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야 略得數百人
하야 以屬皇考
태사太師하니 태사太師哀憐之
하야 悉縱去
하고 因自脫歸
중국中國하다
天
태자솔부솔子以爲
정신廷臣하야 積官至
以終
하니 爲人
이 沈悍篤實
하야 不苟爲笑語
러라
公少卓犖有大志하고 好讀書하야 書未嘗去手하야 無所不讀하고 蓋亦無所不記러라
其爲문장文章에 得紙筆立成하고 而閎博辨麗로 稱天下하니라
하다 後數年
에 遂中甲科
하야 補
강녕부江寧府관찰추관觀察推官이라가 以母
영국부인英國太
영국부인夫人喪
으로 罷去
하다
除喪하고 補초주단련판관楚州團練判官이러니 用擧者監轉般倉하고 遷비서성저작좌랑秘書省著作佐郞하다
하야 遷
태상승太常丞이라가 통판通判강녕부江寧府하야 數上書言事
하니 召還
하야 將以爲
간관諫官이러라
方是時
하야 조원호趙元昊反
하니 이 經略
섬서陝西하야
言신臣等才力薄하야 使事恐不能獨辦하니 請得전田某自佐하노이다하니
以公爲其판관判官하야 직집현원直集賢院 참도총관군사參都總참도총관군사管軍事하다
自眞宗弭兵으로 至是且四十年이라 諸老將盡死하고 爲吏者不知兵法하야 師數陷敗하니 士民震恐이어늘 二公隨事鎭撫하야 其爲世所善하니 多公計策이러라
大將有欲悉數路兵하야 出擊賊者한대 朝廷許之矣어늘 公極言其不可하야 乃止하다
還爲우정언右正言하고 판삼사리흠判三司理欠 빙유사憑由司라가 權修起居注하고 遂지제고知制誥 판국자감判國子監하다
於是
에 섬서陝西用兵未已
하야 人大困
하니 以
한공公추밀부사副今
재상宰相 하다
自
선무부사宣撫歸
하야 이러니 而
하북河北告兵食闕
이어늘 又以公往視
하다
而邢(보주保)보주州兵용도각직학사士殺通判하고 閉城爲亂이어늘 又以公爲용도각직학사龍圖閣直學士 지성덕군진정부知成德軍眞定府 정주안무사定州安정주안무사撫使하야 往執殺之하니
論功하야 遷기거사인起居舍人이라가 又移진봉로도총관秦鳳路都總진봉로도총관管 경략안무사經略安경략안무사撫使 지진주知秦州하다
遭
태사공太師喪
하야 辭起復者久之
러니 上使中貴人
으로 手勅
태사공公하니
公不得已하야 則乞歸葬然後起하다 旣葬에 託邊事求見上하야
曰陛下以孝治天下하시고 方邊鄙無事하며 朝廷不爲無人이어늘
而區區犬馬之心을 尙不得自從하시니 臣卽死知不瞑矣로소이다 因泫然泣數行下하니
以추밀직학사樞密直學士로 爲경원로병마도총관涇原路兵馬都總경원로병마도총관管 경략안무사經略安경략안무사撫使 지위주知渭州하고 遂自尙書禮部郞中으로 遷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지성도부知成都府하야 充촉蜀재梓이利기로夔경원로병마도총관路兵馬병마검할鈐轄하다
西南夷侵邊이어늘 公嚴兵憚之하고 而誘以恩信하니 卽皆稽顙하다
으로 遂號爲易動
이어늘 往者得便宜決事
하야 而多擅殺以爲威
하야 至雖小罪
라도 猶幷妻子遷出之
촉蜀하니 流離顚頓
하야 有以故死者
라
公拊循敎誨
하고 兒女子畜其人
하며 至有甚惡
이라야 然後繩以法
하니 촉蜀人愛公
하고 以繼
하야 而謂公所斷治 爲未嘗有誤
라하다
歲大凶에 寬賦減徭하고 發廩以救之하야 而無餓者하니 급사중事聞에 賜상서예부시랑書獎諭하다 遷급사중給事中이라가 以수어사중승守御史中丞 充이검사理檢使召焉이러니 未至에 以爲추밀직학사樞密直學士 권삼사사權三司使하고 旣而又以爲용도각학사龍圖閣學士 한림학사翰林學士라가 又遷상서예부시랑尙書禮部侍郞하야 正其이검사使號하다
