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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3)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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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3. 鄭荀改名序
亦自中法度
之衰 學廢而道不明하니 然後諸子出이라
으로 하야 以爲聖人之術 止於此라하야
諸子因之하야 益得肆其異說하야 至於戰國하야 蕩而不反하니
然後하야 聖人之學 幾乎其息이러니 最後 獨用詩書之言하야 貶異扶正하야 著書以非諸子하되 尤以爲急이러라
荀卿이라
嘗以學干諸侯라가 不用하야 退老蘭陵하니 楚人尊之러라
及戰國平하야 三代詩書 未盡出이라
莫不盡用荀卿子하니 蓋其爲說 最近於聖人而然也
鄭昊 少爲詩賦하야 擧進士하야 已中第하고 遂棄之曰 此不足學也라하고 始從先生長者學問하야 慨然有好古不及之意
鄭君年尙少而性淳明하고 輔以彊力之志하야 得其是者而師焉 無不至也
將更其名하야數以請이어늘 予使之自擇하니 遂改曰荀이라
於是 又見其志之果也로다
夫荀卿者 未嘗親見聖人하고 徒讀其書而得之
然自하니 使其與 幷進於孔子之門이면 吾不知其先後也로다
世之學者 苟如荀卿이면 可謂學矣 而又進焉이면 則孰能禦哉리오
余旣嘉君善自擇而慕焉하고 因爲之字曰叔希하야 且以勗其成焉하노라


03. 정순鄭荀이 이름을 바꾼 데 대한 서문
역시 저절로 법도에 맞다.
삼대三代성세盛世가 쇠망해갈 무렵에 학문이 폐기되어 가 밝혀지지 못하니 이렇게 된 뒤에 제자백가諸子百家가 출현하였다.
노자老子나라의 혼란에 염증을 느끼고부터 그 잗다란 식견으로 성인聖人의 학술이 여기에 그친다고 여겨 비로소 인의仁義을 비판하고 성지聖智를 헐뜯었다.
그러자 이후로 제자諸子들이 노자의 주장을 이어받아 더욱 그 이설異說를 마음대로 주장하게 되어 전국戰國시대에 이르러서는 지나치게 방자해져 정도正道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런 뒤에 산연山淵제진齊秦, 견백堅白이동異同의 논변이 발흥해서 성인의 학문이 거의 사라지게 되었는데, 마지막에 순경자荀卿子가 홀로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의 말을 써서 이단異端폄척貶斥하고 정도正道부식扶植하여 글을 지어 제자諸子를 비판하되 학문을 권장하는 일을 더욱 급선무로 삼았다.
순경荀卿나라 사람이다.
그는 일찍이 배운 바를 가지고 제후諸侯들에게 벼슬을 구하다가 쓰이지 않게 되자 물러나 난릉蘭陵에서 여생을 보내니 나라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였다.
전국戰國의 혼란이 평정됨에 미쳐서 삼대三代 때의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이 세상에 아직 다 나오지는 못했다.
나라의 대유大儒가생賈生사마천司馬遷 같은 무리들이 순경자荀卿子의 학설을 모두 쓰지 않는 이가 없으니 그 학설이 가장 성인聖人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형양滎陽정호鄭昊가 젊어서 시부詩賦를 공부하여 진사進士 시험에 응시하여 이미 급제하고는 마침내 그때껏 공부하던 시부를 버리면서, “이는 배울 것이 못 된다.”고 말하고는 비로소 연덕年德이 높은 스승을 따라 묻고 배우면서 옛 경전經典을 좋아하면서 그때에 태어나지 못함을 개탄慨歎하는 뜻이 있었다.
정군鄭君은 나이가 아직 젊고 성품이 순명淳明한 데다 굳세고 강한 의지까지 있어서 그 올바른 이를 만나 스승으로 삼음에 지극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 이름을 고치고자 하여 자주 나에게 부탁하였는데 내가 그에게 스스로 선택하게 하니 마침내 그는 ‘’이라고 개명하였다.
여기에서 더욱 그의 과단성 있는 의지를 보겠다.
순경荀卿이라는 이는 일찍이 성인聖人을 친히 만나뵌 적은 없고 한갓 그 글을 읽고 터득하였다.
그렇지만 자사子思맹자孟子 이하는 그 마음속으로 모두 경시하였으니, 만약 그가 자유子游자하子夏와 함께 공자孔子의 문하에 나아갔다면 나는 누가 더 뛰어났을지 알지 못하겠다.
세상의 배우는 자들이 만약 순경荀卿처럼 한다면 학문한다고 이를 만하니 또 여기서 더 나아간다면 누가 그 진보를 막을 수 있겠는가.
내가 이미 정군鄭君이 잘 스스로 선택하여 사모한 것을 가상하게 여기고 이어 그에게 숙희叔希라고 를 지어 주고서 그가 순경처럼 을 완성하기를 권면한다.


역주
역주1 三代 : 儒家에서 古代에 이상적인 정치가 행해졌다고 여겨지는 시대인 夏, 殷, 周를 통칭하여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서는 三代의 마지막인 周나라 말엽을 말하고 있다.
역주2 老子厭周之亂 : 老子는 道家學派의 창시자로, 성은 李, 이름은 耳, 字는 聃이다. 周나라 때 史官을 지냈는데 뒤에 세상이 혼란해지는 것을 보고 은거하여 《道德經》을 저술하였다. 《史記》 〈老莊申韓列傳〉에 “老子는 道德을 닦아 그 학문이 자신을 숨기고 명성을 감추는 데 힘썼다. 오랫동안 周나라에 봉직하였는데 주나라가 쇠망해가는 것을 보고 마침내 떠나갔다.[老子修道德 其學以自隱無名爲務 居周久之 見周之衰 乃遂去]”라고 하였다.
