內朱瑾行事가 甚倔强狙狡하야 可鄙하고 而歐公語次는 風神可掬이라
朱宣은 宋州 下邑人也라 少從其父하야 以販鹽爲盜라가 父抵法死에 宣乃去하야 事靑州節度使王敬武하야 爲軍校어늘 敬武以隷其將曹全晟하다
中和二年에 敬武遣全晟入關하야 與破黃巢하고 還過鄆州할새 鄆州節度使薛崇卒에 其將崔君預自稱留後어늘 全晟攻殺君預하야 遂據鄆州하다
宣以戰功爲鄆州馬步軍都指揮使하다 已而오 全晟死에 軍中推宣爲留後러니 唐僖宗卽拜宣天平軍節度使하다
梁太祖鎭宣武할새 以兄事宣이라 太祖新就鎭하야 兵力尙少하야 數爲秦宗權所困하니 太祖乞兵于宣하다
宣與其弟瑾以兗鄆之兵救汴하야 大破蔡兵하야 走宗權하다
是時
에 太祖已襲取滑州
하야 稍欲幷吞諸鎭
이라 以東
이라하고 乃發兵收亡卒
하야 因攻之
하야 遂爲敵國
하야 苦戰曹濮間
하다
是時에 梁又東攻徐州하고 西有蔡賊하고 而北敵彊晉이라 宣瑾兄弟自相首尾나 然卒爲梁所滅하다
乾寧四年에 宣敗하야 走中都하야 爲葛從周所執하야 斬于汴橋下하다
瑾은 宣從父弟也라 從宣居鄆州하야 補軍校하다 少倜儻有大志러니 兗州節度使齊克讓愛其爲人하야 以女妻之하다
瑾行親迎에 乃選壯士爲輿夫하고 伏兵器輿中하야 夜至兗州하야 兵發하야 遂虜克讓하고 自稱留後하니 僖宗卽拜瑾泰寧軍節度使하다
瑾與宣已破秦宗權於汴州어늘 梁太祖責瑾誘宣武軍卒以歸하야 遣朱珍攻瑾하야 取曹州하고 又攻濮州하고 而太祖自攻鄆하다
瑾兄弟往來相救凡十餘年에 大小數十戰하야 與太祖屢相勝敗하다
太祖得宣將賀瓌何懷寶及瑾兄瓊하고 乃將瓊等至兗城下하야 告瑾曰 汝兄敗矣라 今瓊等已降하니 不如早自歸라하니
瑾僞曰諾이라하고 乃遣牙將胡規持書幣詣軍門하야 請降이어늘
太祖大喜하야 至延壽門하야 與瑾交語한대 瑾曰 願得瓊來면 送符印이라하니 太祖信之하야 遣客將劉捍送瓊往하다
瑾伏壯士橋下하고 單騎迎瓊하야 揮手語捍曰 請瓊獨來라하니 瓊前이어늘 壯士擒之하야 遂閉門하고 責瓊先降하야 斬之하야 擲其首城外하다
瑾嬰城自守어늘 而宣亦敗於鄆州라 乃乞兵於晉하니 晉遣李承嗣史儼等하야 以騎兵五千救之하다
太祖已破宣하고 乃急趨兗하니 瑾城中食盡하야 與承嗣等掠食豐沛間이어늘 梁兵奄至하니 瑾將康懷英等以城降梁하다
瑾等將麾下兵하야 走沂州어늘 沂州刺史尹處賓不納하고 又走海州어늘 梁兵急追之라 乃奔于淮南하다
楊行密聞瑾來하고 大喜하야 解其玉帶贈之하고 表瑾領武寧軍節度使하야 以爲行軍副使하다
其後에 梁遣龐師古葛從周等하야 攻淮南하니 行密用瑾하야 大破梁兵於淸口하야 斬師古하다
行密累表瑾東南諸道行營副都統 領平盧軍節度使 同中書門下平章事하다
行密死에 渥及隆演相繼立하니 皆年少라 徐溫與其子知訓專政이러니 畏瑾하야 欲除之어늘
瑾乃謀殺知訓하야 嘗以月旦遣愛妾候知訓家러니 知訓强通之어늘 妾自歸訴하니 瑾益不平하야
屢勸隆演하야 誅徐氏以去國患이어늘 隆演不能爲하다 旣而오 知訓以泗州로 建靜淮軍하야 出瑾爲節度使러니 將行에 召之夜飮하다
明日에 知訓過瑾謝하니 延之升堂하고 出其妻陶氏라 知訓方拜에 瑾以笏擊踣之하니 伏兵自戶突出하야 殺之하다
