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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2)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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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2. 《당서唐書》 〈예악지禮樂志〉에 대한
古禮之亡 久矣 歐陽公於此 亦無限悲慨
고례古禮망실亡失된 지 오래인지라 구양공歐陽公이 여기에 대해 또한 무한히 비분 개탄했다.
由三代而上 而禮樂達于天下러니 由三代而下 治出於二而禮樂爲虛名이라
삼대三代 이전에는 정치가 에서 나오고 예악禮樂천하天下에 펼쳐졌더니, 삼대三代 이후로는 정치가 에서 나오고 예악禮樂허명虛名이 되었다.
古者 宮室車輿以爲居하며 衣裳冕弁以爲服하며 尊爵俎豆以爲器하며 金石絲竹以爲樂하야 以適郊廟하며 以臨朝廷하며 以事神而治民이라
옛날에는 궁실宮室거여車輿에 기거하며 의상衣裳면변冕弁착복着服하며 존작尊爵조두俎豆를 그릇으로 쓰며 금석金石사죽絲竹을 악기로 써서, 이것으로 교묘郊廟에 가며 이것으로 조정朝廷에 임하며 이것으로 귀신을 섬기고 백성을 다스렸다.
其歲時聚會以爲하며 歡欣交接以爲하며 合衆興事以爲하야 下至里閭田畝 吉凶哀樂 凡民之事 莫不一出於禮
세시歲時취회聚會할 때 이것으로 조근朝覲빙문聘問을 하며, 반갑게 사귀고 응접할 때 이것으로 사향射鄕사향食饗을 하며, 무리를 모아 일을 일으킬 때 이것으로 사전師田학교學校를 하여, 아래로 이려里閭전묘田畝길흉애악吉凶哀樂에 이르기까지 모든 백성들의 일이 한결같이 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었다.
由之以敎其民爲孝慈友悌忠信仁義者 常不出於居處動作衣服飮食之間하니 蓋其朝夕從事者 無非乎此也
이를 통해 백성들에게 효자孝慈우제友悌충신忠信인의仁義를 가르치는 것이 항상 거처와 동작과 의복과 음식 사이를 벗어나지 않으니, 대개 아침저녁으로 종사從事하는 것이 이것 아님이 없었다.
此所謂治出於一而禮樂達于天下하야 使天下安習而行之하야 不知所以遷善遠罪而成俗也
이것이 이른바 정치가 에서 나오고 예악이 천하에 펼쳐져, 천하로 하여금 편안히 익히고 행하게 하여, 으로 옮겨가고 를 멀리하는 줄도 모른 채 저절로 풍속을 이루게 하는 것이다.
及三代已亡 遭秦變古하야
삼대三代가 망하고 난 뒤, 나라에 와서 고례古禮를 바꾸었다.
後之有天下者 自天子百官名號位序 國家制度宮車服器 一切用秦하니 舊間雖有欲治之主 思所改作이라도 不能超然遠復三代之上하고 而牽其時俗하야 稍卽以損益하니 大抵安於而已
이후 천하를 소유한 이가 천자天子백관百官명칭名稱위서位序를 비롯하여 국가國家제도制度궁거宮車복기服器에 이르기까지 일체 진나라 법을 쓰니, 고금에 비록 치세를 이루려는 군주가 있어 고칠 바를 생각한다 하더라도 초연超然히 멀리 삼대 이상으로 회복하지 못하고, 시속時俗을 끌어와 조금씩 때에 따라 가감加減을 하니, 대저 구간苟簡에 편안할 뿐인 것이다.
其朝夕從事 則以簿書獄訟兵食爲急하야 曰 此爲政也 所以治民이라하고
그래서 아침저녁으로 종사하는 것은 부서簿書옥송獄訟병식兵食을 급선무로 삼아 “이것이 정치政治이니,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이다.” 하고,
至於三代禮樂하얀 具其名物하되 而藏於有司하야 時出而用之郊廟朝廷하야 曰此爲禮也 所以敎民이라하니
삼대의 예악에 이르러서는 명물名物을 갖추어놓되 유사有司에게 맡겨 보관하게 하고 때가 되면 꺼내어 교묘郊廟조정朝廷에서 사용하여 “이것이 예법禮法이니 백성을 교화시키는 방법이다.” 한다.
