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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7)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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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7)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自秦變古 王制亡하고 始郡縣天下 下更漢晉하야 分裂爲南北이러니 至隋滅陳하야 天下始合爲一일새
乃改州爲郡하야 依漢制置太守하고 以司隷刺史相統治하니 爲郡一百九十이요 縣一千二百五十五 戶八百九十萬七千五百三十六이요 口四千六百一萬九千九百五十六이라
其地 東西九千三百里 南北一萬四千八百一十五里 東南皆至海하고 西至하고 北至이라
唐興 高祖改郡爲州하야 太守爲刺史하고 又置都督府以治之 然天下初定일새 權置州郡頗多
太宗元年 始命倂省하고 又因山川形便하야 分天下爲十道하니 一曰關內 二曰河南이요 三曰河東이요 四曰河北이요 五曰山南이요 六曰隴右 七曰淮南이요 八曰江南이요 九曰劒南이요 十曰嶺南이라
至十三年定簿하야 凡州府三百五十八이요 縣一千五百五十一이라 明年하고 又增州二 縣六이라 其後 北殄하고 西平高昌하고 北踰陰山하고 西抵大漠이라
其地 東極海하고 西至하고 南盡林州南境하고 北接하니 東西九千五百一十一里 南北一萬六千九百一十八里
二年 分天下郡縣하야 置二十四都督府以統之러니 旣而 以其權重不便이라하야 罷之하다 二十一年 又因十道分山南江南爲東西道하고 增置黔中道又京畿都畿하고 置十五採訪使하야 檢察如漢刺史之職이라
하야 中國用兵하야 而河西隴右不守하야 陷于吐蕃이러니하야 始復隴右 以後 天下大亂하야 至于唐亡이라
然擧唐之盛時하면 東至安東하고 西至安西하고 南至日南하고 北至單于府하니 蓋南北如漢之盛이로되 東不及而西過之
開元二十八年戶部帳 凡郡府三百二十有八이요 縣千五百七十三이요 戶八百四十一萬二千八百七十一이요 口四千八百一十四萬三千六百九 應受田一千四百四十萬三千八百六十二頃이라
考隋唐地理之廣狹 戶口盈耗與其州縣廢置하면 其盛衰治亂興亡可以見矣 蓋自古爲天下者 務廣德而不務廣地하나니 德不足矣 地雖廣이라도 莫能守也 嗚呼 盛極必衰 雖曰勢使之然이나 而殆忽驕滿 常因盛大 可不戒哉


지리지에 관한
나라가 고법古法을 바꾸고부터 왕제王制가 없어지고 처음으로 천하에 군현郡縣을 두어 다스렸다. 아래로 나라, 나라를 지나고서 분열分裂하여 남북조南北朝가 되었는데 나라가 나라를 멸망시킨 때에 이르러 천하가 비로소 통합되어 하나가 되었다.
이에 를 고쳐 으로 삼고서 한나라 제도를 따라 태수太守를 두고 사예司隷, 자사刺史를 통해 다스리게 하니 으로 만든 것은 190이고 은 1,255이고 는 890만 7,536이고 는 4601만 9,956이었다.
그 지역 범위는 동서東西로 9,300이고 남북南北으로 1만 4,815이니 동쪽과 남쪽으로는 모두 바다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저말且末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오원五原에 이르렀다.
나라가 일어나자 고조高祖을 고쳐 로 삼고서 태수太守자사刺史로 바꾸고 다시 도독부都督府를 설치하여 다스렸다. 그렇지만 천하天下가 막 평정되었기에 임시로 설치한 주군州郡이 퍽 많았다.
태종太宗 정관貞觀 원년元年(627)에 처음으로 병합하여 줄이도록 명하고 다시 산천山川의 형세에 따라 천하를 나누어 10를 만드니 첫째가 관내도關內道, 둘째가 하남도河南道, 셋째가 하동도河東道, 넷째가 하북도河北道, 다섯째가 산남도山南道, 여섯째가 농우도隴右道, 일곱째가 회남도淮南道, 여덟째가 강남도江南道, 아홉째가 검남도劒南道, 열째가 영남도嶺南道였다.
정관 13년(639) 부적簿籍을 확정할 때에 이르러 주부州府는 모두 358, 은 1,551이었다. 이듬해 고창을 평정하고 다시 둘과 여섯을 증설增設하였다. 그 후에 북쪽으로 돌궐突厥힐리頡利를 섬멸하고 서쪽으로 고창高昌을 평정하고 북쪽으로 음산陰山을 넘고 서쪽으로 대막大漠에 닿았다.