初에 瑾以二惡馬繫庭中이라가 知訓入而釋馬하야 使相踶鳴이라 故外人莫聞其變하다
瑾擕其首하야 馳示隆演하고 曰 今日爲吳除患矣라하니 隆演曰 此事非吾敢知라하고 遽起入內라
瑾忿然以首擊柱하고 提劍而出하니 府門已闔이라 因踰垣이라가 折其足하다
瑾顧路窮하고 大呼曰 吾爲萬人去害로되 而一身死之라하고 遂自刎하다
瑾妻陶氏臨刑而泣하니 其妾曰 何爲泣乎아 今行見公矣라하니 陶氏收淚하고 欣然就戮이라 聞者哀之하다
瑾名重江淮하야 人畏之라 其死也에 尸之廣陵北門하니 路人私共瘞之하다
是時에 民多病瘧이어늘 皆取其墓上土하야 以水服之하고 云病輒愈라하야 更益新土하야 漸成高墳하다
徐溫等惡之하야 發其尸하야 投於雷公塘하다 後溫病에 夢瑾挽弓射之어늘 溫懼하야 網其骨하야 葬塘側하고 立祠其上하다
初에 瑾嘗病疽라 醫者視之하고 色懼어늘 瑾曰 但理之하라 吾非以病死者라하더니 於是果然이라 卒年五十二라
이 글 안에 주근朱瑾의 행사行事는 몹시 완고하고 교활하여 매우 비루하게 여길 만하고 구양공歐陽公이 서술한 것은 주근의 풍신風神을 손으로 잡을 수 있을 정도로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주선朱宣은 송주宋州 하읍下邑 사람이다. 어려서 그 아버지를 따라 소금을 밀매하는 일로 도적이 되었다가 아버지가 법망에 걸려 죽자 주선은 떠나 청주절도사靑州節度使 왕경무王敬武를 섬겨 군교軍校가 되었는데 왕경무가 자신의 장수 조전성曹全晟에게 소속시켰다.
중화中和 2년(881)에 왕경무가 조전성을 보내 동관潼關으로 들어가 함께 황소黃巢를 격파하고 돌아오다 운주鄆州를 지날 때에 운주절도사鄆州節度使 설숭薛崇이 죽자 그 장수 최군예崔君預가 유후留後를 자칭自稱하거늘 조전성이 공격하여 최군예를 죽이고서 마침내 운주를 점거하였다.
주선은 전공戰功으로 운주마보군도지휘사鄆州馬步軍都指揮使가 되었다. 이윽고 조전성이 죽자 군중이 주선을 추대하여 유후로 삼았는데, 당唐 희종僖宗이 즉시 주선을 천평군절도사天平軍節度使에 배수하였다.
양梁 태조太祖가 선무宣武를 진수鎭守할 때에 주선朱宣을 형으로 섬겼다. 태조가 막 진鎭으로 부임하였을 때에 병력兵力이 아직도 적어서 여러 번 진종권秦宗權에게 곤욕을 당하였는데, 태조가 주선에게 병력을 요청하였다.
주선이 그 아우 주근朱瑾과 함께 연주兗州와 운주鄆州의 병사를 거느리고 변주汴州를 구원하러 가서 채주蔡州의 병사를 크게 격파하여 진종권秦宗權을 내쫓았다.
이때에 태조가 이미 활주滑州를 습격하여 취하고 조금씩 여러 진鎭을 병탄하고자 하였다. 주선과 주근이 이미 돌아오자 태조가 이에 연주와 운주로 급히 격문을 보내 ‘주선과 주근이 선무군宣武軍 중 도망간 군졸軍卒을 많이 회유하여 동쪽으로 갔다’라고 하고 이에 병사를 내어 도망간 군사를 수습하고 인하여 공격하여 마침내 적국敵國이 되어 조주曹州와 복주濮州 사이에서 고전苦戰하였다.
