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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3)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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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2. 《시보詩譜》의 망실된 부분을 보충補充한 데 대한 후서後序
公於詩譜補亡하니 非獨見公之潛心六藝之學이요 又可幷見公之不沒鄭氏之善如此로다
구양공歐陽公이 《시보詩譜》의 망실된 부분을 보충補充하였으니, 육예六藝의 학문에 잠심潛心하였음을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이 이와 같이 정씨鄭氏의 좋은 부분을 없애지 않았음을 아울러 볼 수 있다.
歐陽子曰
구양자歐陽子는 말한다.
昔者聖人已沒 六經之道 幾熄於戰國而焚棄於秦이러니 自漢已來 收拾亡逸하고 發明遺義하야 而正其訛繆하야 得以粗備하니
옛적에 성인聖人께서 돌아가신 뒤에, 육경六經전국戰國시대 때 거의 소멸되고 나라 때 분서焚書의 화를 당하였는데, 나라 이래로 망실된 것을 수습하고 남겨진 뜻을 발명하여 그 오류를 바로잡아 대강이나마 육경의 모습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傳于今者 豈一人之力哉
그러니 〈육경의 도가〉 지금 세상에 전해진 것이 어찌 한 사람의 힘이겠는가.
後之學者 因迹前世之所傳하야 而較其得失 或有之矣어니와 若使徒抱焚餘殘脫之經하야 倀倀於去聖千百年後하야 不見先儒中間之說하고 而欲特立一家之學者 果有能哉
후세의 학자가 이로 인해 전세前世에서 전한 것을 좇아 그 득실得失을 비교할 수는 있겠지만, 가령 한갓 타고 남은 잔결殘缺된 경전을 가지고서 성인聖人의 시대에서 천백 년이 떨어진 시점에서 갈팡질팡하면서 선유先儒들이 그 사이에 남긴 학설은 보지 않고 혼자서 일가一家의 학문을 세우고자 하는 것이 과연 가능하겠는가.
吾未之信也로라
나는 그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然則先儒之論 苟非詳其終始而牴牾하고 質於聖人而悖理害經之甚하야 有不得已而後改易者 何必徒爲異論以相訾也리오
그렇다면 선유先儒가 남긴 논설이 진실로 그 시종始終을 자세히 따져볼 적에 모순되며, 성인聖人의 표준에 질정하였을 적에 이치를 어그러뜨리고 경전의 뜻을 손상시킴이 심하여, 부득이한 점이 있은 뒤에 고치는 것이 아니라면 어찌 한갓 이론異論을 제기하여 헐뜯을 필요가 있겠는가.
於詩 其學亦已博矣
모씨毛氏정씨鄭氏는 《시경詩經》에 있어서 그 학문이 또한 이미 넓다.
予嘗依其箋傳하야 考之於經而證以序譜하니 惜其不合者頗多
내가 일찍이 그들의 주석에 의거하여 《시경》을 고찰해보고 모씨毛氏의 《모서毛序》와 정씨鄭氏의 《시보詩譜》로 증험해보니 안타깝게도 합치하지 않는 점이 퍽 많았다.
蓋詩述商周하야 上陳稷契하고 下迄千五六百歲之間하고 旁及列國君臣世次國地山川封域圖牒鳥獸草木魚蟲之名與其風俗善惡方言訓詁盛衰治亂美刺之由 無所不載
대개 나라와 나라 때의 일을 기술하여 〈생민生民〉과 〈현조玄鳥〉로부터 위로는 의 일을 말하고 아래로는 영공靈公의 시기까지 천오륙백 년의 기간에 이르렀으며, 곁으로는 열국列國 군신君臣들의 세차世次와 영토와 산천山川분봉分封강역疆域도첩圖牒조수鳥獸초목草木어충魚蟲의 이름 및 그 풍속의 좋고 나쁨과 방언方言에 대한 훈고訓詁성쇠치란盛衰治亂에 대한 칭탄과 풍자의 연유에 이르기까지 기록하지 않음이 없었다.
然則孰能無失於其間哉
그렇다면 누군들 이렇게 방대한 내용 속에서 실수가 없을 수 있겠는가.
