注
吳越世序錢王初起處는 有生色이로되 及錢王略地立國處하야는 不足觀覽이니 豈吳越王無他大略耶아 抑亦史官亡之耶아 予는 吳人也라 錄之하야 見其創迹云이라
錢鏐
는 字
가 具美
니 杭州
人也
라 臨安里中有大木
한대 鏐幼時
에 與群兒戲木下
할새 鏐坐大石
하야 指麾群兒爲隊伍
하야 號令頗有法
하니 群兒皆憚之
라 及壯
에 無賴
하야 不喜事生業
하고 以販鹽爲盜
라
縣錄事鍾起有子數人
하야 與鏐飮博
이어늘 起嘗禁其諸子
하되 諸子多竊從之遊
라 豫章人有善術者
가 望牛斗間有王氣
하니 라 因遊錢塘
하야 占之在臨安
일새 乃之臨安
하야 以相法隱市中
하야 陰求其人
이라
起與術者善이러니 術者私謂起曰 占君縣有貴人이어늘 求之市中不可得이라 視君之相하니 貴矣라 然不足當之라하다 起乃爲置酒하고 悉召縣中賢豪爲會하야 陰令術者徧視之하니 皆不足當이라
術者
起家
할새 鏐適從外來
라가 見起
하고 反走
어늘 術者望見之
하고 大驚曰 此眞貴人也
라하야늘 起笑曰 此吾旁舍錢生爾
라하다
術者召鏐하야 至에 熟視之하고 顧起曰 君之貴者는 因此人也라하고 乃慰鏐曰 子骨法非常하니 願自愛라하고 因與起訣曰 吾求其人者는 非有所欲也오 直欲質吾術爾라하고 明日乃去하다 起始縱其子等하야 與鏐遊하고 時時貸其窮乏하다
鏐善射與槊
하고 稍通圖緯諸書
라 唐乾符二年
에 浙西裨將王郢作亂
한대 將
募鄕兵討賊
하고 表鏐偏將
하야 擊郢破之
라 是時
에 黃巢衆已數千
이어늘 攻掠浙東
하야 至臨安
한대
鏐曰 今鎭兵少而賊兵多하니 難以力禦라 宜出奇兵邀之라하고 乃與勁卒二十人伏山谷中한대 巢先鋒度險皆單騎일새 鏐伏弩射殺其將하니 巢兵亂이어늘 鏐引勁卒蹂之하야 斬首數百級이라
鏐曰 此可一用爾니 若大衆至면 何可敵邪리오하고 乃引兵趨八百里하니 八百里는 地名也라 告道旁媪曰 後有問者어든 告曰 臨安兵이 屯八百里矣라하라하다
巢衆至하야 聞媪語하고 不知其地名하고 皆曰 嚮十餘卒도 不可敵이어든 況八百里乎아하고 遂急引兵過하다
都統高駢聞巢不敢犯臨安하고 壯之하야 召董昌與鏐라 俱至廣陵이러니 久之에 駢無討賊意라 昌等不見用하야 辭還하니 駢表昌杭州刺史하다 是時에 天下已亂이라 昌乃團諸縣兵爲八都하고 以鏐爲都指揮使하고 成及爲靖江都將하다
中和二年
에 觀察使劉漢宏
이 與昌有隙
이라 漢宏遣其弟漢宥都虞候辛約
하야 屯兵西陵
이라 鏐率八都兵渡江
하야 竊敵軍號
하야 斫其營
한대 營中驚擾
라 因焚之
하니 漢宥等皆走
하다
漢宏復遣將黃珪何肅屯
한대 鏐皆攻破之
라 與漢宏遇
하야 戰
에 大敗之
하고 殺何肅辛約
이라 漢宏易服持膾刀以遁
이어늘 追者及之
하니 漢宏曰 我
는 宰夫也
라하고 擧刀視之
하야 乃免
하다
四年
에 僖宗遣中使焦居璠爲杭越通和使
하야 詔昌及漢宏罷兵
이어늘 皆不奉詔
라 漢宏遣其將朱褒韓公玫施堅實等以舟兵屯
라
鏐出
하고 成及夜率奇兵
하야 破褒等於
하고 進屯
하니 施堅實等降
이라 遂攻破越州
라
漢宏走
한대 台州刺史執漢宏
하야 送於鏐
하니 斬于會稽
하고 族其家
하다 鏐乃奏昌代漢宏
하고 而自居杭州
하다
三年
에 拜鏐左衛大將軍杭州刺史
하고 昌越州觀察使
하다 是歲
에 畢師鐸囚高駢
하니 淮南大亂
이라 將徐約攻取蘇州
하다
潤州
劉浩逐其帥周寶
어늘 寶奔常州
하니 浩
度支催勘官薛朗爲帥
라 鏐遣都將成及杜稜等攻常州
하야 取周寶以歸
하니 鏐具軍禮郊迎
하고 館寶于
하다
에 稜等進攻潤州
하야 逐劉浩
하고 執薛朗
하야 剖其心以祭寶
하다 然後遣其弟銶攻徐約
하니 約敗走入海
어늘 追殺之
하다
昭宗拜鏐杭州防禦使
하다 是時
에 楊行密
爭淮南
하야 與鏐戰蘇常間
이러니 久之
에 儒爲行密所殺