於是에 入多경덕景德矣로되 歲所出이 乃或多於入이라 公以謂 厚斂疾費如此면 不可以持久나
然欲有所掃除變更하고 興起法度하야 使百姓得完其蓄積하고 而縣官亦以有餘는 在上與執政所爲요 而主計者 不能獨任也라
故爲황우회계록皇祐會計錄上之하야 論其故하야 冀以寤上하다
上固恃公하야 欲以爲大臣이러니 居頃之에 遂以爲추밀부사樞密副使라가 又以검교태부檢校太傅充추밀사樞密使하다
公自常選으로 數年遂任事於時하고 及在樞密爲之使하야 又超其正하니 天下皆以爲宜로되 顧尙有恨公得之晩者러라
公行內修하야 於諸弟尤篤하고 爲人寬厚長者라 與人語에 款款若恐不得當其意로되
自강녕통판江寧歸에 재상宰相私使人招之호되 公謝不往하다
及爲간관諫官하야 於小事近功은 有所不言하고 獨常從容爲上言爲治大方而已러라
범문정공范文正公等이 皆士大夫所望以爲범문정공公卿호되 而其位未副러니 범문정공公得間하야 輒爲上言之라 故범문정공文正公等이 未幾에 皆見用하다
當是時
하야 上
以天下事責大臣
하야 慨然欲有所爲
하니 蓋其志多自公發
이러라
公所設施에 事趣可하야 功期成이면 因能任善하야 不必己出하고 不爲獨行異言하야 以峙聲名이라
故功利之在人者多로되 而事迹可記者는 止於如此니라
가우嘉祐三年十一月에 暴得疾하야 不能興하니 上聞悼駭하사 勅中貴人하야 태의太醫問視하고 疾加損을 輒以聞하시다
公卽辭謝하고 求去位하야 奏至十四五호되 猶不許어늘 而公求之不已하니 乃以爲상서우승尙書右丞 관문전학사觀文殿學士 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 제거경령궁사提擧景靈宮事하다 而公求去位終不已라 於是에 遂以태자소부太子少傅致仕하다
致仕凡五年에 疾遂篤하야 以八年二月乙酉에 薨于第하니 享年五十九라
號推誠태자태보保德功臣하고 階특진特進하며 勳上柱개국경조군공國하고 爵개국경조군공開國京兆郡公하야 食邑三千五百戶에 實封八百戶하고 詔贈개국경조군공公태자태보太子太保하야 而賻賜之甚厚하다
皇曾祖諱우祐니 贈태보太保하고 皇祖諱행주行周니 贈태부太傅하고 皇考諱연소延昭니 贈태보太師하다
妻
부씨富氏는 封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하니 今
之女弟也
라
無男子하야 以弟之子지안至安爲主後하고 女子一人은 尙幼라
전씨田氏는 自태사太師始占其家開삼봉향封하야 而葬양적陽翟이라 故今以公從태사太師하야 葬양적陽翟之삼봉향三封鄕서오리西吳里하다
於是에 公弟우찬선대부右贊善大夫순洵來하야 曰卜葬公利四月甲午하니 請所以誌其壙者하노라
蓋公自佐강녕江寧으로 以至태수守촉蜀히 在所輒興學하고 數親臨之하야 以進諸生하다
某少也에 與公弟游하고 而公所進은 以爲可敎者也일새 知公爲審이라
이런 묘지명墓誌銘은 한유韓愈나 구양수歐陽脩가 미칠 수 없는 경지이다.
전씨田氏는 과거에 경조京兆(서울) 사람이었는데, 후後에 신도信都로 옮겼다.
후진後晉에 난亂이 일어났을 때에, 태부太傅로 계시던 공公의 조부祖父께서 거란契丹으로 들어갔다.
경덕景德 초初에 거란契丹이 전주澶州를 침로侵虜하여 수백數百 인人을 사로잡아서, 당시當時에 거란契丹 태사太師로 계시던 공公의 선친先親에게 처분을 맡기니, 태사太師께서 이들을 가련하게 여겨서 모두 풀어주어 돌아가게 하였고, 그 일 때문에 자신도 거란契丹에서 탈출하여 중국中國으로 돌아왔다.
