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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2)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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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3. 임금 노릇 하기 어려움에 대한
用人之難이라
인재를 쓰는 것이 어려움을 말하였다.
語曰 孰難哉
논어論語》에서 말한 “임금 노릇 하기가 어렵다.”는 것은 어떤 것이 어렵다는 것인가?
蓋莫難於用人이라
대개 사람을 쓰는 것보다 어려운 것은 없다.
夫用人之術 任之必專하며 信之必篤然後 能盡其材而可共成事
대개 사람을 쓰는 방법은 위임하기를 반드시 전적으로 하며, 신임하기를 반드시 독실하게 한 뒤에야 그 재주를 다하게 하여 함께 일을 이룰 수 있는 법이다.
及其失也하얀 任之欲專하면 則不復謀於人而拒絶群議하니 是欲盡一人之用而先失衆人之心也
그런데 잘못하는 경우에는, 위임하기를 전적으로 하고자 한즉 더 이상 남에게 상의하지 않고 여러 사람들의 의론을 막아서 끊으니, 이는 한 사람을 쓰는 것만 극진하게 하고자 하여 먼저 뭇사람의 마음을 잃는 것이다.
信之欲篤하면 則一切不疑而果於必行하니 是不審事之可否하고 不計功之成敗也
신임하기를 독실하게 하고자 하면 일절 의심하지 않고 과감하게 결행하니, 이는 일의 가부可否를 살피지 않고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의 결과를 계산하지 않는 것이다.
夫違衆擧事하고 又不審計而輕發이면 其百擧百失而及於禍敗 此理之宜然也
대개 중인衆人의 뜻을 어기면서 일을 거행하고, 또 살피거나 계산하지 않고서 가벼이 발한다면, 백 번 거행에 백 번 실패하여 화패禍敗에 이르게 되리라는 것은 이치상 당연한 것이다.
然亦有幸而成功者 人情成是而敗非하니
그러나 또한 요행히 공을 이룬 경우가 있으면, 인정人情은 성공하면 옳게 여기고 실패하면 그르게 여기는 법이니,
則又從而贊之하야 以其違衆爲獨見之明하고
또 거기에 붙좇아 찬동하면서 뭇사람들을 거스르는 것을 ‘자기 혼자의 밝은 식견’이라고 하고,
以其拒諫爲不惑群論하고 以其偏信而輕發 爲決於能斷하야
간언諫言을 거부하는 것을 ‘군론群論에 미혹되지 않았다.’고 하고, 치우치게 믿어서 가벼이 발하는 것을 ‘잘 판단해야 할 것에서 결단을 했다.’고 하여,
使後世人君으로 慕此三者以自期라가
후세의 인군人君으로 하여금 이 세 가지를 사모하여 그렇게 되기를 스스로 기약하게 만든다.
至其信用一失而及於禍敗하얀 則雖悔而不可及하니 此甚可歎也
그러다가 믿고 쓰는 것이 한 번 실패하여 화패禍敗에 미치게 되어서는, 비록 후회를 하더라도 소용이 없게 되니, 이것이 심히 한탄스러운 것이다.
前世爲人君者 力拒群議하고 專信一人이라가 而不能早悟하야 以及於禍敗者多矣
전세前世에 임금이 된 자들 중에는 힘써 군의群議를 거부하고 오로지 한 사람을 믿으면서 조기에 깨닫지 못하여 화패禍敗에 이르게 된 경우가 많다.
不可以徧擧하니 請試擧其一二하리이다
일일이 들 수 없으니, 청컨대 시험 삼아 그중 한두 가지를 들어보겠다.
昔秦 地大兵强하고 有衆九十六萬하야 號稱百萬일새 蔑視東晉하야 指爲一隅하야 謂可直以氣呑之耳
옛날에 나라 부견苻堅은 영토가 넓고 군대가 강성하며, 군인 96만을 소유하여 ‘백만 대군’으로 불렸기 때문에, 동진東晉을 무시하여 한쪽 구석 정도로 지목하면서 “단지 기세만 가지고도 삼킬 수 있다.”라고 하였다.
然而擧國之人 皆言晉不可伐하야 更進互說者 不可勝數
그러나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나라는 정벌할 수 없다.”고 하면서 서로 나아가 번갈아 간언諫言하는 자가 이루 셀 수가 없었다.
