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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6)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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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序次縱横節奏 一一中彀
安重榮 小字鐵胡 朔州人也 祖從義 利州刺史 父全 勝州刺史振武馬步軍都指揮使
重榮有力하고 善騎射하야 爲振武巡邊指揮使 晉高祖起太原하야 使張穎陰招重榮한대 其母與兄皆以爲不可어늘 而重榮業以許穎이라
母兄謀共殺穎以止之하니 重榮曰 未可 吾當爲母卜之호리라하고 乃立一箭하야 百步而射之 曰 石公爲天子則中이라하야늘 一發輒中이라 又立一箭而射之 曰 吾爲節度使則中이라하야늘 一發又中하니 其母兄乃許
重榮以巡邊千騎 叛入太原이라 高祖卽位 拜重榮成德軍節度使하다
重榮雖武夫 而曉吏事하니 其下不能欺 有夫婦訟其子不孝者어늘 重榮拔劍授其父하야 使自殺之
其父泣曰 不忍也라하야늘 其母從傍詬罵하고 奪其劍而逐之 問之하니 乃繼母也 重榮叱其母出하고 從後射殺之하다
重榮起於軍卒하야 暴至富貴하야 而見晉高祖皆以藩侯得國하고 嘗謂人曰 天子寧有種耶 兵強馬壯者爲之爾라하다
雖懷異志 而未有以發也러니 是時 高祖與契丹으로 約爲父子하야 契丹驕甚이로대 高祖奉之愈謹하니 重榮憤然하야 以謂 詘中國以尊夷狄하고 困已敝之民하야 而充無厭之欲하니 此晉萬世恥也라하고 數以此非誚高祖
契丹使者往來 過鎭州어늘 重榮箕踞慢罵하야 不爲之禮하고 或執殺之하다
是時 役屬契丹하야 苦其暴虐하니 重榮誘之入塞
契丹數遣使하야 責高祖하고 하니 高祖對使者鞠躬俯首하야 受責愈謹하고 多爲好辭以自解로대 而姑息重榮하야 不能詰이라
乃遣供奉官張澄하야 以兵二千搜索幷鎭忻代山谷中吐渾하야 悉驅出塞어늘 吐渾去而復來하니 重榮卒納之 因招集亡命하고 課民種稗하야 食馬萬匹하야 所爲益驕
因怒殺指揮使賈章하야 誣之以反하고 章女尙幼하야 欲捨之어늘
女曰 吾家三十口皆死於兵하고 存者特吾與父爾 今父死어늘 吾何忍獨生이리오 願就死라하야늘 遂殺之 鎭人於是 高賈女之烈而知重榮之必敗也
重榮旣僭侈 以爲不足貴하야 刻玉爲魚佩之하고 이라
六年夏 契丹使者拽剌過鎭한대 重榮侵辱之 拽剌言不遜하니 重榮怒하야 執拽剌하고 以輕騎掠幽州南境之民하야
乃上表曰 臣昨 言契丹殘虐하야 掠取生口羊馬하고 自今年二月已後 號令諸蕃하야 點閱強壯하고 辦具軍裝하야 期以上秋南向이라 諸蕃部誠恐上天不祐하야 敗滅家族하야 願先自歸하니 其諸部勝兵 衆可十萬이라 皆遣人送契丹所授告身職牒旗幟來歸款하야 皆號泣告勞하야 願治兵甲以報怨이라 又據朔州節度副使趙崇 殺節度使劉山하야 以城來降이라 竊以諸蕃不招呼而自至하고 朔州不攻伐而自歸하니 雖繫人情이나 盡由天意 又念陷蕃諸將等 本自勳勞하야 久居富貴라가 喪身虜塞하야 酷虐不勝하야 企足朝廷하니 思歸可諒이라 苟聞傳檄이면 必盡倒戈리라하니 其表數千言이라
又爲書以遺朝廷大臣四方藩鎭하되 皆以契丹可取爲言이라
高祖患之하야 爲之幸鄴하야 報重榮曰 前世與虜和親 皆所以爲天下計 今吾以天下臣之 爾以一鎭抗之하니 大小不等이라 無自辱焉이어다하다 重榮謂晉無如我何하야 反意乃決하다
