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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6)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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歐陽文忠公五代史抄 卷11
歸安 鹿門 茅坤 批評
孫男 闇叔 茅著 重訂
01.
此等文章 千年絶調
嗚呼 盛衰之理 雖曰天命이나 豈非人事哉 原莊宗之所以得天下與其所以失之者 可以知之矣
世言之將終也 以三矢賜莊宗而告之曰 어늘 而皆背晉以歸梁하니 此三者 吾遺恨也 與爾三矢하노니 爾其無忘乃父之志어다하야늘
莊宗受而藏之於廟하고 其後用兵이면 則遣從事하야 以一告廟하야 請其矢하야 盛以錦囊하야 負而前驅하고 及凱旋而納之러라
方其하고 하야 入於大廟하야 還矢先王하고 而告以成功 其意氣之盛 可謂壯哉인저
及仇讎已滅하고 天下已定하야는 이라
豈得之難而失之易歟 抑本其成敗之迹而皆自於人歟
이라하니 憂勞 可以興國이요 逸豫 可以亡身 自然之理也
故方其盛也 擧天下之豪傑하야도 莫能與之爭이러니 及其하야는 數十伶人困之하야 而身死國滅하야 爲天下笑
夫禍患 常積於忽微하고 而智勇 多困於所溺이니 豈獨伶人也哉 作伶官傳하노라
莊宗旣好俳優하고 又知音하야 能度曲이라 至今汾晉之俗 往往能歌其聲하니 皆是也
其小字 亞子 當時人或謂之亞次 又別爲優名以自目하야 曰李天下
自其爲王으로 至於爲天子 常身與俳優雜戲於庭하니 伶人由此用事하야 遂至於亡하다
素微하니 其父劉叟 賣藥善卜하야 號劉山人이라
劉氏性悍하야 方與諸姬爭寵 常自恥其世家하여 而特諱其事어늘
莊宗乃爲劉叟衣服하야 自負蓍囊藥篋하야 使其子繼岌提破帽而隨之하야 造其臥內하야 曰 劉山人來라하니 劉氏大怒하야 笞繼岌而逐之하니 宮中以此爲笑樂이러라
其戰於 嬖伶周匝爲梁人所得이러니 其後滅梁入汴 周匝謁於馬前이라
莊宗得之喜甚하야 賜以金帛하고 勞其良苦하니 周匝對曰 身陷仇人이로대 而得不死以生者 之力也 願乞二州하야 以報此兩人이라하니 莊宗皆許以爲刺史
郭崇韜諫曰 陛下所與共取天下者 皆英豪忠勇之士 今大功始就하야 封賞未及於一人이어늘 而先以伶人爲刺史하니 恐失天下心이니 不可라하야 因格其命하다
逾年而伶人屢以爲言하니 莊宗謂崇韜曰 吾已許周匝矣 使吾慙見此三人이라 公言雖正이나 然當爲我屈意行之라하고 卒以俊爲景州刺史하고 德源爲憲州刺史하다
莊宗好畋獵이라 獵於中牟라가 踐民田한대 中牟縣令當馬切諫하야 爲民請하니 莊宗怒하야 叱縣令去하고 將殺之
伶人敬新磨 知其不可하고 乃率諸伶하야 走追縣令하야 擒至馬前하야 責之曰 汝爲縣令하야 獨不知吾天子好獵邪 奈何縱民稼穡하야 以供稅賦 何不饑汝縣民而空此地하야 以備吾天子之馳騁 汝罪當死로다하고 因前請亟行刑하니 諸伶共唱和之어늘 莊宗大笑하니 縣令乃得免去러라
莊宗嘗與群優戲於庭할새 四顧而呼曰 李天下 李天下 何在오하니 新磨遽前하야 以手批其頰이라
莊宗失色하니 左右皆恐하고 群伶亦大驚駭하야 共持新磨하야 詰曰 汝奈何批天子頰고하니
新磨對曰 李天下者 一人而已 復誰呼邪오라하다 於是 左右皆笑하니 莊宗大喜하야 賜與新磨甚厚러라
新磨嘗奏事殿中한대 殿中多惡犬이라 新磨去 一犬起逐之하니 新磨倚柱而呼曰 陛下毋縱兒女齧人이라하다
莊宗家世夷狄이요 夷狄之人諱狗일새 故新磨以此譏之
莊宗大怒하야 彎弓注矢하야 將射之하니 新磨急呼曰 陛下無殺臣하소서 臣與陛下爲一體 殺之不祥이라하다
然時諸伶 獨新磨尤善俳하야 其語最著 而不聞其他過惡이라 其敗政亂國者 有景進, 史彦瓊, 郭門高三人爲最
是時 諸伶人出入宮掖하야 侮弄搢紳하니 群臣憤嫉이로대 莫敢出氣하고
或反相附託하야 以希恩倖하고 四方藩鎭 貨賂交行하니 而景進最居中用事
莊宗遣進等하야 出訪民間하야 事無大小 皆以聞이라 每進奏事殿中 左右皆屛退하고 軍機國政 皆與參決이라 러라
莊宗初入洛하야 居唐故宮室한대 而嬪御未備 閹宦希旨하야 多言宮中夜見鬼物하야 相驚恐이라하니 莊宗問所以禳之者하니
因曰 故唐時 後宮萬人이러니 今空宮多怪하니 當實以人乃息이라하니 莊宗欣然하다
其後幸鄴하야 乃遣進等하야 採鄴美女千人하야 以充後宮한대 而進等緣以爲姦하니 軍士妻女因而逃逸者數千人이러라
