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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3)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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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9. 매성유梅聖兪시집詩集에 대한 서문
絶佳
매우 아름답다.
予聞世謂詩人少達而多窮이라하니 夫豈然哉
내가 들으니 세상 사람들은 ‘시인은 영달한 사람은 적고 곤궁한 사람은 많다.’라고 하니 어찌 그렇겠는가.
蓋世所傳詩者 多出於古窮人之辭也
세상에 전해오는 시는 대부분 옛날 곤궁한 사람의 말에서 나온 것이다.
凡士之蘊其所有而不得施於世者 多喜自放於山巓水涯之外하야 見蟲魚草木風雲鳥獸之狀類하야 往往探其奇怪하고
무릇 소유한 재능을 온축하고도 세상에 펴지 못한 선비는 대부분 산속이나 물가에서 스스로 한가하게 살면서 벌레와 물고기, 풀과 나무, 바람과 구름, 새와 짐승들의 모습을 보고서 왕왕 기괴함을 탐구하는 것을 좋아한다.
內有憂思感憤之鬱積이면 其興於怨刺하야 以道羈臣寡婦之所歎하고 而寫人情之難言하니 蓋愈窮則愈工이라
그리고 내면에 근심과 감분感憤이 켜켜이 쌓이면 원망하고 풍자하는 마음을 일으켜 버림받은 신하와 과부가 내는 한탄을 시로 말하여 보통 사람이 하기 어려운 말들을 묘사하니, 대체로 곤궁할수록 더욱 훌륭한 시가 나온다.
然則非詩之能窮人이라 殆窮者而後工也로다
그렇다면 시가 사람을 곤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곤궁하게 된 뒤라야 훌륭한 시가 나오는 것이다.
予友梅聖兪 하고 累擧進士 輒抑於有司하야 凡十餘年이라
나의 벗 매성유梅聖兪는 어릴 때 음보蔭補로 관리가 되었고, 여러 번 진사進士에 응시하였으나 번번이 시험관이 뽑아주지 않아 주현州縣에서 하급관리에 머문 것이 모두 10여 년이었다.
年今五十이로되 猶從하야 爲人之佐하야 鬱其所蓄하야 不得奮見於事業이라
지금 나이가 50세인데, 오히려 벽서辟書를 좇아 남의 보좌관이 되어 뛰어난 재주를 쌓아두고도 사업에 크게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其家宛陵하야 幼習於詩하야 自爲童子 出語已驚其長老하고 旣長 學乎六經仁義之說하야 其爲文章 簡古純粹하야 不求苟說於世하니 世之人 徒知其詩而已
그는 완릉宛陵에 거주하면서 어릴 때부터 시를 익혀 동자童子일 때부터 지은 글이 이미 장로長老들을 놀라게 하였고, 장성한 뒤에는 육경六經인의仁義의 설을 배워 지은 문장이 간결하고 고아하고 순수하여 구차하게 세속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 하지 않았으니, 세상 사람들이 그의 시만을 알 뿐이었다.
然時無賢愚 語詩者 必求之聖兪 聖兪亦自以其不得志者樂於詩而發之
그러나 당시에 현명한 사람 어리석은 사람 가릴 것 없이 시를 말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성유聖兪를 손꼽았고, 성유聖兪 또한 스스로 뜻을 얻지 못한 것을 기꺼이 시로 발산하였다.
故其平生所作 於詩尤多하니 世旣知之矣 而未有薦于上者
그러므로 평생 지은 것이 시에서 더욱 많았으니, 세상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지만 조정에 천거한 사람은 없었다.
嘗見而歎曰 二百年無此作矣라하니 雖知之深이나 亦不果薦也
옛날 왕문강공王文康公이 일찍이 그의 시를 보고 감탄하여 “200년 동안 이런 작품은 없었다.”라고 하였으니, 비록 깊이 알아준 것이지만 그 역시 천거하지는 않았다.
若使其幸得用於朝廷하야 作爲하야 以歌詠大宋之功德하야 薦之淸廟而追商周魯頌之作者 豈不偉歟
만약 다행히 조정에 등용되어 아송雅頌을 지어 대송大宋의 공덕을 노래하여 태묘太廟에 올려져 《시경詩經》의 〈상송商頌〉, 〈주송周頌〉, 〈노송魯頌〉의 작품을 뒤잇게 하였다면 어찌 훌륭하지 않았겠는가.
柰何使其老不得志而爲窮者之詩하야 乃徒發於蟲魚物類羈愁感歎之言
어찌하여 그에게 늙도록 뜻을 얻지 못해 곤궁한 자의 시를 짓게 하여 이에 한갓 벌레와 물고기, 각종 물류들에 관한 말과 나그네 시름과 감탄하는 말을 발하게 하였단 말인가.
世徒喜其工하고 不知其窮之久而將老也하니 可不惜哉
세상에서는 한갓 그가 시를 잘 짓는다는 것을 좋아할 뿐 그가 오랫동안 곤궁하게 지내며 늙어가는 줄 모르니 애석하지 않겠는가.