重榮雖以契丹爲言이나 反陰遣人與幽州節度使劉晞相結이라 契丹亦利晉多事하고 幸重榮之亂하야 期兩敝之하야 欲因以窺中國이라 故不加怒於重榮이라
重榮將反也 其母又以爲不可어늘 重榮曰 請爲母卜之라하고 指其堂下하야 仰射之 曰 吾有天下則中之라하야늘 一發而中하니 其母乃許하다
饒陽令劉巖獻水鳥五色하니 重榮曰 此鳳也라하고 畜之後潭하다 又使人爲大鐵鞭以獻하야 誑其民曰 鞭有神하니 指人 人輒死라하고 號鐵鞭郎君이라하야 出則以爲前驅하다
鎭之城門抱關鐵胡人 無故頭自落하니 鐵胡 重榮小字 雖甚惡之 然不悟也
其冬 反襄陽한대 重榮聞之하고 乃亦擧兵하다
是歲 鎭州大旱蝗하니 重榮聚饑民數萬하야 驅以嚮鄴하고 聲言入覲이라 行至宗城破家堤 高祖遣杜重威逆之
兵已交 其將趙彥之與重榮有隙하야 臨陣 卷旗以奔晉軍이라 其鎧甲鞍轡皆裝以銀하니 晉軍不知其來降하고 爭殺而分之
重榮聞彥之降晉하고 大懼하야 退入于輜重中하니 其兵二萬皆潰去
是冬大寒하야 潰兵飢凍及見殺하야 無孑遺하고 重榮獨與十餘騎奔還하야 以牛馬革爲甲하야 驅州人하야 守城以待
重威兵至城下하니 重榮裨將 自城東水碾門으로 引官軍以入하야 殺守城二萬餘人이라
重榮以吐渾數百騎守이어늘 重威使人擒之하야 하야 命漆其首하야 送于契丹하고 改成德軍爲順德하고 鎭州曰恒州하고 常山曰恒山云이라


04. 안중영安重榮전기傳記
종횡으로 절도에 맞게 연주하듯 서술한 것이 하나하나 과녁을 명중하는 듯하다.
안중영安重榮은 어릴 적 이름은 철호鐵胡이니 삭주朔州 사람이다. 조부 안종의安從義이주자사利州刺史를 지냈고 부친 안전安全승주자사勝州刺史 진무마보군도지휘사振武馬步軍都指揮使를 지냈다.
안중영은 용력이 있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여 진무순변지휘사振武巡邊指揮使가 되었다. 고조高祖태원太原에서 기병起兵하여 장영張穎으로 하여금 몰래 안중영을 불러오게 하였는데 안중영의 모친과 형이 모두 불가하다고 하였으나 안중영은 벌써 장영에게 몸을 맡겼다.
모친과 형이 함께 장영을 살해하여 저지시키려 하니 안중영이 말하기를 “그래서는 안 됩니다. 내가 마땅히 어머니를 위해 점을 쳐보겠습니다.”라고 하고는 화살 하나를 세워두고 백보百步 거리에서 쏘면서 말하기를 “석공石公이 천자가 된다면 명중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첫 발에 곧 명중하였다. 또 화살 하나를 세워두고 쏘면서 말하기를 “내가 절도사가 된다면 명중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첫 발에 또 명중하니, 모친과 형이 결국 허락하였다.
안중영이 순변군巡邊軍 1천 기병騎兵으로 반란을 일으켜 태원으로 들어갔다. 고조가 즉위하자 안중영을 성덕군절도사成德軍節度使에 배수하였다.
안중영安重榮은 비록 무부武夫였으나 이무吏務를 잘 알았으므로 아랫사람이 그를 속일 수 없었다. 어떤 부부夫婦불효不孝한 아들을 송사訟事하였는데 안중영이 검을 뽑아 그 아비에게 주면서 스스로 자식을 죽이게 하였다.
그 아비가 울면서 말하기를 “차마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는데, 그 어미가 곁에서 욕하고 꾸짖고는 그 검을 빼앗아 아들을 죽이려고 쫓아갔다. 물어보니 바로 계모繼母였다. 안중영이 그 어미를 꾸짖어 나가게 하고는 뒤에서 화살을 쏘아 죽였다.
