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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3)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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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1. 태자태사로 치사한 두기공의 묘지명
法度嚴整이라
법도가 엄정嚴整하다.
故 太子太師致仕祁國公 贈司徒兼侍中杜公이요 世昌이니
태자태사太子太師치사致仕기국공祁國公이자 사도司徒 겸시중兼侍中에 추증된 두공杜公이고 세창世昌이니 월주越州 산음山陰 사람이다.
其先 本出於堯之後하야 歷三代 常爲諸侯라가 後徙其封于하니 而子孫散適他國者 以杜爲氏러라
그 선조는 본래 임금의 후손에게서 나와 3대를 거치면서 줄곧 제후가 되었다가 뒤에 이봉移封되니 다른 나라로 흩어져 간 자손들이 를 삼았다.
두혁杜赫이 처음 나라의 장군將軍이 되고 나서, 3대 뒤에 어사대부御史大夫 두주杜周 및 그 아들 건평후建平侯 두연년杜延年나라 때 이어서 현달顯達하였고, 다시 9대를 지나 당양후當陽侯 두예杜預나라 때 현달하였다.
又十有四世 하고 又九世而至于祁公하다
그리고 다시 14대를 지나 기국공岐國公 두우杜佑나라 때 현달하였고, 또 9대를 지나 기공祁公에 이르렀다.
공이 집안을 다스림은 법도가 있어 그 길흉吉凶제사祭祀, 재계齋戒일시日時, 폐축幣祝종사從事를 한결같이 그 가서家書를 준용하였다.
自唐滅 士喪其舊禮하야 而一切苟簡이어늘 獨杜氏守其家法하야 不遷于世俗하니
나라가 멸망하고 나서 선비들이 옛 예법을 상실하여 모든 일이 구차하고 간략하였는데, 두씨杜氏만이 그 가법家法을 지켜 세속에 휩쓸리지 않았다.
蓋自春秋諸侯之子孫으로 歷秦漢千有餘歲 得不絶其世譜하고 而唐之盛時公卿家法存於今者 惟杜氏러라
춘추春秋시대 제후諸侯자손子孫에서부터 나라와 나라 천여 년을 지나도록 그 세보世譜를 단절시키지 않고 나라가 전성全盛할 때 공경公卿가법家法이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는 경우는 오직 두씨杜氏뿐이었다.
公自曾高以來 以恭儉孝謹으로 稱鄕里러니 이라
공의 가문은 증조부와 고조부 이래로 공검恭儉효근孝謹으로 향리鄕里에서 일컬어졌는데, 공에 이르러서는 사람됨이 더욱 청렴하고 자신에게 엄격하였다.
공이 대신이 되어서는 윗사람을 섬길 때에는 속이지 않음을 충성으로 여겼고 이를 타인에게 미루어 실행할 때에는 몸소 본보기를 보이는 것으로 신뢰를 얻었다.
故其動靜纖悉 謹而有法이나 至考其大節하얀 偉如也
그래서 모든 행동거지가 근후하면서도 법도가 있었으나 그 큰 절개를 살펴보게 되면 이룬 것이 우뚝하였다.
公享年八十이요 官至尙書左丞이라
공은 향년享年 80세였고 관직은 상서좌승尙書左丞에 이르렀다.
方其六十有九하야 歲且盡 卽上書告老하다
69세가 되어 한 해가 끝날 무렵 상소하여 치사할 것을 청하였다.
明年以太子少師致仕하고 累遷太子太保太傅太師하고 封祁國公於其家하다
이듬해 태자소사太子少師치사致仕하고 여러 차례 승진하여 태자태보太子太保, 태부태사太傅太師으로 옮기고 물러나 집에 있을 때 기국공祁國公에 봉해졌다.
天子祀明堂할새 遣使者召公陪祠하야 將有所問하니 以疾不至어늘
천자께서 명당明堂에 제사 지내실 적에 사자使者를 보내 공을 불러 제사를 배행陪行하게 하여 자문諮問하시려고 하였는데 공은 질병으로 이르지 못하였다.