其所陳天時人事 堅隨以强辯折之하야 忠言讜論皆沮屈而去하니
그들이 아뢴 천시天時인사人事부견苻堅이 그때그때 억지 변설辨說로 꺾는 바람에 충언忠言당론讜論이 모두 저지되어 떠나갔다.
老成之言也로되 不聽하고 至親之言也로되 不聽하고 堅平生所信重者也 數爲之言하되 不聽하고 惟聽信一將軍하니
왕맹王猛부융苻融과 같은 경우는 노성老成한 이의 말인데도 듣지 않고, 태자太子 소자少子 과 같은 경우는 지친至親의 말인데도 듣지 않고, 사문沙門 도안道安과 같은 경우는 부견이 평소에 깊이 신임했던 사람으로 자주 그를 위해 간언했는데도 듣지 않고, 오직 장군 모용수慕容垂 한 사람의 말만을 듣고 믿어주었다.
垂之言 曰 陛下內斷神謀 足矣 不煩廣訪朝臣하야 以亂聖慮라하니 堅大喜하야 曰 與吾共定天下者 惟卿爾라하고
모용수의 말에 이르기를 “폐하陛下내단內斷신모神謀가 충분하니, 번거로이 조신朝臣들에게 널리 자문하여 성려聖慮를 어지럽힐 필요가 없나이다.”라고 하니, 부견이 크게 기뻐하여 이르기를 “나와 함께 천하를 안정시킬 자는 오직 뿐이다.”라고 하였다.
於是 決意不疑하야 遂大擧南伐이러니 兵至壽春 晉以數千人擊之하야 大敗而歸하야 比至洛陽하얀 九十六萬兵 亡其八十六萬이라
이에 주저하지 않고 결심하여 마침내 크게 남쪽으로 정벌을 거행하였는데, 군대가 수춘壽春에 이르렀을 때 나라가 수천 명으로 공격하여, 크게 패하여 돌아왔는데, 낙양洛陽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는 96만의 군사 중에 86만이나 잃어버렸다.
堅自此兵威沮喪하야 不復能振하야 遂至於亂亡이라
부견이 이로부터 군대의 위세가 꺾여서 다시 진작하지 못하고, 마침내 어지러이 하기에 이르렀다.
近五代時 後唐之鎭太原也 地近契丹하야 恃兵跋扈 議欲徙之於鄆州한대 擧朝之士 皆諫以爲未可하되
오대五代 때에 가까워 후당後唐청태제淸泰帝가, 진조晉祖태원太原진무鎭撫할 적에 지역이 거란契丹에 가까워 군대를 믿고 발호할 것을 염려하여, 운주鄆州로 옮기고자 의론을 하였는데, 온 조정의 선비들이 모두 간언하여 불가하다고 하였다.
帝意必欲徙之하야 夜召常所與謀樞密直學士薛文遇하야 問之以決可否한대 文遇對曰 臣聞作舍道邊이면 三年不成이라하니
청태제는 속으로 반드시 그를 옮기고자 하여, 늘 함께 도모하던 추밀직학사樞密直學士 설문우薛文遇를 밤에 불러 그에게 물어서 가부可否를 결정하려고 하였는데, 설문우가 대답하기를 “신이 듣기로 도로변에 집을 지으면 3년이 가도 완성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此事斷在陛下 何必更問群臣이리오하니
이 일은 결단코 폐하에게 달려 있으니, 어찌 굳이 다시 군신群臣에게 물어볼 것이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帝大喜曰 術者言我今年當得一賢佐하야 助我中興이라하더니 卿其是乎인저하고
청태제가 크게 기뻐하여 이르기를 “술자術者가 내게, 금년今年에는 마땅히 한 사람의 현명한 보좌를 얻어서 나의 중흥中興을 돕게 될 것이라고 하더니, 이 바로 그 사람이구려.”라고 하고,
卽時命學士草制하야 徙晉祖於鄆州하야
즉시 학사學士에게 명하여 기초起草하게 하여, 진조晉祖운주鄆州로 옮기게 하였다.
明旦宣麻하니 在廷之臣 皆失色이라
다음날 조서詔書가 선포되자, 조정에 있던 신하들이 모두 실색失色하였다.
