和凝傳은 不足觀이라 特其好文本末이 頗與今之士大夫以文相侈者類라 予故錄之以自警云이라
和凝
은 字成績
이니 鄆州須昌人也
라 其九世祖逢堯爲唐監察御史
러니 其後世遂不復
이라
凝父矩는 性嗜酒하고 不拘小節이라 然獨好禮文士하야 每傾貲以交之하니 以故로 凝得與之遊라
而凝幼聰敏하고 形神秀發이라 擧進士하고 梁義成軍節度使賀瓌辟爲從事하다
瓌與唐莊宗戰于胡柳할새 瓌戰敗하야 脫身走어늘 獨凝隨之라 反顧見凝하야 麾之使去하니 凝曰 大丈夫當爲知己死니 吾恨未得死所爾라 豈可去也리오하다
已而오 一騎追瓌幾及이어늘 凝叱之不止하고 卽引弓射殺之하야 瓌由此得免이라
瓌歸하야 戒其諸子曰 和生은 志義之士也라 後必富貴리니 爾其謹事之어다하고 因妻之以女하다
中
에 拜殿中侍御史
하고 累遷主客員外郎知制誥翰林學士知貢擧
하다
主司每放榜
에 則圍之以棘
하고 閉
하야 絶人出入以爲常
이러니 凝徹棘開門
에 而士皆肅然無譁
이오 所取皆一時之秀
하야 稱爲得人
이라
晉初에 拜端明殿學士兼判度支하고 爲翰林學士承旨라 晉高祖數召之하야 問以時事한대 凝所對皆稱旨하다
天福五年
에 拜中書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
하다 高祖將幸鄴
할새 而襄州
反迹已見
하니 凝曰 陛下幸鄴
에 從進必因此時反
이리니 則將奈何
오하야늘
高祖曰 卿將何以待之
오하니 凝曰 先人者 所以奪人也
라 請爲
十餘通
하야 授之鄭王
하야 有急則命將擊之
하소서하니 高祖以爲然
이라
是時에 鄭王爲開封尹하야 留不從幸이어늘 乃授以宣勅이라 高祖至鄴에 從進果反하니 鄭王卽以宣勅命騎將李建崇焦繼勳等討之라
從進謂高祖方幸鄴이라 不意晉兵之速也라가 行至花山하야 遇建崇等兵하고 以爲神하야 遂敗走하다
漢高祖時에 拜太子太傅하고 封魯國公하다 顯德二年에 卒하니 年五十八이라 贈侍中하다
凝好飾車服하고 爲文章에 以多爲富하야 有集百餘卷을 常自鏤板하야 以行于世하니 識者多非之라 然性樂善하고 好稱道後進之士라
唐故事에 知貢擧者所放進士에 以己及第時名次爲重이라 凝擧進士及第時에 第五러니 後知貢擧에 選范質爲第五라
화응전和凝傳은 볼만한 내용이 없다. 다만 화응이 문장을 좋아한 본말本末이 자못 문장을 서로 자랑하는 요즘 사대부와 비슷하다. 내가 그러므로 수록하여 스스로 경계로 삼는다.
화응和凝은 자字가 성적成績이니 운주鄆州 수창須昌 사람이다. 9대조 화봉요和逢堯가 당唐나라의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었는데 그 후손들은 마침내 다시 환학宦學을 하지 않았다.
화응의 부친 화구和矩는 성품이 술을 좋아하고 작은 예절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러나 유독 문사文士를 좋아하고 예우하여 매번 재물을 기울여 사귀니, 이 때문에 화응은 문사들과 교유할 수 있었다.
화응은 어려서부터 총민聰敏하고 외모와 정신이 특출했다. 진사進士에 급제하였고 양梁나라 의성군절도사義成軍節度使 하괴賀瓌가 초빙하여 종사從事로 삼았다.
하괴가 당唐 장종莊宗과 호류胡柳에서 전투할 때 하괴가 패전하여 몸을 빼내 도주하였는데 화응만이 뒤를 따랐다. 하괴가 고개를 돌려 화응을 보며 손을 내저어 떠나게 하니 화응이 말하기를 “대장부는 마땅히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으니, 저는 제대로 죽을 곳을 얻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습니다. 어찌 떠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잠시 후 기병騎兵 하나가 하괴를 추격하여 거의 따라잡았는데 화응이 질타하기를 그치지 않고 즉시 활을 당겨 사살射殺하여 하괴가 이 때문에 위기를 면할 수 있었다.