而歲時存問하고 勞賜不絶하다
그런데 세시歲時마다 안부를 묻고 위로하고 하사하시는 것이 끊이지 않았다.
하고 遷河東京西路提點刑獄 知揚州 河東陝西路轉運使하고
공은 젊어서 진사시進士試에 높은 등수로 급제하여 양주관찰추관揚州觀察推官 지평요현知平遙縣 통판진주通判晉州 지건주知乾州를 지내고, 하동河東경서로제점형옥京西路提點刑獄 지양주知揚州 하동河東섬서로전운사陝西路轉運使로 옮겼다.
하고 러니 未行 以爲河北路都轉運使하야 遂知이라
조정에 들어와 삼사호부부사三司戶部副使가 되었고 천장각대제天章閣待制 지형남부知荊南府에 배수되었는데 미처 부임하기 전에 하북로도전운사河北路都轉運使가 되어 마침내 지천웅군知天雄軍이 되었다.
조정에 불려가서 어사중승御史中丞 판유내전判流內銓 지심관원知審官院이 되고 추밀직학사樞密直學士 지영흥군知永興軍에 배수되었고 지병주知幷州로 옮기고 용도각학사龍圖閣學士 겸지영흥군兼知永興軍 권지개봉부權知開封府로 옮겼다.
康定元年 以刑部侍郞 同知樞密院事 卽拜副使하다
강정康定 원년元年(1040)에 형부시랑刑部侍郞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서 곧바로 부사副使에 배수되었다.
慶曆三年 遷吏部侍郞 樞密使하고 明年以本官으로 同中書門下平章事러라
경력慶曆 3년(1043)에 이부시랑吏部侍郞 추밀사樞密使로 옮기고 이듬해 본관本官으로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었다.
公治吏事 如其爲人하야 其聽獄訟 雖明敏이나 而審覈愈精이라
공은 공무를 처리하는 것이 그 사람됨 그대로여서 옥송獄訟을 판결하는 것이 비록 명민明敏하였으나 사실을 조사하여 밝히는 것이 더욱 정밀하였다.
故屢決疑獄 人以爲神이러라
그래서 여러 차례 의심스러운 옥사獄事를 판결하자 사람들이 신명神明과 같다고 여겼다.
其簿書出納 推析毫髮하되 終日無倦色하고 至於條目하얀 必使吏不得爲姦而已 及其施於民者하얀 則簡而易行이러라
장부를 출납할 때에는 작은 부분까지 헤아려보고 분석하되 종일토록 피곤한 기색이 없었고 조목條目들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아전으로 하여금 간사한 짓을 하지 못하게 할 따름이었고, 백성들에게 시행하는 일에 있어서는 간편하고 쉽게 행할 수 있었다.
始居平遙하야 嘗以吏事適他州러니 而縣民爭訟者 皆不肯決하야 以待公歸러라
처음 평요平遙에 있으면서 일찍이 공무로 다른 에 갔는데 송사를 다투는 의 백성들이 모두 판결을 받으려고 하지 않고서 공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知乾州하야 未滿歲 安撫使察其治行하야 以公權知鳳翔府하니 二邦之民 爭於界上하야 一曰 此我公也어늘 汝奪之라하고 一曰 今我公也 汝何有焉이리오하다
지건주知乾州가 되어 한 해를 채우기도 전에 안무사安撫使가 공의 치적治積을 살피고서 공을 권지봉상부權知鳳翔府로 삼으니, 두 지방의 백성들이 자기 고을의 경계에서 다투어, 한쪽은 이분은 우리 공인데 너희가 빼앗아간다고 하고, 다른 한쪽은 지금은 우리 공이니 너희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이냐고 하였다.
