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2)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破千古人君之疑
臣聞朋黨之說 自古有之하니 惟幸人君辨其君子小人而已
大凡君子 與君子 以同道爲朋하고 小人 與小人으로 以同利爲朋하니 此自然之理也
然臣謂小人無朋이요 惟君子則有之라하노니 其故何哉
小人 所好者祿利也 所貪者財貨也
當其同利之時하야 暫相黨引以爲朋者 僞也
及其見利而爭先하고 或利盡而交疎하얀 則反相賦害하야 雖其兄弟親戚이라도 不能相保
故臣謂小人無朋이니 其暫爲朋者 僞也라하노라
君子則不然하야 所守者道義 所行者忠信이요 所惜者名節이라
以之修身이면 則同道而相益하고 以之事國이면 則同心而共濟하야 終始如一하니 此君子之朋也
故爲人君者 但當退小人之僞朋하고 用君子之眞朋이면 則天下治矣리라
堯之時 小人 爲一朋하고 君子 爲一朋이어늘 하니 堯之天下 大治하고
及舜自爲天子하야는 竝列于朝하야 更相稱美하고 更相推讓하야 凡二十二人 爲一朋이어늘 而舜皆用之하야 天下亦大治
紂之時 億萬人 各異心이니 可謂不爲朋矣
然紂以亡國하고 周武王之臣 三千人爲一大朋이로되 而周用以興하고
이러니하야 漢室大亂일새 後方悔悟하야 盡解黨人而釋之 然已無救矣
夫前世之主 能使人人異心不爲朋 莫如紂 能禁絶善人爲朋 莫如 能誅戮淸流之朋 莫如之世
然皆亂亡其國이라
更相稱美推讓而不自疑 莫如舜之二十二臣이요 舜亦不疑而皆用之
然而後世不誚舜爲二十二人朋黨所欺하고 而稱舜爲聰明之聖者 以能辯君子與小人也
周武之世 擧其國之臣三千人共爲一朋하니 自古爲朋之多且大莫如周
然周用此以興者 善人 雖多而不厭也 夫興亡治亂之迹 爲人君者可以鑑矣


06. 붕당朋黨에 대한
천고千古 임금의 의심을 깨뜨렸다.
신은 듣건대 붕당朋黨의 설은 예로부터 있었으니, 오직 임금께서는 군자君子소인小人을 분별하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대체로 군자는 군자와 더불어 를 함께하여 붕당을 이루고, 소인은 소인과 더불어 이익利益을 함께하여 붕당을 이루니, 이는 자연의 이치입니다.
그러나 신은 소인에게는 붕당이 없고 군자에게만 붕당이 있다고 여기니, 그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소인이 좋아하는 것은 이익利益봉록俸祿이고, 탐내는 것은 재화財貨입니다.
저들이 이익을 함께할 때에 잠시 서로 붕당朋黨을 결성하고 끌어들여 벗으로 삼는 것은 거짓입니다.
이익을 보기에 이르러서는 서로 먼저 차지하려고 다투고, 혹 이익이 다 없어져서 교분이 소원하게 되어서는 도리어 서로 해쳐서, 비록 형제 친척이라도 서로 보호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신은 소인에게는 붕당이 없으니, 저들이 잠시 붕당을 이루는 것은 거짓이라고 생각합니다.
군자는 그렇지 않아서 지키는 것은 도의道義요, 행하는 것은 충신忠信이요, 아끼는 것은 명예名譽절조節操입니다.
이로써 몸을 닦으면 를 함께하여 서로 유익하고, 이로써 국가에 일하면 마음을 함께하여 서로 도와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으니, 이것이 군자의 붕당朋黨입니다.
그러므로 인군人君이 된 자는 소인의 거짓 붕당을 물리치고 군자의 참된 붕당을 써야 하니, 그렇게 된다면 천하는 다스려질 것입니다.
임금 때에 소인인 공공共工환도驩兜 등 4인이 하나의 붕당을 이루고, 군자인 팔원八元팔개八凱 등 16인이 하나의 붕당을 이루었는데, 임금을 도와 사흉四凶인 소인의 붕당을 물리치고 팔원‧팔개인 군자의 붕당을 등용하여 요의 천하가 크게 다스려졌습니다.