此所謂治出於二而禮樂爲虛名이라
이것이 이른바 정치가 에서 나오고 예악이 허명虛名이 되었다는 것이다.
故自漢以來 史官所記 皆有司之事爾 所謂禮之末節也
이런 까닭에 나라 이래로 사관史官이 기록한 사물事物명수名數강등읍양降登揖讓배부복흥拜俛伏興에 관한 의절儀節이 모두 유사有司의 일일 뿐이니, 이른바 예의 말절末節이란 것이다.
然用之郊廟朝廷하야 自搢紳大夫 從事其間者 皆莫能曉習하고 而天下之人 至於老死 未嘗見也
그러나 교묘郊廟조정朝廷에 사용하기에 진신대부搢紳大夫로부터 그 사이에 종사하는 자도 모두 환히 익히지 못하고, 천하의 사람들은 늙어 죽을 때까지 보지 못한다.
況欲識禮樂之盛하야 曉然諭其意하고 而被其敎化하야 以成俗乎
하물며 예악의 성대함을 알아 또렷이 의미를 깨쳐 그 교화를 입혀 풍속을 이루려 함에랴 말할 나위 있겠는가.
嗚呼
아!
習其器而不知其意하며 忘其本而存其末하고 又不能備하니 所謂朝覲聘問射鄕食饗師田學校冠婚喪葬之禮在者 幾何
기물器物을 익숙하게 쓰되 그 의미를 알지 못하고 근본을 잊고서 말단을 보존하며 게다가 구비具備하지도 못하였으니, 이른바 조근朝覲빙문聘問사향射鄕사향食饗사전師田학교學校관혼冠婚상장喪葬으로서 예가 남아 있는 것이 그 얼마인가.
自梁以來 始以其當時所行으로 傅於周官五禮之名하야 各立一家之學이러니
나라 이래로 비로소 당시 행하던 바로써 주관周官 오례五禮의 이름에 붙여 각각 일가一家의 학문으로 세웠다.
唐初卽用隋禮라가 至太宗時하야 中書令 秘書監 與禮官學士等으로 因隋之禮하야 增以天子上陵朝廟養老大射講武讀時令納皇后皇太子入學太常行陵合朔陳兵太社等하야 爲吉禮六十一篇 賓禮四篇 軍禮二十篇 嘉禮四十二篇 凶禮十一篇하니 是爲貞觀禮
나라 초기에는 그대로 나라 예제禮制를 쓰다가, 태종太宗 대에 와서 중서령中書令 방현령房玄齡비서감秘書監 위징魏徵예관학사禮官學士 등과 함께 나라의 예제禮制를 바탕으로 천자상릉天子上陵조묘朝廟양로養老대사大射강무講武독시령讀時令납황후納皇后황태자입학皇太子入學태상행릉太常行陵합삭合朔진병태사陳兵太社 등을 더하여 〈길례吉禮〉 61과 〈빈례賓禮〉 4편과 〈군례軍禮〉 20편과 〈가례嘉禮〉 42편과 〈흉례凶禮〉 11편을 만드니, 이것이 정관례貞觀禮이다.
高宗又詔太尉中書令中書侍郞黃門侍郞太子賓客太常卿하야 增之爲一百三十卷하니 是爲顯慶禮
고종高宗이 또 태위太尉 장손무기長孫無忌중서령中書令 두정륜杜正倫이의부李義府중서시랑中書侍郞 이우익李友益황문시랑黃門侍郞 유상도劉祥道허어사許圉師태자빈객太子賓客 허경종許敬宗태상경太常卿 위곤韋琨 등을 불러 증보하여 130권을 만드니, 이것이 현경례顯慶禮이다.
其文雜以式令하고 而義府敬宗 方得幸일새 多希旨傳會하니
그 문장이 법식法式율령律令이 뒤섞여 있는데, 이의부와 허경종이 바야흐로 총애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천자의 비위에 맞추어 견강부회牽强附會한 곳이 많았다.
事旣施行 議者皆以爲非
일이 시행되고 나자 의론하는 자들이 모두 그르다고 여겼다.
上元三年 詔復用貞觀禮
상원上元 3년(676)에 다시 정관례貞觀禮를 사용하라고 조서詔書를 내렸다.
由是 終高宗世 貞觀顯慶二禮兼行하고
이로부터 고종高宗시대가 끝날 때까지 정관례貞觀禮현경례顯慶禮예제禮制겸행兼行하였다.