그 지역 범위는 동쪽으로 바다까지 이르렀고 서쪽으로 언기焉耆에 이르렀고 남쪽으로 임주林州의 남쪽 경계 끝까지 미쳤고 북쪽으로 설연타薛延陀의 경계에 접하였으니 동서東西로 9,511이고 남북南北으로 1만 6,918였다.
당십도도唐十道圖당십도도唐十道圖
경운景雲 2년(711)에 천하의 군현郡縣을 나누어 24도독부都督府를 두어 다스렸는데 이윽고 그 권력이 과중過重하여 불편하다 여겨 폐지하였다. 개원開元 21년(733)에 다시 10를 바탕으로 산남도山南道강남도江南道를 나누어 동도東道, 서도西道를 만들고 검중도黔中道경기도京畿道, 도기도都畿道증설增設하고 채방사採訪使 15인을 두어 나라 때 자사刺史의 직임처럼 검찰檢察하도록 하였다.
천보天寶 연간에 도적이 일어나 중국中國 내지內地에서 군대를 기동起動하면서 하서도河西道, 농우도隴右道를 지키지 못해 토번吐蕃에 함락되었는데 대중大中, 함통咸通 연간에 이르러 비로소 농우를 회복하였다. 건부乾符 연간 이후로 천하가 크게 혼란해져서 나라가 멸망하는 데 이르렀다.
그렇지만 나라가 전성全盛했던 때를 들어보자면 개원開元, 천보天寶 연간에 동쪽으로 안동安東에 이르고 서쪽으로 안서安西에 이르고 남쪽으로 일남日南에 이르고 북쪽으로 선우부單于府에 이르렀으니 대체로 남북南北나라가 전성全盛했던 때와 같았지만 동쪽은 나라만 못하였고 서쪽은 나라를 넘어섰다.
개원 28년(740) 호부戶部장부帳簿군부郡府는 모두 328이고, 은 1,573이고, 는 841만 2,871이고 는 4814만 3,609이고 응수전應受田은 1440만 3,862이었다.
의 영토의 넓이와 호구戶口의 증감과 그 주현州縣폐치廢置를 고찰하면 그들의 성쇠盛衰치란治亂흥망興亡을 볼 수가 있다. 대개 예로부터 천하를 다스리는 자는 을 넓히는 데 힘쓰고 땅을 넓히는 데 힘쓰지 않나니 이 부족하면 땅이 비록 넓더라도 지킬 수가 없다. 오호라! 성대盛大함이 극도에 이르면 반드시 쇠퇴하니 비록 형세가 그렇게 만든다고는 하지만 나태하고 소홀하고 교만驕慢하고 자만自滿함이 항상 성대함으로 인해 생겨난다.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역주
역주1 地理志論 : 본 편은 〈地理志〉의 서론에 해당하는 글로, 秦나라가 郡縣을 두기 시작한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아주 간략하게 隋代까지의 지방제도를 논한 뒤, 바로 唐代의 지방제도와 戶口, 耕田 등의 통계를 제시하고 천하를 다스리는 자는 德을 넓히는 데 힘써야지 土地를 넓히는 데 힘써서는 안 된다는 警戒로 마무리하였다. 아마도 茅坤은 이 글을 議論文의 典型으로 여겨 채록한 듯하다. 중국의 地理를 다룬 최초의 글로는 ≪書經≫의 〈禹貢〉을 들 수 있는데, 천하를 九州로 나누고 각 州의 지리와 物産에 대해 서술하였다.
지리지는 각 지방의 自然과 人文 방면의 지리 상황 및 그 역사적 변천의 과정을 담은 전문적인 記述로, 역대의 史書에 수록되어 전해오는데, 地理志․郡國志․州郡志 등 篇名의 차이는 있으나 지리지로 통칭된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史記≫에는 지리를 다룬 篇目이 따로 없고, ≪漢書≫ 〈지리지〉, ≪後漢書≫ 〈군국지〉, ≪晉書≫ 〈지리지〉, ≪宋書≫ 〈주군지〉, ≪南齊書≫ 〈주군지〉, ≪魏書≫ 〈地形志〉, ≪隋書≫ 〈지리지〉, ≪舊唐書≫ 〈지리지〉 등이 있어 이들을 통해 역대 州郡의 廢置 연혁을 고찰할 수 있다.
