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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3)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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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1. 길주학사吉州學舍에 대한 기문記文
典刑之文이라
전범典範이 되는 문장이다.
慶曆三年秋 天子開하야 召政事之臣八人하야 問 治天下 其要有幾 施於今者宜何先고하고 使坐而書以對하니
경력慶曆 3년 가을에 천자께서 천장각天章閣을 열어 나라의 정사政事를 맡은 신하 여덟 사람을 불러 “천하를 다스리는 요체는 얼마나 되며, 지금 시점에 시행해야 할 것 중 무엇을 우선해야 하는가?”라고 물으시고는, 신하들로 하여금 앉아서 글로 써서 답변하게 하셨다.
八人者皆震恐失位하야 俯伏頓首하고 言 此非愚臣所能及이니 惟陛下所欲爲
여덟 신하가 모두 황공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부복俯伏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말하기를 “이는 어리석은 신하들이 감히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오직 폐하께서 하시고 싶은 대로 하소서.
則天下幸甚이라하다
그리하신다면 천하에 몹시 다행일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於是 詔書屢下하야 勸農桑하고 責吏課하고 擧賢才하며 其明年三月 遂詔天下하야 皆立學置學官之員하니 然後 海隅徼塞四方萬里之外 莫不皆有學하니
이에 천자께서 조서詔書를 누차 내리시어 농상農桑을 권장하고 관리들의 성적을 책려하고 현재賢才를 등용하였으며, 명년明年 3월에는 마침내 천하에 조칙을 내려 학교를 세우고 학관學官을 두었으니, 그런 뒤에야 바다 구석 모퉁이 지방과 변경 지방 등 사방 만리萬里 밖까지 모두 학교를 두지 않음이 없었다.
嗚呼盛矣
오호라! 성대하도다.
學校 王政之本也
학교는 왕정王政의 근본이다.
古者 致治之盛衰 視其學之興廢하니
옛날에 다스림의 성쇠盛衰는 학교의 흥폐興廢를 보면 알 수 있었다.
이라하니 此三代極盛之時大備之制也
예기禮記》 〈학기學記〉에 이르기를 “에는 을 두었으며, 에는 를 두었으며, 에는 을 두었으며, 에는 을 두었다.”라고 하니, 이는 삼대三代의 지극히 성대하던 시절에 크게 갖추어진 제도였다.
宋興蓋八十有四年 而天下之學 始克大立하니 豈非盛美之事 須其久而後 至於大備歟
나라가 흥기한 지 84년 만에 천하의 학교가 비로소 성대하게 세워졌으니, 어찌 성대하고 아름다운 일은 오랜 세월을 기다린 이후에 크게 갖추어지는 데에 이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是以 詔下之日 臣民喜幸而奔走就事者 以後爲羞
이 때문에 조서가 내려온 날에 기뻐하고 다행스러워하면서 분주히 일에 나아온 신민들이 일에 뒤처지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其年十月 吉州之學成이라
그리하여 그해 10월에 길주吉州의 학사가 완성되었다.
州舊有夫子廟하야 在城之西北이러니
길주에는 오래 전부터 공자孔子의 사당이 성의 서북쪽에 있었다.
今知州事李侯寬之至也 謀與州人하야 遷而大之하야 以爲學舍하고 事方上請而詔已下하야 學遂以成이러라
지금의 지주사知州事 이후李侯 이 부임하여 고을 사람들과 함께 논의해서, 사당을 옮기고 확장하여 학사學舍로 삼고서 이곳을 학교로 사용하는 일을 바야흐로 위로 조정에 청하였는데 조서가 내려와 학사가 마침내 완성되었다.
李侯治吉敏而有方이라
이후李侯가 길주를 다스림에 근면하고 방도가 있었다.
