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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王安石(2)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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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3. 京東提點刑獄陸君墓誌銘
誌止詳世系大略하고 竝於銘中點綴生平이라
至君之고조高祖하야 始遷복주福州후관현候官하야 以避唐末之亂하다
曾祖諱경천景遷이니하야효기상장관驍騎上將官 검교태부檢校太傅하고
祖諱숭의崇扆위무군관찰추관威武軍觀察推官으로 從其王歸京師하야 위무군관찰추관전중승殿中丞하고지사노주도주조주귀주노주以卒하다
考諱중화中和 不仕하고 以君故 贈官至하다
君以二年 進士起하야四年某月하야 以使走제주齊州라가 某甲子 卒於운주평음현平陰하다
君子장천長倩가우嘉祐四年某月某甲子 葬君항주杭州전당현錢塘某所之原하고 而書君繫世官職行能勞烈卒葬之地하야 一時以來求誌墓하다
銘曰
於惟육씨陸氏 오군吳郡其始
복주후관현候官 近自
君曾大考 태부장군將軍이니
實仕오월吳越하야 爲皇陪臣이라
태부太傅有子하야 始來皇朝하니
于殿中하고 歷將四州하야
卒葬후관候官하니 實生
贈官직방원외랑職方하니 君實其子
維君諱이요 언박彦博
문장辭甲科하야 四府從事
起家소무邵武하야 再選서주徐州하고
하야 滿歲진류陳留
허창현許昌之招하고 영해현寧海之從이라가
현령오정烏程하고개봉開封이라
이라가 去爲위씨현尉氏하니
詠歌仁明 無有壯穉
공주대읍현大邑이라가 告母高年하니
就養하야 稅商于천주이라
又移도강현導江하야 斗穀千이어늘
君命振之하야 以我公田이라
盜屠民家하야 현위以囚來하니
囚言實盜일새 君曰釋之하라하니
尉方力爭하고 衆亦莫寤러니
後得眞盜 果如러라
이퇴離堆之江 豪右擅焉이어늘
君修堰渠하야 始詘其專하고
灌田爲頃하니 萬有七千이요
鐫約示後하니 後無凶年이러라
來治항주지사
통판通判으로 往從其辟하니
州人僦屋 吏代之輸어늘
君爲創法하야 遂無逋租하다
中書選君하야 한대
有言朝廷하야 今以爲勅이라
冬狩于郊하야 大講戎兵할새
作箴以獻하야 逆戒荒萌하다
召寘集賢하야 以爲교리校理하니
當時名氏 簡在天子하니라
무주지사무주지사婺州 惡吏先鉏하고
募能拯溺하니 民以不漁하다
무주之明年 改命治천주하니
천주人習君하야 謠語讙然하고
爲橋남강南江 濟者免覆하고
늠주廩州 士懷我育이러라
有告衆叛하니 當君燕時
命捕立得호되 坐人不知
蘇饑息窮하고 去害除弊하니
使臣以聞하야 태수政尤異하다
농지고智高螫邊호되 吏不時搏이어늘
君書驛上하야 焯有方略하다
歸佐삼사사三司하야 廷論南師하니
帝曰可哉
汝言予施호리라
하경이동형옥河京以東 再執하경이동형옥하야
諏囚于제주러니而病하야
棄世평음平陰하니 壽五十三이라
有子四人 扶喪而南하니
장천長倩惟伯이요 仲惟장서長緖
장서長恕惟叔이요 季惟장유長愈
장천수주秀州하야 敏有辭章하고
緖由君恩하야 교사재랑郊社齋郞이라
又女六人 皆出진씨陳氏
진숙신陳淑愼 善相君子하니
四男有立하고 女亦有歸
受封장안현군長安하야 卽養無違러니
爰以가우嘉祐六年正月
歸君전당錢塘하니 범촌范村之穴이라
惟君靜深하야 不苟笑嘻하고
隆親篤友하며 遇物愛慈
讀書慨然하야 慕古奇偉하니
顧謂諸子하야 仕當如此
官止사봉원외랑外郞하니 尙書사봉원외랑司封이라
又不得年하야 以旣厥庸이나
有文藏家하야 後世之詒
於君所得 可以此窺
有幽斯竁 掩石在下하야
撰君初終하야 以告來者하노라


03. 경동제점형옥을 지낸 육군의 묘지명
에서는 세계世系의 대략을 상술詳述하는 데 그치고, 에서 일생의 업적을 포괄하여 돋보이게 서술하였다.