≪新唐書≫ 〈지리지〉는 이상의 지리지들을 참고하여 당대의 지방 행정 구역인 10道를 표제어로 세우고 각 도와 그에 속한 州郡들의 연혁을 서술하였다. 서술의 방식을 살펴보면, 역대 地名의 변천, 행정 기관 설치 연혁, 土貢, 戶口, 屬縣 등의 내용을 차례로 서술하여 일목요연하게 천하 지리의 대강을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신당서≫ 〈지리지〉는 ≪구당서≫ 〈지리지〉와 내용의 詳略은 다소 차이가 있지만 체제에 있어서는 대체로 비슷하다. 그리고 마지막에 한 권을 할애하여 각 도에 딸린 羈縻州를 열거하고 있는 부분은 ≪신당서≫에 독자적으로 추가된 것이다.
역주2 (旦)[且]末 : 저본에는 ‘且’가 ‘旦’으로 되어 있으나, ≪新唐書≫에 의거하여 ‘且’로 바로잡았다. 且末은 漢代 西域 36國 가운데 하나로, 西域都護府에 속한다. 都城은 且末城인데 지금의 新疆省 且末縣城의 서남쪽에 있었다. 後漢 초엽에는 鄯善에 병합되어 있다가 다시 독립하였다. 北魏 말엽에는 吐谷渾에 병합되었다.
역주3 五原 : 前漢 때 북방의 변경 지역으로, 郡을 설치하고 요새를 두어 五原郡, 五原塞라고도 불리었다. 지금의 內蒙古 後套의 동쪽, 陰山의 남쪽, 包頭市의 서쪽 지역에 해당한다.
역주4 高昌 : 지금의 新疆省 투르판 동쪽 카라코룸 서남쪽에 있었다. 漢代에는 高昌壁이었고 東晉 鹹和 2년(327)에 前涼이 高昌郡을 설치하였다. 唐 貞觀 14년(640)에 고창을 멸망시키고 그 땅에 西昌州를 두었다가 뒤에 西州로 개칭하였다.
역주5 突厥頡(힐)利 : 頡利는 당나라 때 突厥의 可汗으로, 성은 阿史那이고 이름은 咄苾이다. 高祖 때 국력이 막강하여 매년 중국을 침입했고, 太宗이 즉위한 해에는 長安의 渭水 便橋 북쪽까지 침입하자, 태종이 직접 玄武門을 나와 6騎를 이끌고 위수 가로 가서 담판을 한 다음에, 다시 편교에서 白馬를 잡아 맹약을 맺고 돌려보내기도 하였다. 후에 태종이 정벌하여 당나라의 포로가 되었다. ≪新唐書≫ 卷215 〈頡利可汗列傳〉
역주6 焉耆 : 漢나라 때 西域 36國 가운데 하나로 西域都護府에 소속되었고 도성은 員渠城에 있었는데 北魏 때 멸망당하였다. 唐나라 때 焉耆都督府를 두었고 唐末에 西州의 回鶻에게 병합되었다.
역주7 薛延陀 : 종족의 이름으로 흉노의 별종이다. 처음에는 薛部와 延陀部로 나뉘어져 있다가 설부가 연타부를 합병하고는 설연타라 칭하였다. 처음에는 燕末山에 웅거해 있다가 夷男이 부족장이 되어 돌궐에 귀부하였으며, 그 뒤 돌궐을 배반하고 자립하였다. 당 태종 때 眞珠毘伽可汗으로 册立되었으며, 貞觀 말에 몽고의 鬱督軍山 즉 지금의 杭愛山 부근에 웅거해 있으면서 여러 부족을 통솔하였다. 진주비가가한이 죽은 뒤 국내가 어지러워지자 당나라에서 李世勣을 파견하여 토벌하였다.
역주8 景雲 : 唐 睿宗의 첫 번째 연호(710~711)이다.
역주9 開元 : 唐 玄宗의 두 번째 연호(713~741)이다.
역주10 ) 天寶盜起 : 天寶는 唐 玄宗의 세 번째 연호(742~756)로, 이때 安祿山과 史思明이 난을 일으켜 한때 洛陽과 長安을 함락시켰다.
역주11 大中咸通 : 大中은 唐 宣宗의 연호(847~860)이고, 咸通은 唐 懿宗의 연호(860~874)이다.
역주12 乾符 : 唐 僖宗의 첫 번째 연호(874~879)이다.
역주13 開元天寶之際 : 唐 玄宗의 연호로, 당나라의 전성기를 가리킨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7)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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