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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2)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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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6. 조경순刁景純 학사學士에게 보낸 편지
敍情이라
을 서술하였다.
脩頓首啓하노이다
는 머리를 조아려 아룁니다.
始見하야凶訃하고 聞問驚怛 不能已已
근자에 건덕현령乾德縣令을 그만두고 남양南陽에 와 머물고 있으면서 비로소 사사인謝舍人을 만나고 내한內翰 어른이 별세하셨음을 알았으니, 부음을 들임에 놀랍고 슬픈 심정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丈丈位望竝隆이나
어른께서는 지위와 명망이 모두 높았습니다.
然平生亦嘗坎軻하고 數年以來 方履亨塗任要劇하니 其去大用尺寸間爾
그러나 평생에 평탄치 못한 길을 걸어오시다가 몇 해 이래에야 비로소 환로宦路가 열려 요직要職을 맡으셨으니, 재상에 오를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豈富與貴不可力爲 而天之賦予 多少有限邪
어쩌면 부귀는 힘으로 얻을 수 없고, 하늘이 사람에게 부여함에 많고 적음의 제한이 있는 것입니까.
凡天之賦予人者 又量何事而爲之節也
무릇 하늘이 사람에게 부여하는 것은 또 무엇을 헤아려 절제하는 것입니까.
前旣不可詰하니 但痛惜感悼而已
지나간 일은 이미 따져 물을 수 없으니, 그저 애통하고 슬퍼할 따름입니다.
某自爲學으로 初未有一人知者러니 及首登門하야 便被憐獎하야 開端誘道 勤勤不已하야 至其粗若有成而後止하니
속발束髮하여 공부한 이래로 애초에 한 사람도 알아주는 이가 없었는데, 맨 처음 어른의 문하에 올라 곧 사랑과 칭찬을 입어, 학문의 단서를 열고 학문의 길로 이끌어주시기를 부지런히 힘써 마지않으셔서 조금이라도 성취가 보이는 듯한 뒤에야 그치셨습니다.
雖其後遊於諸公而獲齒多士하야도 雖有知者 皆莫之先也
비록 그 후에 다른 분들과 사귀어 선비들 축에 낄 수 있어서, 비록 저를 알아주는 사람은 있었으나, 아무도 어른보다 앞설 사람은 없었습니다.
然亦自念不欲效世俗子 一遭人之顧已 不以至公相期라도 反趨走門下하야 하고 甚者 獻讒諛而備使令하야 以卑昵自親하야 名曰報德하니 非惟自私 直亦待所知以不厚
그러나 저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세상의 속된 사람들이 한 번 남이 자기를 돌아봐줌을 만나면 지극히 공정한 마음으로 대하지 않더라도 도리어 그 문하에 달려가서 비굴한 웃음을 보이며, 심하면 아첨하는 말을 바치고 하인 노릇을 하면서 자신을 낮춤으로써 친근하게 굴면서 스스로 이를 은혜에 보답한다고 하니, 자신을 위한 사심일 뿐 아니라 그야말로 자신을 알아준 이를 후하지 못한 방법으로 대우하는 것입니다.
是故懼此하야 惟欲少勵名節하야 庶不泯然無聞하야 用以不負所知爾 某之愚誠 所守如此
이런 까닭에 이런 점을 두려워하여 오직 조금이나마 명예名譽절조節操에 힘써 이름없는 존재가 되지 않음으로써 저를 알아준 분의 은혜를 저버리지 않고자 했으니, 저의 어리석은 충정에 지켜 실천해온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然雖胥公이라도 亦未必諒某此心也
그러나 비록 서공胥公(胥偃)이라도 반드시 저의 이런 마음을 헤아려 아시지는 못하셨을 것입니다.
自前歲得罪夷陵으로 奔走萬里 身日益窮하고 迹日益疎하야 不及再聞語言之音이러니 而遂爲幽明之隔하니
지난해 득죄得罪하여 이릉夷陵으로 좌천되면서부터 만 리 먼 길을 가서 몸은 날로 더욱 궁해지고 발길은 날로 더욱 멀어져서 미쳐 다시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지 못했는데, 마침내 이렇게 유명幽冥을 달리하시고 말았습니다.
嗟夫
아아!
世俗之態 旣不欲爲 愚誠所守 又未克果하니 惟有하고 臨柩一奠이어늘
세속 사람들의 작태는 제가 이미 할 수 없었고 어리석은 충정에 지켜온 것도 실천하지 못하였으니, 오직 분상奔喪하여 대문을 바라보며 길게 곡하고 관 앞에서 한 번 술잔을 올려야 할 것입니다.
亦又不及하니 此之爲恨 何可道也리오
그러나 이마저도 하지 못하니, 이 한스러움을 어찌 말할 수 있겠습니까.
徒能惜不永年與未大用하야 遂與道路之人同歎爾이라
한갓 장수長壽를 누리지 못하고 크게 쓰이지 못하신 것을 애석해하여 마침내 남일 뿐인 행인들과 같이 탄식할 뿐입니다.
知歸葬廣陵하야 遂謀京居하니
광릉廣陵으로 반장返葬하고서 마침내 경사京師에 살 작정임을 알았습니다.
議者多云不便이로되 而聞若斯하니 必有以也
사람들이 대개 불편할 것이라 하지만 평소의 유언이 이와 같았다고 하니, 필시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이면 某歲盡春初 當過京師리니 尙可一拜見하야 以盡區區리라
만약 봄물이 변수汴水로 내려올 때를 기다리신다면, 저는 올해가 다 가고 내년 초봄에 경사를 지날 터이니 혹 한 번 찾아뵙고 구구한 회포를 다 풀 수 있을 것입니다.
