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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6)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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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和凝傳 不足觀이라 特其好文本末 頗與今之士大夫以文相侈者類 予故錄之以自警云이라
和凝 字成績이니 鄆州須昌人也 其九世祖逢堯爲唐監察御史러니 其後世遂不復이라
凝父矩 性嗜酒하고 不拘小節이라 然獨好禮文士하야 每傾貲以交之하니 以故 凝得與之遊
而凝幼聰敏하고 形神秀發이라 擧進士하고 梁義成軍節度使賀瓌辟爲從事하다
瓌與唐莊宗戰于胡柳할새 瓌戰敗하야 脫身走어늘 獨凝隨之 反顧見凝하야 麾之使去하니 凝曰 大丈夫當爲知己死 吾恨未得死所爾 豈可去也리오하다
已而 一騎追瓌幾及이어늘 凝叱之不止하고 卽引弓射殺之하야 瓌由此得免이라
瓌歸하야 戒其諸子曰 和生 志義之士也 後必富貴리니 爾其謹事之어다하고 因妻之以女하다
拜殿中侍御史하고 累遷主客員外郎知制誥翰林學士知貢擧하다
是時 進士多浮薄하야 喜爲諠譁以動主司
主司每放榜 則圍之以棘하고하야 絶人出入以爲常이러니 凝徹棘開門 而士皆肅然無譁이오 所取皆一時之秀하야 稱爲得人이라
晉初 拜端明殿學士兼判度支하고 爲翰林學士承旨 晉高祖數召之하야 問以時事한대 凝所對皆稱旨하다
天福五年 拜中書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하다 高祖將幸鄴할새 而襄州反迹已見하니 凝曰 陛下幸鄴 從進必因此時反이리니 則將奈何오하야늘
高祖曰 卿將何以待之오하니 凝曰 先人者 所以奪人也 請爲十餘通하야 授之鄭王하야 有急則命將擊之하소서하니 高祖以爲然이라
是時 鄭王爲開封尹하야 留不從幸이어늘 乃授以宣勅이라 高祖至鄴 從進果反하니 鄭王卽以宣勅命騎將李建崇焦繼勳等討之
從進謂高祖方幸鄴이라 不意晉兵之速也라가 行至花山하야 遇建崇等兵하고 以爲神하야 遂敗走하다
漢高祖時 拜太子太傅하고 封魯國公하다 顯德二年하니 年五十八이라 贈侍中하다
凝好飾車服하고 爲文章 以多爲富하야 有集百餘卷 常自鏤板하야 以行于世하니 識者多非之 然性樂善하고 好稱道後進之士
唐故事 知貢擧者所放進士 以己及第時名次爲重이라 凝擧進士及第時 第五러니 後知貢擧 選范質爲第五


04. 화응和凝전기傳記
화응전和凝傳은 볼만한 내용이 없다. 다만 화응이 문장을 좋아한 본말本末이 자못 문장을 서로 자랑하는 요즘 사대부와 비슷하다. 내가 그러므로 수록하여 스스로 경계로 삼는다.
화응和凝성적成績이니 운주鄆州 수창須昌 사람이다. 9대조 화봉요和逢堯나라의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었는데 그 후손들은 마침내 다시 환학宦學을 하지 않았다.
화응의 부친 화구和矩는 성품이 술을 좋아하고 작은 예절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러나 유독 문사文士를 좋아하고 예우하여 매번 재물을 기울여 사귀니, 이 때문에 화응은 문사들과 교유할 수 있었다.
화응은 어려서부터 총민聰敏하고 외모와 정신이 특출했다. 진사進士에 급제하였고 나라 의성군절도사義成軍節度使 하괴賀瓌가 초빙하여 종사從事로 삼았다.
하괴가 장종莊宗호류胡柳에서 전투할 때 하괴가 패전하여 몸을 빼내 도주하였는데 화응만이 뒤를 따랐다. 하괴가 고개를 돌려 화응을 보며 손을 내저어 떠나게 하니 화응이 말하기를 “대장부는 마땅히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으니, 저는 제대로 죽을 곳을 얻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습니다. 어찌 떠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잠시 후 기병騎兵 하나가 하괴를 추격하여 거의 따라잡았는데 화응이 질타하기를 그치지 않고 즉시 활을 당겨 사살射殺하여 하괴가 이 때문에 위기를 면할 수 있었다.
하괴가 돌아와 자식들에게 당부하기를 “화생和生지기志氣와 의리가 있는 선비이다. 뒤에 반드시 부귀해질 것이니 너희는 삼가 섬기거라.”라고 하고서 자신의 딸을 화응의 아내로 보냈다.
천성天成 연간에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에 배수되고 여러 차례 승진하여 주객원외랑主客員外郎 지제고知制誥 한림학사翰林學士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다.
이 당시 진사시進士試에 응시한 선비들이 경박한 자들이 많아서 시끄럽게 소란을 피우면서 주시관主試官을 동요시키는 일을 즐겨 행했다.
