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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1)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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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的確之見이라
臣昨奉聖旨하야 至河東하야商量麟州事러니 緣臣未到間 鎬已一面與으로 先有奏議
尋再準樞密院箚子하니 備錄鎬等所奏하야 令臣更切同共從長相度이라
臣遂親至河外하야 相度利害하야 與明鎬等으로 再行商議하야 乞那減兵馬人數 可以粗減兵費라하야 已具連署奏聞하고
此外臣別有短見合盡條陳其利害措置之說일새 列爲四議하노니
一曰辨衆說이요 二曰較存廢 三曰減寨卒이요 四曰委土豪
如此則經久之謀 庶近禦邊之策이라
謹具畫一如後하노이다
一曰辨衆說者
臣竊詳前後臣寮起請컨댄 其說有四하니
或欲廢爲寨名하고 或欲移近河次하고 或欲抽兵馬以減省饋運하고 或欲添城堡以招輯蕃漢이라
然廢爲寨而不能減兵이면 則不若不廢 苟能減兵而省費 則何害爲州리오
其城壁堅完하며 地形高峻 乃是天設之險이니 可守而不可攻이어니와
其至黃河與府州 各纔百餘里 若徙之河次라도 不過移得五七十里之近이요 而棄易守難攻之天險이니
以此而言컨댄 移廢二說 未見其可
至如抽減兵馬하얀 誠是邊議之一端이라
然兵冗不獨麟州 大弊乃在하니
若只減麟州而不減五寨 與不減同이라
凡招輯蕃漢之民 最爲實邊之本이라
然非朝廷一力可自爲 必須委付邊臣하야 許其久任하고 漸推恩信하야 不限歲年하야 使得失不繫於朝廷之急하고 而營緝如其家事之專이라야 方可收其遠效 非二年一替之吏所能爲也
臣謂減兵添堡之說 近之而未得其要라하노이다
二曰較存廢者
今河外之兵하야도 尙及二萬이라
大抵盡河東二十州軍하야 以贍二州五寨하야 爲河外數百邊戶而竭數百萬民財 賊雖不來라도 吾已自困하야 使賊得不戰疲人之策하고 而我有殘民斂怨之勞 以此而思컨댄 則似可廢
然未知可存之利
今二州五寨 雖云空守無人之境이나 然賊亦未敢據吾地하니 是尙能斥賊於二三百里外
若麟州一議移廢 則五寨勢亦難存이라
兀爾府州 便爲孤壘하야 而自守不暇리니 是賊可以入據我城堡하고 耕牧我土田하야 夾河對岸 爲其巢穴이라
今賊在數百里外라도 沿河尙費於防秋어든 若使夾岸相望이면 則泛舟踐氷하야 終歲常憂寇至하야 沿河內郡 盡爲邊戍리니 以此而慮컨댄 則不可不存이나
然須得存之之術이라
三曰減寨卒者
臣勘會慶曆三年一年用度컨댄 麟州用糧七萬餘石草二十一萬餘束이요 五寨用糧一十四萬餘石草四十萬餘束이니 其費倍於麟州
於一百二十五里之地 列此五寨하니 除分兵歇泊外 尙有七千五百人이요
別用二千五百人負糧하고 又有幷忻等十州軍百姓輸納하며 外及商旅入中往來하니 其冗長勞費 不可勝言이라
逐寨不過三五十騎 巡綽伏路하고 其餘坐無所爲하니
蓋初建五寨之時 本不如此
寨兵各有定數하니 建寧置一千五百人하고 其餘四寨 各止三百至五百이러니
今之冗數 竝是後來增添이라
臣謂今事宜稍緩하야 不比建寨之初
然且約舊數라도 尙不至冗費
臣請只於建寧 留一千人하야 置一하고 其鎭川中堠百勝三寨 各留五百하고
其餘寨兵所減者 屯於淸寨堡하야 以一都巡檢領之
緣此堡最在近東하야 隔河便是保德軍이라 屯兵可以就保德軍請糧하니 則不煩輸運過河供饋