역주3 用其小見 : 韓愈의 〈原道〉에 “老子가 仁義를 하찮게 여긴 것은 인의를 헐뜯은 것이 아니고 그 식견이 작아서였다.[老子之小仁義 非毁之也 其見者小也]”라고 하였다.
역주4 非仁義而詆聖智 : 《道德經》 18장에 “큰 道가 사라지자 仁과 義가 생겨났고 지혜가 나오자 큰 거짓이 생겨났으며 六親이 화합하지 못하자 효도와 자애가 생겨났고 국가가 혼란해지자 충신이 생겨났다.[大道廢 有仁義 慧智出 有大僞 六親不和 有孝慈 國家昏亂 有忠臣]”라고 하였다.
역주5 山淵齊秦堅白異同之論興 : 각종 궤변을 늘어놓는 學派들이 흥기하였다는 말로, 莊子의 相對主義, 齊나라 稷下에서 활동하였던 道家의 ‘精氣’說, 논변을 중시하였던 公孫龍의 ‘離堅白’, 惠施의 ‘合異同’ 등이 있다.
‘山淵齊秦’은 名家의 논제로, 《荀子》 〈不苟〉에 “군자는, 행동은 구차하게 어려운 일 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논설은 구차하게 꼬치꼬치 따지는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며 명성은 구차하게 전해지는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니 오직 그 禮義에 부합하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산과 연못이 평평하고 하늘과 땅이 나란하며 제나라와 진나라가 붙어 있고……이것은 견지하기 어려운 논설인데 惠施와 鄧析이 잘하였다. 그렇지만 군자가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예의에 알맞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君子行不貴苟難 說不貴苟察 名不貴苟傳 唯其當之爲貴……山淵平 天地比 齊秦襲……是說之難持者也 而惠施鄧析能之 然而君子不貴者 非禮義之中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역주6 荀卿子 : 바로 荀子이다. 趙나라 사람으로, 학식이 넓고 변설이 뛰어났다. 젊은 시절에 齊나라 稷下에서 강학하였는데, 여기서 세 번 祭酒가 되었고, 서쪽으로 秦나라에 들어가 유세하였으며 趙나라에서 軍事를 논하였다. 또 두 차례 楚나라에서 蘭陵令이 되었는데, 만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蘭陵에 거처하면서 저술에 종사하였다. 《荀子》 20권 32篇이 전한다.
순자는 儒家로 자처하여 孔子를 推崇하였다. 다만 그는 諸子 학설의 精髓를 흡수하는 한편, 儒家의 불합리한 부분들을 폐기하여, 儒家를 위주로 諸子를 총합한 先秦시대 철학의 집대성자라고 할 수 있다.
역주7 勸學 : 荀子는 〈勸學〉을 지었는데, 늘 사람들이 배움에 힘쓸 것을 면려하였다.
역주8 楚人 : 荀子는 본래 趙나라 사람인데 뒤에 楚나라의 春申君이 蘭陵令으로 삼았기에 마침내 난릉에서 살았다. 그래서 구양수가 초나라 사람이라고 한 것이다.
역주9 漢諸大儒賈生司馬遷之徒 : 賈生은 賈誼로, 洛陽 사람이다. 漢 文帝 초엽에 博士가 되었고 얼마 있다 太中大夫로 승진하였다. 뒤에 貶謫되어 長沙王의 太傅가 되었는데, 유배 가는 길에 湘水를 지나면서 賦를 지어 屈原을 조문하여 뜻을 펴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암시하였다. 뒤에 梁懷王의 太傅가 되었는데 양회왕이 말에서 떨어져 죽자 그는 울울한 심정에 애를 끓이다 오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司馬遷은 字가 子長으로, 夏陽 사람이다. 西漢의 史學家로 《史記》를 지었다.
역주10 滎陽 : 河南省 鄭州에 속하는 郡名이다.
역주11 自子思孟子已下 意皆輕之 : 《荀子》 〈非十二子〉에 “先王을 대략 본받으면서 그 紀綱을 알지 못하는데도 오히려 재주가 많고 포부가 크며 견문이 雜博하여 옛 일을 살펴 학설을 만들어내고는 五行이라고 말한다. 매우 편벽되고 어그러져 법도가 없으며 덮여 있고 막혀 있는데도 해설함이 없이 그 말을 꾸미고 추존하면서 ‘이것이 참으로 선군자 孔子의 말씀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子思가 唱導하고 孟軻가 和答한 것이다. 그런데도 세속의 우둔한 자들은 시끄럽게 떠들면서 그 잘못된 바를 알지 못하고 마침내 받아들이고 전하면서 仲尼와 子游가 이들에 의해 후세에 존중받게 되었다고 여기니 이것은 子思와 孟軻의 죄이다.[略法先王而不知其統 猶然而材劇志大 聞見雜博 案往舊造說 謂之五行 甚僻違而無類 幽隱而無說 閉約而無解 案飾其辭而祗敬之曰 此眞先君子之言也 子思唱之 孟軻和之 世俗之溝猶瞀儒 嚾嚾然不知其所非也 遂受而傳之 以爲仲尼子游爲玆厚於後世 是則子思孟軻之罪也]”라고 하여, 荀子는 子思와 孟子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역주12 游夏 : 孔子의 제자 子游와 子夏를 말한다. 《論語》 〈先進〉에 “文學에는 子游와 子夏가 있다.”라고 하였는데, 이후로 두 사람을 병칭하게 되었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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