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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3)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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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記先春亭하되 却本堤하고 次之以賓客之館而後 及亭하야 以周單子之言論으로 爲案하니 所謂以經飾吏治
歐陽公之文亦然하니라
景祐三年秋 淸河張侯 以殿中丞으로 來守泗上하야
旣至 問民之所素病하야 而治其尤暴者하니 曰暴莫大於淮
越明年春 作城之外堤하야 因其舊而廣之하니 度爲萬有九千二百尺이요 用人之力 八萬五千이라
泗之民曰 此吾利也 而大役焉이라
然人力出於州兵하고 而石出乎南山하야 作大役而民不知하니 是爲政者之私我也
不出一力而享大利 不可라하야 相與出米一千三百石하야 以食役者러라
堤成 高三十三尺이요 土實石堅하야 捍暴備災 可久而不壞
曰 泗 賓客之至者有禮라하야
於是 因前之亭新之하야 爲勞餞之所하야이라하고
且推其美於前人而志邦人之思也하고
又曰 泗 天下之水會也 歲漕必廩於此라하야
於是 治常豐倉西門二夾室하야
一以視出納하야 曰某亭이라하며 一以爲舟者之寓舍하야 曰通漕亭이라하고
然後曰 吾亦有所休乎인저하고 乃築州署之東城上爲先春亭하야 以臨淮水而望西山하다
是歲秋 予貶夷陵하야 過泗上할새 於是 知張侯之善爲政也
昔周聘楚而過陳할새 見其道穢而川澤不陂梁하고 客至不授館하며 羈旅無所寓하고 遂知其必亡하니
蓋城郭道路旅舍寄寓이요하야 以爲禦備
今張侯之作也 先民之備災而及于賓客往來하고
然後思自休焉이라 故曰 善爲政也
先時 歲大水하야 州幾溺이라
前司封員外郞張侯夏守是州 築堤以禦之하니 今所謂因其舊者是也 是役也
堤爲大 故余記其大者詳焉이라
唐荊川曰
此作 雖亭記 而記堤爲詳하니 重其大者也
作亭 旣不詳이라 故不解先春之意


07. 사주泗州선춘정先春亭에 대한 기문記文
선춘정先春亭에 대해 기문記文을 쓰되 도리어 제방에 근본을 두고 빈객의 객관을 다음으로 이야기한 뒤에 정자에 대해 말하여 나라 단자單子언론言論으로 주안主案을 삼았으니, 이른바 으로써 지방관의 다스림을 윤색했다는 것이다.
구양공歐陽公의 문장 또한 그러하다.
경우景祐 3년 가을에 청하淸河 장후張侯전중승殿中丞으로 와서 사주泗州의 수령이 되었다.
이곳에 도착하자 백성들이 평소 폐해로 여기던 것을 묻고서 그중에 가장 큰 폐해를 다스렸으니, 가장 큰 폐해는 회수淮水가 범람하는 것보다 큰 것이 없었다.
이듬해 봄에 성의 바깥 제방을 만들어 옛 제방에다 그 규모를 확장하니 길이가 19,200이었고 인력人力을 쓴 것이 85,000명이었다.
사주泗州의 백성들이 말하기를 “이는 우리에게 이로운 일이지만 큰 역사役事이다.
그러나 사주泗州의 군사를 내어 인력으로 쓰고 남산南山에서 돌을 캐내어 큰 역사役事를 일으켰는데도 백성은 역사役事를 일으켰는지조차 알지 못하니, 이는 정사를 펴는 사람이 우리를 보살펴준 것이다.
그러니 작은 힘도 보태지 않고 큰 이익을 누리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하고는 서로 함께 쌀 1,300을 내어 역부役夫들을 먹였다.
제방이 완성되자 높이는 33이고, 흙은 튼튼하고 돌은 단단하여 재해를 대비하면서 오래 지나도 무너지지 않을 만하였다.
이윽고 말하기를 “사주泗州는 사방으로 길이 통하는 고을인지라 빈객이 이르는 경우 가 있어야 한다.”라고 하고는,
이에 이전에 있던 장후당蔣侯堂의 정자를 새로 수리하여 위로하고 전송하는 장소로 만들고는 사소정思邵亭이라 명명하고,
전인前人에게 아름다움을 미루고 이 고을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뜻을 기록하였다.