予疑毛鄭之失 旣多 然不敢輕爲改易者 意其爲說不止於箋傳而已 恨不得盡見二家之書하야 未能徧通其旨로다
내가 의심컨대 모씨와 정씨의 오류가 이미 많으나 감히 가벼이 고치지 못하는 것은, 생각건대 그들의 학설이 지금 남아 있는 주석에 그치고 말 뿐이 아니기 때문이니, 두 사람의 글을 다 볼 수 없어서 그들의 뜻에 두루 통할 수 없는 점이 한스럽도다.
夫不盡見其書而欲折其是非 猶不盡人之辭而欲斷其訟之曲直이니 其能果於自決乎
대저 그 글을 다 보지 않고서 시비是非를 가르려고 하는 것은 남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서 송사訟事의 시비를 결단하려는 것과 같으니, 어찌 스스로 판결하기를 과감하게 할 수 있겠는가.
其能使之必服乎
그리고 다른 사람이 자신의 학설에 반드시 복종하게 할 수 있겠는가.
世言鄭氏詩譜最詳이라하야늘 求之久矣로되 不可得이요祕書所藏에도 亦無之러니
세상에서 말하기를 “정씨의 《시보》가 가장 상세하다.”라고 하기에 그 책을 구한 지 오래되었지만 얻을 수가 없었고, 《숭문총목崇文總目》의 비서祕書 소장 목록에도 《시보》는 없었다.
慶曆四年 奉使河東하야 至于絳州하야 偶得焉하니 其文有注而不見名氏
그러다가 경력慶曆 4년(1044)에 사명을 받들고 하동河東으로 가다가 강주絳州에 이르러 우연히 《시보》를 얻어 보니, 그 글에 가 달려 있고 작자의 명씨名氏는 보이지 않았다.
然首尾殘缺하야 自周公致太平已上皆亡之
그러나 수미首尾가 결락되어 “주공이 태평을 이루었다.[주공치태평周公致太平]” 부분 이상은 모두 망실되어 있었다.
尤易爲訛舛하야 悉皆顚倒錯亂하야 不可復考
그리고 그 국보國譜방행旁行은 더욱 착오가 생기기 쉬워서 모두 다 뒤바뀌고 어지럽게 섞여 있어 다시 고찰할 수가 없었다.
凡詩雅頌 兼列商魯하고 十有四國이로되 而其次莫詳其義
무릇 《시경》의 에는 나라와 나라의 것이 겸하여 실려 있고, 정풍正風변풍變風이 14개 나라인데 그 편차한 뜻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 수 없다.
惟封國變風之先後 不可以不知
그러나 오직 열국列國분봉分封과 변풍이 된 순서는 몰라서는 안 된다.
주남周南〉-〈소남召南〉-〈〉-〈〉은 모두 나라에서 나왔고, 〈〉-〈〉은 나라에 귀속되고, 〈〉-〈〉는 사서史書에 〈세가世家〉가 없다.
其可考者
고찰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陳齊衛晉曹鄭秦 此封國之先後也 豳齊衛檜陳唐秦鄭魏曹 此變風之先後也 周南召南邶鄘衛王鄭齊豳秦魏唐陳曹 此孔子未刪詩之前周太師樂歌之次第也 周召邶鄘衛王檜鄭齊魏唐秦陳曹豳 此鄭氏詩譜次第也 黜檜後陳 此今詩次第也
〉-〈〉-〈〉-〈〉-〈〉-〈〉-〈〉은 열국列國분봉分封된 순서이고, 〈〉-〈〉-〈〉-〈〉-〈〉-〈〉-〈〉-〈〉-〈〉-〈〉는 변풍變風이 된 순서이고, 〈주남周南〉-〈소남召南〉-〈〉-〈〉-〈〉-〈〉-〈〉-〈〉-〈〉-〈〉-〈〉-〈〉-〈〉-〈〉는 공자孔子께서 를 산정하시기 전에 나라의 악관樂官태사太師악가樂歌를 배열한 순서이고, 〈주남周南〉-〈소남召南〉-〈〉-〈〉-〈〉-〈〉-〈〉-〈〉-〈〉-〈〉-〈〉-〈〉-〈〉-〈〉-〈〉은 정씨가 《시보》를 편찬할 때의 순서이고, 〈〉와 〈〉을 뒤쪽으로 빼서 편차한 것은 지금 현재 《시경詩經》의 순서이다.