夏人初叛命 天下苦於兵이어늘 而自陝以西尤甚이라 吏緣하야 調發督迫하야 至民破産不能足하야 往往自經投水以死
서하西夏 사람이 처음 반란을 일으켰을 적에 천하 사람들이 병란兵亂에 고통을 받았는데, 섬주陝州에서부터 서쪽 지방이 더욱 심한지라 아전들이 이를 기회로 수탈하면서 징수를 독촉하여 백성들이 가산을 다 털어도 충당할 수가 없어 종종 스스로 목을 매거나 물에 몸을 던져 죽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於是時 公在永興하야 語其人曰 吾不能免汝 然可使汝不勞爾라하고
이때에 공이 영흥永興에 있으면서 그 백성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너희를 완전히 면하게 할 수는 없지만 너희로 하여금 힘들게 하지 않을 수는 있다.”라고 하고서,
乃爲之區處計較하되 量物有無貴賤 道里遠近하야 寬其期會하야 使以次輸送이라
그들을 위해 변통하여 처리할 것을 따져보되 그 지방의 형편과 물가, 운송거리를 헤아려 납부 기한을 여유롭게 하여 차례대로 수송하게 하였다.
由是 物不踴貴하고 如平時하야 而吏束手無所施하고 民比他州 費省十六七이요 至於繕治城郭器械하얀 民皆不知러라
이로 인하여 물가가 오르지 않고 수레, 소, 꼴과 숙식宿食왕래往來를 평소처럼 하여 아전들이 속수무책으로 끼어들 곳이 없었으며, 백성들이 다른 에 비해 비용을 열에 육칠을 절약하였고, 성곽과 기계를 수리하는 일에 있어서는 백성들이 모두 알지 못하였다.
開封治京師 常撓於權要하야 有干其法而能不爲之屈者 世皆以爲難이러니
개봉부開封府경사京師를 다스려서 늘 권세가들에게 간섭을 받아 그들이 법을 범하였을 때 그들에게 굴복하지 않을 수 있는 자가 있으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런 자를 얻기가 어렵다고 여겼다.
至公하야 能使權要不敢有所干이라
그런데 공에 이르러서 권세가들로 하여금 감히 법을 범하지 못하게 할 수 있었다.
凡其爲治 以聽斷盜訟爲能否爾러니 獨公始有餘力하야 省其民事 如治他州하니 皆被其惠러라
무릇 개봉부를 다스리는 일은 도송盜訟을 어떻게 판결하느냐로 유능함을 가렸을 뿐이었는데, 공만이 비로소 여력이 있어서 다른 를 다스렸던 것처럼 그 백성들의 일을 줄여주니 기적畿赤의 여러 의 백성들이 모두 그 은혜를 입었다.
開封比比出能吏로되 而兼於民政者 惟公一人이라
개봉부에 줄줄이 유능한 관리가 나왔지만 민정民政 잘 돌보는 능력을 겸비한 자는 오직 공 한 사람뿐이었다.
吏部審官 主天下吏員이로되 而居職者類以不久遷去 故吏得爲姦이러니
이부吏部심관원審官院이 천하의 관원 선발을 주관하였는데 그 직책에 있는 자들은 대부분 오래지 않아 옮겨갔으므로 아전들이 농간을 부릴 수 있었다.
公始視銓事 一日選者三人爭某闕이어늘 公以問吏하니 吏受丙賕 對曰 當與甲이면 乙不能爭이라하야늘 遂授他闕하다
공이 처음 관리에 대한 전형銓衡을 담당할 때 하루는 선발한 인원 세 사람이 어떤 빈 자리를 다투었는데, 공이 아전에게 그 일을 물으니 아전이 의 뇌물을 받았는지라 대답하기를 “에게 주면 이 다투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자 마침내 갑에게 빈 자리를 주었다.
居數日 吏敎丙訟甲負某事하니 不當得이라
며칠이 지나 아전이 으로 하여금 갑은 어떤 일에 책임이 있으니 빈 자리를 얻어서는 안 된다고 고발하게 하였다.
公悟하야 召乙問之하니 乙謝曰 業已得他闕하니 不願爭이라하니 公不得已與丙하고 而笑曰 此非吏罪
공이 깨달은 것이 있어 을을 불러 물어보니 을이 사양하기를 “이미 다른 빈 자리를 얻었으니 다투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하므로, 공이 어쩔 수 없이 병에게 주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는 아전의 죄가 아니다.
