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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1)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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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忠悃이라
言天下之難言者 不敢冀必然之聽이니 知未必聽而不可不言者 所以盡爲忠之心이온
況臣遭遇聖明하야 容納諫諍이라 言之未必不聽하니 其可黙而不言
臣伏見自去歲以來 群臣多言皇嗣之事하고 臣亦嘗因災異하야 竊有奏陳이러니
雖聖度包容하야 不加誅戮이나 而愚誠懇至하되 天聽未回
臣實不勝愛君之心하야 日夜區區未嘗忘此하야 思欲再陳狂瞽 而未知所以爲言이라
今者伏見兗國公主近已하고 臣因竊思人之常道 莫親於父子之親이요 人之常情 亦莫樂於父子之樂이니 雖在聖哲 異於凡倫이나 其爲天性 於理則一이라
陛下嚮雖未有皇嗣 而尙有公主之愛하야 上慰聖顔이러니 今旣出降하야 漸疎左右하니 則陛下萬幾之暇 處深宮之中하야 誰可與語言이며 誰可承顔色
臣愚以謂宜因此時하야 出自聖意하야 於宗室之中 選材賢可喜者하야 錄以爲皇子하야 使其出入左右하고 問安侍膳하면 亦足以慰悅聖情이라
臣考於書史하니 竊見自古帝王 雖曰至尊이나 未嘗獨處也
其出而居外也 不止百司公見奏事而已 必有儒臣學士 講論於閒宴하고 又有左右侍從 顧問語言하며
其入而居內也 不止宦官宮妾 在於左右而已 其平居燕寢也 則有太子問安侍膳於朝夕하고 其優游宴樂也 多與宗室子弟 懽然相接 如家人하니
計其一日之中 未嘗一時獨處也
今陛下日御前後殿 百司奏事者往往仰瞻天顔而退하고 其甚幸者得承一二言之德音이라 君臣之情不通하고 上下之意不接이요 其餘在廷之臣 儒學侍從之列 未聞一人從容親近於左右
入而居內하얀 則至於問安侍膳하야도 亦闕於朝夕하니
是則陛下富有四海之廣하고 躬享萬乘之尊이나 居外則無一人可親하고 居內則無一人得親이니 此臣所以區區而欲言也
伏況陛下荷祖宗之業하고 承宗廟社稷之重하되 皇子未降하야 儲位久虛
群臣屢言이나 大議未決하니 臣前所奏陳以謂未必立爲儲貳
而且養爲子 旣可以徐察其賢否 亦可以待皇子之降生 於今爲之 亦其時也
臣言狂計愚하니 伏俟斧鉞이라


03. 황자皇子 선발을 논하는
충성忠誠이 가득하다.
신은 듣건대 천하의 말하기 어려운 일을 말하는 자는 감히 꼭 들어주기를 바라지 않으니, 꼭 들어주지 않을 줄을 알고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충성하는 마음을 다하고자 함입니다.
더구나 신은 성스럽고 밝으신 폐하를 만나 간쟁諫諍을 받아주시는 터라 말을 함에 반드시 아니 들어주시지는 않을 것이니, 묵묵히 있으며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은 삼가 보건대 지난해 이래 신하들이 황태자皇太子 뽑는 일에 대해 많이 말하였고, 신도 일찍이 재이災異로 말미암아 진언進言하는 차제에 이 문제에 대해 진달한 적이 있습니다.
비록 성상의 도량으로 포용하여 형벌을 내리지는 않으셨으나, 어리석은 신의 정성이 매우 간절했는데도 성상께서는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신은 실로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밤낮으로 이 문제를 잊지 못하여, 재차 어리석은 생각을 진달하고자 하지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연국공주兗國公主께서 근자에 이미 출강出降하신 것을 보고 신은 이에 적이 생각건대, 사람의 상도常道부자간父子間의 친분보다 친한 것이 없고 사람의 상정常情은 부자간의 즐거움보다 즐거운 것이 없으니, 비록 성왕聖王에 있어서 일반 사람들과는 다르겠지만 그 천성天性은 이치에 있어 같습니다.
폐하께서 예전에는 비록 황태자皇太子는 없었으나 그래도 공주公主에 대한 사랑은 있어서 위로 성상의 용안龍顔을 위로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이미 출강出降하여 점차 좌우에서 멀어지니, 폐하께서 정사를 보시는 겨를에 깊은 궁궐 안에 계시면서 누가 함께 얘기하겠으며 누가 안색을 받들겠습니까.
