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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2)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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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引譽後進하고 亦規訓後進이라
前歲於洛陽 得在州時所寄書하야 卒然不能卽報하고 遂以及今이라
然其勤心 未必若書之怠로되 而獨不知察不察也
脩來京師 已一歲也
臨汴水하니 公操之譽 日與南方之舟 至京師
脩少與時人하야 相接尤寡로되 而譽者無日不聞하니 若幸使盡識舟上人이면 則公操之美 可勝道哉
凡人之相親者 居則握手共席하야 道歡欣하고 旣別則問疾病起居하야 以相爲憂者 常人之情爾
若聞如足下之譽者 何必問其他乎리오
聞之欣然 亦不減握手之樂也
夫不以相見爲歡樂하고 不以疾病爲憂問 是豈無情者乎
得非相期者在於道爾 其或有過而不至于道者라야 乃可爲憂也
近於京師 頻得足下所爲文하야 讀之甚善하니 其好古閔世之意 皆公操自得於古人하야 不待脩之贊也
然有自許太高하며 詆時太過하야 其論若未深究其源者
此事有本末하야 不可卒然語 須相見이라야 乃能盡이라
然有一事하니 今詳而說하리라
此計公操可朝聞而暮改者 試先陳之하리라
家有足下手作書一通及有일새 始見之 駭然不可識이라가 徐而視定하야 辨其點畫 乃可漸通하니
何怪之甚也
旣而持以問人曰 是不能乎書者邪 曰非不能也
書之法 當爾邪 曰非也 古有之乎 曰無 今有之乎 亦曰無也
然則何爲而若是 曰特欲與世異而已
脩聞君子之於學 是而已 不聞爲異也 이나 亦曰如此
然古之人 或有稱而高世者하니 考其行 亦不過乎君子하되 但與世之庸人不合爾 行非異世 蓋人不及而反棄之하야 擧世斥以爲異者歟인저
況今書 前不師乎古하고 後不足以爲來者法하니 雖天下皆好之라도 猶不可爲어든 況天下皆非之어늘 乃獨爲之 何也
是果好異以取高歟인저
然嚮謂公操能使人譽者 豈其履中道秉常德而然歟
抑亦昻然自異以驚世人而得之歟인저
하야 勤謹乎其始하야 惟恐其見異而惑也러니
今足下端然居乎學舍하야 以敎人爲師어늘 而反率然以自異하니 顧學者何所法哉
不幸學者皆從而效之 足下又果爲獨異乎
今不急止 則懼他日有責後生之好怪者 推其事하야 罪以奉歸리니
此脩所以爲憂而敢告也
惟幸察之하라
不宣이라


01. 석추관石推官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
후진後進을 칭찬하고 또한 후진을 규계規戒하였다.
지난해 낙양洛陽에서, 운주鄆州에 계실 때 부치신 편지를 받고서 경황이 없어 곧바로 답장을 하지 못하고 마침내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의 정성은 편지를 보내지 못한 것처럼 태만하지 않건만, 공조公操께서 알아줄지 알아주지 못할지는 모르겠습니다.
경사京師에 온 지 이미 한 해가 지났습니다.
송주宋州변수汴水 가에 있으니, 공조公操의 명성이 날마다 남방으로 가는 배와 함께 경사에 이릅니다.
나는 세상 사람들을 허여함이 적어서 만나는 사람은 특히 적은데도 공조를 칭찬하는 말이 하루도 들리지 않는 날이 없으니, 만약 배를 탄 사람들이 다 안다면 공조의 훌륭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무릇 서로 친한 사람들이 평상시에는 손을 잡고 한자리에 앉아서 즐겁게 얘기하다가, 이별한 뒤에는 질병과 기거를 물어서 서로 걱정하는 것은 일반 사람들의 상정常情입니다.
만약 족하의 명성 같은 것을 들었다면 어찌 그 나머지 것을 물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듣고는 마음이 흐뭇한 것이 또한 직접 만나서 손을 잡는 즐거움만 못지않을 것입니다.