이라 行密據淮南
하야 取潤州
하고 而鏐亦取蘇常
하다
唐升越州威勝軍하야 以董昌爲節度使하야 封隴西郡王하고 杭州武威軍하야 拜鏐都團練使하고 以成及爲副使하다
及은 字弘濟니 與鏐同事攻討하야 謀多出於及이어늘 而鏐以女妻及子仁琇라 鏐乃以杜稜阮結顧全武等爲將校하고 沈崧皮光業林鼎羅隱爲賓客하다
二年
에 拜鏐鎭海軍節度使潤州刺史
하고 乾寧元年
에 加同中書門下平章事
하다 二年
에 越州董昌反
이라
昌素愚
하야 不能決事
하야 臨民訟
에 以
擲之而勝者爲直
이라 妖人應智王溫巫韓媪等
이 以妖言惑昌
하야 獻鳥獸爲
라
牙將倪德儒謂昌曰 曩時謠言
에 有羅平鳥主越人禍福
하야 民間多圖其形
하야 禱祀之
러니 視王書名與圖類
라하고 因出圖以示昌
하니 昌大悅
하야 乃自稱皇帝
하고 國號羅平
하며 하고 分其兵爲兩軍
하야 中軍衣黃
하고 外軍衣白
하야 銘其衣曰歸義
라
副使黃竭切
昌以爲不可
어늘 昌大怒
하야 使人斬竭
하고 持其首至
하야 罵曰 此賊負我
로다 好聖明時
에 三公不肯作
하고 乃自求死耶
아하고 投之
中
하다
昌復拒命하고 遣其將陳都崔溫等屯香嚴石侯하고 乞兵於楊行密하니 行密遣安仁義救昌이라 鏐遣顧全武攻昌하야 斬崔溫이라
昌所用諸將徐珣湯臼袁邠等은 皆庸人이라 不知兵하야 遇全武輒敗로되 昌兄子眞이 驍勇善戰일새 全武等攻之하야 逾年不能克이라 眞與其裨將刺羽有隙일새 刺羽譖之라 昌殺眞하니 兵乃敗라
全武執昌歸杭州
하야 行至
에 昌顧其左右曰 吾與錢公俱起鄕里
하야 吾嘗爲大將
이러니 今何面目
으로 復見之乎
아하니 左右相對泣下
라 因瞋目大呼
하고 投水死
하다
昭宗以宰相王溥鎭越州
하니 溥請授鏐
라 乃改威勝軍爲鎭東軍
하고 拜鏐鎭海鎭東軍節度使
하고 加檢校太尉中書令
하고 賜
하야 恕九死
하다 鏐如越州受命
하고 還治錢塘
하야 號越州爲東府
하다
光化元年에 移鎭海軍於杭州하고 加鏐檢校太師하고 改鏐鄕里曰廣義鄕 勳貴里하고 鏐素所居營曰衣錦營하다 婺州刺史王壇이 叛附于淮南이어늘 楊行密遣其將康儒應壇하야 因攻睦州라 鏐遣其弟銶敗儒於軒渚하니 壇奔宣州라
昭宗詔鏐圖形
하고 升衣錦營爲衣錦城
하고 石鑑山曰衣錦山
하고 大官山曰功臣山
하다 鏐遊衣錦城
하야 宴故老
할새 山林皆覆以錦
하고 號其幼所嘗戲大木曰衣錦將軍
이라하다
天復二年
에 封鏐越王
하다 鏐巡衣錦城
할새 武勇右都指揮使徐綰與左都指揮使許再思叛
하야 焚掠城郭
하고 攻內城
한대 及
陳爲等
이 閉門拒之
라
鏐歸
하야 至北郭門不得入
한대 하야 斬首百餘級
하니 綰屯龍興寺
라
鏐微服踰城而入하야 遣馬綽王榮杜建徽等分屯諸門하고 使顧全武備東府하니 全武曰 東府不足慮요 可慮者淮南爾니이다 綰急이면 必召淮兵하리니 淮兵至면 患不細矣니이다 楊公은 大丈夫니 今以難告면 必能閔我라하니 鏐以爲然하다
全武曰 獨行이면 事必不濟리니 請擇諸公子可行者라하니 鏐曰 吾嘗欲以元璙婚楊氏라하고 乃使隨全武如廣陵하다 綰果召田頵於宣州라
全武等至廣陵하니 行密以女妻元璙하고 亟召頵還한대 頵取鏐錢百萬하고 質鏐子元瓘而歸하다
天祐元年에 封鏐吳王하다 鏐建功臣堂하고 立碑紀功하야 列賓佐將校名氏於碑陰者五百人하다 四年에 升衣錦城爲安國衣錦軍하다
梁太祖卽位
에 封鏐吳越王兼淮南節度使
하다 客有勸鏐拒梁命者
어늘 鏐笑曰 吾豈失爲
邪
리오하고 遂受之
하다
太祖嘗問吳越進奏吏曰 錢鏐平生有所好乎아하니 吏曰 好玉帶名馬라하야늘 太祖笑曰 眞英雄也라하고 乃以玉帶一匣打毬御馬十匹賜之하다
하야 信州危仔倡奔於鏐
하니 鏐惡其姓
하야 改曰元
하다
二年
에 加鏐守中書令
하고 改臨安縣爲安國縣
하고 廣義鄕爲衣錦鄕
하다
三年
에 加守太保
라 한대 鏐遣其弟鋸鏢救之
