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諱위瑋요 자字보신寶臣이니 진정부眞定府영수현인靈壽縣人이라
中
에 盜據
하서河西은주銀하주夏等
은주州하고 後又擊諸部
하야 幷其衆
이라
이계륭李繼隆범정소范廷召等이 數出無功이어늘 而朝범정소廷終棄영무靈武하니 이계천繼遷遂强하야 屢入邊州爲寇하니라
當是時
하야 公爲
동두공봉관東頭供奉官합문지후閤門祗侯하니 年十九
라 태종太宗問大臣誰可使當
이계천繼遷者
오하니 以公應詔
한대
태종太宗以지위주사知渭州로 而欲除제사사諸司使以遣之하니 무혜왕武惠王爲公固讓이어늘 乃以本官지위주사知渭州하다
진종眞宗卽位하야 改내전숭반內殿崇班‧합문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서상합문부사西上閤門副使라가 移지진융군知鎭戎軍하다
當是時하야 이계천繼遷虐使其衆하니 人多怨者어늘 公卽移書하야 言朝廷恩信撫納之厚以動之하니 강족羌人得書하고 往往感泣이라
六年
에 이계천繼遷死
하고 其子
이덕명德明求保塞
어늘
公上書言이계천繼遷이 擅중국中國要害地하야 終身旅拒하야 使謀臣狼顧而憂러니 方其중국國危子弱하니 不卽捕滅이면 後更盛强하야 無以息民이라하다
當是時하야 朝廷欲以恩致이덕명德明하야 寢其書不用하다
而하서河西大族연가묘延家妙等이 遂拔其部人來歸한대 諸將猶豫하야 未知所以應이어늘
公曰 이덕명德明野心去就尙疑하니 今不急折其羽翮하고 而長養就之면 其飛必矣리라하고
元年
에 召還
하야 除
서상합문사西上閤門使빈邠영寧환環경로병마도검할慶路兵馬都鈐轄兼
지빈주사知邠州하다
하고 遷
동상합문사東上閤門使고주자사高州刺史라가 再移
진정부眞定府정주로定州路都鈐轄
하고 已而又以爲
경원로涇原路都鈐轄兼
지위주知渭州하다
公乃圖경원涇原환경環慶兩路山川城郭과 戰守之要以獻하니 眞宗留其一樞密院하고 而以其一付本路하야 使諸將出兵에 皆按圖議事하다
初에 장매章理驕於무연武延함박천鹹泊하고 撥발장臧掘强於평량平涼이어늘 公皆誅之하니 而견수汧위수渭之間이 遂無一강족羌犯塞하니라
八年에 遷영주단련사英州團練使라가 지진주知秦州하니
진주秦西南
강족羌곡시라唃厮囉종가입준宗哥立遵始大
하야 종가입준遵獻方物
하고 求稱
하다
公上書言호되 夷狄無厭하니 足其求면 必輕中國하리라하니 大臣方疑其事라가 會得公書하고 遂不許하고 而猶以爲보순군절도사保順軍節度使하다
公曰 我狃
종가입준遵矣
라 又將爲寇
하리니 吾治兵以俟爾
호리라하더니 종가입준遵使其舅
상양단賞樣丹招
곽시돈郭厮敦爲鄕導
어늘
公卽誘상양단樣丹捕곽시돈厮敦이면 而許以一州하니 상양단樣丹終殺곽시돈厮敦이어늘
公遂奏以爲영주자사潁州刺史하고 而상양단樣丹亦擧남시성南市城以獻하다
先是장길張吉지사知진주秦州에 生지사事熟戶多去爲종가입준遵耳目이러니 及公誅상양단樣丹에 卽皆惶恐避逃어늘
公許之入贖自首면 還故地한대 而至者數千人이요 後遂帖服하야 皆爲用하다
至明年에 곡시라囉종가입준遵果悉衆號十萬이라하야 寇삼도곡三都어늘
公帥三將破之하고 追北至사주沙州하니 所俘斬以萬計라
其後又破滅
마파질랍馬波叱臘귀류鬼留等諸
강족羌하니 곡시라囉종가입준遵遂以窮孤
하야 逃入磧中
이어늘 而公斥境
하야 置
궁문弓門위원威遠凡十寨
하니 自是
진주秦人無事矣