乃吾未知銓法爾로다하고 因命諸曹하야 各具格式科條以白한대
바로 내가 관리 전형하는 법도를 알지 못해서일 뿐이다.”라고 하고, 이어 제조諸曹에 명하여 각각 격식格式과조科條를 갖추어 보고하게 하였다.
問曰 盡乎아하니 曰盡矣라하야늘
이후에 묻기를 “다 보고한 것인가?”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다 보고했습니다.”라고 하였다.
明日 勅諸吏無得升堂하고 使坐曹하야 聽行文書而已
이튿날 여러 아전에게 청당廳堂에 오르지 못하도록 신칙하고 그들에게 자신의 부서[]에 앉아 공문서만 처리하게 할 뿐이었다.
由是 吏不得與銓事하고 與奪一出於公하니 居月餘 翕然聲動京師러라
이로 말미암아 아전들이 관리 전형에 간여하지 못하고 여탈與奪의 권한이 모두 공에게서만 나오니 달포 만에 모두 칭송하는 평판이 경사에 진동하였다.
其在審官 有以賄求官者어늘 吏謝不受하고 曰 我公有賢名하니 不久見用去矣
공이 심관원審官院에 있을 적에 뇌물로 관직을 구하는 자가 있었는데, 아전이 사양하고 받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우리 공이 어진 명성이 있으시니 오래지 않아 기용되어 떠나가실 것이다.
姑少待之하라하다
우선 잠시 기다리고 있으라.”라고 하였다.
경력慶曆 연간 초기에 서하西夏 정벌군이 오래도록 출병하여 백성들이 피폐해져가는 데 염증을 느껴, 서둘러 지금의 승상丞相 부공富公, 추밀樞密 한공韓公범문정공范文正公을 기용하였는데, 세 사람이 마침내 여러 일을 다 개혁하여 기강을 바로잡고자 하니 권세 있고 총애 받는 소인배들은 다 기뻐하지 않았지만 오직 공만이 세 사람의 보좌가 되어 도왔다.
而公尤抑絶僥倖하야 一切不與하야 每積至十數하면 則連封而面還之하고 或詰責其人하야 至慙恨涕泣而去러라
그런데 공은 특히 더 요행으로 벼슬하는 자들을 억눌러서 내강內降은택恩澤을 일절 주지 않고서, 매번 이런 경우가 쌓여 10여 건이 되면 한꺼번에 봉하여 면전에서 돌려주거나 혹은 해당되는 사람을 힐책하여 부끄러워하고 한스러워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떠나는 경우까지도 있었다.
上嘗謂諫官歐陽脩曰 外人知杜某封還內降邪
상이 일찍이 간관諫官 구양수歐陽脩에게 말씀하시기를 “외인外人들이 두모杜某내강內降을 봉하여 돌려보내는 것을 알고 있는가.
吾居禁中하야 有求恩澤者어든 每以杜某不可告之而止者 多於所封還也하니 其助我多矣로다
내가 금중禁中에 거하여 은택을 구하는 자가 있으면 매번 두모杜某 때문에 고하지 못하고 그만두는 경우가, 봉하여 돌려보내는 경우보다 많으니 그가 나를 도움이 많다.
此外人及杜某皆不知也라하시다
이 점은 외인 및 두모 모두 알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然公與三人者 卒皆以此罷去러라
그렇지만 공과 세 사람은 끝내 다 이 때문에 파직되어 떠났다.
公多知本朝故實하야 善決大事
공은 본조本朝고실故實을 많이 알고 있어서 대사大事를 잘 결정하였다.
邊將議欲大擧하야 以擊夏人하니 雖韓公亦以爲可擧라한대
처음에 변장邊將이 군대를 대규모로 출동하여 서하西夏를 공격하려고 논의하니 비록 한공韓公조차도 출동할 만하다고 말하였다.
公爭以爲不可하니 大臣至有欲以沮軍罪公者
그런데 공이 간쟁諫爭하여 불가하다고 아뢰니 대신大臣 가운데 군대의 사기를 떨어뜨린다는 죄목으로 공을 벌하려는 자까지 있었다.