莊宗還洛 進載鄴女千人以從하니 道路相屬하야 男女無別이라
崇韜素嫉伶人하야 常裁抑之하니 伶人由此皆樂其死러라
崇韜之壻也 進讒於莊宗曰 存乂且反하야 爲婦翁報仇이라하야늘 乃囚而殺之하다
以梁河中降晉者
及莊宗入洛하야 伶人皆求賂於友謙한대 友謙不能給而辭焉하니 進乃讒友謙曰 崇韜且誅 友謙不自安하니 必反이라 宜竝誅之라하다
於是 及其將五六人皆族滅之하니 天下不勝其冤이러라
進官至銀靑光祿大夫檢校左散騎常侍兼御史大夫上柱國하다
史彦瓊者 爲武德使하야 居鄴都하니 而魏博六州之政 皆決彦瓊이요 自留守王正言而下 皆俛首承事之
是時 郭崇韜以無罪見殺於蜀이어늘 天下未知其死也 第見京師殺其諸子하고 因相傳曰 崇韜殺魏王繼岌而自王於蜀矣 以故 族其家라하니 鄴人聞之하고 方疑惑이러라
已而 朱友謙又見殺한대 友謙子廷徽 爲澶州刺史 有詔彦瓊使殺之하니 彦瓊秘其事하고 夜半馳出城이라
鄴人見彦瓊無故夜馳出하고 因驚傳曰 劉皇后怒崇韜之殺繼岌也하야 已弑帝而自立하야 急召彦瓊計事라하니 鄴都大恐이러라
貝州人有來鄴者 傳此語以歸한대 戍卒皇甫暉聞之하고 由此作亂이라
在禮已至하니 鄴都巡檢使孫鐸 見彦瓊하야 求兵禦賊한대 彦瓊不肯與하야 曰 賊未至하니 至而給兵 豈晩邪리오하다
已而賊至하니 彦瓊以兵登北門하야 聞賊呼聲하고 大恐하야 棄其兵而走하야 單騎歸於京師
在禮由是得入於鄴하야 以成其叛亂者 由彦瓊啓而縱之也
郭門高者 名從謙이니 門高 其優名也 雖以優進이나 而嘗有軍功이라 故以爲從馬直指揮使하니 從馬直 蓋親軍也
從謙以姓郭으로 拜崇韜爲叔父하고 而皇弟存乂又以從謙爲養子러니 崇韜死 存乂見囚하니 從謙置酒軍中하야 憤然流涕하고 稱此二人之寃이러라
是時 從馬直士王溫 宿衛禁中 夜謀亂이라가 事覺被誅하니 莊宗戲從謙曰 汝黨存乂崇韜負我러니 又敎王溫反이온여 復欲何爲乎아하다
從謙恐하야 退而激其軍士曰 罄爾之貨하야 食肉而飮酒하야 無爲後日計也라하다
軍士問其故하니 從謙因曰 上以王溫故 俟破鄴하야 盡阬爾曹라하니 軍士信之하야 皆欲爲亂이러라
李嗣源兵反하야 向京師하니 莊宗東幸汴州어늘 而嗣源先入이라
居數日 莊宗復東幸汜水하야 謀扼關以爲拒하다
四月丁亥朔 朝群臣於中興殿하고 宰相對三刻罷 從駕黃甲馬軍陣於宣仁門하고 步軍陣於五鳳門以俟
莊宗入食內殿하니 從謙自營中으로 露刃注矢하야 馳攻興敎門하야 與黃甲軍相射
莊宗聞亂하고 率諸王衛士하야 擊亂兵하야 出門이라 亂兵縱火焚門하고 緣城而入하니 莊宗擊殺數十百人이라
亂兵從樓上射帝하니 帝傷重하야 踣於絳霄殿廊下어늘 自皇后諸王으로 左右皆奔走러라
至午時하야 帝崩하니 人善友 聚樂器而焚之하다
嗣源入洛하야 得其骨하야 葬新安之雍陵하다 以從謙爲景州刺史라가 已而殺之하다
傳曰 이라하니 莊宗好伶이라가 而弑於門高하고 焚以樂器하니 可不信哉 可不戒哉
伶人 始則怨崇韜之沮抑之也而讒之하니 劉后使其子繼岌賊殺之於蜀하고 再則仇友謙之不與賂也而倂殺友謙하고
三則因而人情詾詾하야 中外訛言하야 遂激軍士하야 成趙在禮之亂하고 四則郭從謙 又以莊宗嘗誡之 幷激軍士하야 助嗣源之變하야 而莊宗被弑하니 一一如畫


01. 영관伶官들의 전기傳記
이와 같은 문장은 천년 세월에 드문 절조絶調이다.
아아! 성쇠盛衰의 이치는 비록 천명天命이라고는 하나 어찌 사람의 일이 아니겠는가. 후당後唐 장종莊宗이 천하를 얻은 까닭과 천하를 잃은 까닭을 따져보면 알 수 있다.
세상에서 말하기를, 진왕晉王이 임종할 때에 세 개의 화살을 장종에게 주면서 고하기를 “나라는 나의 원수이다. 연왕燕王은 내가 세워준 사람이고 거란契丹은 나와 형제兄弟로 맹약하였거늘 모두 을 배반하고 양나라에 붙었으니 이 셋은 내가 세상을 떠나면서 풀지 못하고 남기고 가는 이다. 너에게 세 개의 화살을 주노니 너는 네 아비의 뜻을 잊지 말지어다.”라고 하였다.
장종이 화살을 받아 종묘宗廟에 보관해두고 그 뒤 군대를 일으킬 때면 종사관을 보내 하나의 소뢰少牢로 종묘에 고하여 화살을 내어가겠다고 청하고서 비단 주머니에 화살을 담아 짊어지고 군대의 선봉에서 말을 달려나갔고, 개선하고 와서는 종묘에 다시 넣어두었다.
연왕 부자父子를 끈으로 묶고 후량後梁군신君臣들의 머리를 함에 담아 와서 종묘에 들어가 화살을 선왕先王에게 돌려드리고 공을 이루었음을 고할 때에는 그 의기意氣의 성대함이 장대壯大하다고 이를 만하였다.
