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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3)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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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3. 상서호부시랑 참지정사 증우복야 문안 왕공의 묘지명
姓王氏 其先 이라
공은 왕씨王氏이니 공의 선조는 태원부太原府 기현祁縣 사람이다.
其六世祖某爲唐刺史로되 遭世亂하야 因留家하니 碭山近이라
공의 6세조 나라 때에 휘주자사輝州刺史였는데 세상이 혼란해지자 이로 인해 탕산현碭山縣에 거주하게 되었으니 탕산현碭山縣송주宋州와 가깝다.
其後又徙하니 今爲應天虞城人也
그 뒤에 또 송주宋州우성虞城으로 이주하였으니 지금은 응천부應天府 우성虞城 사람이 되었다.
諱堯臣이요 字伯庸이라
공은 요신堯臣이고 백용伯庸이다.
天聖五年 擧進士第一하야 爲將作監丞 通判湖州하고 召試하야 以著作佐郞 直集賢院으로 知光州러니 歲大饑 群盜發民倉廩하니 吏法當死
천성天聖 5년(1027)에 진사시進士試에 1등으로 급제하여 장작감승將作監丞 통판호주通判湖州가 되었고, 불려가 시험을 보고서 저작좌랑著作佐郞 직집현원直集賢院으로 지광주知光州가 되었는데, 그해에 큰 기근이 들자 도적들이 백성의 곳간을 도적질하니 법대로 처리하면 사형에 해당하였다.
公曰 此饑民求食爾 荒政之所恤也라하야 乃請以減死論하고 其後遂以著令하야 至今用之
공이 말하기를 “이 굶주린 백성들은 먹을 것을 구한 것일 뿐이니 황정荒政으로 구휼해야 하는 사람들이다.”라고 하고는 이에 조정에 사형을 감하는 것으로 논죄할 것을 청하였고, 그 뒤에 마침내 법으로 제정하여 지금까지 이 법을 쓰고 있다.
丁父憂하고 服除 爲三司度支判官하고 再遷右司諫하다
부친상을 당하고 상을 마친 뒤에 삼사도지판관三司度支判官이 되었으며 다시 우사간右司諫으로 옮겼다.
하야 居瑤華宮이라가 有疾하니 上頗哀憐之
곽황후郭皇后폐위廢位되어 요화궁瑤華宮에 머물다가 병이 들자 상이 매우 가련하게 여겼다.
方后廢時하야 宦者閻文應有力이러니 及后疾하야 文應又主監醫
곽황후郭皇后가 폐위될 때에 환관宦官염문응閻文應이 폐위에 적극 가담하였는데 곽황후郭皇后가 병이 들자 염문응閻文應이 또 곽황후郭皇后의 치료를 감독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后且卒 議者疑文應有姦謀하니 公請付其事御史하야 考按虛實하야 以釋天下之疑하니
게다가 곽황후郭皇后가 죽자 논의하는 자가 염문응閻文應간계奸計를 부렸다고 의심하니, 공이 어사御史에게 이 일을 맡겨 허실虛實을 낱낱이 조사하여 천하 사람들의 의심을 풀어줄 것을 청하였다.
事雖不行이나 然自文應用事 無敢指言者
일은 비록 시행되지 않았지만 염문응閻文應용사用事한 뒤로는 감히 지적하여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後文應卒以恣橫斥死하니 后猶在殯이라
후에 염문응閻文應이 마침내 전횡을 일삼다 배척받아 죽었지만 곽황후郭皇后는 여전히 빈소殯所에 있었다.
有司以歲正月 用故事張燈한대 公言郭氏幸得蒙厚恩하야 復位號어늘 乃天子后也
유사有司정월正月이 되면 고사故事에 따라 빈소에 등불을 밝혀두었는데, 공이 말하기를 “곽씨郭氏는 다행히 두터운 성은을 입어 작위爵位명호名號를 회복하였으니 바로 천자의 입니다.
張燈可廢라하니 上遽爲之罷하다
등불을 밝히는 일은 그만두어도 됩니다.”라고 하자 상이 곧바로 이 일을 그만두게 하였다.
