準勅定諡
라 據本家發到故推誠保德崇仁翊戴功臣觀文殿學士特進太子少師致仕上柱國樂安郡開國公食邑四千三百戶食實封一千二百戶贈太子太師歐陽某行狀
하야 依例牒太常禮院擬諡
라 今準回牒連到議狀
하야 諡曰文忠
이라
公歸老於家하야 以疾不起라 將葬에 行狀上尙書省하고 移太常하야 請謚하니 太常合議曰 公維聖宋賢臣으로 一世學者之所師法이라
明於道德하고 見於文章하며 究覽六經群史諸子百氏하야 馳騁貫穿하야 述作千百萬言하야 以傳先王之遺意하니 其文卓然하야 自成一家하야 比司馬遷揚雄韓愈에 無所不及而有過之者라
方天下溺於末習하야 爲章句聲律之時에 聞公之風하고 一變爲古文하야 咸知趨尙根本하야 使朝廷文明不愧於三代漢唐者는 太師之功이라 於教化治道爲最多하니 如太師眞可謂文矣로다
博士李淸臣得其議하야 則閱讀行狀하고 考按謚法하고 曰 唐韓愈李翱權德輿孫逖本朝楊憶이 皆謚文이니 太師固宜以文謚라하다
吏持衆議하야 白太常官長하니 官長有曰 文則信然하니 不復易也라 然公平生好諫諍하니 當加獻爲文獻이요 無已則加忠爲文忠이라하니
衆相視曰 其如何오하고 則又合言曰 忠亦太師之大節이라 太師嘗參天下政事하야 進言仁宗하고 乞早下詔立皇子하야 使有明名定分하야 以安人心이라
及英宗繼體
하고 今上卽皇帝位
하야 兩預定策翊戴
하야 有安社稷功
이요 이라
蓋太師天性正直하고 心誠洞達하야 明白無所欺隱하고 不肯曲意順俗하야 以自求便安하며 好論列是非하고 分別賢不肖하야 不避人之怨誹狙嫉하야 忘身履危하야 以爲朝廷立事라
按謚法에 道德博聞曰文이요 廉方公正曰忠이니 今加忠以麗文이 宜爲當이라하다
衆以狀授淸臣하야 爲謚議하니 淸臣曰 不改於文而傅之以忠은 議者之盡也라 淸臣其敢不從이리오하고 遂謚文忠이라 謹議라
朝奉郞守尙書工部郞中充秘閣校理直舍人院兼同修起居注權判吏部流內銓騎都尉賜緋魚袋錢藻와 宣德郞守尙書刑部員外郞充集賢校理兼同修起居注權同判吏部流內銓騎都尉賜緋魚袋竇卞은 伏準太常禮院謚議如前이라
天下文物繁盛之極에 學士大夫競夫鎪刻組繪하야 日益靡靡하야 以汨沒於卓詭魁殊之說하야 而不復知淳古之爲正也라
於是時에 天下曰是라하고 太師曰非라하며 天下以爲韙하고 太師以爲陋하니 學士大夫磨牙淬爪하야 爭相出力하야 以致之危害어늘
太師不之顧曰 我道는 堯舜也요 我言은 孔子孟軻也니 而天下不我從하고 將焉往고하니라 然卒由太師而一歸於醇正이라
故仁義之言
이 其華燁然
하야 獨輝灼乎一代之盛
하야 하니 嗚呼媺哉
라
大丈夫束帶立夫人之朝하야 所以大過人者는 大節立焉이니 不齪齪小節以求曲全이 可也라 怫衆慮하고 彊君以難이 是爲大節이요 不徇世俗之論하고 而先識以制未形이 是爲大節이라
太師當嘉祐之間하야 協議建儲正名하야 挈天下之疑而泮之하야 萬世因而若維太山而安不危하니 斯之謂大節이라
謚法에 道德博聞曰文이요 廉方公正曰忠이라 生平論譔文章하야 務明堯舜孔孟之教於已壞之後하니 可謂道德博聞矣요 排左右持祿取容之慮하야 特建萬世無窮之策하되 而自不以爲功하니 可謂廉方公正矣라
太常易名曰文忠이라하니 庶乎天下有以知公議之不能泯也라
省司準例於都亭驛集合省官同參詳하야 皆協令式하야 請有司準例施行하고 謹詳定訖에 遂具狀中書門下取裁하고 奉宰臣判準申하야 謹具狀奏聞하고 伏候勅旨라
성사省司는 칙명勅命에 따라 시호諡號를 의정議定하였습니다. 본가本家에서 보내온 고추성보덕숭인익대공신故推誠保德崇仁翊戴功臣 관문전학사觀文殿學士 특진特進 태자소사太子少師로 치사致仕하고 상주국上柱國 낙안군개국공樂安郡開國公 식읍食邑 4천 3백 호戶 실제 식읍 1천 2백 호에 봉해진 증태자태사贈太子太師 구양모歐陽某의 행장行狀에 의거하여 규례대로 태상례원太常禮院에 이첩移牒하여 시호를 의정擬定하게 하였습니다. 지금 회첩回牒과 연이어 온 의장議狀에 따라 시호를 ‘문충文忠’이라 하였습니다.