그러나 원수들이 이미 멸망하고 천하가 안정되고 나서는 한 사내가 야밤에 소리치자 난리를 일으키는 자들이 사방에서 호응하였다.
그리하여 황망히 동쪽으로 나와 적들을 보기도 전에 군사들이 뿔뿔이 흩어져 버리거늘 임금과 신하가 서로 돌아보며 어디로 갈지를 몰라 심지어 하늘에 맹세하며 머리카락을 자르고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적셨으니, 어찌 그리도 쇠잔했던가.
어쩌면 얻기는 어려워도 잃기는 쉬운 것인가. 아니면 그 성공과 패망의 자취를 궁구해볼 때 모두 남에게서 비롯된 것인가.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가득하면 덜어냄을 초래하고 겸손하면 보탬을 얻는다.”라고 하니, 근심과 수고는 나라를 일으킬 수 있고 방일放逸안락安樂은 몸을 망칠 수 있는 것이 자연한 이치이다.
그러므로 한창 융성할 때에는 온 천하의 호걸들도 그와 다툴 수 없더니, 쇠망할 때가 되자 수십 명의 영인伶人이 그를 피폐하게 하여 몸은 죽고 나라는 멸망하여 천하의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대저 화환禍患은 항상 지극히 미세한 데에서 쌓이고 지혜 있고 용기 있는 자는 자신이 탐닉하는 대상에 피폐해지는 경우가 많으니 어찌 영인만 그렇겠는가. 〈영관전〉을 짓노라.
장종莊宗배우俳優를 좋아한 데다가 또 음률을 알아서 곡을 지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도 분주汾州진주晉州의 민간에서 왕왕 그 소리를 노래할 수 있으니, “어제御製”라고 불리는 것들이 모두 그것이다.
장종의 아명兒名아자亞子이니 당시 사람들은 혹 아차亞次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또 장종이 별도로 예명藝名을 만들어 스스로를 가리켜 “이천하李天下”라고 하였다.
장종이 진왕晉王이 되었을 때부터 천자가 될 때까지 항상 몸소 배우들과 뜰에서 잡다한 연희를 벌이니, 영인伶人들이 이를 말미암아 국사國事를 농단하여 마침내 나라가 망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황후皇后 유씨劉氏는 본래 미천하였으니, 그 아버지 유수劉叟는 약을 팔고 점을 잘 쳐서 유산인劉山人이라 불렸다.
유씨는 성질이 사나워 한창 여러 후궁들과 황제의 총애를 다툴 적에 늘 자신의 출신을 부끄러워하면서 특히 아버지의 일을 숨겼다.
그러자 장종이 유수의 복색을 갖추고서 스스로 점치는 산가지 주머니와 약상자를 짊어지고 아들 이계급李繼岌에게는 망가진 모자를 들고 뒤따르게 하고 침전寢殿 안으로 들어가 말하기를 “유산인이 딸을 보러 왔다.”라고 하니, 유씨가 크게 노하여 이계급을 매로 때리며 쫓아내었다. 궁중 사람들은 이를 우스갯거리로 여겨 즐겼다.
장종莊宗호류胡柳에서 싸울 때에 총애하는 영인伶人 주잡周匝나라 사람들에게 붙잡혔는데, 그 뒤 양나라를 멸망시키고 변주汴州로 입성할 때 주잡이 장종의 말 앞에서 배알하였다.
장종이 주잡을 얻고 몹시 기뻐하여 금과 비단을 하사하고 그의 고생을 위로하니, 주잡이 대답하기를 “제가 원수들에게 붙잡혔음에도 죽지 않고 살 수 있었던 것은 교방사敎坊使 진준陳俊내원재접사內園栽接使 저덕원儲德源의 힘입니다. 바라건대 두 를 내려주어 이 두 사람에게 보답해주십시오.”라고 하니, 장종이 모두 허락하여 자사刺史로 삼았다.
그러자 곽숭도郭崇韜가 간언하기를 “폐하와 함께 천하를 취한 사람들 모두가 영웅호걸에 충성되고 용맹스러운 장사들입니다. 지금 큰 공을 막 성취하고서 아직 봉작封爵이나 상급賞給이 한 사람에게도 내리지 않았는데 그에 앞서 영인을 자사로 삼으시니, 천하 사람의 마음을 잃을까 두렵습니다. 불가합니다.”라고 하여 명령을 중지하였다.
해를 넘겨 영인들이 자주 이 일을 언급하니 장종이 곽숭도에게 이르기를 “내가 이미 주잡에게 허락하였으니, 〈지금의 처사는〉 내가 이 세 사람을 보는 것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다. 공의 말이 비록 바르지만 나를 위해 뜻을 굽혀 시행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진준을 경주자사景州刺史로 삼고 저덕원을 헌주자사憲州刺史로 삼았다.
장종莊宗은 사냥을 좋아하였다. 장종이 중모中牟에서 사냥하다가 백성들의 밭을 밟았는데, 중모현령中牟縣令이 말 앞에서 간절하게 간언하면서 백성들을 위해 밭을 밟지 말 것을 청하니, 장종이 노하여 현령을 꾸짖어 보내고 장차 죽이려 하였다.
영인伶人 경신마敬新磨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이에 영인들을 거느리고서 현령을 쫓아가서 잡아다 장종의 말 앞에 데려다놓고 꾸짖기를 “너는 현령으로 우리 천자께서 사냥을 좋아하시는 것을 유독 모르느냐? 어찌해서 백성들을 풀어놓아 농사를 지어 세금을 바치게 하느냐. 어찌 너의 현민縣民들을 굶주리게 하여 이 땅을 비워서 우리 천자가 말을 달리기 좋게 하지 않느냐. 네 죄가 죽어 마땅하다.”라고 하고는 장종 앞에서 빨리 형을 집행하기를 청하니, 영인들도 함께 화답하여 외쳤다. 장종이 크게 웃으니 현령이 비로소 풀려나서 갈 수 있었다.