또 말하기를 “사주泗州는 천하의 물이 모이는 곳인지라 해마다 조곡漕穀을 반드시 여기에 보관한다.”라고 하여,
이에 상풍창常豐倉 서쪽 문 두 개의 협실夾室을 수리하여
하나는 출납을 맡게 하고는 모정某亭이라 이름하고, 하나는 뱃사람들이 머물 곳으로 삼아서 통조정通漕亭이라 하였다.
그런 뒤에 말하기를 “나도 쉴 곳이 있어야겠다.”라고 하고는, 이에 이 고을 관청 동쪽 위에 선춘정先春亭을 지어서 회수淮水를 굽어보고 서산西山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였다.
이해 가을에 내가 이릉夷陵으로 폄적되어 임지로 갈 때에 사천泗川 가를 지나갔는데, 이에 장후張侯가 정사를 잘했음을 알았다.
옛날 나라 단자單子나라에 빙문聘問 가면서 나라를 지나갈 때에 나라의 도로가 더럽고 강과 못에 제방과 다리가 없으며 객이 이르러도 숙소를 마련해주지 않으며 나그네가 머물 곳이 없음을 보고서 나라가 필시 망할 것임을 알았다.
대개 성곽城郭도로道路객관客館여사旅舍는 모두 삼대三代에 정사를 폈던 법이고, 《주례周禮》에서는 더욱 이 제도를 삼가 드러내 재해를 대비하는 곳으로 삼았다.
지금 장후張侯가 태수가 되었을 때에 백성들이 재해를 대비할 수 있게 제방을 먼저 만들었고 다음으로 빈객賓客들이 왕래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런 뒤에야 스스로 휴식할 곳을 생각하였으므로 정사를 잘했다고 말한 것이다.
이보다 앞선 시기에 해마다 큰 홍수가 발생하여 사주泗州가 거의 물에 잠겼다.
사봉원외랑司封員外郞 장하張夏가 이 고을에 수령이 되었을 때에 제방을 쌓아 홍수를 막았으니, 지금 이른바 옛 제방에다 그 규모를 넓혔다는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역사役事에 제방이 큰일이기 때문에 내가 큰일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당형천唐荊川이 말하였다.
“이 작품은 비록 정자에 관한 기문이지만 제방을 기록한 것이 상세하니, 그중 큰일을 중하게 여긴 것이다.
정자를 지은 내력이 이미 자세하지 않기 때문에 정자 이름인 선춘先春의 뜻을 풀이하지 않았다.”


역주
역주1 : 이 글은 景祐 3년(1036) 5월에 지은 것이다. 이때에 范仲淹이 國事를 함부로 논했다는 죄를 받고 睦州로 좌천되었는데, 歐陽脩가 高若訥에게 편지를 보내어 간언을 하지 않은 데 대해 책망하였다. 이 일로 인해 歐陽脩는 夷陵縣令으로 좌천되었는데, 부임지로 갈 때에 泗川을 경유하였다.
역주2 四達之州 : 泗州는 경내에 淮河와 泗水가 있으니 宋나라 때에 漕運이 반드시 경유하는 곳이었고, 京都와 동남쪽의 여러 州들과 연결되는 중요한 교통요충지이다.
역주3 蔣侯堂 : 蔣堂을 가리킨다. 字는 希魯, 常州 宜興 사람이다. 宋 眞宗 때에 臨安太守를 지냈고, 益州刺史가 되어서는 節儉을 숭상하여 백성의 생활을 넉넉하게 하는 데 힘썼다. 《宋史 권298 蔣堂列傳》
역주4 思邵亭 : 邵는 周나라 때의 邵公을 가리키는데, 邵公이 西伯이 되어 善政을 베풀었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추모한 나머지 그가 잠시 그늘 아래 쉬었던 甘棠나무를 기념하여 잘 가꾸며 보존하는 한편, 甘棠나무를 노래로 지어 불렀다는 고사가 있다. 즉 邵公을 그리워하는 정자라는 말로 蔣堂을 邵公에 비유한 것이다. 그러므로 뒤에 “前人에게 아름다움을 미루었다.[推其美於前人]”라는 말을 한 것이다.
역주5 單子 : 單襄公을 가리키는데, 뒤의 본문에 나오는 내용은 《國語》 〈周語 中〉에 수록되어 있다.
역주6 三代爲政之法 : 城郭과 道路와 客館과 旅舍의 좋고 나쁨은 고대에 정사를 펴는 사람들이 국가 정치의 득실을 살피는 중요한 수단이었다는 말이다.
역주7 周官尤謹著之 : 周官은 《周禮》를 가리키는데, 《周禮》에 城郭과 道路와 客館과 旅舍 등에 관한 제도가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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