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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王安石(1)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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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臣某하노이다
三月二日 朱炎 傳聖旨하야 令臣便視府事者니이다
使指遄臻하야 訓詞俯逮어늘 敢圖衰疾하야 尙誤眷存이로소이다
(中謝) 伏念臣 曲荷搜揚이나 久孤付屬이라
有能必獻이면 未嘗擇事而辭難하고 無力可陳이면 乃始籲天而求佚하니이다
然方焦思有爲之日 以此懷恩未報之身으로 苟營燕安이면 豈免慙悸리잇가
伏蒙陛下仁惟求舊하니 義不忘遐어늘 乃因乘軺將命之臣하야 更喩推轂授方之意로소이다
踦履無用이어늘 하시니 朽株匪材 尙奚勝於리오마는
永惟獎勵하야 徒誓糜捐하노이다


06. 주염朱炎의 일을 주재하도록 하는 성지聖旨를 전한데 감사하는
는 말씀을 올리나이다.
3월 2일에 제거강남로提擧江南路 태상승太常丞 주염朱炎이 전한 성지聖旨에, 신에게 즉시 의 사무를 주재하도록 명하셨습니다.
조정의 명령이 급히 내려와 가르침의 말씀이 아랫사람에게 이르렀으나, 감히 쇠질衰疾을 치료하느라 오히려 돌보아 주시는 뜻을 그르친 듯합니다.
(中謝)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신은 발탁 등용해 주신 은혜를 입었으나 오랫동안 분부하신 뜻을 저버렸습니다.
반드시 헌책獻策할 만한 것이 있으면 일찍이 일을 택하여 어려움을 사양하지 않았고 펼칠 만한 능력이 없으면 곧 황상께 호소하며 은둔隱遁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이 바로 마음을 다하여 일을 이룸이 있어야 하는 때이고, 이를 은혜롭게 여기면서도 보답을 못하였으며 구차하게 안일安逸만을 추구하였으니, 어찌 부끄럽고 두려움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폐하의 옛 신하를 찾으시는 어지신 은혜를 입었으니 의리상 멀리 있는 소신이 이를 잊지 않아야 하는데, 이에 초거軺車가 달려와 효유曉諭하면서 한 지방을 다스리라는 임무를 수여하였습니다.
외짝 신은 쓸모가 없으나 진실로 차마 버리지는 않으셨고, 썩은 그루터기처럼 쓸모가 없는데도 오히려 능력을 헤아려 부리려 하시니, 어찌 이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면려勉勵하시는 뜻을 영원히 유념하고, 다만 이 생명을 다 바칠 것을 맹세합니다.


역주
역주1 朱炎傳聖旨令視府事謝表 : 神宗이 朱炎을 江寧으로 보내어 왕안석으로 하여금 府의 일을 住持하도록 명하자, 熙寧 10년(1077) 3월에 이 表를 올렸다.
역주2 提擧江南路 : 提擧는 宋代에 설치한 특정 업무를 주관하는 提擧官으로, 여기서는 江南路의 특정업무를 주관하는 관원을 칭한다.
역주3 太常丞 : 禮樂, 郊廟, 社稷, 陵寢 등을 관장하는 太常寺에서 太常寺卿과 少卿을 보좌하는 職任을 가진 관원이다.
역주4 誠弗忍於棄捐 : 賈誼의 《新書》 〈諭誠〉에, 옛 楚 楚王이 吳와 전쟁을 하다가 패하여 후퇴할 때에 신발 한 짝이 찢어져 벗겨지자, 30보 쯤 달아나다가 다시 돌아와 그 신을 찾아 신었다. 그 후 좌우에서 묻기를, “왕께서는 어찌 외짝 신발을 그리 아까워하셨습니까?” 하니, 王이 “초나라가 비록 가난하지만 어찌 신 한 짝을 아까워하겠는가. 군사들과 함께 후퇴하려는 뜻으로 한 것이다.[昔楚昭王與吳人戰 楚軍敗 昭王走 屨決踦而行失之 行三十步 復旋取屨 及至于隋 左右問曰 王何曾惜一踦屨乎 昭王曰 楚國雖貧 豈愛一踦屨哉 思與偕反也]” 한 데서 따온 것으로, 무능한 신하이지만 버리지 않으시는 황제의 덕을 찬양한 것이다.
역주5 器使 : 《論語》 〈子路〉에 “군자는 섬기기는 쉬워도 기쁘게 하기는 어려우니, ……사람을 부리는 데는 그릇에 맞게 한다.[君子 易事而難說也……及其使人也 器之]”라고 한 데서 유래한 말로, 재주와 역량을 헤아려서 쓴다는 말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왕안석(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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