안중영安重榮군졸軍卒에서 발신發身하여 갑자기 부귀富貴해져서 폐제廢帝 고조高祖가 모두 번진藩鎭제후諸侯 출신으로 나라를 얻은 것을 보고는 일찍이 어떤 이에게 이르기를 “천자天子가 어찌 종자種子가 있겠는가. 병사가 강하고 말이 튼튼한 자가 천자가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안중영이 비록 다른 뜻을 품기는 했어도 겉으로 드러낸 적은 없었는데, 이때에 고조가 거란契丹부자父子의 맹약을 맺어 거란이 매우 교만하게 구는데도 고조가 더욱 근실하게 받드니 안중영이 분개하여 말하기를 “중국을 굽혀 이적夷狄을 떠받들고 이미 피폐해진 백성을 괴롭혀 만족할 줄 모르는 오랑캐의 욕심을 채워주니, 이는 나라의 만세萬世의 수치이다.”라고 하고는 자주 이 일로 고조를 비난하였다.
거란의 사자가 왕래할 때 진주鎭州를 경유하였는데, 안중영은 두 다리를 뻗고 앉아 업신여기고 꾸짖으면서 예우禮遇하지 않았고 혹 잡아서 죽이기도 하였다.
이때에 토혼吐渾백씨白氏거란契丹복속服屬되어 거란의 학대에 시달리니, 안중영이 이들을 꾀어 변경 안으로 들였다.
그러자 거란이 자주 사자를 보내 고조를 책망하고 아울러 피살된 사자를 찾으니, 고조가 거란의 사자에게 몸을 굽히고 머리를 조아리며 책망을 들을수록 더욱 공손히 대하고 좋은 말을 많이 하여 스스로 해명하였다. 그러나 안중영은 우선 그대로 두고서 꾸짖지 못했다.
마침내 공봉관供奉官 장징張澄을 파견하여 2천의 병사로 병주幷州진주鎭州흔주忻州대주代州의 산골짜기에 있는 토혼을 수색하여 모두 변경 밖으로 쫓아냈는데, 토혼이 떠났다가 다시 오니 안중영이 마침내 이들을 받아들였다. 이어서 망명인亡命人들을 불러 모으고 백성들에게 피를 심게 독책督責하여 1만 필의 말을 먹이면서 하는 짓이 더욱 교만해졌다.
안중영이 노여움을 참지 못해 지휘사指揮使 가장賈章을 살해하고서 반란했다고 무고誣告하였는데, 가장의 딸은 아직 어려 그냥 내버려두려 하였다.
그 딸이 말하기를 “우리 집 서른 명 식구가 모두 병란兵亂에 죽고 살아남은 이는 나와 부친뿐이다. 지금 부친께서 돌아가셨는데 내 어찌 차마 홀로 살겠는가. 죽기를 원하노라.”라고 하자 마침내 살해하였다. 진주鎭州 사람들이 이에 가장의 딸의 정렬貞烈을 높이 여기고 안중영이 반드시 패할 것을 알았다.
안중영安重榮이 이미 분수에 넘치게 사치하면서 금어대金魚袋는 만족할 만큼 귀하지 못하다고 여겨 을 깎아 물고기 모양으로 만들어 찼다. 그리고 두 적처嫡妻를 맞아들였는데 고조高祖가 그대로 인정하여 모두 봉작封爵을 더해주었다.
천복天福 6년(941) 여름에 거란契丹의 사자 예랄拽剌진주鎭州를 지나게 되었는데 안중영이 업신여기며 욕을 보였다. 예랄의 말이 공손하지 않자 안중영이 노하여 예랄을 잡아두고 경기병輕騎兵으로 유주幽州 남쪽 경계의 백성을 약탈하고서 박야博野에 머물렀다.