선덕랑宣德郞 수태상승守太常丞 충집현교리充集賢校理 동지태상례원同知太常禮院 이청신李淸臣
공은 벼슬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가 노년을 보내다가 병이 들어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차 장사 지낼 때 행장行狀을 상서성尙書省에 올리고 태상예원太常禮院에 이첩移牒하여 시호를 청하니 태상예원에서 협의하기를 “공은 성스러운 송조宋朝의 현신賢臣으로 당대 학자들이 모범으로 삼아 본받던 사람이다.
도덕道德을 밝히고 문장에 드러내며 육경六經과 전대의 많은 역사와 제자백가諸子百家를 궁구하여 다 꿰뚫어 통하여 천백만언千百萬言을 저술하여 선왕先王이 남긴 뜻을 전하였다. 그 문장이 우뚝하여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루어 사마천司馬遷과 양웅揚雄과 한유韓愈에 비해 미치지 못하는 점은 없고 뛰어난 점은 있다.
바야흐로 천하가 말습末習에 빠져 장구章句와 성률聲律을 일삼던 때에 공의 풍성風聲을 듣고는 일변一變하여 고문古文으로 변해 모두가 근본을 지향할 줄을 알게 되어서 조정의 문명文明이 삼대三代와 한漢나라 당唐나라에 손색이 없게 한 것은 태사太師(구양수歐陽脩)의 공로이다. 교화教化와 치도治道에 있어 공이 가장 많으니 태사와 같은 이는 참으로 ‘문文’이라 이를 만하다.”라고 하였습니다.
박사博士 이청신李淸臣이 이 의론을 받아보고서 행장을 읽어보고 시법謚法을 고찰한 다음 말하기를 “당나라의 한유韓愈, 이고李翱, 권덕여權德輿, 손적孫逖과 본조本朝의 양억楊憶의 시호가 모두 ‘문’이니 태사의 시호를 ‘문’으로 하는 것이 참으로 마땅하다.”라고 하였습니다.
관리가 여러 사람의 의론을 가지고 태상예원의 관장官長에게 아뢰니, 관장이 말하기를 “‘문’은 참으로 적합하니 다시 바꿀 수 없다. 그러나 공은 평소 간쟁을 좋아하였으니 마땅히 ‘헌獻’을 더하여 ‘문헌文獻’으로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충忠’을 더하여 ‘문충文忠’이라 해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여러 사람이 서로 보면서 말하기를 “어떠한가?”라고 하고 다시 합의하기를 “‘충’은 또한 태사의 대절大節이다. 태사는 일찍이 천하天下의 정사政事에 참여하여 인종仁宗에게 진언하였고 일찍 조명詔命을 내려 황자皇子를 세울 것을 청하여 명분名分을 분명하게 정해 인심을 편안하게 하였다.
영종英宗이 인종의 대를 잇고 금상今上(신종神宗)이 황제로 즉위할 때에 공이 두 번 다 계책을 정하여 보익輔翼하여 추대하는 일에 참여하여 사직을 안정시킨 공이 있고, 안팎을 온화하고 너그럽게 하여 양궁兩宮을 주선하여 영종이 친정親政하게 하였다.
태사는 천성이 정직하고 진실한 마음이 툭 트여 명백하여 속이거나 숨기는 것이 없었고 뜻을 굽혀 시속에 따르면서 일신의 편안을 구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옳고 그름을 논변하고 어진 이와 불초한 이를 분별하기를 좋아하면서 다른 사람이 원망하여 헐뜯고 시기하는 것을 개의치 않아 자신의 안위는 신경 쓰지 않고서 위태로운 일을 마다하지 않음으로써 조정을 위해 정사를 바로 세웠다.
