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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6)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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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中魏州叛兵一節 係唐及梁之禍根일새 因錄之
房知溫 字伯玉이요 兗州瑕丘人也 少以勇力으로 爲赤甲都官健이러니 後隷魏州馬鬪軍하고 稍遷親隨軍指揮使하다
莊宗取魏博하야 得知溫하고 賜姓李氏하고 名曰紹英하야 以爲澶州刺史러니 歷曹貝二州刺史하야 戍瓦橋關하다
知溫首馳赴之하다
天成元年 拜泰寧軍節度使하고 明年 爲北面招討使하야 屯于盧臺하다
明宗遣烏震하야 往代知溫還鎭이어늘 其戍卒效節軍將龍晊等攻震殺之하다 效節 魏州軍也
魏州 自羅紹威誅衙軍으로 楊師厚爲節度使하야 復置銀槍效節軍하다
當梁末帝時하야 師厚幾爲梁患이러니 師厚卒 以賀德倫代之하다
末帝患魏軍彊難制하야 與趙巖等謀하야 分相魏爲兩鎭이라
魏軍由此作亂하야 劫德倫叛梁而降晉하니 梁遂失河北하다
莊宗自得魏軍으로 與梁戰河上하야 數有功이어늘 許其軍以滅梁而厚賞이러니
及梁亡하야 魏軍雖數賜與 而驕縱無厭하야 常懷怨望이라 皇甫暉之亂 劫趙在禮入魏 皆此軍也
明宗入立 在禮鎭天雄軍이러니 以魏軍素驕 常懼禍하야 不遑居하야 陰遣人訴于明宗하야 求解去어늘
明宗乃以皇子從榮으로 代在禮하고 而遣魏效節九指揮하야 北戍盧臺한대 軍發之日 不給兵甲하고 惟以長竿繫旗幟以表隊伍하니 軍士頗自疑惑이라
明年 明宗遣烏震하야 代知溫戍하니 而知溫意尤不樂하다 盧臺戍軍夾水하야 東西爲兩寨러니 震初至하야 與知溫會東寨하야 方博이라가 效節軍亂하야 噪於門外하니 知溫卽乘馬而出이라
亂軍擊殺震하고 執轡留知溫하니 知溫紿曰 騎兵皆在西寨하니 今獨步軍 恐無能爲也라하다
知溫卽躍馬登舟渡河入西寨하야 以騎軍盡殺亂者하다
明宗下詔하야 悉誅其家屬于魏州하야 凡九指揮三千餘家數萬口 驅至漳水上殺之하니 漳水爲之變色이라 魏之驕兵 於是而盡하다
明宗知變自知溫起 釋而不問하고 徙鎭武寧하고 加兼侍中하고 歷鎭天平平盧하다
明宗爲北面招討使하고 而知溫爲副使러니 廢帝時以裨將事知溫甚謹이라가 後因杯酒失意하다
及廢帝起兵鳳翔하고 愍帝出奔하얀 知溫乘間有窺覦之意하야 謂其司馬李冲曰 吾有錢數屋하고 養兵數千하니 因時建義 功必有成이라하니
冲曰 今天子孱弱하야 上下離心이나 兵威甚盛하니 事未可知 冲請懷表而西以覘之호리라하다
及冲至京師하야 廢帝已入立이어늘 冲卽奉表稱賀하고 還勸知溫入朝하니 廢帝慰勞之甚厚하다
知溫還鎭 封東平王한대 太常上言冊拜王公 皇帝遣冊하고 其在外者 命使하되 而鹵簿鼓吹輅車法物不出都城 考之故事無明文이라 今北平王東平王知溫受封遣冊 請下兵部太常太僕하야 給鹵簿鼓吹輅車法物赴本道하야 禮畢還有司라하다
知溫在鎭 常厚斂其民하야 積貲鉅萬하고 治第靑州南城하야 出入以聲妓하야 游嬉不恤政事
天福元年 卒于官하니 贈太尉하다 知溫卒後 其子彦儒獻其父錢三萬緡 絹布三萬疋 金百兩 銀千兩 茶千五百觔 絲十萬兩 拜沂州刺史하다 其將吏分其餘貲者 皆爲富家云이라


02. 방지온房知溫전기傳記
이 글 가운데 위주魏州의 반란군에 관한 한 단락은 나라와 나라의 화근禍根에 관계되기에 수록하였다.
