尙書祠
증공부원외랑部증공부원외랑郞中
증공부원외랑贈戶
증공부원외랑部侍
증공부원외랑郞으로 는 尙書駕
증공부원외랑部증공부원외랑郞中
으로 증공부원외랑贈衛尉卿
문울文蔚之子也
요 광주光州僊
선거현령居縣令으로 증공부원외랑贈工部員外郞諱
호岵之孫
이라
以상부祥符九年嫁하야 至천성天聖九年의 年三十二로 以八月壬辰卒하니 於其夫爲안주安州응성현주부應城縣主簿之時라
後三十七年의 爲희령熙寧元年八月庚申에 祔於其夫안륙安陸태평향太平鄕진현리進賢里之墓하다
於是夫人兩子니 미獼는 爲비서승秘書丞지유현사知담주潭州지유현사攸縣이요 해獬는 爲한림학사翰林學士 상서병부원외랑尙書兵部員外郞 지제고知制誥며 一女子는 嫁교사재랑郊社齋郞장몽산張蒙山하다
夫人敏於德하고 詳於禮하야 事皇姑稱孝하고 內諧外附하야 上下裕如러라
정공鄭公大姓이니 嘗以其富主四方之游士하야 至시랑侍郞則始貧而專於學하다
夫人又故富家로 盡其資以助賓祭하고 補紉澣濯하며 饎㸑朝夕하니 人有不任其勞苦로되 夫人歡終日하야 如未嘗貧이라
故시랑侍郞도 亦以自安於困約之時하야 如未嘗富러라
정씨鄭氏蓋將日顯矣어늘 而夫人不及其顯祿하니 嗚呼라
글 가운데 저상沮喪된 기운을 표현한 곳이 많고, 좋은 구절도 많다.
상서사부낭중尙書祀部郎中 증호부시랑贈戶部侍郞 안륙安陸 정씨鄭氏 휘諱 서紓의 부인夫人으로, 여남군태군汝南郡太君에 봉封해진 이씨李氏는, 상서가부낭중尙書駕部郎中 증위위경贈衛尉卿 문울文蔚의 따님이고, 광주光州 선거현령仙居縣令 증공부원외랑贈工部員外郞 휘諱 호岵의 손녀孫女이다.
상부祥符 9년(1016)에 출가出嫁하여 천성天聖 9년(1024)에 향년享年 32세로 8월 임신일壬申日에 졸卒하니, 그 부군夫君이 안주安州 응성현주부應城縣主簿로 있을 때였다.
37년 후인 희령熙寧 원년元年(1068) 8월 경신일庚申日에 안륙安陸 태평향太平鄕 진현리進賢里의 부군夫君 무덤에 합장合葬하였다.
부인夫人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미獼는 비서승秘書丞 담주潭州 지유현사知攸縣事이고, 해獬는 한림학사翰林學士 상서병부원외랑尙書兵部員外郞 지제고知制誥이며, 딸이 하나이니 교사재랑郊社齋郞 장몽산張蒙山에게 출가出嫁하였다.
부인夫人은 덕행德行에 민첩敏捷하고 예법禮法에 정통精通하여, 시어머님을 잘 섬겨서 효부孝婦로 칭송받았고, 집안을 화목하게 하고 집 밖 사람들과도 친숙하게 지내어, 윗사람에게나 아랫사람에게나 모두 넉넉하게 대하였다.
정공鄭公은 대성大姓으로 그의 재력財力으로 사방에서 찾아오는 나그네들의 접대에 충당하여, 시랑侍郞 때에 이르러 가난해지기 시작하니 학문에만 전심하게 되었다.
부인夫人 또한 과거 재력財力이 넉넉했던 집안으로, 그 재물을 다 동원하여 제사와 빈객접대에 썼고, 손님들의 옷을 기워주고 세탁해주며 조석朝夕으로 식사를 제공하는 일을 다른 사람들은 그 노고를 감내하지 못하는데, 부인은 날이 다하도록 기뻐하여 일찍이 가난을 겪어보지 않은 듯이 하였다.
그 때문에 시랑侍郞 또한 일찍이 부유함을 겪어보지 않은 듯이, 곤궁한 때에도 스스로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다.
정씨鄭氏가 그 후 날로 현달顯達해지게 되었으나, 부인夫人은 일찍 사거死去하여 그 현달顯達해져서 받게 된 봉록俸祿을 향유享有할 수가 없었으니, 아아!
부인을 장례 지낼 때에 임천인臨川人 왕모王某가 부인을 위해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지었다.
심원深遠한 인덕仁德은 준칙準則이 되었고, 유순柔順하면서 의태儀態가 계셨도다.
운명運命이 어떠하였기에, 장년壯年에 이르자마자 사거死去하셨는가?
순후淳厚하고 훌륭한 아드님들, 슬퍼하며 연모戀慕하고 그리워하네.
장엄하게 장례를 모셔 합장하고, 제사에 배향되어 공경恭敬을 받네.
슬픔이 다함이 없음을 아뢰어, 이 시詩에 새겨놓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