제점제주군형옥공사提點諸州軍刑獄公事 본로권농사本路勸農事 조봉랑朝奉郞 상서사봉원외랑尙書司封員外郞 충집현교리充集賢校理 상경군도위上輕軍都尉 사비어대차자賜緋魚袋借紫 육군陸君이고, 언박彦博이니, 그의 선조先祖오군인吳郡人이었다.
고조高祖 때에 이르러 비로소 복주福州 후관현候官縣으로 옮겨서 당말唐末의 난리를 피하였다.
증조曾祖 경천景遷오월吳越에서 벼슬하여 효기상장관驍騎上將官 검교태부檢校太傅가 되었다.
조부祖父 숭의崇扆위무군관찰추관威武軍觀察推官으로 그가 모시던 왕을 따라 나라로 귀순하여 벼슬이 전중승殿中丞에 이르렀고, 노주瀘州, 도주道州, 조주潮州, 귀주貴州 등 네 지사知事를 역임한 후 하였다.
선고先考중화中和이니, 벼슬한 일이 없고, 의 연고로 관직을 추증追贈받아서 상서직방원외랑尙書職方員外郞에 이르렀다.
천성天聖 2년(1024)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후 벼슬을 시작하여 황우皇祐 4년(1052) 모월某月에 이르러 제점경동형옥提點京東刑獄으로 제주齊州에 달려가 죄수를 취조하다가 모갑자일某甲子日운주鄆州평음현平陰縣에서 하였다.
의 아들 장천長倩 등이 가우嘉祐 4년(1059) 모월某月 모갑자일某甲子日항주杭州 전당현錢塘縣 모소某所의 언덕에 안장安葬하고, 세계世系관직官職과 훌륭했던 행실과 세웠던 공로와 하고 하장下葬한 지역 등을 적어 가지고, 언젠가 찾아와서 묘지명墓誌銘을 지어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다음과 같이 을 지었다.
육씨陸氏들은 관향貫鄕오군吳郡에서 시작되었고,
복주福州후관현候官縣은 근래 나라 때에 옮겨온 곳이네.
증조曾祖태부장군太傅將軍으로서,
오월吳越에서 벼슬하여, 우리 황제의 배신陪臣이 되었으며,
태부太傅의 아드님 때에, 비로소 우리 황제께 내부來附하여,
전중殿中이 되고, 네 고을의 지사知事를 역임하였다가,
하여 후관候官안장安葬하였는데, 그분이 처사군處士君을 낳으셨고,
처사군處士君직방원외랑職方員外郞에 추증되었으니, 이 바로 그분의 아들이네.
이고, 언박彦博이니,
문장文章으로 갑과甲科에 합격하여, 사부四府에서 벼슬에 종사하였네.
소무邵武에서 벼슬을 시작하여, 다시 서주徐州로 뽑혀 갔고,
드디어 감세주監稅酒가 되어, 진류陳留에서 임기를 채웠네.
허창현許昌縣으로 불려갔다가, 영해현寧海縣에서 종사하였고,
오정烏程현령縣令이 되었다가, 개봉開封이 되었으며,
처음에 저작좌랑著作佐郞이 되었다가, 옮겨서 위씨현尉氏縣지사知事가 되니,
아이와 어른을 가릴 것 없이 어질고 밝음을 노래하였네.
공주邛州대읍현大邑縣으로 옮겼다가, 모부인母夫人연로年老하심을 이유로 사양하니,
땅의 수령을 면해주고 고향땅에서 봉양할 수 있도록 하여, 천주泉州상세商稅를 담당하게 하였고,
다시 도강현導江縣으로 옮겼을 때에, 흉년으로 곡식 한 말이 으로 폭등하니,
께서 공전公田에서 수확한 곡식으로 기민饑民을 구제하도록 명하였네.
