先生諱민旼이요 자字영극寧極이니 목주睦州동려현위桐廬縣尉諱순詢之曾孫이요 贈國子博士諱연도延滔之孫이요 상서도관원외랑尙書都官員外郞諱소량昭亮之子니
先生嘗欲擧進士라가 已而요 悔曰 吾豈有不得已於此邪아하고 遂居于여주汝州之용흥산龍興山하야 而上葬其親於여주汝하다
여주汝人爭訟之不可平者는 不聽有司하고 而聽先生之一言하며 不羞犯有司之刑하고 而以不得於先生爲恥러라
七年
에 詔求天下行義之士
할새 而守臣以先生應詔
라 於是
에 朝廷賜之米帛
하고 又勅州縣
하야 除其雜賦
하다
三年
에 近臣多言先生有道德可用
호되 而執政度以爲不肯屈
이라하야 除
수 비서성 교서랑守秘書省校書郞하야 致仕
하다
四年에 近臣又多以爲言한대 乃召以爲국자감직강國子監直講이나 先生辭하니 乃除수광록시승守光祿寺丞하야 致仕하다
五年에 大臣有請先生爲其屬용흥현縣者라 於是에 天子以지사知여주汝州용흥현龍興縣지사事하니 先生又辭호되 未聽이러니 而六月某日에 先生終于家하니 年六十七이라
至七年月日에 弟㬙葬先生於요산堯山都官之兆하고 而以夫人이씨李氏祔하다
이씨李氏故대리평사大理評事창부昌符之女니 生一女하야 嫁爲士人妻러니 而先物故하다
先生事父母至孝하야 居喪如禮하고 遇人恂恂하야 雖僕奴不忍以辭氣加焉하다
衣食與田桑有餘면 輒以賙其鄕里하고 貸而後不能償者는 未嘗問也하며 未嘗疑人하니 人亦以故로 不忍欺之러라
蓋先生孝弟忠信하고 無求於世로되 足以使其鄕人으로 畏服之如此하고 而先生未嘗爲異也러라
先生博學
하고 尤喜
주역易호되 未嘗著書
하야 獨
一篇
이 傳於世
하니라
하야 高守節之士 而亦以故成俗
이라 故當世處士之聞
이 獨多於
후한後世
러니
乃至於今하야 知名爲賢而處者 蓋亦無有幾人이라 豈世之所不尙하야 遂湮沒而無聞가
若先生固不爲有待於世로되 而卓然自見於時하니 豈非所謂豪傑之士者哉아
글 전체가 자신의 생각만을 말한 허경虛景이지만, 서술한 것이 법도에 맞다.
선생先生의 휘諱는 민旼이고, 자字는 영극寧極이니, 목주睦州 동려현위桐廬縣尉 휘諱 순詢의 증손曾孫이고, 증국자박사贈國子博士 휘諱 연도延滔의 손자孫子이며, 상서도관원외랑尙書都官員外郞 휘諱 소량昭亮의 아들이다.
도관都官으로부터 위로 공자孔子에 이르기까지가 45세世이다.
선생은 일찍이 진사시進士試에 응시하려 하였다가, 이내 뉘우치고 말하기를 “내 어찌 이를 그만둘 수 없을 게 있으랴.” 하고, 드디어 여주汝州의 용흥산龍興山에 살면서 그 부모父母를 여주汝州에 안장安葬하였다.
여주汝州 사람 중에 쟁송爭訟이 공평하지 않다고 여기는 자가, 담당관의 말은 듣지 않다가 선생이 한마디하면 이를 들었으며, 관청의 형벌을 범하는 것은 부끄럽게 여기지 않아도 선생의 인정認定을 받지 못하는 것은 부끄럽게 여겼다.
경력慶曆 7년(1047)에 조서詔書를 천하에 내려서 의義를 행行하는 선비를 구할 적에 수령이 조서詔書에 호응呼應하여 선생을 보고하니, 이에 조정에서는 그에게 쌀과 비단을 하사하고, 또 주현州縣에 칙명勅命을 내려서 그에게 부과했던 각종 세금을 면제해주었다.