러라
三年
에 召還
하야 除
화주관찰사華州觀察使라가 以西人之恃公也
로 復以爲
부연로마보군도부서鄜延路馬步軍都部署하다
四年
에 遂除
선휘북원사宣徽北院使진국군절도관찰유후鎭國軍節度觀察留後첨서추밀원사簽署樞密院事러니 用
첨서추밀원사事하야 稍除不附己者
라
旣貶
하고 卽指
구래공公爲黨
하야 改
선휘남원사宣徽南院使라가 出爲環慶路都署
하고 又降容
지내주州觀察
선휘남원사使지내주知萊州러니
정진공晉公貶에 乃以정진공公爲화주관찰사華州觀察使지청주사知靑州하다
三年
에 除
창화군절도관찰유후彰化軍節度觀察留後지천웅군知天雄軍이라가 又移
지영흥군知永興軍이러니 而詔
소무군절도사使來朝
하야 至則除
소무군절도사昭武軍節度使而復還之
하다
천성天聖五年에 以疾病求지맹주사知孟州하야 得之러니 會言지맹주사事者 以公宿將有威名하니 不當置之閒處라하야 乃以爲眞지정주定路馬步軍都部署지정주知定州하다
七年에 換창무군절도사彰武軍節度使하고 八年正月에 薨于位하니 年五十八이라
황제皇帝爲罷朝兩日하고 贈시중侍中하며 諡曰무목武穆이라하다
公爲장수將幾四十年에 用兵未嘗敗衂하고 尤有功於西方하다
舊강족羌殺중국中國人하고 得以羊馬贖死를 如강족羌法이어늘 公以謂如此非所尊중국中國而愛吾人이라하야 奏請不許其贖하다
又請補內附
강족羌강족族하야 以爲
상군주上軍主하고 假以勳階爵秩如
하니 至今皆爲成法
하니라
섬서陝西歲取邊人하야 爲弓箭手而無所給이어늘 公以塞上廢地로 募人爲之하고 若干畝에 出一卒하고 若干畝에 出一馬하며 至其稅斂發兵戍守하야는 至今邊賴以實하고 所募皆爲精兵하니라
在지위주渭州에 取농외隴外농간천籠干川築성城하야 置兵以守하고 曰後當有用此者리라하더니
及이원호李元昊叛兵數出에 卒以농간천성籠干川爲덕순군德順將덕순군軍하고 而自농성隴以西公所措置를 人悉以爲便也러라
自삼도곡三都之戰으로 威震四海하니 곡시라唃厮囉聞公姓名이면 卽以手加顙하니라
在지천웅군天雄에 거란契丹使過위주魏地할새 輒陰勒其從人하야 無得高語하고 疾驅至하야 多憚公不敢仰視러라
거란契丹旣請盟
에 眞宗於兵事尤重愼
하야 면 手詔詰難
하야 至十餘反
호되 而公每守一議
하야 終無以奪
하니라
眞宗後愈聽信하야 有論邊事者면 往往密以付公可否하니라
好讀書하야 所如에 必載書數兩하고 兼通춘추공양전春秋公羊춘추곡량전穀梁춘추좌씨전左氏傳호되 而尤熟于춘추좌씨전左氏하니라
始娶
반씨潘氏풍익군부인馮翊郡夫人하니 충무군절도사忠武軍節度使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之子
요
後娶
심씨沈氏안국태부인安國太夫人하니 故
재상相之孫
이요 之子
라
子男四人이니 희僖는 禮賓使지의주사知儀州러니 當이원호元昊叛時에 以策說大將호되 不能用하고 反罪之하야 遷소주韶州以死하다
오俣는 공비고부사供備庫副使로 拒이원호元昊于와정천瓦亭이라가 戰死하니 贈영주자사寧州刺史하고
一女子는 適사방관사四方館使영주자사榮州刺史왕덕기王德基하다
孫五人
이니 양諒과 풍諷은 동두공봉관東頭供奉官이요 의誼는 우시금右侍禁합문지후閤門祗候요 서諝는 이요 자諮는 이라
07. 창무군절도사 시중을 지낸 조목공의 행장
조위曹瑋는 군사적軍事的 지략智略이 뛰어났는데, 공公이 또한 이를 행장行狀에 선명鮮明하게 서술敍述하였다.