景祐四年 以本官으로 知制誥하고 賜服金紫하고 同知通進銀臺司 兼門下封駁 提擧諸司庫務하고 遷翰林學士 知審官院하다
경우景祐 4년(1037)에 본관本官으로 지제고知制誥가 되었고 금어대金魚袋자의紫衣를 하사받았으며 동지통진은대사同知通進銀臺司 겸문하봉박兼門下封駁 제거제사고무提擧諸司庫務가 되었고 한림학사翰林學士 지심관원知審官院으로 옮겼다.
하야 西邊用兵 以公爲陝西體量安撫使
조원호趙元昊가 반란을 일으켜 서쪽 변경에 전쟁이 일어나자 공을 섬서체량안무사陝西體量安撫使로 삼았다.
公視四路山川險易하고 還言某路宜益兵若干이요 某路賊所不攻이요 某路宜急爲備라하고
공이 사로四路의 산천 지형을 시찰하고 돌아와서 말하기를 “모로某路는 의당 병사 약간을 증원해야 하겠고, 모로某路는 적이 공격하지 않을 곳이며, 모로某路는 급히 방비를 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至於諸將材能長短하야도 盡識之하야 薦其可用者二十餘人이러니 後皆爲名將이라
그리고 장수들의 재능의 장단점에 대해서도 모두 알아서 쓸 만한 인재를 천거한 것이 20여 명이었는데 후에 모두 명장名將이 되었다.
이때에 변방의 군대가 호수천好水川에서 처음 대패大敗하여 임복任福 등이 전사하였다.
今韓丞相坐主帥失律하야 奪招討副使하야 知秦州하고 하다
지금의 한승상韓丞相(한기韓琦)은 군대를 통솔함에 군율軍律을 잃었다는 이유로 죄를 얻어 초토부사招討副使의 관직을 강등당하여 지진주知秦州가 되었고, 범문정공范文正公(범중엄范仲淹) 또한 조원호趙元昊에게 답서答書를 보내면서 먼저 조정에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초토부사招討副使의 관직을 강등당하여 지요주知耀州가 되었다.
公因言此兩人 天下之選也
공이 이 일로 인하여 말하기를 “이 두 사람은 천하에서 선발된 뛰어난 인재입니다.
其忠義智勇 名動夷狄하니 不宜以小故置之
충의忠義지용智勇이적夷狄 사이에 이름이 알려져 있으니 작은 일로 이들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且任福 由違節度하야 以致敗 尤不可深責主將이라하니
임복任福은 지휘를 잘못한 탓에 패배를 초래하였으나 더욱 주장主將을 심하게 처벌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由是 忤宰相意하야 幷其他議하야 多格不行이러라
이 일로 말미암아 재상의 심기를 거슬러서 공이 주장한 다른 의론들까지도 대부분 받아들여지지 않아 시행되지 않았다.
明年 賊入涇原이라 戰定川하야 殺大將葛懷敏하니 乃公指言爲備處
이듬해에 적이 경원涇原을 침입하여 정천定川의 전투에서 대장 갈회민葛懷敏을 죽였으니 바로 공이 대비를 해야 한다고 지적하여 말했던 곳이었다.
由是 始以公言爲可信하야 而前所格議 悉見施行이라
이 일로 말미암아 비로소 공의 말을 믿을 만하다고 여겨 이전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의론이 모두 시행되었다.
因復遣公安撫涇原路한대 公曰 陛下復用韓琦范仲淹이면 幸甚이라
이로 인해 공을 안무경원로安撫涇原路로 다시 보냈는데, 공이 말하기를 “폐하께서 한기韓琦범중엄范仲淹을 다시 기용하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願許以便宜從事라하니 上以爲然하다
그러나 장수는 조정에서 통제하지 않는 것이 병법이니, 원컨대 편의에 따라 종사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소서.”라고 하니 상이 수긍하였다.
因言諸路都部署可罷經略副使하야 以重將權하고
공이 인하여 말하기를 “제로諸路도부서都部署경략부사經略副使를 폐지하여 장수의 권위를 무겁게 할 만하고
而偏將見招討使以軍禮하며
편장偏將초토사招討使를 볼 때에 군례軍禮만 행하며,
하고 廢涇原等五州營田하야 以其地募弓箭手하니 其所更置尤多
농간성籠竿城덕순군德順軍을 설치하고 경원涇原 등 5영전營田을 폐지하여 그곳에 궁수弓手를 모집해야 합니다.”라고 하니 새로 설치한 것이 매우 많았다.