而有司臨事 遠引古義하야 與二禮參考增損之하고 無復定制
그래서 유사有司가 행사에 임하였을 때 멀리 고의古義를 인용하여 정관례와 현경례 두 예제와 함께 참고하고 가감하여 달리 확정된 예제가 없었다.
繼以亂敗하야 無可言者하니 博士掌禮하야 備官而已
무씨武氏중종中宗은 혼란한 시대를 이어서 즉위하였기 때문에 말할 만한 것이 없으니 태상박사太常博士가 예를 관장하여 관직만 갖추고 있을 뿐이었다.
玄宗開元十年 以國子司業爲禮儀使하야 以掌五禮하고 十四年 通事舍人 上疏하야 請刪去禮記舊文하고 而益以今事일새
현종玄宗 개원開元 10년(722)에 국자사업國子司業 위도韋縚예의사禮儀使로 삼아 오례五禮를 관장하게 하고, 14년에 통사사인通事舍人 왕암王嵒를 올려 《예기禮記》의 옛 문장을 산거刪去하고 당시의 행사를 가지고 보충하라고 청하였다.
詔付集賢院議한대 學士 以爲禮記不刊之書 去聖久遠 不可改易이요
현종이 집현원集賢院에 부쳐 논의하라고 조서를 내리자, 학사學士 장열張說이 “《예기禮記》는 산삭할 수 없는 경서이니, 성현과의 시대가 멀어진 이때에 개역改易할 수 없습니다.
而唐貞觀顯慶禮 儀注前後不同하니 宜加折衷以爲唐禮라하야늘
그리고 나라 정관貞觀현경顯慶 양례兩禮의주儀注가 전후로 같지 않으니, 의당 절충을 더하여 《당례唐禮》라고 해야 옳습니다.”라고 하였다.
乃詔集賢院學士右散騎常侍左拾遺及太常博士하야 撰述하되
이에 집현원학사集賢院學士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 서견徐堅좌습유左拾遺 이예李銳태상박사太常博士 시경본施敬本에게 명하여 찬술撰述하라고 하였다.
歷年未就하고 而銳卒 代銳爲學士하고 奏起居舍人撰定하니 爲一百五十卷이니 是爲大唐開元禮
그러나 해가 지나도록 완성하지 못하고 이예李銳가 죽자, 소숭蕭嵩이예李銳를 대신하여 학사學士가 되고 주기거사인奏起居舍人 왕중구王仲丘찬정撰定하여 150권을 만드니, 이것이 대당개원례大唐開元禮이다.
由是 唐之五禮之文 始備
이로부터 당나라 오례五禮예문禮文이 비로소 완비되었다.
而後世用之하니 雖時小有損益이나 不能過也
후세에 이것을 쓰니 비록 때에 따라 조금 가감을 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것을 넘지 못한다.
貞元中 太常禮院修撰 考次歷代郊廟沿革之制及其工歌祝號하고 而圖其壇屋陟降之序하야 爲郊祀錄十卷하고
정원貞元 연간에 태상례원수찬太常禮院修撰 왕경王涇이 역대 교묘연혁郊廟沿革의 제도 및 공가工歌축호祝號를 고증하여 찬차撰次하고, 단옥壇屋과 오르내리는 순서를 그림으로 그려 《교사록郊祀錄》 10권을 만들었다.
元和十一年 秘書郞修撰 又錄開元已後禮文하야 損益爲禮閣新儀三十卷하고
원화元和 11년에 비서랑수찬秘書郞修撰 위공숙韋公肅개원開元 이후의 예문을 기록하여, 가감하여 《예각신의禮閣新儀》 30권을 만들었다.
十三年 太常博士 爲曲臺新禮三十卷하고 又採元和以來三公士民婚祭喪葬之禮하야 爲續曲臺禮三十卷하니
원화 13년에 태상박사太常博士 왕언위王彦威가 《곡대신례曲臺新禮》 30권을 만들고, 또 원화 이래 삼공三公사민士民혼례婚禮제례祭禮상례喪禮장례葬禮를 채집하여 《속곡대례續曲臺禮》 30권을 만들었다.
嗚呼 考其文記 可謂備矣
아, 그 문기文記를 고찰해봄에 가히 완비되었다 할 만하다.
以之施于貞觀開元之間이면 亦可謂盛矣
이것을 가지고 정관과 개원 연간에 시행하면 또한 성대하다 하겠다.