공公의 휘諱는 위瑋이고, 자字는 보신寶臣이며, 진정부眞定府 영수현인靈壽縣人이다.
젊어서 음서蔭敍로 천평군天平軍과 무령군武寧軍의 아내도우후牙內都虞候를 역임歷任하였다.
지도至道 연간年間에 이계천李繼遷이 하서河西의 은주銀州, 하주夏州 등을 탈취奪取하여 이곳에 웅거雄據하였고, 후後에는 또 여러 부족部族들을 쳐서 그 무리들을 병합하였다.
이계륭李繼隆과 범정소范廷召 등이 여러 차례 출병出兵을 하였지만 공功을 세우지 못하자, 조정朝廷에서 마침내 영무靈武를 포기抛棄하니, 이계천李繼遷은 더욱 강성해져서 변경邊境의 고을을 여러 차례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하였다.
이때를 당當하여 공公은 동두공봉관東頭供奉官 합문지후閤門祗侯가 되니, 나이가 열아홉이었는데, 태종太宗께서 대신大臣들에게 누가 이계천李繼遷을 감당해 대적할 만한가 물으시니, 무혜왕武惠王께서 아드님인 공公을 천거하였다.
태종太宗께서 이에 지위주사知渭州事로서 제사사諸司使를 겸하게 하여 파견하고자 하자, 무혜왕武惠王께서 공公을 위해 굳게 사양하고 본래의 관직인 지위주知渭州의 직職만을 담당하게 하였다.
진종眞宗께서 즉위卽位하시자 내전숭반內殿崇班, 합문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 서상합문부사西上閤門副使로 관직을 바꾸어 임명하였다가 지진융군知鎭戎軍으로 전임시켰다.
이때를 당하여 이계천李繼遷이 그 무리들을 잔학殘虐하게 혹사酷使하니 무리들 가운데 원망하는 자들이 많았는데, 공公이 곧 공문公文을 보내어 조정朝廷에서 은혜恩惠와 신의信義를 베풀어 진무鎭撫하고 후厚하게 받아들이겠다고 설득하여 그들을 감동시키니, 강족羌族들이 글을 얻어 읽어보고 더러는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이렇게 되자 강노康奴의 여러 강족羌族들이 모두 송宋에 귀부歸附하였다.
함평咸平 6년(1003)에 이계천李繼遷이 죽자 그 아들 이덕명李德明이 내부來附할 뜻을 밝히면서 변방邊方을 보호할 지위를 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공公이 글을 올려서 이계천李繼遷이 중국中國의 요해처要害處를 점거占據하고 죽을 때까지 무리를 모아 항거하여, 일을 도모하는 신하들로 하여금 두려워하고 근심하게 하였는데, 때마침 그 나라가 위태롭고 자식은 어리니, 이런 때에 즉시 잡아 죽이지 않으면, 후에 다시 강성해져서 인민들이 편히 쉴 수가 없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때에 조정朝廷에서는 은혜를 베풀어 이덕명李德明을 끌어들이고자 하여, 그 건의를 묵살하고 채납採納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서河西의 대족大族인 연가묘延家妙 등이 그 부족部族들을 모두 인솔하고 와서 귀부歸附하려 하자, 제장諸將들이 머뭇거리며 어찌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였는데,
공公께서 “이덕명李德明의 야심野心과 거취去就를 아직 믿을 수가 없으니, 지금 급히 그 날개를 꺾어놓지 않고 이를 길러주어 뜻을 이루게 한다면, 그 무리들이 훨훨 날게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고,
즉시 자신이 기병騎兵들을 거느리고 천도산天都山으로 들어가서 그들을 데려와 내지內地로 옮겼다.
이덕명李德明이 이 때문에 드디어 세력이 약화되어, 죽을 때까지 감히 변방邊方을 엿보지 못하게 되었다.