方公使還하야 行至涇州러니이어늘 公止道左解裝하고 爲牓射城中하야 以招貴하고 且發近兵討之
공이 안무사安撫使로 갔다 돌아오는 길에 경주涇州에 이르렀는데 덕승채德勝寨의 군사들이 장수 요귀姚貴를 겁박하여 성문을 닫고 반란을 일으키자, 공이 가던 길을 멈추고 행장을 풀고는 성안에 편지를 묶은 화살을 쏘아 요귀姚貴를 부르는 한편 근방의 군사를 동원하여 토벌하였다.
吏白曰 公奉使且還하니 歸報天子爾
당초에 관리가 아뢰기를 “공은 사명使命을 받들고 갔다 또 돌아오는 길이었으니 돌아와 천자에게 보고만 하면 그뿐이다.
貴叛 非公事也라하야늘 公曰 貴 土豪也 頗得士心이나 然初非叛者
요귀姚貴가 반란을 일으킨 것은 공이 처리해야 할 일이 아니다.”라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요귀姚貴토호土豪인지라 병사들의 인심을 많이 얻고 있지만 애초에 반란을 일으킬 사람이 아니다.
今不乘其未定하야 速招降이면 後必生事하야 爲朝廷患이라한대 貴果出降이러라
지금 반란을 일으킬지 결정하기 전에 속히 불러 항복을 받아내지 않으면 훗날 반드시 반란을 일으켜 조정의 우환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요귀姚貴가 과연 성을 나와 항복하였다.
明年四月 以學士 權三司使
이듬해 4월에 학사學士권삼사사權三司使가 되었다.
自朝廷理元昊罪 軍興而用益廣하니 前爲三司者 皆厚賦暴斂이라
조정에서 조원호趙元昊의 죄를 다스린 뒤로 군사를 일으켜 비용을 사용할 곳이 더욱 많아졌는데, 이전에 삼사사三司使가 된 사람들은 모두 부세를 높게 책정하고 조세를 많이 거두어들였다.
甚者借하고 率富人出錢하며 下至果菜하야도 皆加稅로되 而用益不足이라
심한 경우는 내장內藏에서 빌리기도 하고 부유한 사람들에게 돈을 낼 것을 종용하기도 하며 아래로 과일이나 채소까지도 모두 세금을 부과하였지만 비용을 대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였다.
公始受命하야 則曰 今國與民 皆弊矣 在陛下任臣者如何라하니
공이 처음 명을 받고는 말하기를 “지금 국가와 백성이 모두 피폐해졌으니 폐하께서 신하에게 맡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由是 天子一聽公所爲
이로부터 천자가 한결같이 공이 하는 일을 따라주었다.
公乃推見材利出入盈縮하야 曰 此本也 彼末也라하야 計其緩急先後而去其蠹弊之有根穴者하며 斥其妄計小利之害大體者하고
공이 재물과 이익의 출입과 증감의 현황을 미루어 보고는 말하기를 “이것은 근본이 되는 것이고 저것은 말단이 되는 것이다.”라 하고서 완급과 선후를 계산하여 폐단의 근본을 제거하고, 작은 이익을 함부로 따지다가 대체大體를 해치는 것들을 폐지하였다.
然後一爲條目하야 使就法度하며 罷副使判官不可用者十五人하고 更薦用材且賢者하니 期年 民不加賦而用足이라
그런 뒤에 한결같이 조목을 만들어 법도에 맞게 하였고, 부사판관副使判官 중에 능력 없는 15명을 파직하고 다시 능력 있고 현명한 사람을 천거하니 1년 만에 백성들은 세금을 더 내지 않았지만 비용이 풍족하게 되었다.
明年以其餘 償內藏所借者數百萬하고 又明年 其餘而積於有司者數千萬하니 而所在 稍復其業이러라
이듬해에 남은 재물로 내장內藏에서 빌린 수백만 을 갚았고, 또 이듬해에는 유사有司에게 남은 것을 비축해둔 재물이 수천만 이나 되니 각지에 있던 유용流庸들이 조금씩 자신의 본업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公曰 臣之術 止於是矣
공이 말하기를 “신의 재능은 여기까지입니다.
且臣母老하니 願解煩劇이라하니 天子多公功하야 以爲翰林學士承旨 兼端明殿學士 하다
또 신의 어미가 연로하니 극무劇務에서 해임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니, 천자가 공의 공로를 훌륭하게 여겨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 겸단명전학사兼端明殿學士 군목사群牧使로 삼았다.