대저 서로 만나는 것을 기쁨으로 삼지 않고 질병이 있는 것을 걱정하여 위문慰問하지 않는 것이 어찌 무정한 자이겠습니까?
상대방에게 기대하는 것이 에 있는지라 혹 잘못하여 도에 이르지 못한 것이 있어야 비로소 걱정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근자에 경사京師에서 족하가 지은 글을 자주 얻어서 읽어봄에 매우 좋았으니, 그 고도古道를 좋아하고 세상을 걱정하는 뜻은 모두 공조公操가 스스로 고인古人에게서 얻은 것으로 나의 도움을 기다릴 게 없습니다.
그러나 자부自負하는 것이 너무 높고 세상을 비판하는 것이 너무 지나쳐 그 주장하는 말이 마치 그 근원을 깊이 궁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 문제는 본말本末이 있어 창졸간에 얘기할 수 없으니, 서로 만나야 다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일이 있으니, 이제 상세히 말하겠습니다.
이것은 공조가 아침에 듣고 저녁에 고칠 수 있는 것이라 생각되니, 먼저 말해보겠습니다.
군황君貺의 집에 족하가 손수 쓴 편지 한 통과 〈이상기二像記〉의 석본石本이 있기에 처음 보고서 눈만 휘둥그레 뜨고 알지 못하다가, 서서히 시선이 안정되어 그 점과 획을 변별해보고서야 비로소 차츰 알 수 있었으니, 아!
어쩌면 이리도 몹시 괴이하던지요.
이윽고 내가 그것을 가지고 남에게 묻기를 “이는 글씨를 잘 쓰지 못한 것인가?”라고 하니 “잘 쓰지 못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고,
서법書法에 맞는가?”라고 하니 “그렇지 않다.”라고 하였고, “옛날에 이렇게 쓴 글씨가 있는가?”라고 하니 “없다.”라고 하였고, “지금은 있는가?”라고 하니 역시 “없다.”라고 하였고,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이 했는가?”라고 하니 “단지 세상에서 하는 것과 다르게 하고자 했을 따름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듣건대 군자君子가 학문에 있어서는 옳음을 추구할 따름이고 세상과 다르게 한다는 것은 듣지 못했으니, 학문을 좋아하기로는 양웅揚雄만 한 이가 없지만 역시 이와 같을 뿐입니다.
그러나 옛날 사람들 중에는 혹 독행獨行하여 세상을 높이 초탈했다고 일컬어지는 사람도 있지만, 그 행실을 살펴보면 역시 군자에 불과하되 단지 세상의 용렬한 사람들과 뜻이 맞지 않을 뿐이고 행실이 세상 사람들과 다르지는 않았으니, 대개 사람들이 그에게 못 미치자 도리어 그를 버리고 온 세상 사람들이 그를 배척하여 색다르다고 하는 것일 터입니다.
지나친 사람에 대해서는 성인이 오히려 중용中庸에 나아가게 하고자 했습니다.
더구나 지금의 글씨는 앞으로는 옛날의 서법書法을 본받지 않고 뒤로는 후세의 본보기가 되기에 부족하니, 비록 천하 사람들이 다 좋아하더라도 오히려 그렇게 해서는 안 되거늘, 하물며 천하 사람들이 모두 그르다고 하는데도 홀로 그렇게 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이는 과연 색다른 것을 좋아하여 고상함을 취하는 것일 터입니다.
그렇다면 앞서 공조公操가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칭찬하게 했다고 한 것은, 어찌 중도中道를 실천하고 떳떳한 덕을 지켜서 그러한 것이겠습니까?
역시 자신을 높여서 스스로 색다른 것을 추구하여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여 그러한 칭찬을 받았을 터입니다.
옛날에 동자童子를 가르치는 사람은 설 때는 반드시 방정하게 서며 들을 때는 머리를 기울여 엿듣지 않게 하며 늘 속이지 않는 모습을 보여서, 시초부터 근면勤勉하고 근신勤愼하도록 하고 색다른 것을 보고 현혹될까 오직 염려했습니다.