그리고서 표문表文을 올려 말하기를 “신은 앞서 숙토혼熟吐渾백승복白承福혁련공덕赫連功德 등이 본족本族 3만여 을 거느리고 응주應州에서 도망쳐 온 사실을 보고받았고, 또 생토혼生吐渾계필契苾양돌궐兩突厥삼부三部남북장南北將사타沙陀안경安慶구부九府 등이 각기 그 족속과 우양牛羊과 수레와 천막과 갑옷과 말을 거느리고 일곱 여덟 길을 통해 도망쳐왔는데, 그들이 모두 말하기를 ‘거란이 포학하여 노예와 양마羊馬를 약탈해가고 금년 2월 이후로 여러 번부蕃部에 명령을 내려 강건한 병사들을 점열點閱하고 무장武裝을 갖추어서 올 가을 첫 달에 남쪽으로 향하기로 약속을 정했습니다. 여러 번부에서는 하늘이 돌보지 않아 가족家族패멸敗滅할까 진실로 두려워하여 먼저 스스로 귀부歸附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는데 그들 부족의 정병精兵십만十萬의 무리나 된다는 사실을 보고받았습니다. 또 황하黃河 연안의 당항黨項산전山前산후山後일리逸利월리越利 등의 여러 부족의 수령이 모두 사람을 보내 거란에서 받은 고신告身직첩職牒기치旗幟를 보내면서 투항의 뜻을 표시하고 모두 울부짖으며 자신들의 고통을 고하면서 병갑兵甲을 손질하여 원한을 갚기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받았습니다. 또 삭주절도부사朔州節度副使 조숭趙崇절도사節度使 유산劉山을 살해하고서 성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려 한다는 사실을 보고받았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여러 번부가 부르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오고 삭주가 공격하여 정벌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귀부하니, 비록 인정人情에 관련하여 일어난 일이나 모든 것이 하늘의 뜻에 말미암은 것입니다. 또 생각건대 거란에 함락된 지역의 장수들은 본래 스스로 공훈功勳을 세워 오랫동안 부귀富貴를 누리다가 오랑캐의 경계에 몸이 떨어져 혹독한 학대를 이기지 못하여 우리 조정을 향해 발돋움을 하고 바라보고 있으니 그들의 귀부하려는 마음은 믿을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격문을 띄웠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반드시 모두 창을 거꾸로 잡아 쥘 것입니다.”라고 하니, 그 표문이 수천언數千言이었다.
또 서신을 적어 조정朝廷대신大臣사방四方번진藩鎭에 보내면서 모두 거란을 취할 만하다고 말하였다.
고조가 근심하여 이 때문에 으로 거둥하여 안중영에게 답하기를 “전세前世에 오랑캐와 화친한 것은 모두 천하를 위한 계책이었다. 지금 나는 천하를 신하로 삼고 있고 너는 일개 진주鎭州로 대항하고 있으니 크고 작음이 같지 않다. 스스로 을 취하지 말지어다.”라고 하였다. 안중영은 나라가 자신을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마침내 반란하려는 뜻을 결정하였다.
안중영安重榮이 비록 거란契丹을 이유로 들었으나 뒤로는 몰래 사람을 보내 유주절도사幽州節度使 유희劉晞와 서로 결탁하였다. 거란 또한 나라가 다사다난해지는 것을 이롭게 여기고 안중영의 반란을 요행으로 여겨 진나라와 안중영 둘 다 피폐해지기를 기다려 그 틈에 중국을 노리려 하였다. 그러므로 안중영에게 분노를 나타내지 않았다.
안중영이 장차 반란하려 할 때 그 모친이 또 불가하다고 하자, 안중영이 말하기를 “어머니를 위해 점을 쳐보고자 합니다.”라고 하고 아래의 번간幡竿용구龍口를 가리키며 위를 향해 쏘면서 말하기를 “내가 천하를 소유하게 된다면 명중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첫 발에 명중하니 그 모친이 결국 허락하였다.
요양령饒陽令 유암劉巖오색五色의 물새를 바치니 안중영이 말하기를 “이것은 봉새이다.”라고 하고 뒤뜰의 못에서 길렀다. 또 사람을 시켜 큰 철편鐵鞭을 만들어 바치게 하고서 백성들을 속여 말하기를 “채찍에 신이 깃들어 있으니 사람을 가리키면 사람이 곧 죽는다.”라고 하고는 철편낭군鐵鞭郎君이라 부르면서 출정할 때면 전구前驅로 삼았다.
진주鎭州 성문 앞에 세워둔 호인胡人 철상鐵像이 까닭 없이 머리가 저절로 떨어졌는데, 철호鐵胡는 안중영의 어릴 적 이름이었으므로 이 일을 매우 싫어하였으나 그 의미를 깨닫지는 못했다.
그해 겨울에 안종진安從進양양襄陽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안중영이 듣고서 마침내 거병擧兵하였다.