살펴보건대 시법謚法에 도덕이 있고 견문이 넓은 것을 ‘문’이라 하고 염방廉方하고 공정한 것을 ‘충’이라 하니, 지금 ‘충’을 더하여 ‘문’에 붙이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의장議狀을 이청신에게 주어 시의謚議를 짓게 하니, 이청신이 말하기를 “‘문’을 고치지 않고 ‘충’을 붙이는 것은 의론하는 자의 말이 더할 나위 없다. 청신이 어찌 감히 따르지 않겠는가.”라고 하고 마침내 시호를 ‘문충’이라 하였습니다. 삼가 의론합니다.
조봉랑朝奉郞 수상서공부랑중守尙書工部郞中 충비각교리充秘閣校理 직사인원直舍人院 겸동수기거주兼同修起居注 권판이부유내전權判吏部流內銓 기도위騎都尉 사비어대賜緋魚袋 전조錢藻와 선덕랑宣德郞 수상서형부원외랑守尙書刑部員外郞 충집현교리充集賢校理 겸동수기거주兼同修起居注 권동판리부류내전權同判吏部流內銓 기도위騎都尉 사비어대賜緋魚袋 두변竇卞이 삼가 위와 같은 태상예원太常禮院의 시의謚議를 비준합니다.
천하의 문물이 극도로 번성하자 학사대부學士大夫들이 다투어 문장을 공교工巧하게 조탁하여 날로 더욱 퇴폐해져 기이하고 독특함을 숭상하는 설에 골몰하여 더 이상 순박하고 예스런 정도正道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러한 때에 천하 사람들은 이러한 습속을 옳다 하고 태사太師는 그르다 하였으며 천하 사람들은 이러한 습속을 바르게 여기고 태사는 비루하게 여기니, 학사대부들이 이를 갈고 손톱의 날을 세우면서 다투어 서로 힘을 내어 태사에게 위해危害를 끼쳤습니다.
그래도 태사는 개의치 않고 말하기를 “나의 도는 요순堯舜의 도이고 나의 말은 공자孔子와 맹가孟軻의 말이니 천하가 나를 따르지 않고 장차 어디로 가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태사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모두 순정醇正한 풍조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므로 인의仁義의 말들이 찬란하게 꽃피어 한 시대의 성대함이 유독 번뜩이고 멀리 양한兩漢의 위로 벗어나니, 아아! 아름답습니다.
대장부가 관디를 차고 인주人主의 조정에 서서 남들보다 크게 뛰어날 수 있는 것은 대절大節을 세우는 것이니, 자잘한 소절小節에 얽매여서 뜻을 굽혀 몸을 보전하려고 하지 않아야 합니다. 여러 사람의 뜻을 거스르고 임금에게 어려운 일을 해내기를 힘써 권하는 것이 대절이고, 세속의 논의를 따르지 않고 선견지명先見之明으로 일이 드러나기 전에 제어하는 것이 대절입니다.
태사는 가우嘉祐 연간에 저위儲位를 세워 명분을 바로잡는 것을 협의協議하여 천하 사람들이 의심하여 결정하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만세토록 이를 말미암아 태산처럼 튼튼하게 안정되어 위태롭지 않게 되었으니 이를 일러 대절이라 합니다.
시법謚法에, 도덕이 있고 견문이 넓은 것을 ‘문文’이라 하고 염방廉方하고 공정한 것을 ‘충忠’이라 하였습니다. 일생동안 문장을 논저論著하여 성인의 가르침이 이미 무너진 후세에 요순堯舜과 공맹孔孟의 가르침을 힘써 밝혔으니 도덕이 있고 견문이 넓다고 이를 만하고, 녹봉만 받아먹으면서 비위만 맞추는 황제 좌우의 신하들의 생각을 물리쳐서 만세토록 다함이 없는 계책을 우뚝하게 세우되 스스로 공功으로 여기지 않았으니 염방하고 공정하다 이를 만합니다.
태상례원太常禮院에서 역명易名하여 ‘문충文忠’이라 하니 거의 천하 사람들이 공의公議는 민멸泯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 것입니다.
성사省司는 규례대로 도정역都亭驛에 성관省官이 집합해 같이 참작하여 심의하고 다함께 정식程式을 협의한 다음 유사有司가 규례대로 시행하기를 청하고 삼가 상정詳定을 마친 후 마침내 의장議狀을 갖추어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에서 결재하고 재신宰臣의 승인을 받들어 삼가 주장奏狀을 갖추어 아뢰고 엎드려 칙지勅旨를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