가우嘉祐 3년(1058)에 많은 근신近臣들이 선생이 도道와 덕德을 갖추고 있어서 등용할 만하다고 건의하였으나, 집정자執政者가 몸을 굽히지 않을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수 비서성 교서랑守秘書省校書郞에 제수除授되었다가 벼슬에서 물러났다.
4년에 근신近臣들 가운데 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위해 건의하니, 이에 불러들여서 국자감직강國子監直講에 임명하였으나, 선생이 이를 사양하니, 곧 수광록시승守光祿寺丞에 제수되었다가 벼슬에서 물러났다.
5년에는 대신大臣 가운데 선생에게 자신의 속현屬縣을 맡기기를 청하는 자가 있어서, 이에 천자께서 그를 여주汝州 용흥현龍興縣의 지사知事에 임명하니, 선생이 또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는데, 6월 모일某日에 선생이 집에서 생을 마치니, 향년享年이 67세였다.
대신大臣 가운데 그를 추증追贈해주기를 청하는 자가 있어서, 이에 특별히 태상승太常丞을 추증追贈하였다.
7년 모월某月 모일某日에 아우 㬙가 선생을 요산堯山 도관都官의 묘역墓域에 안장安葬하고, 부인夫人 이씨李氏를 합장合葬하였다.
이씨李氏는 과거過去 대리평사大理評事를 지낸 창부昌符의 따님으로, 딸 하나를 낳았는데, 출가하여 사인士人의 부인이 되었다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선생은 부모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겨, 상례喪禮를 예법에 맞게 치렀고, 진실한 자세로 사람을 대하여, 비록 노복奴僕이라 해도 차마 심한 말로 꾸짖지를 못하였다.
의식衣食과 농토 및 뽕밭의 생산물 가운데 남는 것이 있으면, 즉시 이를 그 고장 사람들의 구제에 썼고, 꾸어주었다가 후에 갚을 수가 없게 된 자에게는, 일찍이 갚기를 독촉한 일이 없었으며, 남을 의심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사람들 또한 이 때문에 차마 그를 속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세상에 선생의 행적에 대하여 전해지는 것 중에 특이한 것이 많고, 학사 대부들 가운데도 이를 알고 전하는 이들이 있었다.
선생은 효제충신孝悌忠信을 실천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았으나, 그 고장사람들로 하여금 경외敬畏하고 심복心服하게 하기를 이와 같이 하기에 족하였고, 선생은 일찍이 뛰어남을 내세운 일이 없었다.
선생은 학문學問에 해박하였고, 특히 《주역周易》을 좋아하였으나, 일찍이 책을 지은 일이 없어, 오직 《대연大衍》 한 편篇만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그의 행적을 고찰해볼 때, 내심에 터득한 것이 없다면, 그 누가 이런 경지에 이를 수가 있겠는가?
전한前漢이 후한後漢으로 교체되던 혼란기를 당하여, 절의節義를 지킨 선비들을 고상하게 여기고 또한 이런 행실 때문에 미풍양속이 형성되어 당시에 처사處士로 소문난 이들이 유독 후세보다 많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에는 현인賢人이라고 이름이 알려져 있으면서 벼슬에 나가지 않는 사람이, 또한 몇 사람 되지 않으니, 어쩌면 세상에서 숭상하지 않는 바여서 드디어 묻혀버리고 알려지지 않게 된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선비들의 조행操行이 세상에 알려지기를 스스로 기대함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인가?
선생 같은 분은 본시 세상에 알려지기를 기대하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우뚝하게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으니, 어찌 이른바 호걸豪杰한 선비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집안에 들어 수양만 할 뿐, 나아가 벼슬하여 자신의 뜻을 외물外物인 명리名利와 바꾸지 않았고,
산림山林에 은거하며 돌아와 벼슬하려 하지 않아서, 이로써 자신의 은일隱逸을 견지하였네.
몸을 깨끗하게 지니기를 좋아하여 과오를 범하지 않았으니,
은일隱逸함이 사익私益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자신自身의 지조志操를 추구한 것일 뿐이었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