이해에 진주鎭州에 큰 가뭄과 황충해蝗蟲害가 드니 안중영安重榮이 굶주린 백성 수만 명을 모아 몰아서 으로 향하게 하고 입근入覲한다고 떠들어댔다. 행렬이 종성宗城파가제破家堤에 이르렀을 때 고조高祖두중위杜重威를 보내 맞이해 싸우게 하였다.
병사들이 이미 교전한 다음 안중영의 장수 조언지趙彥之가 안중영과 틈이 생겨 전투에 임했을 때 깃발을 접고 나라 군대로 달아났다. 그 갑옷과 안장과 고삐가 모두 장식이었는데, 진나라 군대가 투항하러 오는 것인 줄을 알지 못하고 다투어 달려들어 죽이고서 나누어가졌다.
안중영이 조언지가 진나라에 투항했다는 사실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퇴각하여 치중輜重 가운데로 들어가니 그 병사 2만이 모두 흩어져 달아났다.
이해 겨울이 몹시 추워서 흩어진 병사들이 굶주림과 추위로 죽거나 진나라 군대에 살해되어 살아남은 자가 없었고, 안중영은 홀로 10여 기병騎兵과 함께 도망쳐 돌아와 소와 말의 가죽으로 갑옷을 해 입고 진주 사람들을 몰아 성을 지키며 기다렸다.
두중위의 병사가 성 아래에 이르니 안중영의 비장裨將이 성 동쪽의 수년문水碾門으로 관군官軍을 끌어 들여 수비병 2만여 명을 죽였다.
안중영이 토혼吐渾의 수백 기병騎兵으로 아성牙城을 지켰는데, 두중위가 사람을 시켜 사로잡아 머리를 베어 바치니, 고조가 누각에 올라 머리를 받고서 명하여 그 머리에 옻칠을 하여 거란으로 보내고 성덕군成德軍순덕順德으로, 진주鎭州항주恒州로, 상산常山항산恒山으로 개명改名하였다.


역주
역주1 安重榮傳 : 安重榮(?~942)은 朔州 출신으로 軍伍에서 發身하여 용맹과 무예 실력으로 높은 지위에 올랐고 종국에는 천자의 지위를 노리다가 결국은 패망한 인물이다. 안중영의 열전은 ≪舊五代史≫ 卷98 〈晉書 第24 列傳13〉과 ≪新五代史≫ 卷51 〈雜傳 第39〉에 실려 있다.
안중영과 같은 인물 유형은 五代 시기 전형적 인물상의 하나라 할 수 있다. 五代의 亂世에는 국가와 천자가 수시로 뒤바뀌어, 歐陽脩는 〈王進傳〉의 史論에서 “이때를 당하여 나라를 다스린 세월이 긴 경우는 십여 년에 불과했고 짧은 경우는 3, 4년 내지 1, 2년이었다. 그리하여 천하 사람들이 위에서 임금이 바뀌고 나라가 새로 들어서는 것을 마치 戍長이 갈리는 것과 다름없이 보았다.[當此之時 爲國長者不過十餘年 短者三四年至一二年 天下之人視其上易君代國 如更戍長無異]”라고 평하기도 하였다. 武勇이 있고 强兵을 보유한 자 치고 천자의 지위를 노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니, 안중영 역시 “天子가 어찌 種子가 있겠는가. 병사가 강하고 말이 튼튼한 자가 천자가 되는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요컨대 안중영의 열전은 群雄이 서로 자신의 능력을 뽐내며 다투던 시기에 낮은 신분에서 출발하여 천자의 지위까지 노리던 한 인물의 崛起와 敗亡의 여정을 통해 그 시대의 한 단면을 생생히 보여준다.
구양수는 안중영의 생애를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의 지점을 향해 서술하고 있다. 이는 ≪구오대사≫와 ≪신오대사≫의 안중영의 열전을 비교해보면 명확해지는데, ≪신오대사≫에서는 안중영의 이러한 행보 외에 나머지 다른 사안들은 대부분 생략하고 있다.