若平日路人宿食諸寨 五百之卒 巡綽有餘
或些小賊馬 則建寧之兵 可以禦捍이요 若賊數稍多 則淸寨之兵 不失應援이니
蓋都不去百里之內하니 非是減兵이요 但那移就食而已
如此則河外省費하고 民力可紓
四曰委土豪者
今議麟州者 存之則困河東하고 棄之則失河外라하니 若欲兩全而不失인댄 莫若擇一土豪하야 委之自守
麟州堅險하니 與兵二千이면 其守足矣
況所謂土豪者 乃其材勇 獨出一方하니 威名旣著 敵所畏服이요 又能諳敵情僞하야 凡於戰守 不至乖謀하니
若委以一州 則其黨自視州如家하리니 繫已休戚 其戰自勇하며 其守自堅이요
又其旣是土人이라 與其風俗情接하니 人賴其勇하고 亦喜附之리니 則蕃漢之民 可使漸自招集이라
是外能捍賊而戰守하며 內可輯民以實邊이니 省費減兵 無所不便이라
比於命吏而往하야 凡事仰給於朝廷컨댄 利害百倍也
必用土豪인댄이면 不可하니
吉見在建寧寨하야 蕃漢依吉而耕於寨側者 已三百家
其材勇則素已知名이온 況其官序自可知州
一二年間 視其後效하야 苟能善守어든 則可世任之하야 使長爲捍邊之守
右臣所陳 乃是大計 伏望聖慈 特賜裁擇하소서
若可以施行이면 則紓民減費之事 容臣續具條列하리이다
取進止하소서


04. 인주麟州의 일을 어떻게 하는 것이 마땅한지에 대해 논한 차자箚子
적확한 견해이다.
신이 어저께 성지를 받들고 하동에 이르러 명호明鎬인주麟州의 일을 의논하였는데, 신이 도착하지 못한 사이에 명호가 이미 일면으로 시창언施昌言 등과 먼저 주의奏議하였습니다.
얼마 뒤에 다시 추밀원의 차자에 의거해보니, 명호 등이 주의한 내용을 갖추어 기록하여 신으로 하여금 다시 함께 만나서 좋은 쪽으로 상의하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신이 마침내 직접 하북河北으로 가서 이해利害를 헤아려보고, 명호 등과 다시 상의하여 병마와 사람의 수를 줄이면 군비軍費를 줄일 수 있다고 청하기로 하여 이미 연서連署하여 상주上奏하였습니다.
이 밖에 신이 별도로 단견이 있어 응당 그 이해利害와 조처에 관한 일을 조목조목 모두 진달해야겠기에 네 가지 의논을 열거합니다.
첫째는 뭇사람들의 말을 분변하는 것이고, 둘째는 보존하는 것과 폐치廢置하는 것을 비교하는 것이고, 셋째는 의 군졸을 줄이는 것이고, 넷째는 토호土豪에게 위임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면 장구한 모책이 변방을 방어하는 방책에 거의 근사할 것입니다.
삼가 아래와 같이 조목조목 진달합니다.
첫째 ‘뭇 사람들의 말을 분변해야 한다는 것’이란 다음과 같습니다.
신이 그동안 신료들이 주청奏請한 것을 자세히 살펴보니 그 내용이 네 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를 없애고 라는 명칭을 붙이고자 하고, 어떤 사람은 황하 근처로 옮기고자 하고, 어떤 사람은 군병과 말을 뽑아내어서 군량과 마초馬草 운송을 줄이고자 하고, 어떤 사람은 성곽과 보루를 첨가하여서 변경邊境의 이민족과 한족을 불러 모으고자 합니다.
그러나 를 없애고 를 만들더라도 군병을 줄이지 못한다면 이란 명칭을 없애지 않느니만 못할 것이니, 만약 군병을 줄이고 경비를 줄일 수 있다면 로 있은들 무슨 문제 될 게 있겠습니까.