방지온房知溫은 자는 백옥伯玉이고 연주兗州 하구瑕丘 사람이다. 어려서 용력勇力으로 적갑도관건赤甲都官健이 되었는데 후에 위주魏州 마투군馬鬪軍에 소속되었고 점차 승진하여 친수군지휘사親隨軍指揮使가 되었다.
장종莊宗위주魏州박주博州를 취하여 방지온을 얻고는 이소영李紹英이라는 과 이름을 하사하고 전주자사澶州刺史로 삼았는데, 조주曹州패주貝州자사刺史를 역임하고서 와교관瓦橋關을 지켰다.
명종明宗위주魏州로부터 병사를 돌려 남쪽으로 향할 때에 방지온房知溫이 가장 먼저 명종에게 달려갔다.
천성天成 원년(926)에 태령군절도사泰寧軍節度使에 배수되었고, 이듬해에 북면초토사北面招討使가 되어 노대盧臺에 주둔하였다.
명종이 오진烏震을 보내 에서 돌아오는 방지온을 대신하게 하였는데, 그 수졸戍卒 효절군장效節軍將 용질龍晊 등이 오진을 공격하여 죽였다. 효절效節은 위주의 군대이다.
위주는 나소위羅紹威아군衙軍을 주살한 뒤로 양사후楊師厚절도사節度使가 되어 다시 은창효절군銀槍效節軍을 두었다.
말제末帝 때에 양사후가 거의 나라의 우환憂患이 되었는데, 양사후가 하자 하덕륜賀德倫을 후임으로 삼았다.
말제末帝가 위주의 군사가 강성하여 제어하기 어려운 것을 근심하여 조암趙巖 등과 모의하여 상주相州와 위주를 나누어 두 개의 으로 만들었다.
위군魏軍이 이로 말미암아 난을 일으켜 하덕륜을 겁박해서 나라를 배반하고 나라에 항복하게 하니 양나라가 마침내 하북河北을 잃었다.
장종莊宗위군魏軍을 얻은 뒤로 나라와 하상河上에서 전투하여 자주 전공을 세웠는데, 위군에게 양나라를 멸망시키면 후한 상을 내리겠다고 허락하였다.
양나라가 멸망하자 위군은 비록 수차례 포상을 받았지만 방종하여 만족하지 못하고 늘 원망하는 마음을 품었는데, 황보휘皇甫暉가 난을 일으켜 조재례趙在禮를 겁박하여 위주魏州로 간 것은 모두 위군이었다.
명종明宗이 들어와 즉위하자 조재례는 천웅군天雄軍진수鎭守하였는데 위군이 평소 교만한지라 자신에게 늘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불안해하다 몰래 사람을 보내 명종에게 하소연하여 해직解職되어 떠날 수 있게 해 달라 청하였다.
명종이 이에 황자皇子 이종영李從榮을 조재례의 후임으로 삼고 위주魏州효절구지휘效節九指揮를 보내 북쪽에서 노대盧臺를 지키게 하였다. 군대軍隊가 출발하는 날에 병기와 갑주를 지급하지 않고 오직 긴 장대에 기치旗幟만 매달아 대오隊伍를 구분하니, 군사軍士들이 퍽 스스로 의혹疑惑스럽게 여겼다.
이듬해에 명종明宗오진烏震을 보내 방지온房知溫을 대신하여 지키게 하니 방지온이 더욱 불쾌하게 여겼다. 노대盧臺수군戍軍이 물을 끼고 동쪽과 서쪽에 두 개의 영채를 만들었는데 오진이 노대에 막 이르러 방지온과 동쪽 영채에 모여 한창 박혁博奕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효절군效節軍이 난을 일으켜 문 밖에서 소란을 피우니 방지온은 즉시 말을 타고 나갔다.