然兵後果不得出하다
그러나 군대는 나중에 결국 출정出征하지 못하였다.
契丹與夏人 爭銀甕族하야 大戰黃河外하니 而雁門麟府皆警이라
거란과 서하 사람이 은옹족銀甕族을 다투어 황하黃河 밖에서 크게 전쟁을 벌이니 안문雁門인부麟府가 모두 경계하였다.
范文正公安撫河東하야 欲以兵從한대 公以爲契丹必不來 兵不可妄出이라하니
범문정공范文正公하동河東안무安撫하여 군대를 대동해 가려고 하였는데, 공이 거란은 반드시 오지 않을 것이니 군대를 함부로 출동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范公怒하야 至以語侵公하되 公不爲恨이라
그러자 범공范公이 노하여 말로 공을 모욕하기까지 하였으나 공은 서운하게 여기지 않았다.
나중에 거란은 끝내 오지 않았다.
二公皆世俗指公與爲朋黨者로되 其議論之際 蓋如此러라
세상 사람들이 공을 가리키면서 두 공과 모두 함께 붕당을 이루는 자라고 하였으나, 두 분 공이 의론하는 사이에 대립하는 것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及三人者將罷去하야 公獨以爲不可라가 遂亦罷하야 以尙書左丞으로 知兗州라가 歲餘乃致仕하다
세 공이 파직되어 떠나게 될 때에 미치자 공만 혼자 안 된다고 말하였다가, 마침내 역시 파직되어 상서좌승尙書左丞으로 지연주知兗州가 되었다가 한 해 남짓 뒤에 비로소 치사하였다.
公自布衣 至爲相 衣服飮食 無所加하고 雖妻子亦有常節이러라
공은 포의布衣로 있을 때부터 재상이 될 때까지 의복과 음식을 더하는 것이 없었고 비록 처자들조차도 일정한 절도가 있었다.
家故饒財 諸父分産한대 公以所得悉與昆弟之貧者하고 俸祿所入 分給宗族하며 賙人急難하야 러라
집안에 예부터 재물이 넉넉하였기에 여러 백숙부가 가산家産을 나누었는데 공은 받은 것을 모두 가난한 형제들에게 주었고 봉록으로 받는 것을 종족들에게 나누어주었으며, 형편이 급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구휼하여 늙어 벼슬에서 물러날 때까지 거처할 집이 없어 오랫동안 남경南京역사驛舍에 세 들어 살았다.
自少好學하야 하며 喜爲詩하며 讀書雖老不倦이라
공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서화書畫정묘精妙하였고 시 짓기를 좋아하였으며 독서는 늙어서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推獎後進하니 今世知名士多出其門이라
후진後進들을 장려하니 금세今世의 이름난 선비들이 그 문하에서 많이 배출되었다.
居家見賓客 必問時事하야 聞有善이면 喜若己出하고 至有所不可하얀 憂見於色하야 或夜不能寐 如任其責者러라
평소 집에 거처하면서 빈객을 만나볼 때에는 반드시 시사時事를 물어 좋은 일을 듣게 되면 마치 자신이 한 것처럼 기뻐하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들을 경우에는 근심스런 표정이 얼굴에 드러나 간혹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여 마치 자신이 그 책무를 맡고 있는 것처럼 하는 경우도 있었다.
凡公所以行之終身者 有能履其一이라도 君子以爲人之所難이어늘 而公自謂不足以名後世하야 遺戒子孫하야 無得紀述하니 嗚呼 인저
무릇 공이 종신토록 행한 일들은 그 가운데 하나만 실천할 수 있더라도 군자가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여기는데, 공은 후세에 이름을 내기에 부족하다고 스스로 여겨 자손들에게 경계를 남겨 그 사적을 기술할 수 없게 하였으니, 아, 어쩌면 이른바 임무는 무겁고 갈 길은 멀어 선을 행하기에 날이 부족하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曾祖太子少保諱某 贈太師하고 祖鴻臚卿諱叔詹 追封吳國公하고 父尙書度支員外郞諱遂良 追封韓國公하니 皆贈太師中書令兼尙書令이라
증조부 태자소보太子少保 태사太師에 추증되었고, 조부 홍려경鴻臚卿 숙첨叔詹오국공吳國公추봉追封되었으며, 부친 상서도지원외랑尙書度支員外郞 수량遂良한국공韓國公에 추봉되었으니 모두 태사중서령太師中書令 겸상서령兼尙書令에 추증되었다.