予未見鄭譜하고 嘗略考春秋史記本紀世家年表하고 而合以毛鄭之說하야 爲詩圖十四篇이라
애초에 내가 정씨鄭氏의 《시보詩譜》를 보기 전에 일찍이 《춘추春秋》와 《사기史記》의 〈본기本紀〉‧〈세가世家〉‧〈연표年表〉를 대략 참고하고 모씨와 정씨의 설을 합쳐서 《시도詩圖》 14편을 만들었다.
今因取以補鄭譜之亡者하니 足以見二家所說世次先後 甚備
지금 《시도》를 취하여 정씨의 《시보》에서 망실된 부분을 보충하니, 모씨와 정씨가 말했던 세차世次의 순서가 매우 갖추어졌음을 충분히 볼 수 있다.
因據而求 其得失較然矣 而仍存其圖하야 庶幾以見予於鄭氏之學 盡心焉耳
여기에 의거하여 구하면 그 득실이 분명해질 것이기 때문에 《시도》를 그대로 남겨두어 내가 정씨의 학문에 마음을 다한 사실을 보이노라.
夫盡其說而有所不通然後 得以論正이니 予豈好爲異論者哉
대저 그 말을 다하고서도 통하지 않는 부분이 있은 연후에 논정論正할 수 있는 것이니, 내 어찌 이론異論을 세우기 좋아하는 자이겠는가.
凡補其譜十有五 補其文字二百七이요 增損塗乙改正者三百八十三 而鄭氏之譜復完矣
무릇 보계譜系를 보충한 곳이 15부분이요, 글자를 보충한 곳이 207부분이요, 증감하고 수정하고 개정한 곳이 383부분이니, 이에 정씨의 《시보》가 다시 완전해졌다.
역주
역주1 : 이 서문은 熙寧 3년(1070)에 지은 것이다. 《詩譜》는 漢나라 鄭玄이 지은 것으로 《詩經》의 각 國風, 大雅, 小雅, 頌에 관계가 있는 史實을 차례로 서술한 책이다. 唐나라 때 孔穎達이 편찬한 《毛詩正義》에서 각 부분의 머리말 형식으로 《詩譜》의 해당 부분을 나누어 편재하였고, 원래 독립된 책으로서의 《詩譜》는 失傳되었다.
역주2 毛鄭 : 毛는 毛氏를 가리키는데 누구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前漢 때 인물인 毛亨과 毛萇으로 추정하여 《毛詩》와 《毛詩詁訓傳》의 저자로 이들을 지목하기도 하지만 확정적인 것은 아니다. 鄭은 後漢의 經學家인 鄭玄(127~200)을 가리킨다. 《毛詩》에 주석을 달았다.
역주3 生民玄鳥 : 〈生民〉과 〈玄鳥〉는 모두 《詩經》의 편명이다. 〈생민〉은 郊祭를 지낼 때 불렸을 것으로 여겨지며 〈大雅〉에 실려 있는데, 炎帝의 후손인 姜嫄이 郊禖에 제사하다가 大人의 발자국을 보고 그 엄지 부분을 밟고서는 胎氣를 느껴 周나라의 시조인 稷을 낳았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현조〉는 商 高宗인 武丁을 제사하는 詩로 〈商頌〉에 실려 있는데, 高辛氏의 妃이며 有娀氏의 딸인 簡狄이 郊禖에 제사 지낼 적에 제비가 떨어뜨려준 알을 삼키고 태기를 느껴 商나라의 시조인 契을 낳았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역주4 陳靈公 : 春秋시대 陳 宣公의 증손으로 이름은 平國이며 재위 기간은 15년이다. 〈詩譜序〉에 “孔子께서 懿王과 夷王 때의 시를 기록하고 진 영공의 음란한 일에까지 미치셨으니, 이를 일러 變風과 變雅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진 영공의 음란한 일은 《詩經》의 〈陳風 澤陂〉에 실려 있는데, 진나라 대부 夏御叔의 아내 夏姬가 영공을 비롯하여 대부인 孔寧‧儀行父와 간통한 일을 기록하였다.