천자天子께서는 그를 정신廷臣으로 삼아서 벼슬이 계속 올라 태자율부수太子率府率에 이르러 졸卒하였는데, 사람됨이 침착沈着 용맹勇猛하고 독실篤實하면서도, 우스개 이야기도 거리낌없이 하였다.
아들 여덟을 두었는데, 이름이 알려진 이가 많았고, 공公이 그 가운데 장남長男이다.
공公은 어렸을 때에 비범非凡하게 뛰어났으며, 큰 뜻을 품고 책 읽기를 좋아하여 책이 손에서 떠난 일이 없고, 읽지 않은 책이 없었으며, 대체로 읽은 것은 또한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문장文章을 짓게 되면 지필紙筆을 마련하자마자 즉시 완성하였으며, 글이 웅장雄壯 해박該博하고 분명하면서도 아름다워서 천하의 칭찬을 받았다.
처음 진사시進士試에 응시하여 학구과學究科의 동학구同學究 출신으로 벼슬에 나가게 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가, 수년 후에 드디어 갑과甲科로 합격하여 강녕부江寧府 관찰추관觀察推官에 보임補任되었는데, 어머니인 영국부인英國夫人의 상喪을 당하여 그만두고 물러났다.
상기喪期를 마치고 초주단련판관楚州團練判官에 임명任命되었고, 전반창轉般倉의 감독을 맡도록 천거薦擧한 사람이 있어서 이를 감독하게 되었으며, 비서성저작좌랑秘書省著作佐郞으로 옮겼다.
그 후 또 현량방정과賢良方正科의 대책對策에 1등等으로 합격하여 태상승太常丞으로 옮겼다가 강녕부江寧府의 통판通判이 되었는데, 여러 차례 상서上書하여 사안事案에 대하여 간언諫言을 하자, 중앙으로 불러들여서 장차 간관諫官으로 삼으려 하였다.
그때 마침 조원호趙元昊의 반란反亂이 일어나서 하영공夏英公(夏竦)과 범문정공范文正公(范仲淹)이 섬서陝西의 경략經略이 되었는데,
상언上言하기를 “신臣 등의 재능과 능력이 부족하여 일 처리에 독자적인 판단을 제대로 못할까 두려우니 전田 아무개가 저희들을 보좌하게 해주시기를 청합니다.” 하였으므로,
공公으로 그 판관判官을 담당하게 하여 직집현원直集賢院 삼도총관군사參都摠管軍事가 되었다.
진종眞宗 때에 전쟁을 그치고부터 이때에 이르기까지 40년 사이에 전쟁경험이 있던 노장老將들은 모두 죽고, 관리官吏가 된 자들은 병법兵法을 알지 못하여 군사軍士들이 여러 차례 패전敗戰하니 사민士民들이 크게 두려워하였는데, 두 공公께서 사안事案에 적합하게 진무鎭撫하여 세상에서 잘 처리한다는 칭예稱譽를 듣게 되었으니, 그 가운데 많은 부분이 공公이 낸 계책計策대로 한 것이었다.
그때 대장大將 가운데 몇 개個 노路의 군사軍士들을 총동원하여 나아가 적敵을 치고자 한 사람이 있자 조정朝廷에서 이를 허락하였으나, 공公이 그 불가不可함을 극언極言하여 드디어 중지하게 하였다.
또 변방邊方을 다스릴 기본이 되는 14조항條項을 아뢰자, 받아들여 정책에 활용한 것이 많았다.
중앙中央으로 불러들여서 우정언右正言을 제수하고 판삼사리흠判三司理欠 빙유사憑由司를 삼았다가 권수기거주權修起居注에 임명되었고, 다시 지제고知制誥 판국자감判國子監이 되었다.
이때에 섬서陝西의 전쟁이 끝나지 않아서 백성들이 크게 곤경을 겪게 되니, 공公으로 당시의 재상宰相인 추밀부사樞密副使 한공韓公(韓琦)의 선무宣撫를 보좌하는 선무부사宣撫副使의 일을 담당하게 하였다.
선무부사宣撫副使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판삼반원判三班院이 되었는데, 하북河北에서 군량軍糧이 모자란다고 보고하니, 다시 공公에게 가서 살펴보도록 하였다.