성벽이 튼튼하고 지형이 높은 것은 그야말로 하늘이 만든 험준한 요새라 수비할 수는 있고 공격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황하와 부주府州까지의 거리가 각각 겨우 백여 리밖에 안 되니, 만약 황하로 옮긴다 하더라도 불과 5, 70리 근처로 옮길 뿐, 수비하기는 쉽고 공격하기는 어려운 천험天險의 요새를 버리는 것입니다.
이로써 말한다면 황하 근처로 옮기자는 주장과 를 없애자는 주장은 아무래도 옳지 못합니다.
군병과 말을 뽑아내어 줄이자는 주장으로 말하자면 진실로 변방 경영에 관한 중요한 논의거리입니다.
그러나 군병이 쓸데없이 많은 것은 인주麟州뿐만이 아니니, 큰 폐단은 바로 5에 있습니다.
따라서 만약 인주의 군병과 말을 줄이고 5채의 군병과 말은 줄이지 않는다면, 줄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무릇 변방의 이민족과 한족을 불러 모으는 것은 무엇보다 변방을 충실하게 하는 근본이 됩니다.
그러나 조정 혼자만의 힘으로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변신邊臣에게 위임하여 오래도록 그 일을 전담하도록 허락하고 점차 은혜와 믿음을 미루되 햇수에 제한을 두지 말아서 그 일의 득실이 조정의 급무에 매이지 않고 경영하기를 자기 집일을 하듯 할 수 있게 해야 비로소 원대한 공효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니, 2년에 한 번 바뀌는 관리가 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신은 생각건대 군병을 줄이고 보루를 첨가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럴 듯하지만 일의 요체에 맞지 않습니다.
둘째 ‘보존하는 것과 폐치廢置하는 것을 비교하는 것’이란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 하외河外의 군병은 번갈아 쉬는 군병을 제외하고도 오히려 2만이나 됩니다.
대저 하동 20의 군사를 죄다 동원하여 2(인주麟州, 부주府州) 5를 넉넉하게 하여 하외河外의 수백 변호邊戶를 만드느라 수백만 백성의 재물을 긁어모은다면, 적이 비록 오지 않더라도 우리가 이미 스스로 곤궁해져서 적으로 하여금 싸우지 않고 상대방을 지치게 하는 계책을 얻게 하고, 우리에게는 백성을 피폐하게 해 원망을 받는 수고가 있게 하니, 이로써 생각해본다면 폐치해도 될 듯합니다.
그러나 이는 보존해야 할 이점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 2주 5채는 비록 사람이 없는 경계境界를 속절없이 지키고 있지만 적도 감히 우리 땅을 점거하지 못하니, 이는 외려 적을 2, 3백 리 밖으로 내치는 것입니다.
만약 인주를 한 번 옮기거나 폐치하자고 논의하면 5채도 형세상 보존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외로이 남은 부주府州는 곧 외로운 보루堡壘가 되고 말아서 자기를 지키기에도 겨를이 없을 터이니, 이렇게 되면 적이 우리 성과 보루에 들어와 점거하고 우리 땅과 농토에서 경작하고 목축할 수 있어서 황하 양쪽 기슭이 적의 소굴이 될 것입니다.
지금 적이 수백 리 밖에 있음에도 황하 연안에는 오히려 방추防秋에 힘을 써야 하는데, 만약 황하 양쪽 기슭에서 서로 마주 보고 있게 된다면 배를 띄우거나 얼음이 언 강을 건너와서 한 해 동안 늘 적이 쳐들어올까 근심하여 황하 연안 안의 고을들이 죄다 변방을 수비하는 진지가 될 터이니, 이 문제를 가지고 생각한다면 그대로 보존해두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모름지기 보존하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셋째 ‘의 군졸을 줄이는 것’이란 다음과 같습니다.
신이 경력慶曆 3년(1043) 한 해의 용도를 심사해보건대, 인주麟州는 양곡 7만여 섬과 건초 21만여 을 썼고, 5는 양곡 14만여 섬과 건초 40만여 속을 썼으니, 5채의 비용이 인주보다 곱절이 됩니다.