장종莊宗이 한번은 우인優人들과 뜰에서 연희를 벌이면서 사방을 돌아보며 외치기를 “이천하李天下여, 이천하여. 어디에 있는가?”라고 하니, 경신마敬新磨가 갑자기 앞으로 나아가 손으로 장종의 뺨을 쳤다.
장종이 아연실색하니 좌우의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영인伶人들도 크게 경악하여 함께 경신마를 붙들고 따지기를 “네가 어찌하여 천자의 뺨을 쳤느냐?”라고 하니,
경신마가 대답하기를 “이천하라는 사람은 한 사람 뿐이니, 다시 누구를 부른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이에 좌우의 사람들이 모두 웃으니 장종이 크게 기뻐하여 경신마에게 매우 후한 상을 내려주었다.
경신마가 전중殿中에 일을 아뢰러 간 적이 있었는데 전중에는 사나운 개들이 많았다. 경신마가 떠나려 하자 개 한 마리가 일어나 경신마를 쫓으니 경신마가 기둥에 기대 외치기를 “폐하께서는 자식들을 풀어 사람을 물게 하지 마소서.”라고 하였다.
장종의 집안은 오랑캐 출신이고, 오랑캐 사람들은 개라고 불리는 것을 꺼렸기 때문에 경신마가 이 말로 기롱한 것이었다.
장종이 크게 노하여 활을 당겨 화살을 먹이고서 경신마를 쏘려 하니, 경신마가 급히 외치기를 “폐하께서는 신을 죽이지 마십시오. 신과 폐하는 한 몸이니 저를 죽이는 것은 상서롭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장종이 크게 놀라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폐하께서 개국하여 연호를 동광同光으로 고치니, 천하 사람들이 모두 폐하를 동광제同光帝라고 부릅니다. 또 과 같으니, 만약 경신마를 죽인다면 ‘’은 빛이 없어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장종이 크게 웃고서 경신마를 풀어주었다.
그러나 당시 영인伶人들 가운데 유독 경신마敬新磨해학諧謔을 특히 잘하여 그 말이 가장 잘 알려졌고 다른 과실이나 악행은 알려진 것이 없다. 정사를 무너뜨리고 나라를 어지럽게 한 자는 경진景進사언경史彦瓊곽문고郭門高 세 사람이 으뜸이다.
이때에 영인들이 궁정을 출입하면서 사대부를 모욕하고 조롱하니, 신하들이 분개하고 미워하였으나 감히 겉으로 원망을 드러내지는 못하였다.
어떤 사람은 도리어 그들에게 빌붙어 총애를 받기를 바랐고 사방의 번진藩鎭들은 뇌물을 다투어 보냈는데, 조정에 있으면서 국사를 농단하기로는 경진이 가장 으뜸이었다.
장종이 경진 등을 보내 민간에 가서 탐방하게 하여 크고 작은 일 할 것 없이 모두 아뢰게 하였다. 그리고 경진이 전중殿中에서 일을 아뢸 때마다 황제가 좌우를 모두 물리쳤고, 군기軍機국정國政에 모두 참여하여 결정하였다. 삼사사三司使 공겸孔謙은 경진을 형으로 섬기면서 팔가八哥라고 불렀다.
장종莊宗이 처음 낙양洛陽에 들어와 나라의 옛 궁실에 거처하였는데 임금을 모실 빈첩嬪妾이 갖추어지지 않았다. 환관들이 장종의 뜻에 영합하여 다들 말하기를 “궁중에 밤에 귀물鬼物이 보여 사람들이 놀라고 두려워합니다.”라고 하니, 장종이 귀물을 쫓아낼 방법을 물었다.
이에 환관들이 말하기를 “옛날 당나라 때에는 후궁이 만 명이었는데, 지금은 궁궐이 텅 비어 귀괴鬼怪가 많으니 마땅히 사람으로 궁을 채워야 사라질 것입니다.”라고 하니, 장종이 기뻐하였다.
그 뒤 에 거둥하여 경진景進 등을 보내 업의 미녀 천 명을 가려 뽑아 후궁을 채우게 하였는데, 경진 등이 이를 빌미로 간음을 하니, 군사들의 아내와 딸들로 이 때문에 도망간 사람이 수천 명이었다.
장종이 낙양으로 돌아갈 때 경진이 업의 여인 천 명을 수레에 싣고서 따르니, 도로에 그 행렬이 길게 이어져 남녀의 분별이 사라질 정도로 혼잡하였다.
위왕魏王 이계급李繼岌을 격파하자 유황후劉皇后가 환관들의 참언을 듣고서 이계급에게 곽숭도郭崇韜를 살해하게 하였다. 곽숭도는 평소 영인伶人을 미워하여 항상 그들을 억제하니, 영인들이 이 때문에 모두 그의 죽음을 좋아하였다.
황제의 아우 이존예李存乂는 곽숭도의 사위였다. 경진景進이 장종에게 모함하여 말하기를 “이존예가 장차 모반하여 장인을 위해 원수를 갚으려 하고 있습니다.”라고 하기에 마침내 가두고서 죽였다.
주우겸朱友謙나라의 하중河中 땅을 가지고 에 투항한 자이다.
장종莊宗이 낙양에 들어가자 영인伶人들이 모두 주우겸에게 뇌물을 요구하였는데 주우겸은 뇌물을 줄 수 없어 사양하니, 경진景進이 이에 주우겸을 참소하기를 “곽숭도郭崇韜도 주살된 터라 주우겸이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니 반드시 모반할 것입니다. 마땅히 주우겸도 주살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주우겸 및 그 장수 5, 6인까지도 모두 멸족滅族시키니, 천하 사람들이 그 원통함을 이기지 못하였다.