하괴가 돌아와 자식들에게 당부하기를 “화생和生은 지기志氣와 의리가 있는 선비이다. 뒤에 반드시 부귀해질 것이니 너희는 삼가 섬기거라.”라고 하고서 자신의 딸을 화응의 아내로 보냈다.
천성天成 연간에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에 배수되고 여러 차례 승진하여 주객원외랑主客員外郎 지제고知制誥 한림학사翰林學士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다.
이 당시 진사시進士試에 응시한 선비들이 경박한 자들이 많아서 시끄럽게 소란을 피우면서 주시관主試官을 동요시키는 일을 즐겨 행했다.
그리하여 주시관이 매번 방방放榜할 때마다 가시나무를 두르고 성문省門을 닫아걸어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는 것을 상규常規로 삼았는데, 지공거知貢擧 화응和凝이 가시나무를 치우고 문을 열자 선비들이 모두 숙연하여 떠드는 이가 없었으며 취재取才한 이들 모두가 당시의 빼어난 이들이어서 인재를 얻었다고 일컬어졌다.
진晉나라 초기에 단명전학사端明殿學士 겸판탁지兼判度支에 배수되고 한림학사翰林學士 승지承旨가 되었다. 진晉 고조高祖가 자주 불러 시사時事를 물었는데, 화응의 대답이 모두 고조의 뜻에 맞았다.
천복天福 5년(940)에 중서시랑中書侍郎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에 배수되었다. 고조가 장차 업鄴으로 거둥하려 할 때 양주襄州의 안종진安從進이 반란하려는 조짐이 이미 드러나니, 화응이 말하기를 “폐하께서 업으로 거둥하시면 안종진이 반드시 이때를 틈타 반란을 할 것이니 장차 어찌하시렵니까?”라고 하였다.
고조가 말하기를 “경은 장차 어떻게 대처하겠는가?”라고 하자, 화응이 말하기를 “남보다 먼저 행동을 취하는 것이 남을 제압하는 방법입니다. 청컨대 선칙宣勅 10여 통을 만들어 정왕鄭王에게 주어 위급한 사태가 생기면 장수를 임명하여 적을 격퇴하게 하십시오.”라고 하니 고조가 옳게 여겼다.
이때에 정왕이 개봉윤開封尹이 되어 개봉에 머무르면서 고조를 따라가지 않았는데 이에 선칙을 주었다. 고조가 업에 이르자 안종진이 과연 반란하니 정왕이 즉시 선칙으로 기장騎將 이건숭李建崇, 초계훈焦繼勳 등을 임명하여 토벌하게 하였다.
안종진은 고조가 지금 업에 거둥하였으므로 진나라 병사가 신속히 대응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하다가, 출병하여 화산花山에 이르러 이건숭 등의 병력을 만나고는 신묘하다고 여겨 마침내 패주하였다.
출제出帝가 즉위하자 우복야右僕射를 더하고 한해 남짓 지나 평장사平章事를 파직하고 좌복야左僕射로 승진시켰다.
한漢 고조高祖 때에 태자태부太子太傅를 배수하고 노국공魯國公에 봉하였다. 현덕顯德 2년(955)에 졸하니 향년 58세였다. 시중侍中을 추증하였다.
화응和凝은 수레와 의복을 꾸미기 좋아하고 문장을 지을 때 양이 많은 것을 추구하여 문집 백여 권을 일찍이 스스로 판각하여 세상에 간행하니 식자識者들이 많이들 옳지 못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성품이 선善을 즐겨 행하고 후진後進들을 칭찬하기 좋아하였다.
당唐나라의 고사故事에 지공거知貢擧가 방방放榜한 진사進士 중에서 자신이 급제할 때의 명차名次로 선발한 자를 중시하였다. 화응이 진사에 응시하여 급제할 때 제오명第五名이었는데 후에 지공거가 되었을 때 범질范質을 제오명으로 선발하였다.
뒤에 범질의 지위가 재상에 이르고 노국공魯國公에 봉해지고 관직이 태자태부太子太傅에 이르니 모두 화응과 같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영광으로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