도둑이 민가民家를 도륙하자, 현위縣尉가 이를 체포해 왔는데,
죄수가 실제로 도둑질한 사람을 말하였으므로, 이 석방하도록 명하니,
현위는 힘을 다해 항의하고, 모든 관리들도 의 말에 반대하였으나,
후에 진범을 체포하게 되니, 과연 의 깊은 사려思慮가 들어맞은 것이네.
이퇴離堆 땅의 제언堤堰의 혜택을, 권세權勢 있는 호족豪族들이 독차지하니,
제언堤堰농수로農水路수리修理하여, 비로소 그들이 독차지하였던 수리水利를 억제하게 되었네.
농지에 관개시설을 하니, 혜택을 입은 농토가 일만칠천一萬七千이었고,
수리水利의 규약을 새겨놓아 후세에도 볼 수 있게 하니, 후대에도 흉년 드는 일이 없게 되었네.
정문숙공鄭文肅公항주지사杭州知事로 부임하여 다스릴 때에,
통판通判으로 따라가서 그 휘하麾下에 있었는데,
고을 사람들이 관부官府의 건물에 들어 살면서 낸 집세를 관리들이 가로채자,
을 만들어서 이를 금하니, 이에 세금을 횡령하는 일이 없어졌네.
중서성中書省에서 경관京官으로 선발하여, 어사추직御史推直에 임명하니,
조정에 진언進言한 말이 지금도 준수하는 법도가 되었네.
겨울에 교외郊外에서 수렵을 하여, 대대적으로 군사훈련을 할 적에,
을 지어 바쳐서, 황음荒淫일락逸樂에 빠지는 것을 예방하였네.
집현원集賢院으로 불러들여 교리校理로 삼으니,
당시에 성명姓名천자天子에게 보고되었네.
지방관으로 나아가 무주지사婺州知事가 되어서는, 못된 관리부터 먼저 제거하였고,
유능한 사람을 임용하고 약한 자를 구제하니, 백성들이 수탈을 면하게 되었네.
무주婺州를 다스린 이듬해에, 전근되어 천주泉州를 다스리게 되자,
천주泉州 사람들이 의 소문을 익히 들은지라, 노래를 부르며 환영하였고,
남강南江에 다리를 놓아서, 물을 건너는 사람들이 배가 전복되는 일을 면하게 되었으며,
늠주廩州에 학교를 세우니, 선비들이 잘 길러주었다고 고맙게 여겼네.
어떤 사람이 군중群衆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보고하자, 군은 때마침 연회宴會를 베풀고 있었는데,
체포하도록 명하여 바로 잡아들이되, 연회에 참여했던 이들은 알지도 못하였고,
굶주리는 사람을 소생시켜서 곤궁함을 면하게 하고, 각종 폐단을 제거하니,
사신使臣이 이를 보고하면서, 태수太守정사政事가 더욱 뛰어나다고 하였네.
농지고儂智高가 거느린 오랑캐가 변방을 어지럽히되, 그때 관리들이 체포하지 못하였는데,
역로驛路를 통하여 급히 상서하여, 할 계책을 분명하게 밝혔네.
돌아와 삼사사三司使를 보좌하게 되었을 때에, 조정에서 남방을 정벌할 것을 논의하니
황제께서 “좋다.
너의 건의를 내가 시행하리라.” 하시고,
하경이동형옥河京以東刑獄에 임명하여 다시 형벌권刑罰權을 맡게 되니,
제주齊州에서 죄수를 심문했는데, 땅에 이르러 병이 들어서,
평음平陰에서 세상을 버렸으니, 향년享年이 53세였네.
아들 넷이 있어, 시신屍身으로 모시니
장천長倩이 맏아들이고, 장서長緖가 둘째이며,
장서長恕가 셋째이고, 장유長愈가 막내인데,
장천長倩수주秀州속관屬官으로 있으면서, 민첩해서 사장辭章에 능하다는 소문이 났고,
장서長恕군주君主의 은혜를 입어서 교사재랑郊社齋郞이 되었네.