娶相里氏하니 晉國夫人이라
상리씨相里氏를 아내로 맞이하였으니 진국부인晉國夫人이다.
子男曰詵 大理評事 太常博士 將作監主簿 祕書省正字 三子早卒이라
자식은 아들 대리평사大理評事이고, 태상박사太常博士이고, 장작감주부將作監主簿이고, 비서성정자祕書省正字이고, 다른 세 아들은 일찍 졸하였다.
女長 適集賢校理蘇舜欽하고 次適祕閣校理李綖하고 次適單州團練推官張遵道
딸은 첫째는 집현교리集賢校理 소순흠蘇舜欽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비각교리祕閣校理 이연李綖에게 시집갔고, 셋째는 단주단련추관單州團練推官 장준도張遵道에게 시집갔다.
公以嘉祐二年二月五日 卒于家
공은 가우嘉祐 2년(1057) 2월 5일에 집에서 졸하였다.
其子訢 以其年十月十八日 葬公于하다
그 아들 이 그해 10월 18일에 응천부應天府 송성현宋城縣인효원仁孝原에 공을 장사 지냈다.
銘曰
은 다음과 같다.
翼翼祁公이여
신중하고 엄숙한 기공祁公이여
率履自躬하니
몸소 솔선수범 실천하니
一其初終
시종 한결같이 함은
惟德之恭이로다
오직 공손한 덕이로다
公在于位하니
공이 관직에 계시니
士知貪廉하고
선비들이 탐욕과 청렴을 알고
退老于家하니
늙어 물러나 집에 계시니
四方之瞻이로다
사방 사람들이 우러러보네
豈惟士夫리오
어찌 사대부만이겠는가
天子曰咨
천자께서 말씀하셨네 “아 훌륭하도다
爾曲爾直
너희의 굽음과 너희의 곧음을
繩之墨之하니
먹줄 놓아 분별하니
正爾方圓
너희의 방원方圓을 바로잡음에
有矩有規로다
곱자와 그림쇠가 있구나
人莫之踰하니
사람들이 공의 법도를 넘지 못하니
公無爾欺
공은 너희를 속임이 없도다
予左予右
나의 좌우에 있는 이 가운데
惟公是毗로다
오직 공이 나를 제대로 보필하도다
公雖告休
공은 비록 치사하여 물러났지만
受寵不已하니
은총 그치지 않으니
國公
궁신宮臣의 직함 국공國公의 봉호를
卽命于第
집에서 받도록 명하였네
奕奕明堂
빛나고 빛나는 명당明堂
萬邦從祀
만방萬邦종사從祀하는 곳이라
豈無臣工이리오마는
어찌 신하가 없겠는가마는
爲予執法하라
나를 위해 법을 집행하라
何以召之
어찌하여 공을 불렀는가
惟公舊德이라
오직 공은 덕망德望 높은 구신舊臣이라서라네
公不能來
공이 나아오지 못한다면
予其往錫이라
내가 보내어 하사하리라
君子愷悌
화락하고 소탈한 군자는
民之父母
백성들의 부모와 같으니
公雖百齡이라도
공이 비록 백 세라 하더라도
人以爲少
사람들은 적다고 여긴다네
不俾黃耉하고
하늘이 천수 누리게 하지 않고
喪予元老로다
나의 원로元老를 잃게 하였도다”
寵祿之隆
총애와 봉록의 융숭함은
則有止期어니와
곧 끝날 기약이 있거니와
惟其不已
오직 그 끝나지 않는 것은
旣去而思
떠나가신 뒤에 사모하는 마음이라네
銘昭于遠하니
을 지어 먼 후대에 밝히노니
萬世之詒로다
만세에 길이 이어질 것이로다
唐荊川曰
당형천唐荊川이 말하였다.