경진은 관직이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검교좌산기상시檢校左散騎常侍 겸어사대부兼御史大夫 상주국上柱國에 이르렀다.
사언경史彦瓊무덕사武德使가 되어 업도鄴都에 거주하였는데 위박魏博의 여섯 의 정사가 모두 사언경에게서 결정되었고, 유수留守 왕정언王正言 이하로부터 모든 관리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받들어 섬겼다.
이때에 곽숭도郭崇韜에서 무고하게 주살되었는데, 천하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알지 못하였다. 다만 경사京師에서 곽숭도의 아들들을 죽이는 것만 보고서는 서로 전하여 말하기를 “곽숭도가 위왕魏王 이계급李繼岌을 죽이고 촉에서 스스로 왕 노릇을 한다. 이 때문에 그 집안을 멸족하는 것이다.”라고 하니, 업도의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몹시 의아해하였다.
얼마 뒤 주우겸朱友謙이 또 주살되었는데 주우겸의 아들 주정미朱廷徽전주자사澶州刺史였으므로 사언경에게 조서를 내려 주정휘를 죽이게 하니, 사언경이 그 일을 비밀에 부치고 야밤에 말을 달려 성을 나갔다.
업도 사람들이 사언경이 까닭 없이 밤에 말을 달려 나가는 것을 보고는 놀라서 전하여 말하기를 “유황후劉皇后가 곽숭도가 이계급을 살해한 것에 노하여 벌써 황제를 시해하고 스스로 황위에 올라 급히 사언경을 불러 일을 모의하려는 것이다.”라고 하니, 업도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하였다.
업도에 온 패주貝州 사람이 이 말을 전해 듣고 돌아갔는데, 수졸戍卒 황보휘皇甫暉가 그 말을 듣고는 이를 말미암아 조재례趙在禮를 위협하여 난을 일으켰다.
조재례가 이미 관도館陶에 당도하니 업도순검사鄴都巡檢使 손탁孫鐸이 사언경을 만나 적을 방어할 병사를 요청하였는데 사언경이 병사를 내주려 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적이 아직 오지 않았으니, 적이 온 다음 병사를 주더라도 어찌 늦겠는가.”라고 하였다.
얼마 뒤 적들이 당도하니 사언경이 병사들을 이끌고 북문北門에 올라가 적들의 함성 소리를 듣고는 크게 두려워하여 병사들을 버리고 도주하여 단기單騎로 경사로 돌아갔다.
조재례가 이를 말미암아 업도에 입성하여 반란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것은, 사언경이 단초를 열고서 반란군이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두었기 때문이었다.
곽문고郭門高는 이름이 종겸從謙이니, 문고門高예명藝名이다. 비록 우인優人으로 중용되었으나 군공軍功을 세운 적이 있기 때문에 종마직지휘사從馬直指揮使가 되었으니, 종마직從馬直친위군親衛軍의 직임이다.
곽종겸은 성씨가 곽씨였으므로 곽숭도郭崇韜에게 절을 올리고 숙부叔父로 대하였고 황제의 아우인 이존예李存乂가 또 곽종겸을 양자養子로 삼았다. 곽숭도가 죽자 이존예도 구금되니 곽종겸이 군중軍中에서 술을 마시며 분개하며 눈물을 흘리고 두 사람의 억울함을 말하였다.
이때 종마직從馬直 군사軍士 왕온王溫금중禁中에서 숙위宿衛하던 중에 야밤에 반란을 모의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주륙되니, 장종莊宗이 곽종겸을 희롱하여 말하기를 “너의 당여黨與인 이존예와 곽숭도가 나를 배반하더니, 또 왕온으로 하여금 모반하게 하는구나. 이제 다시 무슨 짓을 하려느냐?”라고 하였다.
곽종겸이 두려워하여 물러나 군사들을 선동하기를 “너희들의 재물을 다 털어 고기를 먹고 술을 마셔버리고 훗날에 무엇을 할지 따위는 생각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군사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곽종겸이 인하여 말하기를 “성상께서 왕온의 일로 업도鄴都를 깨뜨린 뒤에 너희들을 다 파묻으려 한다.”라고 하니, 군사들이 그 말을 믿고서 모두 난을 일으키려 하였다.
이사원李嗣源의 군대가 반란을 일으켜 경사京師로 향하니 장종莊宗은 동쪽으로 변주汴州로 거둥하였는데, 이사원이 먼저 변주로 들어왔다.
장종이 만승萬勝 땅에 이르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돌아오니 군사들이 흩어져 버렸으나 그래도 2만여 명이 있었다.
며칠이 지나서 장종이 다시 동쪽으로 사수汜水로 거둥하여 사수관汜水關에 웅거하고서 반군을 막기로 계획하였다.
4월 정해일丁亥日 초하루에 중흥전中興殿에서 군신群臣조현朝見을 받고 재상들을 삼각三刻동안 면대面對하고 파하였다. 어가를 호종하는 황갑마군黃甲馬軍선인문宣仁門에 진을 치고 보군步軍오봉문五鳳門에서 진을 치고 기다렸다.
장종이 내전에 들어가 수라를 들었는데 곽종겸이 군영에서 칼을 빼어들고 활에 화살을 먹여 흥교문興敎門으로 돌진하여 황갑군黃甲軍과 서로 화살을 쏘았다.
장종이 난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제왕諸王위사衛士를 거느리고서 반란병을 공격하러 흥교문으로 나갔다. 반란병이 불을 놓아 문을 불태우고 성벽을 타고 들어오니 장종이 공격하여 수십백數十百 인을 죽였다.