그 후 보주保州의 병사들이 통판을 살해하고 성문城門을 닫고 난亂을 일으키니, 다시 공公이 용도각직학사龍圖閣直學士 지성덕군진정부知成德軍眞定府 정주안무사定州按撫使가 되어, 임지任地에 부임하여 그들을 잡아 처형하였다.
그 공功으로 기거사인起居舍人으로 옮겼다가 다시 진봉로도총관秦鳳路都摠管 경략안무사經略按撫使 지진주知秦州로 옮겼다.
부친인 태사공太師公의 상喪을 당하여 사임辭任하자, 상기喪期를 다 마치기 전에 벼슬에 복귀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오래도록 사양하니, 황상皇上께서 궁중宮中의 귀인貴人을 파견하여 손수 조칙詔勅을 전하면서 빨리 복귀하도록 공公에게 재촉하셨다.
이에 공公은 어쩔 수 없이 장례를 모신 이후에 출사하도록 허락해달라고 청하고, 장례를 마치자 변방邊方의 일을 이유로 하여 황상을 알현하기를 청하면서
“폐하께서 효孝를 통치의 기본이념으로 하여 천하를 다스리고 계시고, 지금 변방에 전란이 없으며, 조정에 사람이 없지도 않은데,
이 하찮은 충심忠心을 가진 신臣에게 오히려 상기喪期를 마칠 수도 없게 하시니, 신臣은 곧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나이다.” 하면서 줄줄 눈물을 흘렸다.
황상께서 그 모습이 매우 수척해졌음을 보시고 또 그가 하는 말을 들으시자 비감해하시면서 드디어 상기喪期를 마칠 때까지 벼슬에서 물러나 있겠다는 뜻을 들어주셨다.
장수將帥인 신하가 상기喪期를 마칠 때까지 물러나 있을 수 있게 된 것이 공公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상기喪期를 마치자 추밀직학사樞密直學士로서 경원로병마도총관涇原路兵馬都摠管 경략안무사經略按撫使 지위주知渭州에 임명되었고 마침내 상서예부낭중尙書禮部郎中에서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지성도부知成都府로 나가서, 촉蜀‧재梓‧이利‧기로夔路의 병마검할兵馬鈐割의 직임職任을 담당하게 되었다.
서남방西南方의 오랑캐들이 변방을 침노하니, 공公이 군사들을 엄하게 단속하고 그들을 은애恩愛와 신의信義로 진무鎭撫하자, 오랑캐들 모두가 이마를 조아리며 복속하였다.
촉蜀 땅에서 왕균王均과 이순李順이 거듭 난亂을 일으키면서 드디어 세상을 바꾸게 되었다고 외쳤는데, 이를 진압하러 간 장수들이 전권을 가지고 일을 처리하면서 함부로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 위엄을 드러내려는 사람이 많아서, 가벼운 죄를 범했을 뿐인데도 오히려 처자들까지 모두 촉蜀 땅에서 내쫓는 일이 일어나, 가족들이 헤어져서 골짜기에 굴러 엎어져서 이 때문에 죽는 사람들도 있게 되었다.
이에 공公은 이들을 위무慰撫하고 가르쳐 타이르며 그 사람들을 어린 자식처럼 보살펴주고, 심한 악행을 자행한 일이 있은 연후에야 법에 맞게 다스리니, 촉蜀 땅 사람들이 공公을 사랑하게 되었고, 장충정張忠定(張詠)이 이런 정책을 계승하고 말하기를 “공公이 판단하고 다스린 일에 일찍이 오류를 범한 일이 없었다.” 하였다.
큰 흉년이 들자 부세賦稅의 징수를 늦춰주고 요역徭役을 줄여주며 곡식창고를 열어서 구제해주어 아사餓死한 사람이 없게 되었는데, 이 일이 조정에 보고되자, 황상께서 장려하는 유시諭示의 글을 내리시고, 급사중給事中으로 옮겨서 수어사중승守御史中丞으로 이검사理檢使에 충원하고자 소환하였다가, 도착도 하기 전에 추밀직학사樞密直學士 권삼사사權三司使에 임명하였고, 그 후에 또 용도각학사龍圖閣學士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임명하였다가, 다시 상서예부시랑尙書禮部侍郞으로 옮기고 정식正式으로 삼사사三司使의 명호名號를 수여하였다.