라 淮兵爲水栅環城
하고 以銅鈴繫網
하야 沈水中
하야 斷潛行者
라
水軍卒司馬福이 多智而善水行일새 乃先以巨竹觸網하니 淮人聞鈴聲하고 遂擧網한대 福乃過하야 入城中하고 其出也에 亦然이라
乃取其軍號하야 內外夾攻에 號令相應하니 淮人以爲神이라 遂大敗之하다 本等走어늘 擒其將閭丘直何明等하다
四年
에 鏐游衣錦軍
하야 作還鄕歌曰
還鄕兮掛錦衣
하니 父老遠來相追隨
로다 無孛人無欺
하니 吳越一王駟馬歸
라하다
元年
에 加鏐守尙書令兼淮南宣潤等道四面行營都統
하고 立
於衣錦軍
이라 鏐弟鏢居湖州
러니 擅殺戍將潘長
하고 懼罪
하야 奔于淮南
하다
二年
에 梁郢王友珪立
하야 冊尊鏐尙父
하다 末帝貞明三年
에 加鏐天下兵馬都元帥
하고 하다 四年
에 取
州
하니 鏐始由海路
하야 入貢京師
하다 龍德元年
에 賜鏐詔書不名
하다
唐莊宗入洛
에 鏐遣使貢獻
하고 求
이라 莊宗下其議於有司
하니 群臣皆以謂非天子
면 不得用玉冊
이라하고 라 旣而許之
하고
乃賜鏐玉冊金印이라 鏐因以鎭海等軍節度로 授其子元瓘하고 自稱吳越國王하고 更名所居曰宮殿 府曰朝하고 官屬皆稱臣하고 起玉冊金券詔書三樓於衣錦軍하고 遣使冊新羅渤海王하고 海中諸國에 皆封拜其君長하다
元瓘等遣人以絹表間道自陳
이러니 安重誨死
에 明宗乃復鏐官爵
하다 三年
에 鏐卒
하니 年八十一
이라 諡曰武肅
이라 子元瓘立
하다
嗚呼라 天人之際는 爲難言也라 非徒自古術者好奇而幸中이라 至於英豪草竊하야도 亦多自託於妖祥하니 豈其欺惑愚衆에 有以用之歟아
蓋其興也
에 非有功德積漸之勤
이요 而黥髡盜販
이 倔起於王侯
어늘 而人亦樂爲之傳歟
아 考錢氏之終始
컨대 非有德澤施及一方
이요 而
에 虐用其人甚矣
니 其動于氣象者
가 豈非其孽歟
아
是時에 四海分裂하야 不勝其暴나 又豈皆然歟리오 是皆無所得而推歟아 術者之言은 不中者多而中者少어늘 而人特喜道其中者歟인저
귀안歸安 녹문鹿門 모곤茅坤 비평批評
손남孫男 암숙闇叔 모저茅著 중정重訂
注
오월吳越의 세계世系와 전왕錢王이 처음 일어난 부분은 생동하는 형상이 있지만 전왕錢王이 땅을 빼앗아 나라를 세운 부분에서는 족히 볼 것이 없으니 어쩌면 오월왕吳越王이 별다른 원대遠大한 모략謀略이 없어서인가? 아니면 사관史官이 이 부분을 빠뜨려서인가? 나는 오인吳人인지라 이를 수록하여 그 처음의 자취를 드러낸다.
전류錢鏐는 자字가 구미具美니 항주杭州 임안臨安 사람이다. 임안臨安의 마을에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전류가 어린 시절 아이들과 그 나무 아래에서 놀 적에 전류는 큰 바위에 앉아 있으면서 아이들이 대오隊伍를 이루도록 지휘指麾하여 호령號令이 자못 법도가 있으니 아이들이 모두 그를 두려워하였다. 장성하여 하는 일 없이 지내며 생업生業에 종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소금을 몰래 파는 일로 도적이 되었다.
임안현臨安縣의
녹사錄事 종기鍾起에게 아들 몇 명이 있어
전류錢鏐와 함께 술과 도박에 빠져 지냈는데, 종기가 자신의 아들들에게 금지하였는데도 아들들이 몰래 그를 따라 노는 일이 많았다.
예장豫章 사람으로
방술方術을 잘하는 이가
우성牛星과
두성斗星 사이에
왕기王氣가 서려 있는 것을 보았으니
우수牛宿와
두수斗宿는
전당錢塘의
분야分野에 해당한다. 이로 인해 전당 지방으로 가서 점을 치자
왕기王氣가
임안臨安에 있기에 이에 임안으로 가서 저자에 숨어 지내면서
관상술觀相術로 몰래 그 사람을 찾았다.