宦者張永和方用事할새 請收民十之三以佐國이라
당초에 환관인 장영화張永和가 바야흐로 용사用事할 때에 백성들에게 방전房錢 10분의 3을 거두어 국비에 보탤 것을 청하였다.
事下三司한대 永和陰遣人하야 以利動公이어늘 公執以爲不可하니
이 일이 삼사三司에 내려졌는데 장영화張永和가 몰래 사람을 보내 국가에 이익이 된다고 공을 선동하거늘 공은 쟁집하여 불가하다고 하였다.
度支副使林濰附永和하야 議不已 公奏罷濰하니 乃止러라
탁지부사度支副使 임유林濰장영화張永和에게 붙어 이 일에 대한 의론을 그만두지 않았으므로 공이 임유林濰의 파직을 주청하자 마침내 이 일에 대한 논의가 그쳤다.
轉運使 皆請增民하면 歲可爲錢十餘萬이라하야늘 公亦以爲不可하니
익주로益州路, 이주노利州路, 기주로夔州路 3전운사轉運使가 모두 청하여 백성들에게 염정鹽井에 대한 세금을 더 거둬들이면 한 해에 10여만 을 만들 수 있다고 하거늘 공은 역시 불가하다고 하였다.
而權倖因緣하야 多見裁抑하니 京師數爲飛語하고 及上之左右하야도 往往讒其短者로되
그런데 이리저리 결탁하여 이익을 보려던 권행權倖들이 공에게 제지당하는 일이 많아지자 경사京師에 수차례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상의 좌우에 있는 사람들도 왕왕 공의 단점을 참소하였다.
上一切不問하고 而公爲之亦自若也러라
그러나 상이 일절 묻지 않았고 공도 태연하였다.
及公旣罷하야 上慰勞之하니 公頓首謝曰 非臣之能이라 惟陛下信用臣爾라하다
공이 이미 파직되어 상이 위로하니 공이 머리를 조아리고 사례하여 말하기를 “신의 능력이 아니라 오직 폐하께서 저를 믿고 써주신 덕분일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丁母憂하야 去職하고 服除 復爲學士 群牧使하며 再遷給事中하고 皇祐三年 以本官으로 爲樞密副使
모친상을 당하여 관직을 떠났고 상을 마치고 나자 다시 학사學士 군목사群牧使가 되었으며, 다시 급사중給事中으로 옮겼고 황우皇祐 3년(1051)에 본관本官으로 추밀부사樞密副使가 되었다.
公持法守正하야 遂以身任天下事
공은 법과 정도正道를 지켜 마침내 몸소 천하의 일을 담당하였다.
凡宗室宦官醫師樂工嬖習之賤 莫不關樞密而濫恩倖이라
무릇 미천한 종실宗室환관宦官의사醫師악공樂工폐습嬖習 등이 추밀원樞密院과 관련하여 지나친 은혜를 입고 있지 않음이 없었다.
請隨其事하야 可損損之하며 可絶絶之하고 至其大者하얀 則皆著爲定令하니
일에 따라 줄일 만한 것은 줄이고 끊을 만한 것은 끊었으며 큰 것에 이르러서는 모두 분명하게 법으로 제정할 것을 청하였다.
由是 小人益怨하야 構爲飛書以害公이어늘
이로 말미암아 소인들이 공을 더욱 원망하여 익명의 글을 만들어 공을 해치려 하였다.
公得書하야 自請曰 臣恐不能勝衆怨하니 願得罷去라하니 上愈知公爲忠하야 爲下令購爲書者甚急하니 公益感勵
그런데 공은 글을 얻어 보고는 자청하여 “신은 많은 사람들의 원망을 이길 수 없을까 두려우니 관직을 그만두고 떠나기를 바랍니다.”라고 하니, 상이 공의 충심을 더욱 알아서 명을 내려 글을 만든 사람을 찾아낼 것을 몹시 재촉하니 공이 더욱 감격하고 분발하였다.
在位六年 廢職修擧 皆有條理러라
추밀부사樞密副使로 있은 6년 동안 폐해진 직무를 다시 정비한 것이 모두 조리가 있었다.