반란군이 오진을 쳐 죽이고 고삐를 잡아 방지온을 만류하니, 방지온이 거짓으로 말하기를 “기병騎兵은 모두 서쪽 영채에 있으니 지금 보병步兵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까 걱정이다.”라고 하였다.
방지온이 즉시 말을 달려 배에 올라 황하黃河를 건너 서쪽 성채로 들어가 기마병을 거느리고 반란군을 모두 죽였다.
명종이 조서詔書를 내려 위주魏州에서 반란군의 가솔家率들을 모두 주살하게 하여 구지휘九指揮 3천여 명의 가솔 수만 명을 장수漳水 가로 데려가 죽이니 장수의 물빛이 이 때문에 변하였다. 위주의 교만했던 병사들이 이에 모두 죽었다.
명종은 변란이 방지온 때문에 일어났음을 알았지만 풀어주어 힐문하지 않고 옮겨 무녕武寧진수鎭守하게 하고 겸시중兼侍中을 더해주었고 천평天平평로平盧를 차례로 진수鎭守하게 하였다.
당초에 명종明宗북면초토사北面招討使가 되고 방지온房知溫부사副使가 되었는데, 폐제廢帝가 이때에 비장裨將으로 방지온을 몹시 공근하게 섬겼다가 후에 술을 마시다 실수하여 신임을 잃었다.
폐제가 봉상鳳翔에서 기병起兵하고 민제愍帝가 달아나자 방지온은 그 틈을 타 기회를 엿보려는 뜻을 가지고 사마司馬 이충李冲에게 말하기를 “나에게는 몇 채의 집에 가득한 돈이 있고 수천 명의 병사를 양병養兵해 두었으니, 이런 시기에 의병義兵을 일으키면 반드시 공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충이 말하기를 “지금 천자天子가 유약하여 상하가 마음이 이반되었지만 노왕潞王이 거느린 병사의 위세가 몹시 성대하니 일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제가 표문表文을 가지고 서쪽으로 가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충이 경사京師에 이르렀을 때에 폐제가 이미 들어와 즉위한 뒤였으니 이충은 즉시 표문表文을 바치고 하례하고 돌아가 방지온에게 권유하여 입조入朝하게 하니, 폐제가 몹시 후하게 위로하였다.
방지온房知溫으로 돌아오자 동평왕東平王에 봉해졌는데, 태상太常상언上言하기를 “왕공王公책배冊拜할 때에는 황제皇帝임헌臨軒하여 책서冊書를 보내고, 외직外職에 있는 사람은 정아正衙에서 사자에게 명하되 의장儀仗, 악기樂器, 노거輅車, 법물法物 등이 도성都城을 벗어나지 않는 것은 고사故事를 상고해보아도 명확한 규정이 없습니다. 지금 북평왕北平王 조덕균趙德鈞동평왕東平王 방지온房知溫책봉冊封해주어 책서冊書를 보낼 때에 청컨대 병부兵部, 태상시太常寺, 태복시太僕寺에게 명을 내려 의장, 악기, 노거, 법물 등을 주어 본도本道로 가지고 가게하고 예의禮儀를 마치고나서 유사有司에게 되돌려 주게 하십시요.”라고 하였다.
방지온房知溫에 있을 때에 늘 그 백성들에게 각박하게 세금을 거두어 쌓아둔 재물이 거만鉅萬이나 되었고, 청주靑州남성南城에 집을 지어 출입할 때에 가무에 능한 기녀를 따르게 하여 유희游嬉를 즐기며 정사政事를 돌보지 않았다.
천복天福 원년(901)에 관소官所에서 하니 태위太尉증직贈職되었다. 방지온이 한 뒤에 그 아들 방언유房彦儒가 아비의 3만 , 견포絹布 3만 , 황금 1백 , 은 1천 , 차 1천 5백 , 10만 을 바치고 기주자사沂州刺史에 배수되었다. 남은 재물을 나누어 가진 그의 장리將吏들은 모두 부자가 되었다.


역주
역주1 房知溫傳 : 房知溫(?~936)은 伯玉이고 兗州 瑕丘 사람으로 또 다른 이름은 李紹英이다. 列傳은 ≪舊五代史≫ 卷91 〈晉書 第17 列傳 第6〉, ≪新五代史≫ 卷46 〈雜傳 第34〉에 각각 실려 있다.