전류錢鏐
종기가 이 술자術者와 친하게 지냈는데 술자가 둘만 있을 때 종기에게 이르기를, “그대의 현縣에 귀인貴人이 있음을 점쳐 알았는데 저자에서 찾아보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그대의 상相을 보니 귀인의 상相이다. 그렇지만 왕자王者에 해당하기에는 부족하다.”라고 하였다. 종기가 이에 술자리를 마련하고 현縣에 사는 현사賢士와 호걸豪傑을 모두 불러 모임을 갖고서 몰래 술자에게 두루 살펴보게 하였는데 모두 왕자에 해당하기에는 부족하였다.
술자가 종기의 집을 들렀을 때 전류가 마침 밖에서 찾아왔다가 종기를 보고는 몸을 돌려 달아나자 술자가 그를 바라보고 크게 놀라 말하기를, “이 사람이 참으로 귀인이다.”라고 하였는데 종기가 웃으며 말하기를, “이 사람은 우리 옆집의 전생錢生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술자가 전류를 불러 그가 오자 자세하게 살펴보고 종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그대가 귀하게 되는 것은 이 사람 때문일 것이다.”라고 하고 나서 전류를 위로하기를, “너의 골상骨相이 범상치 않으니 부디 자중자애自重自愛하거라.”라고 하고 이어 종기와 작별하며 말하기를, “내가 이 사람을 찾은 것은 바라는 바가 있어서가 아니고 다만 나의 방술을 증명하고 싶어서였을 뿐이다.”라고 하고 이튿날 바로 떠났다. 종기가 그제야 아들들을 전류와 놀게 내버려 두고 이따금 전류가 궁핍窮乏할 때면 도와주었다.
전류錢鏐는 활과 창을 잘 다루었고 각종 도참圖讖과 위서緯書를 대략 통달하였다. 당唐 건부乾符 2년(875)에 절서浙西의 비장裨將 왕영王郢이 반란을 일으키자 석감진石鑑鎭의 진장鎭將 동창董昌이 향병鄕兵을 모집하여 적賊을 토벌하고 표주表奏하여 전류를 편장偏將으로 삼아 왕영을 격파擊破하였다. 이때에 황소黃巢의 무리가 이미 수천 명이었는데 절동浙東을 공략攻掠하여 임안臨安에 이르렀다.
그러자 전류가 말하기를, “지금 진병鎭兵은 적고 적병賊兵은 많으니 힘으로 막기 어렵습니다. 기병奇兵을 내어 대적해야 합니다.”라고 하고서 정예병 20명과 함께 산곡山谷에서 매복하였다. 황소의 선봉대先鋒隊가 험한 곳을 지나갈 때 길이 좁아 모두 기병 한 명씩 가기에 전류가 매복해 두었던 궁노수弓弩手들이 쇠뇌로 그 장수들을 사살射殺하니 황소의 병졸들이 혼란해지거늘 전류가 정예병을 이끌고 그들을 유린하여 수급首級 수백을 베었다.
전류가 말하기를, “이 방법은 한 번만 쓸 수 있을 뿐이니 만약 대군大軍이 이르면 어떻게 대적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서 군대를 이끌고 팔백리八百里로 가니 팔백리는 지명地名이었다. 길가의 노파老婆에게 말하기를, “뒤에 묻는 자가 있거든 그에게 임안의 군대가 팔백리에 진을 쳤다고 고하라.”라고 하였다.
황소의 무리가 이르러 노파의 말을 듣고 팔백리가 지명인 것은 모르고 모두 말하기를, “지난번에 10여 명 군졸도 대적하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팔백리에 진을 친 군사임에랴!”라고 하고 마침내 급히 군대를 이끌고 지나갔다.
도통都統 고변高駢이 황소가 감히 임안을 침범하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 장하게 여겨 동창과 전류를 불렀다. 함께 광릉廣陵에 갔는데 오래 지나도 고병이 적賊을 토벌하려는 뜻이 없는지라 동창 등이 쓰이지 못하여 하직하고 돌아오니 고병이 표주表奏하여 동창을 항주자사杭州刺史로 삼았다. 이때에 천하天下가 이미 혼란하니 동창이 이에 각 현縣의 병사들을 모아 팔도八都를 만들고서 전류를 도지휘사都指揮使로 삼고 성급成及을 정강도장靖江都將으로 삼았다.
중화中和 2년(882)에 월주관찰사越州觀察使 유한굉劉漢宏이 동창董昌과 사이가 좋지 않았기에 유한굉이 자기 아우 유한유劉漢宥, 도우후都虞候 신약辛約을 보내 서릉西陵에 군대를 주둔하였다. 전류錢鏐가 팔도八都의 군대를 거느리고 강江을 건너 적병敵兵의 군호軍號를 훔쳐 그 군영軍營을 부수자 군영 안이 놀라고 소란해 졌는데 이 틈을 타서 군영을 불지르니 유한유 등이 모두 달아났다.
유한굉이 다시 장수 황규黃珪, 하숙何肅을 보내 제기諸曁, 소산蕭山에 주둔하자 전류가 모두 공격하여 무찔렀다. 그리고는 유한굉과 만나 전투하여 크게 패배시키고 하숙과 신약을 죽였다. 유한굉이 옷을 바꿔 입고 회칼을 가지고 달아났는데 추격병이 그를 따라잡으니 유한굉이 말하기를, “저는 백정입니다.”라고 하고 회칼을 들어 보여주고서야 벗어났다.