後六日而晉祖反書至하니
6일 뒤에 진조晉祖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글이 이르니,
淸泰帝憂懼하야 不知所爲하야
청태제가 근심하고 두려워하며 어찌할 바를 몰라, 이숭李崧에게 이르기를
我適見薛文遇하야 爲之肉顫하니 欲自抽刀刺之라하니
“내가 마침 설문우薛文遇를 만나, 그로 인해 살이 떨릴 지경이 되었으니, 스스로 칼을 뽑아 그를 찌르고 싶다.”라고 하니,
崧對曰 事已至此하니 悔無及矣라하고
이숭이 대답하기를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후회해도 소용이 없나이다.”라고 하고,
但君臣相顧하야 涕泣而已
다만 군신君臣이 서로 돌아보며 눈물을 흘리며 울 따름이었다.
由是言之컨대 能力拒群議하고 專信一人 莫如二君之果也
이로 미루어 말해보건대, 힘써 군의群議를 거부하고 오로지 한 사람만을 믿는 것이 두 임금처럼 과감한 경우는 없었다.
由之以致禍敗亂亡 亦莫如二君之酷也
그로 인해 화패禍敗난망亂亡을 초래한 것이 또한 두 임금처럼 혹독했던 경우도 없었다.
方苻堅欲與慕容垂 共定天下하고 淸泰帝以薛文遇爲賢佐하야 助我中興하얀 可謂臨亂之君 各賢其臣者也
바야흐로 부견苻堅모용수慕容垂와 함께 천하를 평정하고자 하고, 청태제淸泰帝설문우薛文遇를 어진 보좌로 여겨 “나의 중흥을 돕는다.”고 하기에 이르러서는, 가히 ‘어지러움에 처한 임금들이 각각 그 신하를 현명하게 여겼다.’고 할 만한 경우이다.
或有詰予曰 然則用人者不可專信乎아하야늘 應之曰 可謂專而信矣로되 不聞擧齊蜀之臣民非之也
혹자가 나에게 힐난하기를 “그렇다면 용인用人하는 자는 오로지 한 사람을 믿어서는 안 되는 것인가?”라고 하거늘, 응답하기를 “ 환공桓公관중管仲을 등용한 것과 나라 선주先主제갈량諸葛亮을 등용한 것은 ‘오로지하고, 믿어주었다.’고 할 만한데도, 나라와 나라의 온 신민臣民들이 그르게 여겼다는 것을 들어보지 못하였다.
蓋其令出而擧國之臣民從하고 事行而擧國之臣民便이라
대개 그 명령이 나오면 온 나라의 신민들이 따르고 일이 행해지면 온 나라의 신민들이 편해졌다.
故桓公先主得以專任而不貳也
그러므로 환공桓公선주先主가 전적으로 맡겨서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使令出而兩國之人不從하고 事行而兩國之人不便이면 則彼二君者 其肯專任而信之하야 以失衆心而斂國怨乎리오
만약 명령이 나와도 두 나라의 백성들이 따르지 않고 일이 행해져도 두 나라의 사람들이 편해지지 않는다면, 저 두 임금이 어찌 전적으로 맡기고 믿어서 중인衆人들의 마음을 잃고 나라 사람들의 원망을 초래하려고 했겠는가?” 하였다.
凡歐陽公之論 最痛切이라
무릇 구양공歐陽公의 논의가 가장 통절痛切하다.
然其行文 不如嫋娜紆徐하니 須參互之라야 爲入神解
그러나 그 행문行文삼소三蘇의 부드럽고 느긋한 것만은 못하니, 모름지기 참고하여 보아야 신묘한 견해에 들어갈 수 있다.
역주
역주1 爲君難論上 : 임금 노릇 하는 어려움 중에서 가장 심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을 쓰는 것’에 대해 논한 글이다. 사람을 쓸 때는 원칙적으로, 전적으로 믿어주고 과감하게 실행하여야 하는데, 그럴 경우에 나타날 수 있는 역설적인 폐단을 예로 들면서 사람을 쓰는 것의 어려움에 대해 설파하고 있다.
역주2 爲君難 : 《論語》 〈子路〉에 “사람들 말에 ‘임금 노릇 하기가 어려우며 신하 노릇 하기가 쉽지 않다.’라고 하였다.[人之言曰 爲君難 爲臣不易]”는 말이 보인다.