순이 스스로 천자가 되기에 이르러서는 고요皐陶후직后稷 등 22인이 함께 조정에 늘어서서 번갈아 서로 칭찬하고 번갈아 서로 자리를 미루고 사양하여 22인이 한 붕당이 되었는데, 순은 이들을 모두 등용하여 천하가 또한 크게 다스려졌습니다.
서경書經》 〈우서虞書 태서泰誓〉에 이르기를 “ 주왕紂王은 신하 억만 명이 있으나 억만의 마음이었거니와, 나라는 신하 3천 명이 있는데 오직 한마음이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주왕紂王 때에는 억만 사람이 각기 마음이 달랐으니, 붕당朋黨을 이루지 않았다고 이를 만합니다.
그러나 주왕紂王은 이 때문에 나라를 망쳤고, 무왕武王의 신하는 3천 명이 하나의 큰 붕당을 이루었으나 나라는 이들을 등용하여 흥하였습니다.
후한後漢 헌제獻帝 때에는 천하의 명사名士들을 모두 잡아들여 감금하여 당인黨人이라고 지목하였는데, 황건적黃巾賊이 일어나 나라 황실이 크게 혼란해지자, 그러한 뒤에야 비로소 뉘우치고 깨달아 당인黨人들을 모두 풀어 석방하였으나 이미 구원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라 말년에 점점 붕당론朋黨論이 일어났는데, 소종昭宗 때에 이르러 조정의 명사들을 모두 죽여서 황하黃河에 다 던지며 말하기를 “이들은 청류淸流이니 탁류濁流에 던질 만하다.”라고 하더니, 나라가 마침내 망하였습니다.
전대前代군주君主 중에 사람마다 마음을 달리하여 붕당朋黨을 이루지 못하게 한 것은 주왕紂王만 한 이가 없고, 선인善人들이 붕당을 이룸을 금지한 것은 후한後漢헌제獻帝만 한 이가 없고, 청류淸流의 붕당을 주륙誅戮한 것은 소종昭宗의 시대만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그 나라를 혼란시켜 망하게 하였습니다.
번갈아 서로 칭찬하고 번갈아 서로 자리를 미루고 사양하여 서로 의심하지 않은 것은 의 22명의 신하만 한 이가 없었고, 또한 이들을 의심하지 않고 모두 등용하였습니다.
그러나 후세에서는 이 22명의 붕당에게 속았다고 비꼬지 않고, 을 총명한 성군聖君이라고 칭찬한 것은 군자와 소인을 분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왕武王의 세대에 온 나라의 신하 3천 명이 함께 하나의 붕당을 이루었으니, 예로부터 붕당을 이룸이 많고 또 큰 것은 주나라만 한 나라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나라가 이들을 등용하여 흥한 것은 선인善人은 비록 많더라도 나쁘지 않기 때문이니, 흥망興亡치란治亂의 자취를 인군人君이 된 자는 거울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역주
역주1 朋黨論 : 歐陽脩가 慶曆 4년(1044)에 지은 글이다. 그 당시 宋 仁宗이 杜衍, 富弼, 韓琦, 范仲淹 등을 進用해서 개혁할 마음을 품었는데, 歐陽脩 등 諫官의 대대적인 지지를 얻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守舊勢力의 강렬한 반대를 만났으니, 呂夷簡‧夏竦 등이 여론을 크게 조성하여 부필, 범중엄, 구양수 등을 무함하여 朋黨이라고 하였다.
저본의 제목 아래, “諫院에 있을 때 올린 것이다.[在諫院進]”라는 註가 달려 있다.
역주2 共工驩兜等四人 : 堯임금 때의 네 명의 惡人인 四凶으로, 共工‧驩兜‧三苗‧鯀을 가리킨다. 《書經》 〈虞書 舜典〉에 “공공을 幽洲에 유배하고, 환도를 嵩山에 유치하고, 삼묘를 三危에 몰아내고, 곤을 羽山에 가두어 네 사람을 벌주었다.[流共工于幽洲 放驩兜于嵩山 竄三苗于三危 殛鯀于羽山 四罪]”라고 하였다.