역주5 崇文總目 : 宋나라 때 王堯臣 등이 편찬한 장서 목록이다. 송나라 초기에 昭文館, 史館, 集賢院 등의 三館을 설치하여 藏書를 보관하다가, 후에 또 崇文院을 세워서 三館新修書院이라 불렀다. 景祐 원년(1034)에 왕요신 등에게 명하여 三館과 祕閣에 소장된 장서 목록을 만들어 66권으로 편찬한 것이 바로 《숭문총목》이다. 당시에 歐陽脩 또한 編定에 참여하였다.
역주6 國譜旁行 : 國譜는 列國의 譜系를 말하고, 旁行은 傍系의 뜻으로 嫡孫 이외의 支孫들의 譜系를 말한다.
역주7 正變之風 : 正風과 變風을 말한다. 각국의 風謠 가운데 〈周南〉과 〈召南〉이 바른 道를 노래한 정풍에 해당한다. 변풍은 도가 쇠퇴하여 그 쇠퇴한 상황을 반영한 國風들을 가리킨다. 〈詩大序〉에 “왕도가 쇠하고 예의가 폐해지고 정교가 실추되고 나라마다 정사를 달리하고 집집마다 풍속을 달리하는 데에 이르러 변풍과 변아가 생겼다.[至于王道衰 禮儀廢 政敎失 國異政 家殊俗 而變風變雅作矣]”라고 하였다.
역주8 (皆)[比] : 저본에는 ‘皆’로 되어 있으나, 본집에 의거하여 ‘比’로 바로잡았다.
역주9 周召王豳同出於周 邶鄘幷於衛 : 《詩經集傳》 각 國風의 첫머리에 붙은 말을 참고하면, 〈周南〉에서 周는 國名이고 南은 남방의 제후국을 가리키는 것으로, 周나라 國中에서 얻은 것에 南國의 시를 섞어 〈周南〉이라 이른 것이다. 이는 곧 天子의 나라로부터 諸侯國에 風化가 입혀졌고 단지 國中뿐만이 아님을 말한 것이다.
〈召南〉에서 召는 地名으로 周 文王의 아들이자 武王의 아우인 召公 奭의 采邑이다. 〈召南〉은 南國에서 얻은 것을 곧바로 가리킨 것으로, 方伯의 나라로부터 南方에 風化가 입혀져 감히 天子의 나라에 잇댈 수 없으므로 〈召南〉이라 이른 것이다.
〈王〉은 周나라의 東都인 洛陽을 가리킨다. 周 幽王이 褒姒를 총애하여 褒姒의 아들 伯服을 태자로 세우려고 申后와 태자 宜臼를 폐출하였다. 이에 宜臼가 申나라로 도망쳤고 申侯가 분노하여 犬戎과 함께 周나라를 쳐서 幽王을 시해하였다. 이후 宜臼가 왕이 되니 이 사람이 平王으로 이때 洛陽으로 천도하였고 이로부터 王室의 권위가 떨어져 제후와 다름이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王〉은 雅가 아니라 風에 속하였다. 그러나 王의 칭호는 변하지 않았으므로 周라고 하지 않고 〈王〉이라고 말한 것이다.
〈豳〉은 國名으로 周나라의 선조인 公劉가 세운 나라이다. 周 武王이 죽고 어린 成王이 즉위하였는데 나이가 어려 정무를 수행하기 어려우므로 周公 旦이 섭정하면서 后稷과 公劉의 교화를 서술하여 시 한 편을 지어 成王을 경계하니 이것이 〈豳〉이다. 後人들이 周公이 지은 것과 周公을 위해 지은 시를 취해서 여기에 붙였다. 이상이 〈周南〉-〈召南〉-〈王〉-〈豳〉은 모두 周나라에서 나왔다고 한 연유이다.
周 武王이 商 紂王을 이기고 그 도읍인 朝歌로부터 땅을 나누어 朝歌 이북을 邶, 남쪽을 鄘, 동쪽을 衛라고 불렀다. 邶와 鄘이 봉해진 시기는 상세하지 않고 衛는 武王의 아우인 康叔의 나라였다. 邶와 鄘이 언제 衛나라에 병합되었는지도 상세하지 않으나, 〈邶〉와 〈鄘〉의 시들은 모두 衛의 일들이다. 이상이 〈邶〉-〈鄘〉은 衛나라에 귀속된다고 한 연유이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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