대중상부大中祥符 원년元年(1008)에 공公을 불러들여서 서상합문사西上閤門使, 빈邠‧영寧‧환環‧경로병마도검할慶路兵馬都鈐轄 겸兼 지빈주사知邠州事에 제수하였다.
황상皇上께서 동행東行하여 봉선封禪의 의식을 거행하시고, 공公을 동상합문사東上閤門使, 고주자사高州刺史로 옮겼다가, 다시 진정부眞定府 정주로定州路 도검할都鈐轄로 옮겼고 그 후 다시 경원로涇原路 도검할都鈐轄 겸兼 지위주知渭州에 임명하였다.
공公이 이에 경원涇原과 환경環慶 양로兩路의 산천山川과 성곽城郭 및 전수戰守의 요충지要衝地를 지도地圖에 표시하여 바치니, 진종眞宗께서 그 지도地圖 한 부는 추밀원樞密院에 보관하고, 한 부는 해당 노路에 송부送付하여, 여러 장수들로 하여금 출병시出兵時에는 그 지도地圖를 참고하여 일을 도모하도록 하였다.
황상께서 분음汾陰에서 후토后土에 제사祭祀를 지낸 후 공公을 사방관사四方館使로 옮겼다.
처음 장매章埋가 무연武延의 함박천鹹泊川에서 저항하고, 발장拔臧이 평량平涼에서 강성하게 버티고 있었는데, 공公께서 이들을 모두 주멸誅滅하니, 견수汧水와 위수渭水 사이는 드디어 강족羌族이 국경을 침범하는 일이 한 번도 없게 되었다.
대중상부大中祥符 8년에 영주단련사英州團練使로 옮겼다가 지진주知秦州가 되었다.
진주秦州 서남西南의 강족羌族 추장 곡시라唃厮囉와 종가입준宗哥立遵이 강대强大해지기 시작하여, 종가입준宗哥立遵이 방물方物을 바치고 찬보贊普라는 칭호稱號를 내려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공公이 조정에 글을 올려 진언進言하기를 “오랑캐들은 욕심이 끝이 없으니, 그 요구를 이루게 되면 반드시 중국을 깔보게 될 것입니다.” 하니, 대신大臣들이 그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결정을 못하고 있다가, 때마침 공의 상서가 이르자 마침내 그들의 요구를 허락하지 않고, 전례前例를 따라서 보순군절도사保順軍節度使로 임명하였다.
공께서 “내가 종가입준宗哥立遵을 잘 아는데, 다시 우리 국토를 침구侵寇할 것이니, 우리는 군사軍士를 조련하여 이에 대비해야 한다.”라고 말하였는데, 과연 종가입준宗哥立遵이 그의 외숙外叔 상양단賞樣丹을 시켜서 오래 전에 귀부歸附한 숙호熟戶의 추장 곽시돈郭厮敦을 불러 향도嚮導로 삼아서 침구侵寇해왔다.
이에 공公이 즉시 상양단賞樣丹을 설득하여 곽시돈郭厮敦을 사로잡으면 그가 다스리던 고을을 영유領有하도록 허락하겠다고 하니, 상양단賞樣丹이 마침내 곽시돈郭厮敦을 죽였다.
공公은 상양단賞樣丹을 영주자사潁州刺史로 임명하기를 주청奏請하였고, 상양단賞樣丹이 또한 남시성南市城을 빼앗아 이를 바쳤다.
이보다 앞서 장길張吉이 진주秦州의 지사知事로 있을 때에 숙호熟戶 노릇을 하던 강족羌族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종가입준宗哥立遵 쪽에 붙어서 간첩間諜활동을 하며 사단을 일으켰는데, 공公이 상양단賞樣丹(郭厮敦의 오기誤記인 듯함)을 처형하자 모두 두려워하며 황급히 도피하였다.
공公이 그들 가운데 속전贖錢을 납부하고 자수自首한 자들에게 옛날 살던 땅으로 돌아오는 것을 허락하니, 고지故地로 되돌아온 사람들이 수천數千에 이르렀고, 그 후後에는 드디어 순복順服하여 이들을 모두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었다.