중화中和 4년(884)에 희종僖宗이 중사中使 초거번焦居璠을 보내 항월통화사杭越通和使로 삼아 동창董昌 및 유한굉劉漢宏에게 군대를 물리라고 조서詔書로 명하였는데 모두 조명詔命을 받들지 않았다. 유한굉이 자기 장수 주포朱褒, 한공매韓公玫, 시견실施堅實 등을 보내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망해望海에 주둔하였다.
전류錢鏐가 평수平水에 출병하고 성급成及이 밤에 기병奇兵을 거느리고서 주포 등을 조아태曹娥埭에서 격파하고 진군하여 풍산豐山에 주둔하자 시견실 등이 항복하니 마침내 월주越州를 격파하였다.
유한굉이 태주台州로 달아나자 태주자사台州刺史가 유한굉을 잡아 전류에게 보내니 회계會稽에서 참수斬首하고 멸족滅族시켰다. 전류가 이에 표주表奏하여 동창으로 유한굉을 대신하게 하고 자신은 항주杭州에 머물렀다.
광계光啓 3년(887)에 전류錢鏐를 좌위대장군左衛大將軍 항주자사杭州刺史에 임명하고 동창董昌을 월주관찰사越州觀察使에 임명하였다. 이해에 필사탁畢師鐸이 고변高駢을 감옥에 가두니 회남淮南이 크게 혼란해졌다. 이에 육합진六合鎭의 장수 서약徐約이 소주蘇州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윤주潤州의 아장牙將 유호劉浩가 그 주수主帥 주보周寶를 쫓아내자 주보가 상주常州로 달아나니 유호가 도지최감관度支催勘官 설랑薛朗을 추대하여 주수主帥로 삼았다. 전류가 도장都將 성급成及, 두릉杜稜 등을 보내 상주를 공격하여 주보를 잡아 돌아오니 전류가 군례軍禮를 갖추어 교외郊外에서 영접하고 주보를 장정樟亭에 머물게 하였다.
주보가 병으로 죽자 두릉 등이 진군하여 윤주를 공격하여 유호를 몰아내고 설랑을 잡고는 그 심장을 도려내어 주보에게 제사 지냈다. 그런 뒤에 전류는 자기 아우 전구錢銶를 보내 서약을 공격하니 서약이 패주敗走하여 해도海島로 들어갔는데 추격하여 죽였다.
소종昭宗이 전류錢鏐를 항주방어사杭州防禦使에 임명하였다. 이때에 양행밀楊行密과 손유孫儒가 회남淮南을 쟁탈爭奪하면서 전류와 소주蘇州, 상주常州 지역에서 전투하였는데 오래 지나 손유가 양행밀에게 살해당하였다. 양행밀이 회남을 점거하고서 윤주潤州를 차지하였고 전류 역시 소주, 상주를 차지하였다.
당唐나라가 월주를 위승군威勝軍으로 승격昇格하고서 동창董昌을 절도사節度使로 삼고 농서군왕隴西郡王에 봉하였고, 항주를 무위군武威軍으로 승격昇格하고서 전류를 도단련사都團練使로 삼고 성급成及을 도단련부사都團練副使로 삼았다.
성급은 자字가 홍제弘濟니 전류와 전투하고 토벌하는 일을 함께하며 전략戰略이 성급에게서 나온 경우가 많았는데, 전류가 자기 여식女息을 성급의 아들 성인수成仁琇에게 시집보냈다. 전류가 이에 두릉杜稜, 원결阮結, 고전무顧全武 등을 장교將校로 삼고 심숭沈崧, 피광업皮光業, 임정林鼎, 나은羅隱을 빈객賓客으로 삼았다.
경복景福 2년(893)에 전류錢鏐를 진해군절도사鎭海軍節度使 윤주자사潤州刺史에 임명하였다. 건녕乾寧 원년元年(894)에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를 더하였다. 건녕乾寧 2년(895)에 월주越州의 동창董昌이 배반하였다.
동창은 평소 어리석어 일을 결단決斷하지 못하여 백성의 송사訟事를 처리할 때 골패骨牌를 던져 이긴 자를 옳다고 판정하였다. 요인妖人 응지應智, 왕온王溫과 무격巫覡 한오韓媪 등이 요언妖言으로 동창을 미혹迷惑하여 조수鳥獸를 바쳐 부서符瑞라고 하였다.
아장牙將 예덕유倪德儒가 동창에게 이르기를, “예전 요언謠言에 나평조羅平鳥라는 새가 월인越人의 화복禍福을 주관主管한다는 말이 있어 민간民間에서 많이들 그 형상을 그려 기도하고 제사하였는데 왕께서 이름을 쓰신 것을 보니 그 그림과 비슷합니다.”라고 하고 이를 인하여 그림을 꺼내 동창에게 보이니 동창이 크게 기뻐하여 이에 황제皇帝를 자칭自稱하고 국호國號를 나평羅平이라고 하며 순천順天으로 개원改元하고 그 군대를 양군兩軍으로 나누어 중군中軍은 황색黃色 옷을 입고 외군外軍은 백색白色 옷을 입고서 그 옷에 귀의歸義라는 글자를 새겼다.