其作學也 吉之士 率其私錢一百五十萬以助하고 用人之力 積二萬二千工이로되 而人不以爲勞하며 其良材堅甓之用 凡二十二萬三千五百이로되 而人不以爲多하며 學有堂筵齋講하고 有藏書之閣하고 有賓客之位하고 有游息之亭하야 嚴嚴翼翼하야 壯偉閎燿이로되 而人不以爲侈
학사를 지을 적에 길주의 선비들이 자신들의 사재 150만 을 모아 일을 도왔고, 인력人力을 사용한 것이 22,000명의 공인工人에 이르렀으되 사람들이 수고롭다고 여기지 않았으며, 좋은 목재와 튼튼한 벽돌을 사용한 것이 모두 22만 3,500개였으되 사람들이 많다고 여기지 않았으며, 학사에 당청堂廳연석筵席, 학재學齋강단講壇을 두고, 장서각藏書閣을 두었으며, 빈객賓客의 자리를 두고 유식游息할 정자를 두어 장엄하고 정제하여 위의 있고 찬란하였으나 사람들이 사치스럽다고 여기지 않았다.
旣成 而來學者常三百餘人이라
학사가 완성되자 와서 배우는 자들이 늘 300여 명이었다.
予世家於吉하고 而濫官于朝호되 進不能贊揚天子之盛美하고 退不能與諸生揖讓乎其中이라
우리 집안은 대대로 길주에서 살았고 조정에서 관직이 분수에 넘쳤으되, 나아가서는 천자의 성대하고 아름다운 덕을 선양宣揚하지 못했고 물러나서는 제생諸生들과 그곳에서 읍양揖讓의 예를 행하지 못하였다.
然予聞敎學之法 本於人性하야 磨揉遷革하야 使趨於善이니 其勉於人者勤하고 其入於人者漸이라 善敎者以 須遲久之功하야 至於禮讓興行而風俗純美然後 爲學之成이라
그러나 내가 듣기로 교학敎學의 방법은 사람의 성품에 근본해서 연마하고 변화시켜 선을 추구하도록 만드는 것이니, 사람을 권면하는 것은 부지런히 하고 사람을 감화시키기는 것은 점차적으로 하므로, 잘 가르치는 자가 게을리하지 않는 뜻을 가지고서 장구長久하게 공력을 들여 예양禮讓이 흥기하여 유행하고 풍속이 순수하고 아름다워지는 데 이른 연후에야 학문이 완성된다고 하였다.
今州縣之吏 不得久其職而躬親於敎化也
오늘날 주현州縣의 관리들은 직무에 오래 있으면서 교화敎化를 몸소 펼칠 수 없는 실정이다.
故李侯之績 及於學之立而不及待其成하니 惟後之人 毋廢慢天子之詔而以中止니라
때문에 이후李侯의 치적이 학사를 세우는 데에는 미쳤으나 그 교학敎學의 도가 완성됨을 기다리는 데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니, 오직 후인後人들은 천자의 조칙을 폐기하고 가볍게 여겨 학문을 게을리하여 중도에 그치게 하지 말지어다.
幸予他日因得歸榮故鄉而謁于學門 將見吉之士 皆道德明秀而可爲公卿하고 問于其俗而婚喪飮食 皆中禮節하고 入于其里而長幼相孝慈于其家하고 行于其郊而少者扶其羸老하며 壯者代其負荷于道路 然後 樂學之道成이라
행여 내가 훗날 영광스럽게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어 이 학사에 참알參謁할 적에 길주의 선비가 모두 도덕이 밝고 빼어나 공경公卿이 될 만하고, 풍속을 물어봄에 혼례婚禮상례喪禮며 마시고 먹는 것이 모두 예절에 맞고, 마을에 들어감에 장유長幼가 그 집에서 서로 효도하며 자애하고, 교외에 다님에 젊은이들이 쇠약한 늙은이들을 부축하며 장년들은 길에서 그 짐을 대신 짊어지는 것을 장차 볼 것이니, 그러한 뒤에 교학敎學의 도가 완성되었음을 즐거워할 것이다.