역주3 八元八凱十六人 : 八元은 高辛氏의 여덟 아들로 伯奮, 仲堪, 叔獻, 季仲, 伯虎, 仲熊, 叔豹, 季貍이고, 八凱는 高陽氏의 여덟 아들로 蒼舒, 憒攲, 檮戭, 大臨, 尨降, 庭堅, 仲容, 叔達이다. 《春秋左氏傳 文公 18년》
역주4 舜佐堯……而進元凱君子之朋 : 《春秋左氏傳》 文公 18년 조에 “舜이 堯임금의 신하가 되어 八凱를 천거하여 后土를 주관하게 하고 八元을 천거하여 사방에 敎化를 펴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역주5 皐夔稷契等二十二人 : 皐는 皐陶로 舜임금 때 법의 집행을 맡은 士였고, 夔는 교육과 음악을 전담한 典樂이었고, 稷은 后稷으로 농업을 담당하였고, 契은 민정 장관이라 할 司徒의 직책을 관장하였다. 22인은 四岳 1인과 중앙 장관인 9官과 지방 장관인 12牧을 합친 것이다. 《書經 虞書 舜典》
역주6 紂有臣億萬……惟一心 : 《書經》 〈周書 泰誓 上〉에 나온다. 저본의 ‘紂’와 ‘周’는 《서경》에 ‘受’와 ‘予’로 되어 있다.
역주7 後漢獻帝時……目爲黨人 : 黨錮之禍를 말한다. 後漢 桓帝 때 환관이 정권을 독단하다가 朝官과 太學生의 반대를 만났는데, 환관이 이들이 조정을 비방했다는 죄목으로 李膺 등 200여 명을 黨人이라고 명명하여 체포하였다. 靈帝 때에 竇武‧陳藩 등이 환관을 죽여 없애려고 도모하였는데 일이 누설되어 살해당하였다. 그 후에 李膺‧范滂 등 100여 명은 사사되었고, 6, 7백 명은 囚禁되었다. 《後漢書 권67 黨錮列傳》
역주8 黃巾賊起 : 後漢 鉅鹿 사람인 張角이 黃老를 숭봉하여 五斗米道를 행하면서 제자 수십만 명을 거느리고 靈帝 때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 무리들이 모두 누런 두건을 착용하였으므로 黃巾賊이라고 불렀다. 그 뒤 皇甫嵩에 의하여 평정되었다. 《後漢書 권101 皇甫嵩列傳》
역주9 唐之晩年 漸起朋黨之論 : 唐나라 穆宗에서 武宗 때까지 牛僧孺와 李德裕가 서로 뜻이 맞지 않아 알력이 심했는데, 그로 인해 결국 牛僧孺‧李宗閔을 우두머리로 하는 당과 李吉甫‧李德裕 父子를 우두머리로 하는 당으로 갈라져서 40년간 대립하였다. 당시 이를 일러 ‘牛李之黨’이라 불렀다. 《新唐書 권180 李德裕列傳》
역주10 及昭宗時……可投濁流 : 昭宗은 昭宣帝의 잘못이다. 소선제는 바로 哀帝이다. 唐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昭宣帝 天祐 2년(905)에 재상 柳瓚이 朱全忠의 뜻에 영합하여 大臣인 裴樞 등 7인을 모함해서 滑州 白馬驛에서 죽일 적에, 과거에 누차 급제하지 못해서 불만을 품고 있던 李振이 주전충의 佐吏로 있다가 “이들이 스스로 淸流라고 말을 하니 黃河에 던져 넣어서 영원히 濁流가 되게 하는 것이 좋겠다.[此輩自謂淸流 宜投於黃河 永爲濁流]”라고 하자, 주전충이 웃으면서 허락하였다고 한다. 《舊五代史 梁書 권18 李振傳》
역주11 唐遂亡矣 : 907년에 唐나라가 朱全忠에게 멸망한 것을 말한다. 주전충이 바로 後梁의 太祖이다.
역주12 漢獻帝 : 漢나라 桓帝와 靈帝가 되어야 한다.
역주13 唐昭宗 : 唐나라 昭宣帝가 되어야 한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