부사副使 황갈黃竭이 동창에게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간절하게 경계하였는데 동창이 크게 노하여 사람을 시켜 황갈을 참수斬首하고 그 머리를 가져 오게 하고서 꾸짖기를, “이 적인賊人이 나를 저버렸도다. 성명聖明한 좋은 시절에 삼공三公이 되려고는 하지 않고 도리어 스스로 죽기를 구한단 말이냐!”라고 하고 그 머리를 측간에 던져버렸다.
동창董昌이 이에 서신으로 이 사실을 전류錢鏐에게 알리니 전류가 동창이 배반한 정상情狀을 보고하였다. 소종昭宗이 조명詔命을 내려 동창의 관작官爵을 삭탈削奪하고 전류를 팽성군왕彭城郡王에 봉하고 절강동도초토사浙江東道招討使에 임명하였다. 전류가 말하기를, “동씨董氏가 우리에게 은혜가 있으니 대뜸 토벌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고서 군대 3만 명을 거느리고 영은문迎恩門에 주둔하고서 그 문객門客 심방沈滂을 보내 동창을 타일러서 잘못을 뉘우치게 하였다. 그러자 동창이 200만萬 전錢을 가지고 군대를 호궤犒饋하고 응지應智 등을 잡아 전류의 군중軍中에 보내고서 대죄待罪하기를 자청自請하니 전류가 이에 군대를 돌렸다.
그런데 동창이 다시 명을 거역하고 자기 장수 진도陳都, 최온崔溫 등을 보내 향엄香嚴, 석후石侯에 주둔하고 양행밀楊行密에게 원군을 청하니 양행밀이 안인의安仁義를 보내 동창을 구원하였다. 그러자 전류는 고전무顧全武를 보내 동창을 공격하여 최온을 참수斬首하였다.
동창이 임용한 장수들인 서순徐珣, 탕구湯臼, 원빈袁邠 등은 모두 용렬한 사람이라 용병用兵하는 법을 알지 못하여 고전무를 맞닥뜨릴 때마다 패하였으나 동창의 조카 동진董眞이 용맹하고 전투를 잘하므로 고전무 등이 그를 공격하여 해를 넘기도록 이기지 못하였다. 동진이 자기 비장裨將 자우刺羽와 사이가 좋지 않기에 자우가 그를 참소하였다. 동창이 동진을 죽이니 동창의 군대가 그제야 패배하였다.
고전무가 동창을 잡아 항주杭州로 돌아가 행군하여 서소강西小江에 이르렀을 때 동창이 좌우左右의 수하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내가 전공錢公과 함께 향리鄕里에서 일어나 내가 일찍이 대장大將이 되었었는데 지금 무슨 면목面目으로 다시 그를 본단 말인가!”라고 하니 좌우左右의 수하들이 서로 마주보며 눈물을 흘렸다. 동창이 이에 눈을 부릅뜨고 크게 소리치고는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소종昭宗이 재상宰相 왕보王溥에게 월주越州를 진수鎭守하게 하니 왕부가 전류에게 제수除授해 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위승군威勝軍을 진동군鎭東軍으로 고치고 전류를 진해군절도사鎭海軍節度使 및 진동군절도사鎭東軍節度使에 임명하고 검교태위檢校太尉 중서령中書令을 더하고 철권鐵券을 하사下賜하여 아홉 번 사죄死罪를 사면赦免해주도록 하였다. 전류가 월주에 가서 조명詔命을 받고는 돌아와 전당錢塘을 다스리면서 월주를 동부東府라고 불렀다.
광화光化 원년元年(898)에 진해군을 항주杭州로 옮기고 전류에게 검교태사檢校太師를 더하고 전류의 향리鄕里를 광의향廣義鄕 훈귀리勳貴里라고 고쳐 부르고 전류가 평소 지내는 군영을 의금영衣錦營이라고 하였다. 무주자사婺州刺史 왕단王壇이 배반하여 회남淮南에 붙으니 양행밀楊行密이 자기 장수 강유康儒를 보내 왕단에게 호응하여 이를 인하여 목주睦州를 공격하였다. 전류가 자기 아우 전구錢銶를 보내 강유를 헌저軒渚에서 패배시키니 왕단이 선주宣州로 달아났다.
소종이 조명詔命을 내려 능연각凌烟閣에 전류의 초상을 그리도록 하고 의금영을 승격하여 의금성衣錦城으로 삼고 석감산石鑑山을 의금산衣錦山이라고 하고 대관산大官山을 공신산功臣山이라고 하였다. 전류가 의금성에서 노닐면서 고향 노인들에게 잔치를 베풀 때 산림山林을 모두 비단으로 덮었고 어린 시절 일찍이 놀았던 큰 나무를 의금장군衣錦將軍이라고 불렀다.