그리하여 주시관이 매번 방방放榜할 때마다 가시나무를 두르고 성문省門을 닫아걸어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는 것을 상규常規로 삼았는데, 지공거知貢擧 화응和凝이 가시나무를 치우고 문을 열자 선비들이 모두 숙연하여 떠드는 이가 없었으며 취재取才한 이들 모두가 당시의 빼어난 이들이어서 인재를 얻었다고 일컬어졌다.
나라 초기에 단명전학사端明殿學士 겸판탁지兼判度支에 배수되고 한림학사翰林學士 승지承旨가 되었다. 고조高祖가 자주 불러 시사時事를 물었는데, 화응의 대답이 모두 고조의 뜻에 맞았다.
천복天福 5년(940)에 중서시랑中書侍郎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에 배수되었다. 고조가 장차 으로 거둥하려 할 때 양주襄州안종진安從進이 반란하려는 조짐이 이미 드러나니, 화응이 말하기를 “폐하께서 업으로 거둥하시면 안종진이 반드시 이때를 틈타 반란을 할 것이니 장차 어찌하시렵니까?”라고 하였다.
고조가 말하기를 “경은 장차 어떻게 대처하겠는가?”라고 하자, 화응이 말하기를 “남보다 먼저 행동을 취하는 것이 남을 제압하는 방법입니다. 청컨대 선칙宣勅 10여 통을 만들어 정왕鄭王에게 주어 위급한 사태가 생기면 장수를 임명하여 적을 격퇴하게 하십시오.”라고 하니 고조가 옳게 여겼다.
이때에 정왕이 개봉윤開封尹이 되어 개봉에 머무르면서 고조를 따라가지 않았는데 이에 선칙을 주었다. 고조가 업에 이르자 안종진이 과연 반란하니 정왕이 즉시 선칙으로 기장騎將 이건숭李建崇, 초계훈焦繼勳 등을 임명하여 토벌하게 하였다.
안종진은 고조가 지금 업에 거둥하였으므로 진나라 병사가 신속히 대응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하다가, 출병하여 화산花山에 이르러 이건숭 등의 병력을 만나고는 신묘하다고 여겨 마침내 패주하였다.
출제出帝가 즉위하자 우복야右僕射를 더하고 한해 남짓 지나 평장사平章事를 파직하고 좌복야左僕射로 승진시켰다.
고조高祖 때에 태자태부太子太傅를 배수하고 노국공魯國公에 봉하였다. 현덕顯德 2년(955)에 졸하니 향년 58세였다. 시중侍中을 추증하였다.
화응和凝은 수레와 의복을 꾸미기 좋아하고 문장을 지을 때 양이 많은 것을 추구하여 문집 백여 권을 일찍이 스스로 판각하여 세상에 간행하니 식자識者들이 많이들 옳지 못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성품이 을 즐겨 행하고 후진後進들을 칭찬하기 좋아하였다.
나라의 고사故事지공거知貢擧방방放榜진사進士 중에서 자신이 급제할 때의 명차名次로 선발한 자를 중시하였다. 화응이 진사에 응시하여 급제할 때 제오명第五名이었는데 후에 지공거가 되었을 때 범질范質을 제오명으로 선발하였다.
뒤에 범질의 지위가 재상에 이르고 노국공魯國公에 봉해지고 관직이 태자태부太子太傅에 이르니 모두 화응과 같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영광으로 여겼다.


역주
역주1 和凝傳 : 和凝(898~955)의 字는 成績으로 鄆州 須昌 사람이다. 後梁과 後唐과 後晉과 後漢과 後周의 다섯 왕조를 섬기며 큰 부침을 겪지 않고 무난하게 宦路를 걸었다. 화응의 열전은 ≪舊五代史≫ 卷127 〈周書 第18 列傳7〉과 ≪新五代史≫ 卷56 〈雜傳 第44〉에 실려 있다. 어떻게 보면 화응은 五代의 혼란한 시기에 자신의 몸을 온전히 하고 출세와 명망을 동시에 다 누린 인물인데, ≪신오대사≫는 단지 〈잡전〉에 넣고 있을 뿐이다. 이는 역시 구양수가 여러 왕조를 지조 없이 섬겨 특별히 볼만한 공업이 없는 인물로 화응을 평가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내용에서 ≪구오대사≫와 ≪신오대사≫는 큰 차이는 없으나, ≪신오대사≫는 화응의 공적과 언행을 굳이 다 싣지 않고 생략하고 축약한 부분이 많다. 특히 ≪구오대사≫에서 화응의 인품과 문장을 직접적으로 칭찬한 말이 ≪신오대사≫에서는 모두 생략되어 있다. 화응은 자신이 살아생전에 직접 자신의 문집 백 권을 간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인물인데, 이에 대해 ≪신오대사≫에서는 “화응은 수레와 의복을 꾸미기 좋아하고 문장을 지을 때 양이 많은 것을 추구하여 문집 백여 권을 일찍이 스스로 판각하여 세상에 유행시키니 識者들이 많이들 그릇되게 여겼다.”라고 평가절하하였다. 이는 ≪구오대사≫의 史評에서 “대저 稽古하는 힘으로 재상의 지위에 오른 사람이 어찌 평범한 사람이겠는가.……예컨대 成績(和凝)의 문채와 元錫(蘇禹珪)의 행실과 景範의 순후함은 모두 군자다운 儒者라고 이를 수 있다. 이로써 재상으로 세우니 어찌 선하지 않겠는가.[夫以稽古之力 取秉鈞之位者 豈常人乎……如成績之文采 元錫之履行 景範之純厚 皆得謂之君子儒矣 以之爰立 何用不臧]”라고 한 것과 대비된다.