而得時從先生耆老하야 席于衆賓之後하야 聽鄉樂之歌하며 飮獻酬之酒하야 以詩頌天子太平之功하고 而周覽學舍하야 思詠李侯之遺愛 不亦美哉
그리고 때때로 선생들과 나이 많으신 어른들을 따라 여러 빈객의 뒤에 자리하여 향악鄉樂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서로 주고받는 술을 마시면서 천자께서 세상을 태평太平하게 만든 공덕을 시로 칭송하고, 길주의 학사를 두루 살펴보고서 이후李侯가 남긴 인애仁愛를 사모하며 음영吟詠할 수 있다면 또한 아름답지 않겠는가.
故於其始成也 刻辭于石而立諸其廡以俟하노라
그러므로 이 학사가 처음 완성되는 때에 돌에다 이 말을 새겨 낭무廊廡에 세워두고서 후일을 기다리노라.
역주
역주1 : 이 글은 慶曆 4년(1044)에 지은 것이다. 경력 3년 8월에 仁宗이 신하들을 불러 국가의 정사에 관해 물었는데, 范仲淹 등이 글을 올려 정사를 모두 혁신할 것을 청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이른바 ‘慶曆新政’이 시작되었다. 이 가운데 학교를 진흥하는 일은 新政의 가장 중요한 사안의 하나였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지어진 본 글에서는 吉州學舍의 건립 전 상황을 서술함과 동시에, 학교가 교화에 담당하는 부분이 매우 크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길주는 지금의 江西省 吉安縣이다.
農巖 金昌協의 《農巖集》 34권 〈雜識〉에서 이 글을 들며 歐陽脩가 문장을 다듬는 데 들인 공력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구양수의 문집에 실린 〈吉州學記〉는 두 가지 판본이 있는데, 비단 字句에 增減이 있을 뿐 아니라 章段의 先後도 상당히 차이가 있다. 하나는 石刻本이고 하나는 송나라가 태평할 적에 인쇄한 본인데 석각본은 《六一居士集》에, 인쇄본은 그 外集에 실려 있다. 석각본은 자수가 상당히 줄었고 문장도 한층 간결하고 통창한 것으로 볼 때 응당 뒤에 개수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구양공이 글을 지음에 있어 비록 尺牘이라 할지라도 대부분 뒤에 가서 개수했다고 한다. 그가 저술에 있어서 구차하지 않음이 이와 같았으니, 이 記文 또한 그 한 가지 증거이다. 두 판본을 가지고 한번 비교하고 대조하여 살펴보면 자세하게 하고 간략하게 하며 버리고 취한 뜻과 정밀하게 문장을 선택하고 다듬은 공력을 엿볼 수 있다. 周益公(周必大)의 序에 ‘전에 지은 것에 근거하여 새 작품을 살펴보면 글을 짓는 법을 깨닫게 된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역주2 天章閣 : 宋 眞宗 天禧 4년(1020)에 세워 진종의 御製文集, 御書 등을 보관한 건물이다. 仁宗 天聖 8년(1030) 이후로 여기에 待制, 侍講, 學士, 直學士 등을 두고 각종 보물 및 왕실 물건, 역대 황제의 畵像 등을 보관하였다.
역주3 記曰……家有塾 : 學, 序, 庠, 塾은 모두 학교의 명칭이다. 國은 國都이고, 遂는 도성 교외의 행정구역이고, 黨은 지방의 기초 행정단위로 500家를 기준으로 하였고, 家는 각 가정을 가리킨다.
역주4 不倦之意 : 《論語》 〈述而〉에서 공자가 “묵묵히 기억하며, 배우고 싫어하지 않으며, 사람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것, 이 중에 어느 것이 나에게 있겠는가.[黙而識之 學而不厭 誨人不倦 何有於我]”라고 하였다.
역주5 : 一本에는 ‘怠’로 되어 있는 것이 있으므로, ‘怠’의 뜻과 상통하는 것으로 보았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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