聖兪詩旣多 不自收拾하니 其妻之兄子 懼其多而易失也하야 하야 次爲十卷이라
성유聖兪의 시가 이미 많음에 스스로 수습하지 않았으니, 그의 처조카인 사경초謝景初가 시가 많지만 쉽게 유실될까 걱정하여 낙양洛陽에서 오흥吳興에 이르는 동안 지은 시를 가져다 편차하여 10권을 만들었다.
予嘗嗜聖兪詩而患不能盡得之일새 遽喜謝氏之能類次也
나는 일찍이 성유聖兪의 시를 좋아하여 모두 다 볼 수 없을까 걱정하였기 때문에, 대번에 사씨謝氏성유聖兪의 시를 분류하고 편차한 것을 기뻐하였다.
輒序而藏之러라
그래서 곧 서문을 짓고 보관해두었다.
其後十五年 聖兪以疾卒于京師어늘 余旣哭而銘之하고
15년 뒤에 성유聖兪경사京師에서 병으로 죽었는데 내가 곡한 뒤에 묘지명墓誌銘을 썼다.
因索于其家하야 得其遺稿千餘篇하야所藏하야 掇其尤者六百七十七篇하야 爲一十五卷하노라
그리고 그의 집에서 작품들을 찾아내 유고遺稿 1,000여 편을 얻어서 예전부터 보관하고 있던 것과 아울러 뛰어난 작품 677편을 모아 15권으로 만들었다.
嗚呼 吾於聖兪詩 論之詳矣 故不復云하노라
아, 나는 성유聖兪의 시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논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말하지 않노라.
역주
역주1 : 이 글은 梅聖兪(梅堯臣)가 살아 있을 때에 대략 지어놓았다가 그가 죽은 1년 뒤인 嘉祐 6년(1061)에 다시 정리하여 지은 것이다.
이 서문에 대해 金昌協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歐陽公의 문집에 梅聖兪의 시집 서문이 있는데, 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은 梅聖兪가 살아 있을 적에 지은 것이다. 예컨대 ‘나이가 지금 쉰이다.’ 하고, 또 ‘세상 사람들은 그가 오랫동안 곤궁하게 지내며 늙어가는 줄은 모른다.’ 하였으니, 梅聖兪가 죽은 뒤에 지은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런데 끝에는 ‘15년 뒤에 梅聖兪는 병들어 죽었다.’는 말이 있다. 公은 처음에 謝景初가 편집한 것을 바탕으로 앞에 말한 것처럼 서문을 짓고 梅聖兪가 죽은 뒤에 다시 그 완전한 詩稿를 편집하여 정하자, 이전에 쓴 서문에 이 몇 마디 말을 蛇足처럼 보태고 전후의 글을 합하여 한 편으로 만든 것이니, 비록 의심스럽기는 하나 자세히 살펴보면 저간의 사정이 이와 같을 것이다. 그리고 公이 梅聖兪에게 준 편지를 살펴보면 ‘시집의 서문을 삼가 명하신 대로 부쳐드립니다. 뛰어난 솜씨를 지닌 작자의 훌륭한 점을 기술하여 말하기는 했습니다만 마음에 들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는데, 이 또한 이 서문을 가리켜 한 말일 것이다. 우연히 歐陽公의 문집을 보고 기록하는 바이다.” 《農巖集 권34 雜識 外篇》
역주2 少以蔭補爲吏 : 梅堯臣의 숙부인 梅詢이 翰林侍讀學士를 역임하였기 때문에 蔭補로 관리가 된 것이다.
역주3 困於州縣 : 梅堯臣은 桐城, 河南, 河陽의 主簿를 지냈고, 德興, 乾德, 襄城의 知縣을 지냈다.
역주4 辟書 : 원래는 조정에서 禮로 賢材를 초빙하는 문서를 말하는데, 후에 사람을 초빙하는 문서라는 의미로 쓰인다.
역주5 王文康公 : 文康은 王曙(963~1034)의 시호이다. 字는 晦叔이고 宋 眞宗 때에 재상을 지냈다. 梅堯臣의 시를 칭찬한 것은 王曙가 河南府를 다스릴 때의 일이다.
역주6 雅頌 : 《詩經》의 〈大雅〉와 〈小雅〉 그리고 〈周頌〉, 〈魯頌〉, 〈商頌〉을 가리킨 것으로, 雅는 朝廷의 雅樂이고, 頌은 祖先의 功德을 찬양하는 宗廟樂이다.
역주7 謝景初 : 1019~1084. 字는 師厚, 號는 今時翁, 杭州 富陽 사람이다. 大曆 연간에 進士가 되었고 湖州轉運判官 등을 역임하였다.
역주8 取其自洛陽至于吳興已來所作 : 梅堯臣은 天聖 9년(1031)에 洛陽에서 河南縣主簿로 있었고, 慶曆 3년(1043)에서 4년(1044)까지 吳興에서 湖州稅監을 지냈는데, 謝景初가 모은 梅堯臣의 시는 이 시기에 지어진 것들이다.
역주9 : 문맥이 통하지 않아 본집에 근거하여 ‘舊’자로 번역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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