경덕景德 연간年間부터 재물의 관리와 출납에 관한 일을 삼사三司에서 맡았지만, 공公이 삼사사三司使가 됨에 이르러 비로소 다시 재물에 대한 부세賦稅를 살펴서 그 출납을 모두 주관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세입이 경덕景德 연간年間보다 더 많아졌으나, 1년간의 세출이 세입보다 많은 경우도 있게 되니, 공公은 ‘많이 거두고도 이처럼 세입보다도 더욱 많이 지출하게 되면, 이를 오래 지탱할 수가 없다.
그러나 옛 제도를 개혁하여 변경하고 새로운 법도法度를 세우며, 백성들로 하여금 재화財貨의 축적을 온전하게 하고 조정 또한 풍부하게 하고자 하는 일은, 황상皇上과 집정執政이 할 일이지 회계를 주관하는 사람이 독단적으로 맡아 처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하였다.
그 때문에 〈황우회계록皇祐會計錄〉을 지어 바치면서 그 이유를 설명하고, 이 문제를 위에서도 깨닫게 되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황상皇上께서는 본시 공公을 신뢰하여 대신大臣으로 삼고자 하였으므로, 얼마 있다가 드디어 공公을 추밀부사樞密副使로 삼았다가, 다시 검교태부檢校太傅 추밀사樞密使의 직임을 담당하게 하였다.
공公이 정기적으로 관리를 선발하는 일을 맡고부터 당시에 수년간 그 일을 독담하여 처리하였고, 추밀樞密에서 최고위직最高位職인 사使에 오른 것은 또한 정상적正常的인 승진절차를 뛰어넘은 것이었으나, 천하 사람들은 모두 이를 당연하게 여기고, 도리어 공公이 그 지위를 얻은 것이 너무 늦었다고 한恨스러워 하는 사람도 있었다.
공公은 자신의 행실을 닦아 여러 형제들을 더욱 후하게 대하였고, 사람됨이 관인寬仁 후덕厚德한 훌륭한 분이었으며,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에는 정성을 다하며 마치 그 뜻을 감당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듯이 하였다.
그가 신념을 가지고 지키는 것에 이르러서는 아무도 그의 뜻을 꺾을 수가 없었다.
강녕통판江寧通判으로 있다가 돌아왔을 때에 재상宰相이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초대하였으나 공公은 이를 사절하고 가지 않았다.
간관諫官이 되어서는 작은 일로 공功을 세울 만한 것은 말한 일이 없고, 홀로 언제나 황상皇上께 천하天下를 다스릴 원대遠大한 방략方略에 대하여 조용히 말씀드릴 뿐이었다.
범문정공范文正公(范仲淹) 등等은 사대부士大夫들이 모두 공경公卿이 되기를 바라는 바였지만 이에 부합되는 지위를 얻지 못하고 있었는데, 공公이 알현謁見할 기회를 얻자 즉시 황상皇上께 이를 건의하였고, 그 때문에 문정공文正公 등이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임용되었다.
이때를 당하여 황상皇上께서 자주 천하사天下事에 대하여 대신들에게 완비를 요구하면서 개연慨然히 이루고자 하는 바가 있었는데, 황상皇上의 이런 뜻이 공公의 건의에서 나온 것이 많았다.
공公이 베풀어 시행한 일 가운데, 일이 빨리 실현되어서 공적功績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할 수 있는 것들은, 이를 잘할 만한 사람에게 맡기고, 굳이 스스로 나서지 않았으며, 홀로 이를 행하거나 별도로 건의를 해서 성명聲名을 드날리려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공덕功德과 이익利益이 있게 한 것이 많았으나 그분의 사적事跡으로 기록할 만한 것은 이 정도에 그칠 뿐이었다.
가우嘉祐 3년(1058) 11월에 갑자기 병을 얻어서 일어날 수가 없게 되니, 황상皇上께서 들으시고 크게 놀라 슬퍼하시며 고위高位 환관宦官에게 명하여 태의太醫가 치료를 맡게 하고, 병이 더하거나 차도가 있을 때에는 즉시 이를 보고하게 하셨다.