또 여섯 딸이, 모두 진씨陳氏 집안으로 출가하였는데,
그중 진숙신陳淑愼에게 시집간 딸이, 남편을 도와 내조를 잘했네.
네 아들들은 가정을 이루었고, 딸들도 모두 출가하였으며,
부인夫人장안현군長安縣君에 임명되어, 봉양함에 어그러짐이 없다가,
이에 가우嘉祐 6년 정월에,
전당錢塘으로 모셔 가서, 범촌范村의 묘지에 안장하였네.
은 고요하고 뜻이 깊어, 함부로 웃거나 희롱하는 말을 하지 않았고,
친족을 융숭하게 대하고, 벗들을 독실하게 대하였으며, 사람들을 자애롭게 대하였네.
굳건한 의지를 가지고 독서에 임하여, 옛 성현을 연모함이 뛰어났고,
여러 아들들을 돌아보며 벼슬도 이런 자세로 해야 한다고 말하였네.
벼슬이 상서성尙書省 사봉원외랑司封員外郞에 그쳤고,
또한 장수長壽도 못하여, 이 때문에 큰 공로를 세우지는 못하였으나,
지어놓은 글들이 집안에 간직되어, 후세에 볼 수 있도록 남겨놓았기에
이 도달한 경지를 이로써 엿볼 수 있고,
유택幽宅에, 묘지명墓誌銘을 새긴 돌이 무덤 아래 있어서,
의 일생 전말을 기록하여, 후세 사람에게 알려주노라.


역주
역주1 提點京東諸州軍刑獄公事 : 宋代 地方行政區域인 15個의 路 가운데 하나인 京東路(관할구역이 現 山東, 河南, 江蘇 一帶였음)에 소속된 여러 州의 司法, 刑獄, 監察, 農桑 등을 담당했던 武官職이다.
역주2 朝奉郞 : 正7品에 해당하는 文散官이다.
역주3 司封員外郞 : 尙書吏部 司封司의 副長官으로, 封爵, 敍贈, 奏蔭, 承襲 등의 사무를 담당하였다.
역주4 充集賢校理 : ‘充’은 他職을 맡고 있는 官員을 集賢院에 特派했을 때에 붙이는 칭호이다.
역주5 上輕車都尉 : 正4品官에게 내리는 勳官의 명칭이다.
역주6 賜緋魚袋借紫 : ‘賜緋魚袋’는 正4品官에게 내려준 緋服과 銀魚袋이고, ‘借紫’는 3品官에 오르지 못한 사람이 3品 以上官이 맡을 직무를 담당하였을 때에, 紫色官服을 입고 金魚袋를 패용하게 하면서, 이를 ‘借紫’라 칭하였다.
역주7 吳越 : 907년에 錢鏐가 건국했다가 978년에 宋에 귀부한 五代十國時代의 十國 中의 한 나라이다.
역주8 尙書職方員外郞 : 尙書省 兵部 職方司의 副長官이다.
역주9 天聖 : 天聖은 宋 仁宗의 年號(1022~1031)이다.
역주10 皇祐 : 皇祐도 宋 仁宗의 年號(1046~1053)이다.
역주11 太傅 : 춘추시대에 國君을 보필하는 三公의 한 사람으로, 後世에는 大官에게 주는 명예직일 뿐 實職은 없었다.
역주12 處士 : 才德을 지녔으면서 벼슬하지 않고 隱居하는 사람으로, 여기에서는 墓主의 父親을 稱한 것이다.
역주13 監稅酒 : 宋代의 專賣品인 술의 제조 판매를 주관하기 위하여 각 지방의 城鎭에 두었던 官員이다.
역주14 佐著作 : 秘書省에서 校書 및 日曆의 修撰 등을 담당하였던 著作佐郞의 略稱이다.
역주15 鄭文肅公 : 鄭戩을 지칭한다. 그의 諡號가 文肅이며 《宋史》에 立傳된 인물이다. 鄭戩이 知杭州로 부임한 것은 慶曆 元年(1041)이었다.
역주16 御史推直 : 御史臺에 두었던 推職官을 지칭한다.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2)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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