身賤力微하야 於此之時 當有可致어늘 而無毫髮之助하니
몸은 미천하고 힘은 미약하여 이러한 때에 응당 보답을 드려야 할 터인데 터럭만한 도움도 못 되니.
慙愧慙愧
부끄럽고 부끄럽습니다.
不宣이라
이만 줄입니다.
역주
역주1 與刁景純學士書 : 이 글은 康定 원년(1040)에 쓴 것이다. 刁景純은, 이름은 約이고 景純은 자이다. 학문에 힘썼고 문장에 능하였다. 天聖 연간에 進士試에 급제하여 館閣校理, 史館職 및 楊州 수령 등을 역임하였다. 潤州에 집을 지어 藏春塢라 이름 붙이고 한가로이 소요하였다.
淸나라 陸心源의 《宋史翼》에 의하면, 조경순이 寶元(1038~1039) 중에 館閣校勘이 되었다고 하니, 歐陽脩가 조경순을 이때 만났을 것으로 짐작된다. 조경순은 구양수의 장인인 胥偃의 손위 처남이다. 이보다 앞서 天聖 6년(1028)에 구양수가 당시의 名士인 서언을 찾아가 자신이 지은 글을 보여주니, 서언이 그 문장에 감탄하여 구양수를 자신의 문하에 받아들였다. 그해 겨울 구양수는 서언과 함께 宋나라의 수도인 開封으로 갔고, 天聖 7년(1029) 봄에 國子監에서 거행한 考試에서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그러나 景祐 3년(1036)에 范仲淹이 재상 呂夷簡의 비위를 거슬러 좌천될 때 구양수는 범중엄을 편들었고 서언은 여이간을 편들었다. 이 일로 구양수와 서언은 사이가 멀어졌는데, 이때 서언이 죽었으므로 구양수가 이 편지를 보낸 것이다.
역주2 近自罷乾德 遂居南陽 : 景德 3년에 歐陽脩가 范仲淹이 재상 呂夷簡의 비위를 거슬러 좌천된 일로 편지를 보내 高若訥을 질책했다가 夷陵縣令으로 좌천되었다. 그 이듬해에 다시 光化軍 乾德縣令으로 자리를 옮겼고, 寶元 2년에야 복직되어 乾德縣에서 모친을 모시고 南陽에 와서 待次하고 있었다.
역주3 謝舍人 : 謝絳을 가리킨다. 그의 자는 希深이다. 사강이 寶元 2년(1039)에 자청으로 鄧州 수령으로 나갔는데, 이때 梅堯臣과 함께 갔고 구양수가 찾아가서 이들과 만나 열흘 정도 머물다가 돌아온 적이 있다. 舍人은 官名인데 顯貴한 집안 자제를 일컫는 말로도 쓰인다.
역주4 丈丈內翰 : 胥偃을 가리킨다. 丈丈은 어른에 대한 존칭이다. 內翰은 翰林學士이다.
역주5 束髮 : 어릴 때를 뜻한다. 옛날에 남자아이가 成童이 되면 머리를 한 가닥으로 묶어 늘어뜨린 것을 말한다. 성동은 8세 이상이라는 설도 있고, 15세 이상이라는 설도 있다. 《禮記》 〈玉藻〉에 “동자의 예의범절은, 검은 베로 만든 옷에 비단으로 가선을 두르며, 비단으로 된 허리띠와 끈을 사용하며, 비단으로 만든 띠로 머리를 묶는데, 모두 붉은색의 비단을 쓴다.[童子之節也 緇布衣錦緣 錦紳幷紐 錦束髮 皆朱錦也]” 한 데서 온 말이다.
역주6 脅肩諂笑 : 권세가 있는 자에게 잘 보이려고 비굴하게 웃는 것이다. 曾子가 “어깨를 웅크린 채 아첨하여 웃는 것이 더운 여름날에 밭일하는 것보다 더 고되다.[脅肩諂笑 病于夏畦]”라고 하였다. 《孟子 滕文公 下》
역주7 望門長號 : 《禮記》 〈奔喪〉에 “大功은 문을 바라보고 곡한다.[大功望門而哭]”라고 하였다. 이는 喪家의 대문이 보이면 곡한다는 뜻이다. 胥偃은 歐陽脩의 장인이므로, 장인의 喪에 사위는 원래 緦麻三月의 服을 입게 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奔喪의 禮를 갖춤을 뜻하는 말로 썼다.
역주8 理命 : 治命과 같은 말로 평소에 정신이 맑을 때 한 유언이다. 춘추시대 晉나라의 魏武子가 병이 들었을 때 그의 아들 魏顆에게 “내가 죽으면 내 첩들을 시집보내라.”라고 하였는데, 병이 위중해져서는 “반드시 殉葬하라.”라고 하였다. 무자가 죽자 위과가 “병이 심하면 정신이 어지럽게 되니, 나는 정신이 온전할 때의 治命을 따르겠다.”라고 하면서 부친의 첩들을 시집보냈다. 《春秋左氏傳 宣公 15년》
역주9 若須春水下汴 : 黃河로부터 淮水로 들어가는 강으로 通濟渠라고도 하는데, 宋나라 때 동남쪽으로 통하는 水運의 길이다. 胥偃이 京師에서 죽었고 廣陵으로 返葬하려면 반드시 汴水를 거쳐야 하는데, 봄이 되어 얼음이 풀려야 물길이 뚫리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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