이때에 양梁나라가 또 동쪽으로 서주徐州를 공격하였고 서쪽으로 채주蔡州라는 적賊이 있었고 북쪽으로 강성强盛한 진晉나라를 적대하고 있었다. 주선과 주근 형제가 스스로 서로 수미首尾가 되어 막았지만 끝내 양나라에 멸망하였다.
건녕乾寧 4년(897)에 주선이 패하여 중도中都로 달아났다가 갈종주葛從周에게 잡혀 변교汴橋 아래에서 참수되었다.
주근朱瑾은 주선朱宣의 종제從弟이다. 주선을 따라 운주鄆州에 거하면서 군교軍校가 되었다. 어려서 대범하여 큰 뜻이 있었는데, 연주절도사兗州節度使 제극양齊克讓이 그 사람됨을 아껴 딸을 시집보냈다.
주근이 친영親迎을 할 때에 장사壯士를 선별하여 수레꾼으로 위장하고 수레 안에 병장기를 숨겨두어 밤에 연주兗州에 이르러 복병이 나와서 마침내 제극양齊克讓을 사로잡고 유후留後로 자칭自稱하니, 희종僖宗이 즉시 주근을 태령군절도사泰寧軍節度使로 삼았다.
주근이 주선과 이미 변주汴州에서 진종권秦宗權을 격파하였는데, 양梁 태조太祖가 주근이 선무군宣武軍의 군졸軍卒을 회유하여 데리고 돌아간 것을 꾸짖어 주진朱珍을 보내 주근을 공격하여 조주曹州를 취하고 또 복주濮州를 공격하였고 태조太祖는 스스로 운주鄆州를 공격하였다.
주근 형제가 오가며 서로 구원한 지 10여 년 동안 크고 작은 전투를 수십 번 치러 태조와 수차례 승패勝敗를 주고받았다.
태조太祖가 주선朱宣의 장수 하괴賀瓌, 하회보何懷寶 및 주근朱瑾의 형 주경朱瓊을 잡고 이에 주경 등을 데리고 가 연주兗州의 성 아래에 이르러 주근에게 말하기를 “너의 형은 패하였다. 지금 주경 등이 이미 항복하였으니, 빨리 스스로 귀순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니,
주근이 거짓으로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이에 아장牙將 호규胡規를 보내 항복문서와 폐물을 가지고 군문에 이르러 항복하겠다고 하였다.
태조가 크게 기뻐하며 연수문延壽門에 이르러 주근과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근이 말하기를 “원컨대 주경을 보내주시면 부인符印을 보내겠습니다.”라고 하니, 태조가 이 말을 믿고 객장客將 유한劉捍을 보내 주경을 송환하게 하였다.
주근이 장사壯士를 다리 아래에 매복시키고 단기單騎로 주경을 맞이하여 손을 내저으며 유한에게 말하기를 “청컨대 주경을 혼자 오게 하라.”라고 하였다. 주경이 앞으로 나아오자 장사가 그를 사로잡아 마침내 성문을 닫고 주경이 먼저 항복한 것을 꾸짖어 참수하고서 그 머리를 성 밖으로 던졌다.
태조太祖가 함락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는 이에 병사를 남겨 성을 포위한 다음 떠났다.
주근朱瑾이 성을 의지하여 스스로 지켰고 주선朱宣도 역시 운주鄆州에서 패하였으므로 주근이 이에 진晉나라에 원병을 청하였는데, 진晉나라가 이승사李承嗣와 사엄史儼 등을 보내 5천 명의 기병으로 구원하였다.
태조太祖가 이미 주선을 격파하고 이에 연주兗州로 급히 달려가니 주근이 성 안에 식량이 다하여 이승사李承嗣 등과 풍주豐州와 패주沛州 사이에서 식량을 노략질하고 있었는데, 양梁나라 병사가 갑자기 이르자 주근의 장수 강회영康懷英 등이 성을 가지고 양梁나라에 항복하였다.
주근 등이 휘하의 병사를 거느리고 기주沂州로 달아났는데 기주자사沂州刺史 윤처빈尹處賓이 받아주지 않았고 다시 해주海州로 달아났는데 양나라 병사가 급히 추격하기에 이에 회남淮南으로 달아났다.
양행밀楊行密이 주근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자신의 옥대玉帶를 풀어 내려주고 표주表奏하여 주근을 영무녕군절도사領武寧軍節度使를 삼고서 행군부사行軍副使로 삼았다.