반란병들이 누대 위에서 황제를 쏘니 황제가 중상을 입어 강소전絳霄殿 회랑 아래에 엎어지거늘 황후와 제왕諸王들로부터 좌우에서 모시던 사람들이 모두 달아나 버렸다.
오시午時가 되어 황제가 붕어하니 오방五坊 사람 선우善友가 악기를 모아 〈땔감으로 삼아〉 시신을 불태웠다.
이사원이 낙양에 들어와 장종의 유골을 수습하여 신안新安옹릉雍陵에 장사 지냈다. 그리고 곽종겸을 경주자사景州刺史로 삼았다가 얼마 뒤 죽였다.
옛 글에 이르기를 “임금이 이것으로 시작하였으니 반드시 이것으로 마친다.”라고 하였다. 장종은 영인伶人을 좋아하다가 곽문고에게 시해당하고 악기로 그 시신이 불태워졌으니 그 말을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영인伶人이 처음에는 곽숭도郭崇韜가 자신들을 저지하는 것을 원망하여 그를 참소하니 유황후劉皇后가 아들 이계급李繼岌에게 에서 곽숭도를 살해하게 하고, 두 번째로는 주우겸朱友謙이 뇌물을 주지 않는 것을 원망스럽게 여겨 주우겸까지 살해하였고,
세 번째로는 이런 일들로 인해 민심이 흉흉해져 중외中外에 유언비어가 전파되어 마침내 군사들을 격동시켜 조재례趙在禮의 반란을 완성하고, 네 번째로는 곽종겸이 또 장종이 꾸짖었던 말 때문에 덩달아 군사들을 격동시켜 이사원李嗣源의 변란을 도와 장종이 시해당하니, 서술이 하나하나 그림과 같다.


역주
역주1 伶官傳 : 伶官은 관직을 받은 伶人이며 영인은 곧 음악과 연극 등을 행하는 藝人이다. 朱全忠이 세운 後梁을 멸망시키고 後唐을 세운 莊宗 李存勖은 그 자신이 음악에 조예가 깊고 俳優와 演戲를 좋아하여 주위에 항상 총애하는 영관들을 두었다. 〈伶官傳〉은 바로 후당 장종의 총애를 받았던 영관들의 열전으로 周匝, 敬新磨, 景進, 史彦瓊, 郭門高 등 영관 5인의 일화가 실려 있다.
영관에 대한 구양수의 기본적인 입장은 군주가 현혹되어 여기에 탐닉할 경우 나라가 피폐하고 멸망에까지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체적인 논조는 이러한 사례를 통해 警責을 제시하는 데 있다. 그러나 그 서술에서는 諧謔적인 일화를 많이 채용하여 문장에 읽는 맛이 있다. 滑稽를 통해 世道에 도움을 주고자 한 것인데, ≪宋名臣言行錄≫ 後集 卷2 〈歐陽脩 文忠公〉에 “(구양수가)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지은 〈伶官傳〉이 어찌 ≪史記≫의 〈滑稽傳〉보다 아래겠는가.’라고 하였다.[嘗謂我作伶官傳 豈下滑稽者也]”라는 기록이 보인다.
茅坤은 ≪史抄≫의 〈영관전〉에 단 평어 외에 ≪文抄≫의 〈伶官傳論〉에도 “莊宗의 웅대한 마음이 歐陽公의 문장과 千古에 高下를 다툴 만하다.[莊宗雄心處 與歐陽公之文可上下千古]”라고 평어를 달았다.
역주2 晉王 : 後唐 莊宗 李存勖(885~926)의 아버지인 李克用을 가리킨다.
역주3 梁……與吾約爲兄弟 : 梁은 朱溫(朱全忠)의 後梁을 가리킨다. 李克用은 당초에 주온과 함께 黃巢의 난을 토벌하던 사이였다. 그런데 이극용이 汴州 封禪寺에서 군사를 쉬게 하던 도중 주온이 上源驛에서 이극용에게 酒宴을 베풀고 야밤에 습격하여 이극용을 해치려 하였다. 다행히 侍者가 이극용을 침상 밑에 숨기고 薛鐵山 등이 도와 가까스로 자신의 군영으로 돌아와 화를 면하였다. 또한 최후에 이극용은 주온에게 太原에서 포위되어 있는 중에 병사하였다.(≪新五代史≫ 卷4 〈唐本紀〉)
燕王은 劉仁恭과 劉守光 父子이다. 유인공이 세력을 잃고 이극용에게 의지했을 때 이극용이 그를 받아들여 장수로 삼고 아꼈는데, 후에 이극용이 李匡儔를 격파하고 유인공을 幽州留後로 삼은 뒤 唐나라 조정에 청해 유인공을 檢校司空 盧龍軍節度使에 제수되게 하였다. 그러나 유인공은 晉나라가 羅弘信을 공격하면서 원병을 요청하였으나 거절하였고, 이극용이 서찰을 보내 질책하자 使者를 가두고 晉나라의 장수로 幽州에 머물면서 유인공을 감시하던 燕留得 등을 죽였다. 이에 이극용이 유인공을 토벌하였으나 유인공에게 크게 패하였다.(≪新五代史≫ 卷39 〈雜傳27〉)
契丹 太祖 耶律阿保機는 주온이 唐나라의 皇位를 찬탈하려 할 때에 이극용과 雲州 樂城에서 회합하고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 그리고 함께 주온을 토벌하기로 맹세하였으나 야율아보기는 거란으로 돌아간 뒤에 맹약을 배반하고 도리어 주온의 후량과 합세하여 이극용을 압박하였다.(≪新五代史≫ 卷73 〈四夷附錄〉)
역주4 少牢 : 제사의 犧牲으로 소와 양과 돼지를 모두 사용하는 것을 太牢, 양과 돼지만 사용하는 것을 소뢰라고 한다.