어리석은 신은 마땅히 이러한 때를 말미암아 성상의 뜻을 내어 종실宗室 중에서 재주 있고 어질어 좋아할 만한 사람을 선발하여 거두어서 황태자로 삼아서 좌우에 출입하며 문안하고 시선侍膳하게 한다면, 또한 성상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신이 사서史書를 살피니 삼가 보건대 예로부터 제왕帝王은 비록 지존至尊이지만 혼자 거처한 적이 없었습니다.
궁궐을 나가 밖에 거처할 때에는 백사百司공적公的으로 알현하여 일을 아뢰는 것뿐만이 아니라, 반드시 유신儒臣학사學士들이 한가한 때 강론하고, 또 좌우의 시종이 있어 고문顧問하고 얘기하였습니다.
궁궐에 들어가 안에 거처할 때에는 환관宦官궁첩宮妾이 좌우에 있을 뿐만 아니라, 평상시 내전內殿에 한가히 계실 때에는 태자太子가 조석으로 문안하고 시선侍膳하였고, 한가로이 연회를 열 때는 대개 종실의 자제들과 한 가족처럼 즐겁게 어울렸습니다.
헤아려보면 하루 안에 한때도 홀로 있은 적이 없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날마다 전후 대전大殿에 납셔 계실 때, 일을 아뢰는 백사百司가 왕왕 천안天顔을 우러러보고 물러나고 매우 다행인 경우에는 한두 마디 덕음德音을 들을 수 있을 뿐 군신君臣이 서로 통하지 않고 상하上下의 뜻이 서로 이어지지 아니하며, 그 나머지 조정에 있는 신하와 유학儒學시종侍從의 반열에 있는 신하들 중에 한 사람도 조용히 좌우에서 폐하를 친근히 모시는 이가 있단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궁궐에 들어가 안에 거처하실 때는 심지어 문안과 시선侍膳까지 조석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이는 폐하께서 사해의 넓은 땅을 넉넉히 소유하시고 만승萬乘의 존귀함을 몸소 누리시지만, 밖에 계실 때는 한 사람도 친할 만한 이가 없고 안에 계실 때는 한 사람도 친할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이 신이 구구히 말씀 드리고자 하는 바입니다.
더구나 폐하께서는 조종祖宗왕업王業을 받으시고 종묘사직宗廟社稷중임重任을 계승하셨으되, 황자皇子가 아직 탄생하지 않아 저위儲位가 비어 있은 지 오래입니다.
신하들이 누차 진언하였으나 대의大議가 아직 결정되지 못했으니, 신이 전에 진달한 바 “굳이 황태자로 세울 것까지도 없습니다.
우선 양자養子로 삼아둔다면 천천히 그 현부賢否를 살필 수 있을 뿐 아니라 황자가 태어나기를 기다릴 수도 있습니다.”라고 한 말을 바로 지금 실행할 때입니다.
신은 말이 주제넘고 생각이 어리석으니, 삼가 주벌誅罰을 기다립니다.


역주
역주1 論選皇子疏 : 이 글은 仁宗 嘉祐 2년(1057) 8월에 지어졌다. 인종의 세 아들인 楊王 昉, 雍王 昕, 荊王 曦가 모두 일찍 죽어 後嗣가 없었다. 이때 淑妃 苗氏 소생인 兗國公主가 또 出嫁하여 궁궐을 나갔다. 그래서 歐陽脩가 글을 올려 황태자를 세워서 인종의 마음을 위로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역주2 臣聞 : 本集에는 이 앞에 “8월 모일에 한림학사 조산대부 우간의대부 지제고 충사관수찬 간수당서 판태상시 겸예의사 상경거도위 사자금어대 신 구양수는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두 번 절하고, 체천법도 흠문총무 성신효덕 황제폐하께 글을 올립니다.[八月日 翰林學士朝散大夫右諫議大夫知制誥充史官修撰刊修唐書判太常寺兼禮儀事上輕車都尉賜紫金魚袋臣歐陽脩 謹昧死再拜上書于體天法道欽文聰武聖神孝德皇帝陛下]”라는 구절이 있다.
역주3 出降 : 君主의 딸이 시집가는 것을 말한다. 군주는 至尊이므로 그 딸인 公主가 臣民에게 시집가는 것을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1) 책은 2024.01.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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