한편 ≪구오대사≫의 사평은 다음과 같다. “제왕의 존귀함은 반드시 천명으로부터 나온다. 비록 韓信이나 彭越처럼 용맹한 장수나 吳王 劉濞와 淮南王 劉安처럼 세력 있는 제후라도 망령되이 바랄 수 없는데, 하물며 안중영과 安從進처럼 용렬하고 우매한 이들이 서로 도와 난을 일으켰으니 스스로 멸망을 취한 것이 참으로 당연하다. 후대에 강한 병력을 가지고 중요한 藩鎭을 다스리는 자가 거울로 삼지 않을 수 있겠는가.[帝王之尊 必由天命 雖韓信彭越之勇 吳濞淮南之勢 猶不可以妄冀 而況二安之庸昧 相輔爲亂 固宜其自取滅亡也 後之擁強兵蒞重鎭者 得不以爲鑑乎]”
역주2 唐 廢帝 : ?~936. 五代 後唐의 마지막 황제인 末帝 李從珂이다. 明宗이 죽고 친아들인 李從厚(閔帝)가 즉위하여 藩鎭의 힘을 약화시키는 정책을 실시하자 위기를 느낀 이종가가 鳳翔節度使로 있던 도중 반란을 일으켜 이종후를 폐위시키고 즉위하였다.
역주3 吐渾白氏 : 吐渾은 土谷(욕)渾이라고도 하며, 지금의 靑海省과 甘肅省 일대에 거주하던 鮮卑族 유목민을 가리킨다. 이들은 한때 강성하여 티베트인들을 제압하고 나라를 세워 중국과 대립하기도 하였으나 7세기 무렵 唐나라에 복속하였고 이후 티베트인이 세운 吐藩에 멸망당하여 그 일부가 유목 생활을 영위하였다. 五代 당시 이들의 지도자들로 史書에 기록된 이들은 白承福, 白可久 등으로 모두 白氏였다.
역주4 幷求使者 : 後晉으로 사신 갔다가 안중영에게 살해되어 돌아오지 않는 사신을 찾은 것이다.
역주5 金魚袋 : 금으로 만든 물고기 모양의 장식을 단 주머니이다. 唐나라 때 5품 이상의 관원이 佩用하였다.
역주6 娶二妻 高祖因之竝加封爵 : ≪太平御覽≫ 卷202 〈縣君〉에 “≪五代史≫ 〈晉史〉에 ‘鎭州節度使 安重榮의 妻 彭城郡夫人 劉氏를 魯國夫人에 봉하고 南陽郡夫人 韓氏를 陳國夫人에 봉하였다. 안중영이 두 사람의 嫡妻를 세운 것은 禮가 아니고, 조정에서 아울러 冊命한 것 또한 올바른 禮制가 아니다.’라고 하였다.[五代史晉史曰 鎭州節度使安重榮妻彭城郡夫人劉氏 封魯國夫人 南陽郡夫人韓氏 封陳國夫人 重榮立二嫡妻 非禮也 朝廷並命之 亦非制也]”라고 하였다.
역주7 天福 : 後晉 高祖 石敬瑭의 연호로, 2대 황제인 出帝 石重貴도 連用하였다. 936~944년에 해당한다.
역주8 處之博野 : 博野는 오늘날의 河北省 중부에 있는 保定市에 속한 곳이다. 五代 당시에는 거란과의 접경지역에 속한다. ≪遼史拾遺≫와 ≪資治通鑑≫에는 해당 기사의 ‘處’가 ‘軍’으로 되어 있다. 이를 미루어 볼 때 ‘處之’는 安重榮이 거란에 속한 幽州 접경 지역을 약탈하고 거란과 대치하며 주둔한 상황을 가리킨 것이다.
역주9 : 조선시대 表咨文 등에서 ‘據’는 ‘准’, ‘奉’ 등과 함께 어떠한 사실을 다른 곳으로부터 수령하거나 받는다는 의미로 쓰인다. 즉 이는 특정한 사실을 수령하여 알았다는 의미로, 이를 원문의 문맥에 적용했을 때도 이질성이 없으므로 이에 준하여 번역하였다.