지금 족하는 단정하게 학사學舍에 앉아서 사람을 가르치는 일로 스승이 되었거늘, 도리어 느닷없이 스스로 색다른 모습을 보이니 도리어 학자들이 무엇을 본받겠습니까?
불행히도 학자들이 모두 따라서 본받는다면 족하는 또 과연 홀로 남들과 다르겠습니까?
지금 급히 그만두지 않으면 훗날 괴이한 것을 좋아하는 후생을 꾸짖는 이가 이 일을 미루어 족하에게 죄를 돌릴까 두렵습니다.
이것이 내가 걱정하여 감히 말해주는 까닭입니다.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이만 줄입니다.


역주
역주1 與石推官第一書 : 歐陽脩가 景祐 원년(1034) 5월에 京師에 들어와 王曙의 추천으로 學士院의 試官이 되었고 館閣校勘에 임명되었는데, 이 글에서 “내가 경사에 온 지 이미 한 해가 지났다.” 한 것으로 보아, 이 글은 경우 2년(1035)에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石推官은 石介를 가리킨다. 推官은 官名이다. 宋나라 때 三司와 各 部, 府, 節度使, 觀察使 및 州郡에 모두 추관을 두었다. 석개는 鄆州觀察使推官과 南京留守推官을 역임했기 때문에 추관이라 부른 것이다. 본서 권10 〈上杜中丞書〉의 註 ‘推官石介’ 참조.
역주2 : 운
역주3 公操 : 石介의 자가 守道 또는 公操이다.
역주4 宋州 : 宋나라 때 본래 開封東路에 속한 州였는데, 眞宗 景德 3년(1006)에 應天府로 승격하였고, 大中祥符 7년(1014)에 南京이 되었다.
역주5 君貺 : 王拱辰의 자이다. 왕공신은 원래 이름이 拱壽이고, 開封 咸平 사람인데 歐陽脩‧石介와 진사시에 同榜급제하였다. 權知開封府‧御史中丞을 역임하였다.
역주6 二像記石本 : 石介가 지은 〈二像記〉라는 記文의 石刻을 拓本한 것이다.
역주7 好學莫如揚雄 : 漢나라 揚雄은 문장가이면서 학자로, 특히 古代의 文字에 정통하였다. 《周易》을 본떠서 《太玄經》을 저술하였고, 《論語》를 본떠서 《法言》을 저술하였다. 그는 5대조인 揚季 때부터 자신에 이르기까지 岷山 남쪽 郫縣에 살면서 전답 한 뙈기와 집 한 채로 근근이 살아가면서도 학문에 매우 독실하였다. 《漢書 권87 揚雄傳》
그의 《法言》에 “동자 때부터 학문을 익혀 이제 백발이 분분하다.[童而習之 白紛如也]”라고 하였다.
역주8 獨行 : 《禮記》 〈儒行〉의 ‘特立獨行’에서 온 말로, 뜻과 행실이 고상하여 時流와 어울리지 않음을 뜻한다. 이 구절을 韓愈가 伯夷의 절개를 칭송한 〈伯夷頌〉에서도 썼다.
역주9 及其過 聖人猶欲就之於中庸 : 子貢이 子張과 子夏 중 누가 나은지 물으니, 孔子가 자공은 지나치고[過] 자하는 미치지 못한다고 답하였다. 자공이 그렇다면 자장이 더 나으냐고 묻자, 공자가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過猶不及]”고 하였다. 《論語 先進》
역주10 古之敎童子者……常視之毋誑 : 《禮記》 〈曲禮 上〉에 “어린아이에게는 늘 속이지 않음을 보이며, 동자는 너무 따뜻한 옷인 갖옷과 裳을 입히지 않으며, 설 때는 반드시 방정하게 서고 머리를 기울여 엿듣지 않게 한다.[幼子常視毋誑 童子不衣裘裳 立必正方 不傾聽]”라고 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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