천복天復 2년(902)에 전류錢鏐를 월왕越王에 봉하였다. 전류가 의금성衣錦城을 순행巡行할 때 무용우도지휘사武勇右都指揮使 서관徐綰과 좌도지휘사左都指揮使 허재사許再思가 배반하여 성곽城郭에 불을 지르고 노략질하고 내성內城을 공격하자 전류의 아들 전전영錢傳瑛 및 그 장수 마작馬綽, 진위陳爲 등이 문을 닫고 저항하였다.
전류가 돌아와 북곽문北郭門에 이르러 들어가지 못하자 성급成及이 전류를 대신하여 서관과 싸워 백여 명의 수급首級을 베니 서관이 용흥사龍興寺에 진을 쳤다.
전류가 미복微服을 입고 성을 넘어 들어가 마작, 왕영王榮, 두건휘杜建徽 등을 보내 각 성문을 나누어 지키도록 하고 고전무顧全武에게 동부東府를 방비防備하도록 하니 고전무가 말하기를, “동부는 염려할 것이 없고 우려되는 것은 회남淮南일 뿐입니다. 서관이 다급해지면 반드시 회남의 군대를 부를 것이니 회남의 군대가 오면 작은 걱정거리가 아닐 것입니다. 양공楊公(양행밀楊行密)은 대장부大丈夫니 지금 난처한 사정을 이야기하면 반드시 우리를 불쌍히 여길 것입니다.”라고 하니, 전류가 그의 말을 옳게 여겼다.
고전무가 말하기를, “혼자 가면 일이 반드시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니 청컨대 공자公子들 가운데 함께 갈 만한 분을 택하소서.”라고 하니 전류가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원료元璙를 양씨楊氏와 혼인을 맺게 하고 싶었다.”라고 하고서 전원료錢元璙에게 고전무를 따라 광릉廣陵에 가게 하였다. 서관이 과연 선주宣州에서 전군田頵을 불렀다.
고전무 등이 광릉에 이르니 양행밀楊行密이 여식女息을 전원료에게 시집보내고 급히 전군을 소환召還하였는데 전군이 전류의 100만萬 전錢을 취하고 전류의 아들 전원관錢元瓘을 인질로 잡아 돌아갔다.
천우天祐 원년元年(904)에 전류錢鏐를 오왕吳王에 봉하였다. 전류가 공신당功臣堂을 세우고 비석을 세워 공훈功勳을 기록하여 막료幕僚와 관리官吏, 장교將校의 성명姓名을 비석 뒷면에 새긴 것이 5백 명이었다. 천우天祐 4년(907)에 의금성衣錦城을 승격하여 안국의금군安國衣錦軍으로 삼았다.
양梁 태조太祖가 즉위하자 전류를 오월왕吳越王에 봉하고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를 겸하게 하였다. 문객門客 가운데 전류에게 양나라의 명을 거절하라고 한 자가 있었는데 전류가 웃으며 말하기를, “내 어찌 손중모孫仲謀가 되는 데 문제가 있겠느냐.”라고 하고 마침내 임명을 받아들였다.
태조가 일찍이 오월吳越의 진주리進奏吏에게 묻기를, “전류가 평소 좋아하는 것이 있느냐?”라고 하니 진주리가 아뢰기를, “옥대玉帶와 명마名馬를 좋아합니다.”라고 하였는데 태조가 웃으며 말하기를, “참으로 영웅英雄이로다.”라고 하고서 옥대玉帶 1갑匣과 격구할 때 타는 어마御馬 10필匹을 하사하였다.
강서江西의 위전풍危全諷 등이 양악楊渥에게 패배하여 신주信州 위자창危仔倡이 전류에게 달아나니 전류가 그의 성姓을 싫어하여 원元으로 고쳤다.
개평開平 2년(908)에 전류에게
수중서령守中書令을 더하고
임안현臨安縣을 고쳐
안국현安國縣으로 삼고
광의향廣義鄕을 고쳐
의금향衣錦鄕으로 삼았다.
후량後梁 태조太祖
개평開平 3년(909)에 수태보守太保를 더하였다. 양악楊渥의 장수 주본周本, 진장陳章이 소주蘇州를 포위하자 전류錢鏐가 자기 아우 전거錢鋸, 전표錢鏢를 보내 구원하였다. 회남淮南의 군대가 수책水栅을 만들어 성을 포위하고 구리 방울을 그물에 달아 물속에 가라앉혀 잠수하여 성 안으로 들어가는 자들을 막았다.
수군水軍 병졸 사마복司馬福이 꾀가 많고 수영水泳을 잘하였기에 이에 먼저 큰 대나무를 가지고 그물을 건드리니 회남淮南 군사들이 방울 소리를 듣고 마침내 그물을 들어올리자 사마복이 이 틈을 타 잠수하여 그물 있는 곳을 지나 성중城中에 들어갔고, 나올 때에도 그렇게 하였다.
그렇게 해서 성중城中의 군호軍號를 알아내어 내외內外에서 협공夾攻하면서 호령號令이 서로 호응하니 회남淮南 군사들이 귀신같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마침내 회남淮南 군대를 크게 패배시켰다. 주본 등이 달아나자 그 장수 여구직閭丘直, 하명何明 등을 사로잡았다.