125리의 땅에 이 5채를 늘어놓았으니, 교대로 휴식하는 병사를 제외하더라도 오히려 7천5백 명이 있습니다.
게다가 따로 2천5백 명의 인력을 써서 양곡을 운반하고, 또 병주幷州흔주忻州 등 열 고을의 군졸과 백성들이 양곡을 운송하고 밖으로는 상인들까지도 그 안에 들어와 왕래하니, 거리가 멀어서 고생과 경비가 많이 드는 것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마다 불과 기병 3, 50기가 순찰하고 경비할 뿐, 나머지는 가만히 앉아 하는 일이 없습니다.
처음 5채를 세울 때에는 본래 이렇지는 않았습니다.
의 병사는 각각 정해진 수가 있었으니, 건녕建寧에는 1천5백 명을 두었고 그 나머지 네 에는 각각 3백 내지 5백 명에 그쳤습니다.
지금의 쓸데없이 많은 병사 수는 모두 그 후에 더 늘인 것입니다.
신은 생각건대 지금의 사정은 조금 느긋하여 를 세우던 당초에 비할 바는 아닙니다.
그러나 우선 예전의 수로 제한하더라도 쓸데없는 비용이 드는 데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신은 청컨대 건녕에는 단지 1천 명만 남겨두고 도순검都巡檢 한 명을 두며, 진천鎭川중후中堠백승百勝 3채에는 각각 5백 명만 남겨두소서.
그리고 이 들에서 줄인 병사를 청채보淸寨堡에 주둔시키고 도순검 한 명이 통솔하도록 하소서.
이 청채보는 동쪽에 가장 가까워 황하를 건너면 바로 보덕군保德軍이라, 주둔하는 병사들이 보덕군에 가서 양곡을 청할 수 있으므로 번거롭게 양곡을 수송하여 황하를 건너 공급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평상시에 행인들이 이 들에 숙식할 경우에는 5백 명의 군졸이 순찰하면 충분할 것입니다.
사소한 적의 기병 정도는 건녕의 군사들이 막을 수 있을 것이고, 적의 숫자가 많으면 청채보의 군사들이 어김없이 응원할 것입니다.
이곳들은 모두 1백 리 안을 벗어나지 않으니, 군사를 줄이는 게 아니고 단지 군사를 옮겨서 식량이 있는 데로 나아가게 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와 같이 하면 하외河外에 드는 비용은 줄고 백성들의 힘은 느긋하게 펴질 수 있을 것입니다.
넷째 ‘토호土豪에게 위임하는 것’이란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 인주麟州의 일을 논의하는 이들은 인주를 그대로 두면 하동河東을 곤란하게 하고 버리면 하외河外를 잃게 된다고 하니, 만약 양쪽 모두 온전히 하여 잃지 않고자 한다면 한 명의 토호를 가려뽑아서 그에게 인주를 맡겨서 스스로 지키게 하느니만 못합니다.
인주는 튼튼하고 험준한 곳이니 군사 2천 명만 주면 충분히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이른바 토호란 자는 곧 재주와 용맹이 한 지방에서 특출하니 위명이 이미 드러남에 적들이 두려워하는 바이고, 또 적의 실정과 속임수를 잘 알아서 무릇 전투와 수비에 있어서 계책이 어긋나는 데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 한 를 맡긴다면 그들이 를 보기를 자기 집처럼 여길 것이니, 자기의 흥망興亡고락苦樂이 달린 터라 그 전투에서는 절로 용감하고 그 수비에서는 절로 견고할 것입니다.
게다가 이미 그 지방 사람이라 풍속과 민정民情에 밀접하니 사람들이 그의 용맹을 믿고 또한 그에게 의지하기를 좋아할 터인즉 변방의 백성들을 점차 불러 모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밖으로는 적을 막아서 전투하고 수비할 수 있으며 안으로는 백성을 모아서 변방을 튼튼히 할 수 있을 터이니, 비용을 줄이고 병력을 줄일 수 있어 불편할 것이 없습니다.