樞密使狄靑 以軍功起行伍하야 居大位하니 而士卒多屬目하야 往往造作言語하야 以相扇動하니 人情以爲疑로되 而靑色頗自得이라
추밀사樞密使 적청狄靑군공軍功으로 항오行伍에서 발탁되어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자 사졸士卒들 대부분이 주목하여 왕왕 말을 만들어내 서로 선동하니 사람들은 의심하는데 적청狄靑의 안색은 퍽 의기양양하였다.
公嘗以語衆折靑하야 爲陳禍福하야 言古將帥起微賤至富貴而不能保首領者 可以爲鑒戒라하니 靑稍沮畏러라
공이 일찍이 여러 사람에게 말하는 차제에 적청狄靑을 꺾어서 화복禍福의 이치로 말하기를 “옛날 미천한 신분에서 일어나 부귀한 데에 이르렀지만 머리를 보존하지 못했던 장수들을 경계로 삼을 만하다.”라고 하니 적청狄靑이 차츰 두려워하게 되었다.
嘉祐元年三月 拜戶部侍郞 參知政事하고 三年 遷吏部侍郞하고 八月二十一日 以疾薨于位하니 享年五十有六이라
가우嘉祐 원년元年(1057) 3월에 호부시랑戶部侍郞 참지정사參知政事에 배수되었고, 3년에 이부시랑吏部侍郞으로 옮겼으며 8월 21일에 병으로 재임 중에 돌아가시니 향년 56세였다.
公在政事 論議有所不同이면 必反復切剴하야 至於是而後止하야 不爲獨見이라
공이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있을 때에 논의가 일치하지 않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반복하여 절실하고 간곡하게 말하여 옳은 데에 이른 뒤에야 논의를 그만두어 자신의 견해만을 주장하지 않았다.
在上前 所陳天下利害甚多로되 至施行之하얀 亦未嘗自名이라
상 앞에서 천하의 이해利害에 대해 진설한 것이 매우 많았는데 진설한 것이 시행됨에 이르러서는 또한 일찍이 자신이 진설한 것임을 밝힌 적이 없었다.
其所設施 與在樞密時特異하니 豈政事者丞相府也 其體自宜如是邪
공이 시행한 바가 추밀원樞密院에 있을 때와는 매우 다르니, 참지정사參知政事승상부丞相府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기에 체모體貌를 본래 이와 같이 해야 하는 것이리라.
公爲人純質하야 雖貴顯이나 不忘儉約하고 與其弟純臣相友愛하니 世稱孝悌者言王氏러라
공은 사람됨이 순수하고 질박하여 비록 높은 자리에 올랐지만 검약을 잊지 않았고, 공의 아우 순신純臣과 서로 우애가 깊어 세상에서 효제孝悌를 일컬을 때 왕씨王氏를 이야기하였다.
遇人一以誠意하야 無所矯飾하고 善知人하야 多所稱하니 薦士爲時名臣者甚衆이러라
사람을 대할 때 한결같이 성의誠意를 다하여 거짓으로 꾸밈이 없었고 사람을 잘 볼 줄 알아 칭찬한 사람이 많았는데 천거된 선비 중에 당시의 명신名臣이 된 자들이 매우 많았다.
有文集五十卷이라
문집 50권이 남아 있다.
將終 口授其弟純臣遺奏하야 以宗廟至重儲嗣未立爲憂하니 天子愍然이라
임종臨終할 때에 아우인 순신에게 유주遺奏를 불러주면서 종묘宗廟가 매우 귀중한데 태자를 세우지 않은 것을 근심하니 천자가 매우 슬퍼하였다.
臨其喪하야 輟視朝一日하고 贈左僕射하고 太常諡曰文安하다
공의 상을 치를 때에 하루 동안 철조輟朝하고 좌복야左僕射를 증직하고 태상시太常寺에서 문안文安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曾祖諱化 某官이요 贈太傅 妣戚氏 封曹國太夫人이라
증조부 모관某官을 지냈고 태부太傅에 증직되었으며 증조모 척씨戚氏조국태부인曹國太夫人에 봉해졌다.
祖諱礪 某官이요 父諱瀆 某官이니 皆贈太師中書令 兼尙書令이라
조부 모관某官을 지냈고 부친 모관某官을 지냈으니 모두 태사중서령太師中書令 겸상서령兼尙書令에 증직되었다.
