리들이 체포하지 못하였는데,
군君이 역로驛路를 통하여 급히 상서하여, 적敵을 멸滅할 계책을 분명하게 밝혔네.
돌아와 삼사사三司使를 보좌하게 되었을 때에, 조정에서 남방을 정벌할 것을 논의하니
하경이동형옥河京以東刑獄에 임명하여 다시 형벌권刑罰權을 맡게 되니,
제주齊州에서 죄수를 심문했는데, 운鄆 땅에 이르러 병이 들어서,
평음平陰에서 세상을 버렸으니, 향년享年이 53세였네.
장천長倩은 수주秀州의 속관屬官으로 있으면서, 민첩해서 사장辭章에 능하다는 소문이 났고,
장서長恕는 군주君主의 은혜를 입어서 교사재랑郊社齋郞이 되었네.
또 여섯 딸이, 모두 진씨陳氏 집안으로 출가하였는데,
그중 진숙신陳淑愼에게 시집간 딸이, 남편을 도와 내조를 잘했네.
네 아들들은 가정을 이루었고, 딸들도 모두 출가하였으며,
부인夫人은 장안현군長安縣君에 임명되어, 봉양함에 어그러짐이 없다가,
군君을 전당錢塘으로 모셔 가서, 범촌范村의 묘지에 안장하였네.
군君은 고요하고 뜻이 깊어, 함부로 웃거나 희롱하는 말을 하지 않았고,
친족을 융숭하게 대하고, 벗들을 독실하게 대하였으며, 사람들을 자애롭게 대하였네.
굳건한 의지를 가지고 독서에 임하여, 옛 성현을 연모함이 뛰어났고,
여러 아들들을 돌아보며 벼슬도 이런 자세로 해야 한다고 말하였네.
벼슬이 상서성尙書省 사봉원외랑司封員外郞에 그쳤고,
또한 장수長壽도 못하여, 이 때문에 큰 공로를 세우지는 못하였으나,
지어놓은 글들이 집안에 간직되어, 후세에 볼 수 있도록 남겨놓았기에
이 유택幽宅에, 묘지명墓誌銘을 새긴 돌이 무덤 아래 있어서,
군君의 일생 전말을 기록하여, 후세 사람에게 알려주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