而不能至三代之隆者 具其文而意不在焉이니 此所謂禮樂爲虛名也哉인저
그러나 삼대三代 시대의 융성함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예문은 갖추었으나 의미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니, 이것이 이른바 예악禮樂이 허명이 되었다는 것이다.
역주
역주1 唐書禮樂志論 : 이 글은 古代와 唐나라의 禮樂制度의 變遷과 得失에 관해 논술하였다.
역주2 治出於一 : 政敎合一의 정치를 말한다.
역주3 朝覲聘問 : 朝覲은 신하가 군주를 뵙는 예이다. 봄에 뵙는 것을 朝라고 하고, 가을에 뵙는 것을 覲이라고 한다. 聘問은 諸侯간에 외교를 트고 友好를 맺는 것이다.
역주4 射鄕食饗 : 大射禮와 鄕飮酒禮의 종류이다.
역주5 師田學校 : 師田은 병사를 출동시켜 사냥 따위를 하는 것이고, 學校 역시 동물 사냥을 배우는 곳이다. 校는 동물 사냥을 의미한다.
역주6 苟簡 : 거칠고 엉성하다는 뜻이다.
역주7 事物名數降登揖讓拜俛伏興之節 : 名數는 名位와 禮數로 지위에 따라 행하는 禮의 등급이 다른 것이다. 降登은 예를 갖출 때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이다. 拜俛은 절하고 몸을 숙이는 것이고, 伏興은 엎드리고 몸을 일으키는 것이다. 모두 禮節를 행하는 모습이다.
역주8 (其)[具] : 저본에는 ‘其’자로 되어 있는데, 四庫全書本에서 《新唐書》와 《唐宋八代家文抄》에 모두 ‘具’자로 되어 있다. ‘具’자가 문리에 더 맞는다고 판단되어 ‘具’자로 고쳤다.
역주9 房玄齡 : 579~648. 唐나라 齊州 臨淄 사람으로, 자는 喬이고 房彦謙의 아들이다. 隋나라에서 진사가 되었으나 뒤에 당나라에 귀의하여 太宗 貞觀 원년에 中書令이 되고, 開國公에 봉해졌다. 뒤에 魏國公과 梁國公에 봉해졌다. 15년 동안 재상 직위에 있으면서 杜如晦와 정권을 담당하여 ‘방현령이 모의하고 두여회가 결단한다.[房謀杜斷]’는 일컬음이 있었다.
역주10 魏徵 : 580~643. 山東省 曲城 사람으로, 자는 玄成, 시호는 文貞이다. 隋나라 말 혼란기에 李密의 군대에 참가하였으나, 곧 唐 高祖에게 귀순하여 고조의 장자 李建成의 유력한 측근이 되었다. 황태자 건성이 아우 世民(뒷날 唐 太宗)과의 경쟁에서 패하였으나, 위징의 인격에 감복한 태종의 부름을 받아 諫議大夫 등의 요직을 역임한 후 宰相으로 중용되었다.
역주11 長孫無忌 : 594~659. 자는 輔機이고, 河南 洛陽 사람이다. 隋나라 右驍衛將軍 長孫晟의 아들로, 선조는 선비족 拓跋氏이다. 高宗 초에 太尉에 올라 《唐律疏議》를 지었다.
역주12 杜正倫 : 생몰년 미상. 唐 高宗 때의 재상이다. 貞觀 연간에 누차 中書侍郞에 올랐고, 군국의 정령을 관장하였다.
역주13 李義府 : 614~666. 瀛州 饒陽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문학으로 명성이 있었다. 唐 太宗 때에 벼슬에 나아가 신임을 크게 얻었고, 중서성의 직무를 두루 관장하였다.
역주14 李友益 : 고종 때의 중서시랑으로 唐나라 禮樂 정리에 참여하였다.
역주15 劉祥道 : 595~666. 자는 同壽이고, 唐朝 觀城(지금의 莘縣 觀城) 사람이다. 中書舍人, 御史中丞, 吏部侍郞, 刑部尙書, 右相 등의 직책을 역임하고, 廣平郡에 봉해졌다.
역주16 許圉師 : 安州 安陸(지금의 湖北省 安陸縣) 사람이다. 진사과에 급제하여 누차 給事中, 黃門侍郞 등을 역임하였고, 龍朔 3년에 左相이 되었다.