역주5 係燕父子以組 : 914년에 後唐 莊宗 李存勖이 장수를 보내 幽州를 격파하고 劉仁恭과 劉守光 부자를 사로잡아 압송하여 太原에 돌아와서 종묘에 바쳤다. 이때 유수광을 참수하고 유인공은 鴈門으로 압송하여 심장을 칼로 찔러 피를 내어 선왕의 능에 올린 다음 참수하였다.(≪新五代史≫ 卷39 〈雜傳27〉)
역주6 函梁君臣之首 : 923년에 李存勖이 後梁을 멸망시키고 이미 자결한 후량 末帝의 시신은 장사를 지내주고 그 목을 베어 太社에 보관하였다.(≪新五代史≫ 卷13 〈梁家人傳〉)
역주7 一夫夜呼 亂者四應 : 926년에 貝州의 군졸 皇甫暉가 軍中에서 군졸들을 충동질하여 변란을 일으켜 鄴城을 점거하였다. 이에 邢州․滄州 등지에 주둔하던 군사들이 이어서 병란을 일으켜 호응하였다.(≪新五代史≫ 卷49 〈皇甫暉傳〉)
역주8 蒼皇東出……(得)[泣]下沾襟 : 皇甫暉의 반란을 진압하던 李嗣源이 도리어 군사들에 의해 황제로 옹립되어 鄴城의 叛軍들과 연합하여 도성을 공격하자 莊宗이 군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나아가 도망하였다. 행렬이 洛陽 동쪽 石橋에 이르러 장종이 술을 마시며 우니, 元行欽 등 100여 명이 머리털을 자르고 목숨을 바쳐 나라의 은혜에 보답할 것을 하늘에 맹세하고는 임금과 신하들이 서로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렸다.(≪新五代史≫ 卷25 〈唐臣傳〉)
역주9 (得)[泣] : 저본에는 ‘得’으로 되어 있으나, ≪新五代史≫에 의거하여 ‘泣’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0 書曰……謙得益 : ≪書經≫ 〈虞書 大禹謨〉에 나오는 말이다.
역주11 (泣)[得] : 저본에는 ‘泣’으로 되어 있으나, ≪新五代史≫에 의거하여 ‘得’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2 (哀)[衰] : 저본에는 ‘哀’로 되어 있으나, ≪新五代史≫에 의거하여 ‘衰’로 바로잡았다.
역주13 謂之御製者 : ≪五代史補≫ 卷2에 “莊宗은 公子 시절에 본디 음률을 좋아하였고, 또 스스로 악곡을 지을 수 있었다. 그 뒤 무릇 군사를 운용할 때 前後의 隊伍에 모두 자신이 지은 악곡을 주어 소리를 드높여 부르게 하고, 이를 御製라 하였다. 戰陣에 들어갈 때에 이르러서는 승부를 따질 것 없이 말머리를 돌리자마자 군중이 일제히 악곡을 불렀다. 그러므로 모든 전투에서 사람들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잊었으니, 이는 또한 용병할 때의 한 奇策이다.[莊宗公子時 雅好音律 又能自撰曲子詞 其後凡用軍 前後隊伍皆以所撰詞授之 使揚聲而唱 謂之御製 至於入陣 不論勝負 馬頭纔轉 則衆樂齊作 故凡所鬪戰 人忘其死 斯亦用軍之一奇也]”라고 하였다.
역주14 皇后劉氏 : 莊宗의 황후로 시호는 神閔敬皇后이다. ≪新五代史≫ 권14 〈唐家人傳〉에 그 행력이 자세하며 본서에도 실려 있다.
역주15 (首)[省] : 저본에는 ‘首’로 되어 있으나, ≪新五代史≫에 의거하여 ‘省’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6 胡柳 : 胡柳는 현재 山東省 濮縣 서남쪽에 있는 지명이다. 黃柳陂라고도 한다. 後梁과 後晉이 이곳에서 싸워 후진이 패하고 후진의 명장인 周德威가 전사하였다. 그러나 莊宗이 직접 奮戰하여 후량의 군대를 격퇴하고 德勝에 성채를 쌓았다.(≪新五代史≫ 卷36 〈義兒傳〉)
역주17 敎坊使陳俊 內園栽接使儲德源 : 敎坊은 음악을 가르치고 優人을 관장하던 부서이다. 內園栽接使는 궁중 禁園의 관리를 맡던 관직이다.
역주18 臣與陛下爲一體……則同無光矣 : 敬新磨의 이름인 新磨는 새로 갈고 닦는다는 뜻이고, 同은 銅과 같다고 하였으니, 이는 곧 새로 개국한 後唐을 갈고 닦는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므로 경신마를 죽이면 銅을 갈고 닦을 수 없어 광택이 사라질 것이라는 말이다.
역주19 三司使孔謙……呼爲八哥 : 孔謙(?~926)은 魏州 사람으로, 젊은 나이에 胥吏가 되어 後唐 莊宗 때 魏博度支使가 되었다. 후에 租庸副使를 거쳐 同光 2년(924)에 租庸使가 되었다가, 明宗이 즉위한 후 처형되었다. ≪舊五代史≫ 권34 〈唐書 莊宗紀〉에 따르면, 이 당시 魏州의 錢穀 및 병사와 군마에 관한 업무를 모두 景進이 맡아 감독하였는데, 공겸이 경진에게 아부하면서 은총을 바랐다고 한다. 宋나라 때 胡次焱의 ≪梅巖文集≫ 권5 〈論稱呼〉에서 이 부분을 인용하면서 “팔가는 아우가 형을 부르는 말이니 존칭이다.[八哥者 弟呼兄之辭也 尊稱也]”라고 하였다.