역주2 宦學 : 벼슬살이에 필요한 각종 지식을 배우는 것이다.
역주3 天成 : 後唐 明宗의 연호로 926~930년 사이에 사용되었다.
역주4 省門 : 예부 자체를 지칭하는데, 예부가 尙書省에 속해 있었으므로 이렇게 불렸다. 또한 禮部에서 進士를 考試하는 장소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역주5 安從進 : ?~942. 後唐을 섬겨 貴州刺史, 保義彰武軍節度使 등을 역임하였고 後晉 때에는 同中書門下平章事 山南東道節度使가 되었다. 941년에 襄州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襄州行營都部署 高行周의 군대에게 격파당해 양양에서 가족들과 함께 焚死하였다.
역주6 宣勅 : 宣과 勅으로 모두 관원을 임명할 때 발행하는 문서이다. ≪資治通鑑≫ 卷283 〈後晉紀3〉의 동일 기사에 胡三省이 주석을 달기를 “宣은 樞密院에서 나오고 勅은 中書門下에서 나온다.[宣出於樞密院 勅出於中書門下]라고 하였다.
역주7 出帝卽位……遷左僕射 : ≪五代史記纂誤續補≫ 卷5에 다음과 같이 고증하였다. “살펴보건대 〈晉本紀〉에 ‘開運 2년(945) 8월 丙寅일에 和凝을 파직하였다.’라고 하였고, 薛居正의 ≪舊五代史≫ 〈晉本紀〉에 ‘天福 7년(942) 8월 甲子일에 화응에게 右僕射를 더하였다. 開運 2년 8월 병인일에 宰臣 화응을 재상에서 파직하고 右僕射를 守職하게 하였다. 3년 11월 庚寅일에 우복야 화응을 左僕射로 삼았다.’라고 하였고, ≪資治通鑑≫에 ‘개운 2년 8월 병인일에 우복야 兼中書侍郞 同平章事 화응을 파직하고 本官을 守職하게 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우복야를 더한 때로부터 평장사에서 파직한 때까지 4년의 시간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한해 남짓’이라고 할 수 없으며, 좌복야로 승진한 것은 또 한 해를 넘긴 뒤이다.[按晉本紀開運二年八月丙寅 和凝罷 薛史晉本紀天福七年八月甲子 和凝加右僕射 開運三年十一月庚寅 以右僕射和凝爲左僕射 通鑑開運二年八月丙寅 右僕射兼中書侍郞同平章事和凝罷 守本官 是加右僕射至罷平章事 相去四年 不得曰歲餘 遷左僕射 又踰年矣]”
역주8 唐故事……當時以爲榮 : 宋나라 때 葉夢得의 ≪石林燕語≫ 卷8에 “唐나라 말기에 禮部의 知貢擧가 시험 답안이 우수한 자를 얻으면 즉시 자신이 급제할 때의 名次에 두고 甲乙로 高下를 삼지 않고서 이를 ‘衣鉢을 전한다.’라고 하였다. 和凝이 급제할 때 명차가 第十三이었는데, 뒤에 范魯公 質을 얻어 마침내 第十三에 두었다. 그 후 범질은 재상에 올랐고 관직이 太子太傅에 이르렀으며 魯國公에 봉해져 화응과 모두 같았으니, 세상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唐末禮部知貢擧有得程文優者 卽以己登第時名次處之 不以甲乙爲髙下也 謂之傳衣鉢 和凝登第名在十三 後得范魯公質 遂處以十三 其後范登相位 官至太子太傅 封國於魯 與凝皆同 世以爲異也]”라고 하였다. 또한 송나라 때 王闢之의 ≪澠水燕談錄≫ 卷7에도 이 일화를 소개했는데 이때 화응이 범질에게 “그대의 문장은 응당 第一에 두어야 하나, 도리어 굽혀서 第十三에 둠으로써 老夫의 의발을 전한 것이다. [君文合在第一 輙屈居第十三人 用傳老夫衣鉢]”라고 하였다. 또한 송나라 때 洪邁의 ≪容齋四筆≫ 卷4에 “≪新五代史≫ 화응의 열전에 잘못 기록하여 第五라고 하였으나 ≪登科記≫로 고찰해보건대 잘못이다.[新五代史和凝傳 誤爲第五 以登科記考之而非也]”라고 하였다. 범질(911~964)은 자가 文素로 後唐 長興 4년(933) 進士가 되고 後晉과 後漢과 後周와 宋나라에서 모두 벼슬하였다. 송나라 때 侍中에 오르고 魯國公에 봉해졌다. 저서에 ≪五代通錄≫ 등이 있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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