역주3 苻堅 : 338~385. 5胡16國시대 前秦의 제3대 황제이다. 豪族의 횡포를 누르고, 학문을 장려하여 太學을 정비하였으며, 農耕을 활발히 일으켰다. 그리하여 前燕과 前涼을 멸망시키고, 동쪽 高句麗로부터 서쪽 타림 남서부 호탄에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역주4 王猛 : 325~375. 字는 景略이고, 北海郡 劇縣 출신 사람이다. 前秦의 승상이자 대장군이며 저명한 정치가‧군사가로서 명성이 있었으며, 苻堅을 보필하여 前秦이 國勢를 크게 떨치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苻堅이 東晉을 정벌하려고 할 때 반대하는 유언을 남겼다.
역주5 苻融 : 苻堅의 동생으로, 苻堅의 신뢰가 있었으나, 東晉 정벌에 대해서는 계속되는 전쟁으로 인해 병사들이 지치고 나라가 피폐해 있음을 이유로 반대하였다.
역주6 太子宏 : 苻堅의 맏아들로, 苻堅의 東晉 정벌에 반대하였다. 苻堅이 淝水에서 패배한 뒤, 어머니와 처를 데리고 晉나라에 투신하여 輔國將軍을 지냈다. 후에 桓玄에게 살해되었다.
역주7 少子詵 : 苻堅의 어린 아들로, 苻堅에게 총애를 받았다. 東晉 정벌을 반대하였으나, 苻堅이 어린아이의 말이라고 무시하였다. 苻堅이 姚萇에게 붙잡혀 禪讓을 강요받다가 살해되자, 자살하였다.
역주8 沙門道安 : 沙門은 승려를 말한다. 道安(312~385)은 東晉 때의 대표적인 高僧으로, 12살 때 출가하여 초기 중국 佛敎의 기초를 확립하였다는 평을 받는다. 晉 武帝 때 제자 400여 명을 이끌고 襄陽으로 피란하여 檀溪寺를 세워 佛法을 전파하였으며, 長安으로 가 苻堅의 고문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역주9 慕容垂 : 326~396. 5胡16國시대 後燕의 건국자이다. 苻堅의 휘하에 있다가 苻堅이 淝水 전투에서 패하여 죽은 후, 中山을 도읍으로 하여 燕나라를 세웠다. 華北 동부 지역을 평정, 高句麗 등에 빼앗겼던 遼河 유역을 빼앗아 국력을 신장시켰다.
역주10 淸泰帝 : 後唐의 마지막 황제인 李從珂(885~936)를 가리킨다. 본래 明宗의 양자였으나, 明宗 사후 그의 아들 閔帝를 축출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라 淸泰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明宗의 사위였던 河東節度使 石敬瑭이 반기를 들고 遼의 대군을 끌어들였을 때 분신자살하였다.
역주11 晉祖 : 중국 五代 後晉의 高祖 石敬瑭(892~942)을 가리킨다. 遼에 燕雲 16개 州를 할양한다는 조건으로 원군을 받아 後唐을 무너뜨렸다.
역주12 李崧 : 深州 饒陽 사람으로 後唐 때 벼슬길에 올라 吏部侍郞 端明殿學士에 이르렀고 後晉의 조정에서 中書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 兼 樞密使가 되었다. 거란의 태종 耶律德光이 汴京에 들어와서 그를 太子太師에 임명하였다. 후한 고조 劉知遠에게 피살되었다. 《新五代史 권57 李崧傳》
역주13 齊桓公之用管仲 : 管仲은 春秋時代 齊나라의 정승 管夷吾로, 富國强兵에 힘을 쏟아 夷狄을 물리치고, 周나라 왕실을 높였으며, 諸侯들을 결속시켜 천하를 바로잡아 桓公이 霸者가 되게 하였다. 처음에는 公子 糾의 진영에 서서 환공과 싸워 환공의 혁대 고리를 화살로 맞히기도 하였으나, 나중에 친구 鮑叔牙의 추천으로 환공의 휘하에 들었다.
역주14 蜀先主之用諸葛亮 : 先主는 蜀漢을 建國한 昭烈帝 劉備(161~223)이다. 諸葛亮(181~234)은 蜀나라의 名宰相이자 지략가로서, 字는 孔明이다. 出仕하기 전에 南陽의 鄧縣에서 지냈는데, 유비가 그의 명성을 듣고 三顧草廬하여 재상으로 삼았다. 이후 유비를 도와 曹操의 대군을 赤壁에서 대파하고, 荊州와 益州를 점령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웠다. 유비가 제갈량을 얻고 나서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다.[猶魚之有水也]”라고 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역주15 三蘇 : 蘇洵과 그의 두 아들인 蘇軾, 蘇轍 세 사람을 가리킨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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