개평開平 4년(910)에 전류錢鏐가 의금군衣錦軍에 가서 〈환향가還鄕歌〉를 지어 노래하기를, “삼진절도사三鎭節度使로 고향에 돌아올 때 금의錦衣를 걸치니 부로父老들이 멀리 나와 서로 뒤따르도다. 두수斗宿와 우수牛宿 사이 살별이 없고 인간 세상에 속이는 이 없으니 오월吳越의 한 왕이 사마駟馬 타고 돌아가네.”라고 하였다.
건화乾化 원년元年(911)에 전류에게 수상서령守尙書令 겸회남선륜등도사면행영도통兼淮南宣潤等道四面行營都統을 더하고 의금군衣錦軍에 생사生祠를 세웠다. 전류의 아우 전표錢鏢가 호주湖州에 있었는데 수장戍將 반장潘長을 마음대로 죽이고 죄를 받을까 두려워 회남淮南으로 달아났다.
건화乾化 2년(912)에 양梁나라 영왕郢王 주우규朱友珪가 즉위하여 책명冊命을 내려 전류를 상보尙父로 높였다. 말제末帝 정명貞明 3년(917)에 전류에게 천하병마도원수天下兵馬都元帥를 더하고 개부開府하여 관속官屬을 두게 하였다. 정명貞明 4년(918)에 양융연楊隆演이 건주虔州를 취하니 전류가 처음으로 바닷길을 통해 경사京師에 들어가 공물을 바쳤다. 용덕龍德 원년元年(921)에 전류에게 조서詔書를 내렸는데 이름은 쓰지 않았다.
당唐 장종莊宗이 낙양洛陽에 들어가자 전류錢鏐가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고 옥책玉冊을 청하였다. 장종이 유사有司에게 내려 보내 그 일을 의논하게 하니 신료들이 모두 천자天子가 아니면 옥책을 쓸 수 없다고 하고 곽숭도郭崇韜는 더욱 불가하다고 하였다. 이윽고 장종이 허락하고는 이에 전류에게 옥책과 금인金印을 하사下賜하였다.
전류가 이에 진해군鎭海軍 등等의 절도사節度使를 자기 아들 전원관錢元瓘에게 제수하고 오월국왕吳越國王이라고 자칭自稱하고 지내는 거처를 궁전宮殿으로, 부府를 조朝로 명칭을 고치고 관속官屬들을 모두 신하라 칭하고 옥책루玉冊樓, 금권루金券樓, 조서루詔書樓 세 누각을 의금군衣錦軍에 세우고 사신을 보내 신라왕新羅王과 발해왕渤海王을 책봉冊封하고 해중海中의 여러 나라에 대해 모두 그 군장君長을 봉해주고 직책을 주었다.
명종明宗이 처음 즉위하였을 때 안중회安重誨가 전권專權을 휘둘렀는데, 전류錢鏐가 안중회에게 서신書信을 보낼 때 서신의 말이 거만하여 안중회가 크게 노하였다. 이때에 공봉관供奉官 오소우烏昭遇, 한매韓玫가 오월吳越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온 뒤에 한매가 오소우가 전류에게 칭신稱臣하면서 무도舞蹈의 예禮를 행하였다고 무고誣告하니 안중회가 이에 전류의 왕작王爵, 원수元帥, 상보尙父를 삭탈削奪할 것을 상주上奏하여 전류가 태사太師로 치사致仕하였다.
전원관錢元瓘 등이 사람을 보내 비단과 표문表文을 들고 샛길로 찾아가서 스스로 아뢰었는데 안중회가 죽자 명종이 그제야 전류의 관작官爵을 회복해주었다. 장흥長興 3년(932)에 전류가 졸卒하니 향년 81세였다. 시호諡號는 무숙武肅이다. 아들 전원관이 즉위하였다.
오호라! 하늘과 사람의 관계는 말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예로부터 술자術者들이 기괴奇怪함을 좋아하여 요행히 들어맞기를 바랐을 뿐만 아니라 영웅호걸英雄豪傑이나 산야山野의 도적들에 이르기까지도 흔히 요망妖妄한 징조徵兆에 스스로 가탁하였으니 어쩌면 어리석은 대중들을 속이는 데 쓸 만한 점이 있어서인가?
대개 그들이 흥기興起할 때에는 공덕功德을 점차로 쌓아가는 노력이 있는 것이 아니고 형벌을 받은 죄인이나 도적과 상인의 세력이 갑자기 일어나 왕후王侯가 된 것인데 사람들이 또한 요망한 징조를 전하기 좋아해서인가? 전씨錢氏의 전말顚末을 상고해보면 덕택德澤이 한 지방에 베풀어진 것이 아니고 백 년 사이에 그 지방 백성들을 매우 잔혹하게 부렸으니 그 천문天文, 역상曆象에 나타난 것이 어찌 그 요얼妖孼이 아니겠는가.
이때에 사해四海가 분열分裂하여 그 포악하기가 그지없었으나 또 어찌 다 그러했겠는가. 이것이 사실을 전혀 알지도 못하고 추측한 것이겠는가. 술자術者의 말은 적중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적중하는 경우가 적은데 사람들이 단지 그 적중한 일만 말하기 좋아해서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