祖妣袁氏 鄆國太夫人이요 妣仇氏 徐國太夫人이요 娶丁氏 安康郡夫人이라
조모 원씨袁氏운국태부인鄆國太夫人에 봉해졌고 모친 구지仇氏서국태부인徐國太夫人에 봉해졌으며, 부인인 정씨丁氏안강군부인安康郡夫人에 봉해졌다.
子男三人이니 同老 大理評事 周老 太常寺太祝이러니 早卒하고 朋老 大理評事
자식은 아들이 3명이니, 동로同老대리평사大理評事이고, 주로周老태상시태축太常寺太祝을 지냈는데 일찍 죽었고, 붕로朋老대리평사大理評事이다.
二女 長適校書郞戚師道러니 早卒하고 未嫁
두 딸 중에 장녀는 교서랑校書郞 척사도戚師道에게 시집갔는데 일찍 죽었고, 차녀는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
王氏自遷虞城으로 由公曾祖而下 或葬雙金하고 或葬土山하니 皆在虞城이라
왕씨王氏우성虞城으로 이주한 뒤로 공의 증조曾祖로부터 이하는 혹은 쌍금雙金에 안장하고 혹은 토산土山에 안장하였으니 모두 우성虞城에 있다.
嘉祐四年八月十日 改葬公之皇考于宋城縣平臺鄕石落原하고 而以公從葬焉이라
가우嘉祐 4년(1059) 8월 10일에 송성현宋城縣 평대향平臺鄉 석락원石落原에 공의 황고皇考개장改葬하였고 공도 이곳에 안장하였다.
銘曰
은 다음과 같다.
王爲祁人이니
왕씨王氏기주祁州 사람인데
遭亂不還이라
난리를 만나 돌아가지 못했네
六世之祖
6세조가
初留碭山이라
처음 탕산현碭山縣에 머물다가
其後再遷하니
그 뒤에 다시 옮기니
虞宋之間이라
우성虞城송주宋州의 사이였네
遂安其居하야
마침내 그곳을 거주지로 정하여
葬不遠卜이라
장지葬地를 가까운 곳에 정할 수 있게 되었네
宋多名家하니
송나라는 명가名家가 많은데
王實大族이라
왕씨王氏는 실로 대족大族이었네
族大而振하니
종족이 커지고 명성을 떨쳤으니
自公顯聞이라
공으로부터 크게 드러나 알려진 것이라네
公初奮躬
공이 처음 입신立身한 것은
以學以文이라
학문學文을 통해서라네
逢國多事하야
국가가 다사다난할 때를 만나
有勞有勤이라
부지런히 힘쓴 노고가 있었네
利歸于邦하고
이익은 국가로 돌리고
怨不避身하니
원망은 피하지 않았으니
帝識其忠하야
황제가 공의 충심을 알고서
謂堪予弼이라
나를 보필할 수 있겠다 여겼네
俾副樞機
공에게 추밀부사樞密副使를 맡김에
出入惟密이라
출입할 때에 오직 엄밀하였고
遂參政事하니
마침내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니
實有謀謨
실로 훌륭한 계책이 있었네
誰中止之하야
누가 중도에 공을 그치게 하여
不俾相予
나를 돕지 못하게 하였는가
帝有褒章하니
황제가 이에 포장褒章하였으니
愍飾之贈이라
애도하여 높은 증직贈職시호諡號를 하사한 것이라네
長于百寮하니
백관들 중에 으뜸이 되었으니
考德惟稱이라
덕행을 상고해보면 걸맞구나
維古載功
옛날에 공적을 기록하던 것은
在其廟器러니
종묘宗廟제기祭器에 있었는데
今亦有銘하니
지금은 또한 이 있으니
幽宮是閟로다
무덤 속에 묻는도다
唐荊川曰
당형천唐荊川이 말하였다.
純雅之文이라
순아純雅한 글이다.”
역주
역주1 : 이 글은 歐陽脩 나이 53세인 嘉祐 4년(1059)에 지은 것이다. 王公은 王堯臣으로 자는 伯庸, 시호는 文安이다. 進士試에 제1등으로 급제했으며 벼슬은 三司使, 樞密副使를 거쳐 戶部侍郞 參知政事에 이르렀다. 《宋史》 〈王堯臣傳〉에 “추밀부사로 3년 동안 재임하면서 僥倖으로 벼슬을 얻는 것을 힘써 억제하였다. 이에 어떤 사람이 익명의 글을 경성에 두루 붙였으나 仁宗이 王堯臣을 의심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역주2 太原祁 : 太原府 祁縣으로 지금의 安徽省에 속한다.