방지온은 勇力으로 魏州 馬鬪軍에 소속되었다. 後唐 莊宗이 魏州와 博州를 취하여 방지온을 얻고는 성과 이름을 하사하고 刺史를 제수하였다. 후에 明宗이 반란을 일으켜 魏州에서 남쪽으로 향할 때 방지온이 가장 먼저 명종에게 달려갔다. 방지온이 北面招討使가 되어 盧臺에 주둔할 때에 명종이 烏震을 후임으로 보내자 인사에 불만을 품어 魏軍을 움직여 이를 죽였고 위군 또한 반란군으로 내몰아 모두 주살하였다. 후에 廢帝가 반란을 일으켜 愍帝가 달아나자 이를 틈타 자신도 반란을 일으키려다 李冲의 권유로 입조하여 東平王에 봉해졌다. 鎭을 鎭撫할 때에는 세금을 각박하게 거두어 遊戲를 즐기며 정사를 돌보지 않다 館所에서 卒하였다.
이 열전에서는 방지온의 飜覆無常한 사적을 생생하게 묘사하였는데, 茅坤이 위주의 반란군이 後唐과 後梁의 禍根에 관계되기에 이 列傳을 史抄에 수록하였다고 하였듯이 특히 위주의 군사와 관련된 이야기는 생동감 넘치고 상세하게 묘사하였다.
위주 牙軍의 흥망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아군은 唐 代宗 때 田承嗣가 魏博節度使가 되어 만든 호위대로 唐나라 말기에 羅紹威가 절도사가 되었을 때에 아군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져 민폐를 끼치고 난을 일으키자 나소위가 朱溫에게 구원을 요청해 2년 만에 아군의 세력을 완전히 평정하였다. 후에 梁 太祖가 죽자 楊師厚가 다시 위주에 銀槍效節軍을 두었는데, 楊師厚가 卒하자 梁 末帝가 趙巖과 모의하여 위주를 相州와 위주로 나누어 두 개의 鎭으로 만들었다. 이로 말미암아 魏軍이 반란을 일으켜 晉나라에 항복하였다. 明宗 때에 위군이 변란을 일으키자 방지온이 이들을 주살하였고 명종이 명을 내려 위군 3천여 명의 가솔 수만 명을 漳水 가로 데려가 죽이게 하니 이로서 위주의 병사들이 모두 죽었다.
역주2 明宗自魏反兵南向 : 天成 원년에 魏州에서 趙在禮가 반란을 일으키자 莊宗이 明宗을 보내 토벌하게 하였다. 명종이 위주로 가 조재례의 謝罪를 받아들이고 합류하여 南下하면서 군사를 모았고, 이해 4월에 장종이 崩하자 洛陽으로 들어가 황제에 즉위하였다.(본서 卷2 〈唐明宗紀〉)
역주3 潞王 : 後唐의 廢帝 또는 末帝라고 부르는 李從珂(?~936)를 가리킨다. 李嗣源이 즉위하여 明宗이 되자 그가 전쟁에서 여러 차례 공을 세웠다고 하여 潞王에 봉하였다.
역주4 臨軒 : 군주가 正殿에 앉지 않고 전각 앞의 섬돌 위에 나온다는 말이다. 전각의 앞 堂과 계단의 사이에 있는 난간이 마치 수레와 같기 때문에 臨軒이라 한 것이다.
역주5 正衙 : 唐나라와 宋나라 때에 정식 조회에 聽政하던 곳을 이른다.
역주6 德鈞 : 趙德鈞(?~937)을 가리킨다. 본명은 趙行實이다. 後唐 莊宗 李存勖을 섬기면서는 李紹斌이라는 이름을 받고 北平王에 봉해졌으며 幽州 지방에서 강력한 군세를 지니고 행세하였다. 후당 말엽에 契丹과 내통하면서 나라를 찬탈하려고 시도하다가 거란 및 石敬瑭이 세운 後晉 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거란에 잡혀가 옥중에서 죽었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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