공公은 즉시 이에 감사를 드리고 사양하면서 벼슬에서 떠남을 허락해주기를 청하는 상주上奏를 열네댓 차례나 올렸으나 허락하지 않았으며, 그런데도 공公이 청하기를 그치지 않으니, 이에 상서우승尙書右丞 관문전학사觀文殿學士 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 제거경령궁사提擧景靈宮事에 임명하였으나, 공公이 벼슬에서 떠나기를 청하는 상주上奏를 끝내 중단하지 않자, 이에 드디어 태자소부太子少傅로 벼슬에서 물러남을 허락받게 된 것이다.
치사致仕한 지 5년이 되어 병이 더욱 위독해져서 가우嘉祐 8년 2월 을유일乙酉日에 사저私邸에서 훙薨하니 향년享年이 59세였다.
추성보덕공신推誠保德功臣의 호號를 내리고 품계品階는 특진特進, 훈勳은 상주국上柱國, 작爵은 개국경조군공開國京兆郡公으로 하고, 식읍食邑 3,500호戶에 실봉實封 800호戶를 내리고, 조서詔書를 내려서 공公을 태자태보太子太保에 증직贈職하고, 상사喪事에 쓸 재물을 매우 넉넉하게 내리셨다.
증조고曾祖考의 휘諱는 우祐이고 태보太保에 증직贈職되었고, 조고祖考의 휘諱는 행주行周이고 태부太傅에 증직贈職되었으며, 부친父親의 휘諱는 연소延昭이고 태사太史에 증직贈職되었다.
부인夫人은 부씨富氏로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에 봉封해졌고, 현재 재상宰相으로 계신 하남공河南公(富弼)의 매씨妹氏이다.
아들이 없어서 아우의 아들인 지안至安을 후계자로 삼았으며, 딸이 하나 있으나 아직 어리다.
전씨田氏는 태사太史 때에 처음으로 그 집안이 개봉開封에 정착하고 양적陽翟에 묘墓를 썼으므로, 이제 공公도 태사太史를 따라서 양적陽翟의 삼봉향三封鄕 서오리西吳里에 안장安葬하였다.
이에 공公의 아우님인 우찬선대부右贊善大夫 순洵이 찾아와서 말하기를 “점占을 쳐서 길吉하고 이利로운 4월 갑오일甲午日에 공公을 안장하였으니, 그분의 분묘墳墓에 세울 묘지명墓志銘을 지어주시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대체로 공公이 강녕江寧의 보좌관輔佐官으로 계실 때부터 촉蜀 땅의 태수太守가 됨에 이르기까지 머물렀던 곳마다 즉시 학교를 세우고 친히 자주 방문하여 제생諸生들을 독려하였다.
나는 젊었을 때에 공公의 아우님과 친교를 맺었고, 공公이 추천한 사람은 가르칠 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공公을 자세히 알게 된 것이다.
전씨田氏 집안은 제齊나라에서 끝까지 장구長久하게 존귀한 복록을 누렸다가,
그 후 후손들이 오랫동안 기록된 이가 없었는데,
송대宋代에 이르러 연이어 현달顯達해졌으니, 공公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네.
그 꽃다운 능력을 발휘하여 아름다운 업적을 이루도록 보좌하였고,
제업帝業을 발전시켜, 깊고 웅장하고 우뚝하게 빛이 났네.
이에 등용되어 황상皇上을 보좌하며, 재상宰相으로 천하의 정사政事를 주재하였네.
문치文治로 교화하고 무위武威로 제압하여, 내외內外가 복종하여 따르게 되었네.
또한 높은 자리에 올랐으니, 어찌 뭇사람들의 모함이 없었으리오마는
공公만이 저들을 잘 부려서, 자신에게 영예를 더해줄 사람인 것같이 대하였네.
옛적 황고皇考께서는 사람들 살려주는 일에 과감하였고,
그 복福이 공公에게 전해졌으나 자신이 다 누리려 하지 않았네.
공公은 또 칭예가 많았으니, 공公은 의당 장수長壽를 누리셔야 마땅한데,
어찌 이다지도 위태한 병이 들어 장수長壽하지 못하게 하였는가.
이 명銘을 유택幽宅에 묻으면서, 영구히 평안平安하시기를 고告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