역주3 輝州 : 治所는 지금의 河南 單縣에 있었다.
역주4 碭山 : 縣의 이름으로 지금의 安徽省에 속한다.
역주5 : 州의 이름으로 治所는 지금의 河南 商丘에 있었는데, 碭山縣의 서쪽에 있다.
역주6 宋州之虞城 : 지금의 河南 虞城에 있었다.
역주7 郭皇后廢 : 郭皇后는 본래 仁宗의 皇后였는데, 당시에 尙美人과 楊美人이 인종에게 총애를 받고 있어 서로 여러 번 분쟁이 있었다. 하루는 尙氏가 인종 앞에서 郭后를 비난하자 郭后가 화가 나 그녀의 뺨을 때리다가 실수로 인종을 때리게 되었다. 이 일로 인해 인종이 크게 화가 나자 이 틈을 타 閻文應이 폐위를 도모하였고 평소 원한이 있던 呂夷簡이 적극 폐위를 주장하여 결국 폐위되었다.
역주8 元昊反 : 宋 仁宗 寶元 元年(1038)에 西夏의 趙元昊가 스스로를 大夏皇帝라 칭하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 일을 두고 한 말이다.
역주9 是時……任福等戰死 : 慶曆 元年(1041)에 任福이 好水川에서 趙元昊의 군대에 대패하였는데 任福 등 전사자가 6,000여 명이나 되었다. 《宋史 仁宗紀》 好水川은 지금의 寧夏 隆德縣 경계에 있었다.
역주10 范文正公……知耀州 : 본서 권23 〈資政殿學士戶部侍郞文正范公神道碑銘〉에 이 내용이 자세하다.
역주11 將不中御 兵法也 : 《孫子》 〈九變〉에 “군주의 명령을 받지 않는 경우가 있다.[君命有所不受]” 하였고, 《史記》 〈孫子列傳〉에 “장수가 군중에 있을 적에는 군주의 명령을 받지 않는 경우가 있다.[將在軍 君命有所不受]” 하였다.
역주12 置德順軍於籠竿城 : 《宋史》 〈仁宗紀〉에 “慶曆 3년(1043)에 渭州의 籠竿城에 軍을 설치하였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軍은 德順軍을 가리킨다. 德順軍은 治所가 현재 甘肅 靜寧縣 동쪽에 있다.
역주13 德勝寨兵……閉城叛 : 王堯臣이 安撫涇原路가 되어 涇原 등 5州의 營田을 폐지하고 그곳에 弓手를 모집하여 그들에게 밭을 주어 직접 경작하며 그곳을 지키게 하였는데 將帥들이 그들의 땅을 조금씩 침탈하고 빼앗았다. 이에 그곳의 궁수들이 노하여 姚貴를 겁박하여 성문을 닫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 일을 두고 한 말이다. 《宋史 王堯臣傳》
역주14 內藏 : 內庫라고도 하는데 궁내의 창고를 말한다.
역주15 流庸 : 가난으로 인해 자신의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품삯을 받고 일을 하던 사람을 가리킨다.
역주16 群牧使 : 송나라 때에 중앙에 群牧使制置使를 신설하였는데 이 관직의 簡稱이다. 국가에서 사용하는 馬匹의 牧養 및 繁殖 등의 일을 관장하였는데 주로 大臣이 겸임하였다.
역주17 房錢 : 방을 빌려주고 받는 방값을 이른다.
역주18 益利夔三路 : 益州路, 利州路, 夔州路를 가리킨다. 益州路는 바로 成都府路를 가리키는데 宋 咸平 4년(1001)에 西川路를 나누어 설치하였고 嘉祐 4년(1059)에 成都府路로 개명하였다. 利州路는 宋 咸平 4년에 설치하였는데 治所는 興元府에 있다. 夔州路는 宋 咸平 4년에 설치하였는데 治所는 夔州에 있다.
역주19 鹽井 : 소금이 생산되는 우물을 말한다. 중국의 四川 및 雲南 일대에 鹽井이 많이 있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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