이듬해가 되자 곡시라唃厮囉와 종가입준宗哥立遵이 공公의 예측대로 무리를 총동원하여 10만 대군이라 칭하면서 삼도곡三都谷으로 침구侵寇하였다.
공公이 세 장수를 거느리고 이들을 격파하고 패배한 적군을 추격하여 사주沙州에 이르니, 사로잡거나 죽인 적군이 만여萬餘 인人이었다.
이 사실이 보고되자 객성사客省使 강주방어사康州防禦使에 제수除授되었다.
그 후에 또 마파질랍馬波叱臘과 귀류鬼留 등 강족羌族의 추장들을 격파擊破하여 없애버리니, 곡시라唃厮囉와 종가입준宗哥立遵이 드디어 궁곤窮困해지고 고립孤立되어 사막沙漠 가운데로 달아났는데, 공公이 농상隴上 지역의 영토를 개척하고 궁문弓門과 위원威遠 등 모두 열 곳에 성채城寨를 세우니, 이때부터 진주秦州 사람들이 전쟁에 시달리는 일이 없게 되었다.
천희天禧 3년(1019)에 중앙으로 불러들여 화주관찰사華州觀察使를 제수除授하였다가, 서쪽 변방 사람들이 공公을 신뢰하고 의지하므로 다시 부연로마보군도부서鄜延路馬步軍都部署에 임명하였다.
4년에 선휘북원사宣徽北院使 진국군절도관찰유후鎭國軍節度觀察留後 첨서추밀원사簽署樞密院事에 제수除授되었는데, 정진공丁晉公이 국권國權을 휘두르면서 자기편에 붙지 않는 사람들을 차츰차츰 제거하였다.
구래공寇萊公을 폄출貶黜시키고 나서는 공公을 그의 당여黨與로 지목하여 선휘남원사宣徽南院使로 바꾸었다가 환경로도부서環慶路都部署로 내보냈고, 또다시 용주관찰사容州觀察使 지내주知萊州로 강임降任시켰다.
그 후 정진공丁晉公이 폄직貶職을 당하게 되자, 곧 공公을 화주관찰사華州觀察使 지청주사知靑州事로 삼았다.
천성天聖 3년(1025)에 창화군절도관찰유후彰化軍節度觀察留後 지천웅군知天雄軍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지영흥군知永興軍으로 옮겼는데, 조서詔書를 내려 조정朝廷으로 불러들여 도착하자마자 소무군절도사昭武軍節度使를 제수하고 다시 임지任地로 돌아가게 하였다.
천성天聖 5년에는 질병疾病을 이유로 지맹주사知孟州事가 되기를 청하여 뜻을 이루었는데, 때마침 일의 처리에 대하여 진언한 사람이 있어서, 공公이 역전의 장수로서 위명威名이 있는데 이런 사람을 한가한 자리에 있게 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니, 이에 진정로마보군도부서眞定路馬步軍都部曙 지정주知定州로 바꾸었다.
7년에 창무군절도사彰武軍節度使로 바뀌었고, 8년 정월正月에 그 지위에 계시면서 훙薨하셨으니, 향년享年이 58세였다.
황제皇帝께서는 공公을 위해 양일간兩日間 조정朝廷의 업무를 중단하셨고, 시중侍中으로 추증追贈하고 무목武穆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리셨다.
공公이 장수將帥 노릇을 하신 것이 거의 40년인데, 전쟁에 일찍이 패배한 일이 없었고, 서방西方 강족羌族과의 전쟁에 더욱 공로가 컸다.
전前에는 강족羌族이 중국 사람을 죽이고서 양이나 말을 바치면 사형을 면해주기를 강족羌族의 법法대로 하였는데, 공公께서는 이와 같이 하는 것은 중국中國을 높이고 우리 인민人民을 아끼는 도리가 아니라고 여기셔서, 속죄贖罪를 허용하지 말 것을 주청하였다.
또 내부內附한 여러 강족羌族의 추장을 보임補任하여 해당 종족種族의 상군주上軍主로 삼고 훈계勳階와 작질爵秩을 왕관王官에 준準하도록 해주기를 청하였는데, 그것이 지금까지 모두 법法으로 정해져서 시행되고 있다.