역주10 臣昨據熟吐渾白承福……七八路來奔 : 吐渾을 언급할 때 熟은 복속한 부족을 가리키고, 生은 복속하지 않은 부족을 가리킨다. 이는 후대에 熟女眞과 生女眞의 예와 같다. 帳은 유목민의 천막 단위이다. 兩突厥은 東突厥과 西突厥을 가리킨다. 돌궐은 한때 동쪽으로는 만주, 서쪽으로는 중앙아시아까지 세력을 확장하였으나 중국의 隋나라 무렵에 동족 간 다툼으로 분열하여 동돌궐은 몽골 지역, 서돌궐은 중앙아시아 지역을 지배하였다. 沙陀와 安慶은 ≪舊唐書≫ 卷19下 〈僖宗本紀〉에 “北面行營都監押 陳景思가 沙陀와 薩葛과 安慶 등 세 부락과 吐渾의 무리 3만을 거느리고 關中으로 달려가 구원하였다.[北面行營都監押陳景思率沙陀薩葛安慶等三部落與吐渾之衆三萬赴援關中]”라는 기사에서 보듯 突厥 세 부락의 명칭이다. 九府는 ≪舊五代史≫ 卷55 〈史建瑭列傳〉에, 沙陀族인 史建瑭의 부친 史敬思를 설명하면서 “敬思가 九府都督이 되었다.[敬思爲九府都督]”라고 서술한 기사를 볼 때 돌궐의 지방 편제로 보인다.
역주11 (其)[具] : 저본에는 ‘其’로 되어 있으나, ≪新五代史≫에 의거하여 ‘具’로 바로잡았다.
역주12 又據沿河黨項山前後逸越利諸族首領 : 黨項은 唐兀이라고도 표기하는 羌族의 한 갈래로 탕구트족을 가리킨다. 宋나라 때 티베트 지역에 세워지는 西夏 건국의 주체이기도 하다. 본래 吐蕃과 함께 山西省과 甘肅省 등에 흩어져 목축 생활을 하였는데, 唐나라 때 이들을 회유하여 李氏 성을 하사하였다. 唐나라 내지로 이동한 당항족들은 주로 夏州와 甘肅省, 陝西省 등지에 정착하였다. 이후 당나라 말기의 혼란한 때에 당항족의 우두머리인 拓跋思恭이 黃巢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夏州, 銀州, 綏州, 幽州, 定州 등의 지배권을 받았고 五代 무렵이 되면 중국의 간섭에서 벗어나 완전히 독립된 부락으로 성장하였다. 山前과 山後는 지역 명칭이다. ≪宋史≫ 卷90 〈地理志〉에 “燕山府路는 府가 하나이니 燕山이고, 州가 아홉이니 涿州와 檀州와 平州와 易州와 營州와 順州와 薊州와 景州와 經州이고, 縣은 열둘이다. 宣和 4년에 조칙을 내려 山前의 收復한 州縣들을 합하여 監司를 두고 燕山府路라 이름하고 山後는 별도로 雲中府路라 이름하였다.……雲中府는 唐나라 때의 雲州로 大同軍節度에 속한다. 石敬瑭의 晉나라 때에 契丹에게 뇌물로 바쳐 거란이 西京이라 불렀다. 宣和 3년에 비로소 雲中府와 武州와 應州와 朔州와 蔚州와 奉州와 聖州와 歸州와 化州와 儒州와 嬀州 등의 州를 얻으니 이른바 山後九州이다.[燕山府路 府一燕山 州九涿檀平易營順薊景經 縣二十 宣和四年 詔山前收復州縣 合置監司 以燕山府路爲名 山後別名雲中府路……雲中府 唐雲州 大同軍節度 石晉以賂契丹 契丹號爲西京 宣和三年 始得雲中府武應朔蔚奉聖歸化儒嬀等州 所謂山後九州也]”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前後의 기준은 燕山임을 알 수 있다. 연산은 오늘날의 北京에 있다. 逸利와 越利는 다른 史料에는 잘 보이지 않으나 문맥상 부족 명칭임을 알 수 있다.
역주13 旛(번)竿龍口 : 旛竿은 깃발을 달아매는 장대를 가리키고, 龍口는 깃발을 메어다는 용머리 모양 장식에 달린 구멍이다.
역주14 安從進 : ?~942. 後唐을 섬겨 貴州刺史, 保義彰武軍節度使 등을 역임하였고 後晉 때에는 同中書門下平章事와 山南東道節度使가 되었다. 941년에 襄州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襄州行營都部署 高行周의 군대에게 격파당해 가족들과 함께 焚死하였다.
역주15 牙城 : 主將이 거처하는 城으로 牙旗를 세우므로 아성이라 불렀다.
역주16 斬首以獻 高祖御樓受馘(괵) : 獻馘禮를 행한 것이다. 헌괵례는 적장의 머리를 왕에게 바치는 의식이다. 馘은 본래 적의 왼쪽 귀를 가리키는데 首級을 가리키기도 한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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