이는 관리를 임명해 보내서 모든 일을 조정에 의지하는 것에 비교하면 이해利害가 백 배나 차이가 납니다.
반드시 토호를 쓴다면 왕길王吉이 아니면 안 됩니다.
왕길은 현재 건녕채建寧寨에 있는데, 왕길을 의지하여 부근에서 농사를 짓는 변방의 백성이 이미 3백 가구나 됩니다.
그의 재주와 용맹은 평소에 이미 이름이 났는데다, 더구나 그 관직의 등급이 본디 지주知州를 맡길 수 있음에 있어서이겠습니까.
한두 해 동안 성효成效가 있는지를 살펴보아서 진실로 잘 지키면 대대로 지주知州에 임명하여 길이 변방을 수비하게 해도 될 것입니다.
이상 신이 진달한 바는 바로 국가의 큰 계책이니,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특별히 헤아려 선택해주소서.
만약 이 계책을 시행할 수 있다면 백성의 힘을 덜고 비용을 줄이는 일을 신이 이어서 구체적으로 진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성상께서 결정하소서.


역주
역주1 論麟州事宜箚子 : 이 글은 仁宗 慶曆 4년(1044) 5월에 지어진 것이다. 이해 4월에 歐陽脩가 황제의 생신을 축하하러 온 거란의 사신을 接伴하여 都亭驛에서 연회를 열었고, 河東으로 가서 麟州의 사정을 관찰하였다. 내용은 麟州의 治所를 옮기거나 廢置하는 것은 모두 옳지 않으니, 응당 토호에게 위임하여 방어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주는 송나라 때 河東路에 속하였고 치소는 新春에 있었다.
역주2 明鎬 : 989~1048. 宋나라 때 密州 安丘(現 山東省 安丘市) 사람으로 자는 化基이다. 眞宗 祥符 5년(1010)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知同州를 지낼 때 변경 지방 호족의 자제들 가운데 학업이 없고 무능한 사람을 뽑아 훈련시켜 淸邊軍을 만들어 운영하였다. 뒤에 三司戶部判官 및 東京‧益州路 轉運使를 역임했다. 慶曆 8년(1048)에 文彦博이 河北宣撫使가 되고 명호가 副使가 되어 宣毅卒王의 난을 진압하고, 그 공으로 參知政事가 되었다. 시호는 文烈이다.
역주3 施昌言 : ?~1064. 宋 慶曆 연간(1041~1048)에 활동한 시인이다. 자는 正臣으로 通州 靜海(現 江蘇省 南通) 사람이다. 仁宗 때에 진사에 올라 通判滁州, 河北都轉運使를 거쳐 英宗 治平 원년(1064)에 知越州로 있다가 세상을 마쳤다.
역주4 五寨 : 現 山西省 雁門 일대에 있던 宋나라 때의 邊寨이다. 建寧‧鎭川‧中堠‧百勝 등 다섯 곳이 있었다.
역주5 分休 : 番休와 같은 말로 병사가 번갈아가면서 쉬는 것이다. 《資治通鑑》에 “당시 동방의 官兵들이 모두 번갈아 쉬고 있었는데 滿寵이 表를 올려 중군 병사들을 부르고 아울러 쉬고 있는 장수와 군사들을 부를 것을 청하였다.[時 東方吏士皆分休 寵表請召中軍兵 幷召所休將士]” 하였는데, 그 註에 “分休는 番休와 같다.[分休猶番休也]” 하였다.
역주6 都巡檢 : 송나라 때 변방 지역이나 여러 郡이 연접한 곳에 두었던 武官으로 순시하며 도적을 막는 일을 맡았다.
역주7 王吉 : 宋 仁宗 때의 장수로 魏釗와 더불어 姜郞阿의 반란군을 토벌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1) 책은 2024.01.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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