섬서陝西 지방에서는 매년 국경國境지대에 사는 사람들을 데려다가 궁전수弓箭手로 부리면서도 대가代價를 지급한 일이 없었는데, 공公이 변경邊境의 농사를 짓지 않는 땅을 주기로 하고 사람을 모집하여 그 일을 하도록 하고, 약간 묘畝를 지급받았으면 병정兵丁 한 사람을 내고, 약간 묘畝를 지급받았으면 말 한 필匹을 내도록 하였는데, 그때에 제정된 세렴稅斂과 발병發兵 및 수수戍守에 관한 제도는 변경邊境 지방에서 지금에 이르도록 이를 근거로 시행施行하고 있으며, 이렇게 모집한 사람들이 모두 정병精兵이 되었다.
지위주知渭州로 계실 때에 농외隴外 땅을 취取하여 농간천籠干川에 성城을 쌓고 군사를 배치하여 지키게 하고 “뒷날에 마땅히 이 성城을 유용有用하게 쓸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셨는데,
이원호李元昊의 반군叛軍이 빈번하게 출몰함에 이르러 마침내 농간천성籠干川城이 덕순군德順軍의 지휘소指揮所가 되었으며, 농성隴城 이서以西 지방에 공公께서 조치해놓으신 일들을 후인後人들이 모두 편리하게 활용하였다.
삼도곡三都谷의 전투 이후부터 위명威名이 온 천하에 진동하니, 곡시라唃厮囉까지도 공公의 성명姓名을 들으면 계신 곳을 향하여 손을 이마에 대고 경의敬意를 표하였다.
공公께서 지천웅군知天雄軍으로 계실 때에, 거란契丹의 사신使臣이 위주魏州 땅을 지나가면서 종자들을 단속하여 큰 소리로 떠들지 못하게 하였고, 급히 말을 몰고 가면서 많은 이들이 공公을 두려워하여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였다.
거란契丹이 화약和約을 청請하자 이를 들어주고는, 진종眞宗께서 전쟁에 관한 일을 더욱 신중하게 처리하셔서, 변방邊方의 일에 대한 보고가 있게 되면 손수 조서詔書를 내려 힐난詰難하시면서 십여 차례씩 되돌려 보내셨으나, 공公께서 번번이 같은 주장을 고수固守하니 끝내 그 뜻을 꺾을 수가 없었다.
진종眞宗께서는 그 후에 더욱 신뢰信賴하고 건의建議를 받아들여, 변방邊方의 일에 관한 의론議論이 있게 되면 왕왕往往 은밀하게 공公에게 가부可否의 판단을 맡겼다.
공公은 글 읽기를 좋아하셔서 가는 곳마다 서적을 몇 수레씩 싣고 갔으며,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등에 두루 능통하였고, 특히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정통精通하셨다.
처음에 반씨潘氏를 부인夫人으로 맞이하여 풍익군부인馮翊郡夫人이 되셨는데, 충무군절도사忠武軍節度使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한국공韓國公 미美의 따님이시다.
후後에 심씨沈氏를 맞이하여 안국태부인安國太夫人이 되셨는데, 옛 재상宰相이었던 좌복사左伏射 윤倫의 손녀孫女이고, 광록소경光祿少卿 계종繼宗의 따님이시다.
아들이 넷인데, 희僖는 예빈사禮賓使 지의주사知儀州事로 있다가 이원호李元昊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 계책을 내어 대장大將을 설득하였으나 채납採納되지 못하고, 도리어 벌을 받아서 소주韶州로 좌천左遷되었다가 사망死亡하였다.
오俣는 공비고부사供備庫副使로 있을 때에 와정천瓦亭川에서 이원호李元昊의 반란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하니, 영주자사寧州刺史에 추증追贈되었다.
딸이 하나인데, 사방관사四方館使 영주자사榮州刺史인 왕덕기王德基에게 출가하였다.
손자孫子가 다섯인데, 량諒과 풍諷은 동두공봉관東頭供奉官이고, 의誼는 우시금右侍禁 합문지후閤門祗候이며, 서諝는 삼반봉직三班奉職이고, 자諮는 우반전직右班殿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