역주20 魏王繼岌……遣繼岌賊殺郭崇韜 : 李繼岌(?~926)은 後唐 莊宗 李存勖의 아들이다. 당시 蜀은 王衍(899~926)이 할거하고 있었는데, 925년에 後唐에서 이계급을 西南面行營都統으로 삼고 郭崇韜를 都招討使로 삼아 촉을 정벌하였다. 이때 이계급은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부족했으므로 실제 전공은 거의 곽숭도가 세웠다. 곽숭도는 평소 환관과 영인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었으므로 이들이 중간에서 곽숭도를 모략하여 모반을 획책하고 있다고 장종에게 보고하였다. 장종이 확실하지 않은 사실이라 여기고 결정을 내리지 않자 劉皇后가 이계급에게 따로 密旨를 보내 곽숭도를 살해하게 하니 계속 거절하다가 주변의 강압에 못이긴 이계급이 이를 허락하여 곽숭도를 죽이게 하였다.(≪新五代史≫ 卷14 〈唐家人傳〉) 이 내용은 본서 〈唐繼岌傳〉에 자세하다.
역주21 皇弟存乂 : 李存乂(?~926)는 後唐 太祖 李克用의 다섯 번째 아들이다. 建雄保大二軍節度使를 역임했으며 925년에 睦王으로 봉해졌다. 郭崇韜의 사위로 곽숭도가 피살되자 집에서 술을 마시며 불만을 토로하였는데 환관들이 곽숭도의 黨與를 제거하고자 이 사실을 과장하여 이존예가 원망을 품고 모반하려 한다고 모함하여 장종이 가택에 연금하고 얼마 후 사사하였다.(≪新五代史≫ 卷14 〈唐家人傳〉)
역주22 朱友謙 : ?~926. 後梁 太祖 朱溫의 의붓아들로 본명은 朱簡이다. 본래는 保義軍節度使 王珙의 휘하장수였는데 반란이 일어나 왕공이 피살당하자 평소 그의 재주를 눈여겨보았던 주온에게 발탁되어 의붓아들이 되고 冀王에 봉해졌다. 河中으로 나가 護國節度使가 되었다. 주온이 아들인 朱友珪에게 살해되자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晉王 李存勖에게 투항하였다. 이존욱 역시 그의 재능을 아껴 의붓아들로 받아들여 이름을 李繼麟으로 바꾸고 河中節度使, 尙書令으로 삼았다. 후에 郭崇韜와 함께 반란을 도모했다는 참소를 받고 살해되었다.
역주23 趙在禮 : 886?~947. 五代 後唐의 大臣으로 字는 幹臣이며 涿州 사람이다. 처음에 藩鎭의 劉仁恭을 섬겼다가 후에 李存勖에게 투항하여 魏博軍效節指揮使가 되었다. 후에 貝州의 戍卒 皇甫暉가 병사들을 선동하여 난을 일으켜 主將 楊仁晸을 죽이고 조재례를 겁박하여 主將으로 세우고 鄴都를 공격하고 조재례를 魏博留後로 삼았다. 莊宗 李存勖이 慰撫하기도 하고 討伐하기도 하였으나 반군은 진정되지 않았고 결국 토벌하러 갔던 明宗 李嗣源이 도리어 반군들과 합세하여 군사를 이끌고 洛陽을 공격하는 바람에 혼란 중에 莊宗은 군관에게 피살당하였고, 명종이 즉위하여 趙在禮를 鄴都留守에 제수하였다. 後唐을 멸망시키고 後晉이 들어서자 후진에 벼슬하여 섬겼다. 후진이 契丹에 멸망당할 때 스스로 목을 매 죽었다.
역주24 館陶 : 현재의 河北省 邯鄲 館陶縣 서남쪽 40리 지점에 있었다. 성 서북쪽 70리 지점에 陶山이 있었고 春秋戰國시대에 趙나라가 이곳에 館을 설치하였으므로 漢나라 때 여기에 근거하여 縣名을 지었다. 鄴都와 가까이 위치해 있었다.
역주25 (學)[軍] : 저본에는 ‘學’으로 되어 있으나, ≪新五代史≫에 의거하여 ‘軍’으로 바로잡았다.
역주26 莊宗至萬勝……尙有二萬餘人 : ≪五代史記纂誤續補≫ 卷3에 “살펴보건대 〈家人傳〉에, 莊宗이 동쪽으로 汴州에 行幸할 때 御駕를 扈從한 병사가 2만 5천이었고 萬勝에 이르러 나아갈 수 없어 돌아오자 군사가 흩어져 太半을 잃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薛居正의 ≪舊五代史≫ 〈唐本紀〉에는, 처음에 황제가 동쪽으로 出關할 때 어가를 호종하는 병사가 2만 5천이었고 다시 汜水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1만여 騎를 잃었다고 되어 있다. ≪資治通鑑≫에는, 황제가 出關할 때 호종하는 병사가 2만 5천이었고, 돌아올 때에는 이미 만여 명을 잃었다고 되어 있다. 여기에서 ‘그래도 2만여 명이 있었다’라고 한 것은 오류이다.[按家人傳莊宗東幸汴州 從駕兵二萬五千 及至萬勝 不得進而還 軍士離散 所失大半 薛史唐本紀初帝東出關 從駕兵二萬五千 及復至汜水 已失萬餘騎 通鑑帝之出關也 扈從兵二萬五千 及還已失萬餘人 此作尙有二萬餘人誤矣]”라고 하였다.
역주27 五(方)[坊] : 황제의 음식과 사냥매, 사냥개 등을 관리하던 관서이다.
역주28 (方)[坊] : 저본에는 ‘方’으로 되어 있으나, 사고전서본과 ≪新五代史≫에 의거하여 ‘坊’으로 바로잡았다.
역주29 君以此始 必以此終 : ≪春秋左氏傳≫ 宣公 12년에 나오는 말이다. 楚王이 전투 중에 다른 수레로 옮겨 타려 하자, 屈蕩이 이를 저지하면서 본래 탄 수레로 전쟁을 마쳐야 한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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