역주17 許敬宗 : 592~672. 자는 延族이고, 杭州 新城(지금의 浙江省 富陽縣 서남) 사람으로 許善心의 아들이다. 隋나라 때 관직을 맡았다고 당나라에 들어와 著作郞 兼修國史가 되고, 이어 給事中, 太子右庶子 등을 거쳤다. 고종이 즉위한 뒤 禮部尙書로 발탁되었으며, 侍中‧中書令 등을 거쳐 右相이 되었다.
역주18 韋琨 : 京兆 萬年(지금의 陝西省 西安) 사람이다. 太子洗馬事 등을 거쳐 太宗 때에 給事中이 되었다. 고종 때에 太子中舍人, 太常卿이 되었다.
역주19 武氏中宗 : 武氏는 則天武后(624~705)이다. 高宗의 후비인데, 中宗을 폐위하고 睿宗을 세웠으며, 다시 예종을 폐위하고 직접 황제가 되어 국호를 周로 바꾸었다. 中宗은 측천무후에 의해 폐위되었다가 뒤에 神龍 원년(705)에 다시 복위되었다.
역주20 韋縚 : 韋叔夏의 아들이다. 開元 연간에 集賢修撰, 光祿卿 등을 역임하고, 太常卿으로 올랐다가 太子少師가 되었다.
역주21 王嵒(암) : 자는 山甫이다. 玄宗 때에 벼슬하였으며, 글씨를 잘 쓰고 禮에 밝았다.
역주22 張說 : 667~730. 자는 道濟이고, 또 다른 자는 說之이다. 洛陽 사람으로 관직이 中書令에 이르렀고 燕國公에 봉해졌다. 朝廷의 중요한 글이 그의 손에서 나온 것이 많았다. 碑誌 문자에 뛰어났고, 詩는 淒婉하다는 평을 받는다. 시호는 文貞이다. 許國公 蘇頲과 함께 詔勅의 文章을 잘 지었으므로 ‘燕許大手筆’이라 칭하였다.
역주23 徐堅 : 659~729. 字는 元固이고 湖州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沛王 李賢이 그의 이름을 듣고 불러서 종이를 주고 賦를 지어보라고 하였다. 그 자리에서 바로 부를 짓자 기특하게 여겼다. 聖曆 연간에 東都留守判官이 되어 表奏를 담당하니, 王方慶이 ‘掌綸誥之選’이라 불렀다. 中宗 때에 給事中이 되고 玄宗 때에 集賢院學士가 되었다. 太子少保에 추증되고, 시호는 文이다. 저서에 《初學記》가 있다.
역주24 李銳 : 자세한 사항은 미상이다. 太常博士, 左拾遺를 지냈고 禮樂 개정에 참여하였다.
역주25 施敬本 : 潤州 丹陽 사람이다. 開元 연간에 四門助敎가 되고, 太常博士로서 集賢修撰이 되었다. 뒤에 右補闕과 秘書郞이 되었다.
역주26 蕭嵩 : ?~749. 後梁 明帝 때의 蕭巋의 玄孫이다. 神龍 元年(705)에 洛州參軍事, 景雲 元年(710)에 醴泉尉가 되었다. 開元 초에 中書舍人이 되고, 姚崇의 신임을 받아 開元 14년(726)에 朔方節度使를 역임하였고, 개원 16년(728)에 재상이 되었다.
역주27 王仲丘 : 沂州 琅邪 사람으로 王師順의 손자이다. 玄宗 開元 연간에 集賢修撰, 起居舍人 등을 지냈다. 禮部員外郞으로 遷職되어 《開元禮》, 《群書四錄》등을 纂輯하는 데 참여했다. 저서에 《攝生撮錄》 등이 있다.
역주28 王涇 : 河南府 密縣尉를 지냈고, 元和 元年(806)에 내직에 들어와 太常博士가 되었다.
역주29 韋公肅 : 京兆 사람으로, 元和 초년에 太常博士 兼修撰이 되었다.
역주30 王彦威 : 太原 사람으로 元和 연간에 明經 甲科에 합격하였다. 大和 연간에 司農卿 등을 거쳐 平盧節度使에 제수되었다. 檢校禮部尙書, 忠武軍節度使 등을 거쳐 北海縣子에 봉해졌다. 시호는 靖이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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