그 후에 양나라가 방사고龎師古와 갈종주葛從周 등을 보내 회남을 공격하니 양행밀이 주근을 임용하여 청구淸口에서 양병梁兵을 대파하고 방사고를 참수하였다.
양행밀이 누차 표주하여 주근을 동남제도행영부도통東南諸道行營副都統 영평로군절도사領平盧軍節度使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로 삼았다.
양행밀楊行密이 죽자 양악楊渥과 양융연楊隆演이 서로 뒤이어 절도사節度使의 자리에 올랐는데 모두 나이가 어렸다. 그러므로 서온徐溫과 그의 아들 서지훈徐知訓이 전정專政하였는데 이들이 주근朱瑾을 두려워하여 제거하고자 하였다.
주근이 이에 서지훈을 죽이고자 하여 일찍이 매월 초 1일에 애첩愛妾을 보내 서지훈의 집에 문후하였는데, 서지훈이 강제로 사통하자 애첩愛妾이 스스로 돌아와 하소연 하니 주근이 더욱 마음이 편치 않았다.
누차 양융연에게 권하여 서씨徐氏를 주살하여 나라의 근심거리를 제거하자고 하였는데 양융연이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윽고 서지훈이 사주泗州를 가지고 정회군靜淮軍을 세워 주근을 내보내 절도사로 삼았는데, 주근이 떠나려 할 때에 서지훈을 불러 밤에 술을 마셨다.
이튿날 서지훈이 주근의 집에 들러 사례하니, 그를 맞이하여 당堂에 오르고 아내 도씨陶氏를 나오게 하였다. 서지훈이 막 절할 때에 주근이 홀笏을 가지고 쳐서 넘어뜨리자 복병伏兵이 문에서 갑자기 뛰어나와 서지훈을 죽였다.
당초에 주근朱瑾이 사나운 두 마리 말을 뜰 가운데 묶어 두었다가 서지훈徐知訓이 들어오자 말을 풀어놓아 서로 발길질 하고 울게 하였다. 그러므로 외인들이 그 변란을 듣지 못하였다.
주근이 서지훈의 머리를 가지고 급히 양융연楊隆演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금일 오吳를 위해 환란을 제거하였습니다.”라고 하니, 양융연이 말하기를 “이 일은 내가 감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하고 황급히 일어나 안으로 들어갔다.
주근이 분노하여 머리로 기둥을 치고는 검을 들고 나오니, 부府의 문이 이미 닫혀 있는지라 담을 넘다가 그 다리가 부러졌다.
주근이 사방을 둘러보아도 벗어날 길이 없자 크게 소리쳐 말하기를 “나는 만 명의 백성을 위해 해악을 제거하였으나 이 한 몸은 죽는다.”라고 하고 마침내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윤주潤州의 서지고徐知誥가 변란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병사를 거느리고 광릉廣陵으로 달려가 주근의 집안을 멸족하였다.
주근의 처妻 도씨陶氏가 형벌을 받을 때에 눈물을 흘리니 주근의 첩妾이 말하기를 “무엇 때문에 눈물을 흘리십니까. 이제 장차 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도씨가 눈물을 거두고 기쁜 안색으로 형장에 나아갔다. 이 일을 들은 사람들은 불쌍하게 여겼다.
주근朱瑾은 강회江淮에 명망이 무거워 사람들이 경외하였다. 그가 죽자 광릉廣陵의 북문에 시신을 버려두었는데, 행인들이 함께 묻어주었다.
이때에 백성들이 많이들 학질을 앓고 있었는데 모두 그의 묘소 위의 흙을 가져다 물과 함께 복용하고는 병이 대번에 나았다고 하면서 다시 새로운 흙을 더 덮어주어 점차 큰 봉분이 되었다.
서온徐溫 등이 이를 미워하여 그의 시신을 꺼내 뇌공당雷公塘에 던졌다. 후에 서온이 병들었는데 꿈에 주근이 활을 당겨 쏘거늘 서온이 두려워 그의 유골을 그물로 건져내어 뇌공당 곁에 매장하고 그 옆에 사당을 세웠다.
당초에 주근이 일찍이 등창을 앓았는데 의원이 이를 보고 두려운 기색을 띠자 주근이 말하기를 “그냥 치료만 하라. 나는 병으로 죽을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더니, 이에 과연 그렇게 되었다. 죽었을 때 나이는 52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