此文之密 豈班孟堅下哉리오
“이 글의 치밀함이 어찌 반맹견班孟堅(반고班固)보다 아래이겠는가.”
역주
역주1 : 杜祁公은 杜衍(978~1057)으로, 자는 世昌, 시호는 正獻이다. 進士試에 甲科로 급제하여 외직을 두루 역임하고 仁宗 때 특별히 詔命을 받아 御史中丞에 임명되었다. 慶曆 초년에 樞密使가 되어 富弼, 韓琦, 范仲淹 등과 新政의 重臣이 되었다. 慶曆 7년(1047)에 太子少師로 致仕하였는데 皇祐 원년(1049)에 太子太師에 오르고 祈國公에 봉해졌다.
구양수보다 29세 연상으로 구양수를 알아보고 천거하였다. 구양수가 지은 〈跋杜祁公書〉를 보면 景祐 연간에 구양수가 館閣에서 교감을 맡고 있을 때 처음 두연을 만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보다 15년 뒤에 두연이 재상에서 물러났을 때 집으로 찾아가 안부를 묻고 함께 시를 창화하였다. 뒤에 書簡과 詩文을 10권으로 편찬하였다.
두연이 졸하자 구양수가 주동이 되어 이 묘지명을 지어 보답하였고, 같은 해에 또 〈祭杜祁公文〉을 지어 자신을 알아준 은혜에 다시 보답하였다. 이 글을 지은 해에 구양수는 51세로 權知禮部貢擧, 右諫議大夫, 攝太常卿, 權判史館으로 있었다.
역주2 越州山陰人也 : 越州는 宋代에 兩浙路에 속했는데 치소는 山陰에 있었으니 바로 지금의 浙江省 紹興이다.
역주3 : 옛 國名으로 祁姓인데 지금 陝西省 西安 동남쪽에 있다. 周 宣王 때 그 國君이 선왕에게 죽임을 당했다.
역주4 自杜赫爲秦將軍 : 《史記》 〈秦始皇本紀〉에 “이에 六國의 策士들 가운데 寧越, 徐尙, 蘇秦, 杜赫의 무리들이 秦을 위해 책략을 발휘하였다.”라고 하였는데, 《索隱》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呂氏春秋》에 ‘두혁이 천하를 안정시키기 위해 周 昭文君에게 유세하였다.’라고 하였는데, 高誘는 ‘두혁은 周나라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역주5 御史大夫周……仍顯于漢 : 御史大夫 杜周는 西漢 사람으로 張湯의 廷尉史가 되었다. 말수가 적고 법을 매우 엄격하게 적용하였으며 황제의 뜻을 잘 엿보아 어사중승이 된 지 10여 년이 지나 마침내 어사대부가 되었다.
建平侯 杜延年은 두주의 아들로 자는 幼公이다. 昭帝 때 司空에 보임되었다가 諫議大夫로 陞遷하였다. 上官桀의 역모를 고발한 일로 인해 건평후에 봉해졌다. 霍光과 교분이 두터워 그를 따라 부침하였다. 졸하자 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漢書》 本傳에 사적이 보인다.
역주6 當陽侯預顯于晉 : 杜預는 자가 元凱로, 京兆 杜陵 사람이다. 咸寧 4년(278) 鎭南大將軍 都督荊州諸軍事 鎭襄陽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계속 表를 올려 吳나라를 공격할 것을 요청하였다. 오나라를 멸망시킨 공으로 당양후에 봉해졌다. 謀略에 능해 杜武庫로 일컬어졌다. 《春秋左氏經傳集解》 등을 편찬하였다.
역주7 岐國公佑顯于唐 : 杜佑(735~812)는 자가 君卿으로, 唐나라 京兆 萬年 사람이다. 嶺南과 淮南의 節度使를 역임하였고 貞元(785~805) 말에는 檢校司徒同平章事에 발탁되었다. 王叔文이 개혁 정치를 펼 때 度支鹽鐵使에 임명되어 財政을 주관하였다. 기국공에 봉해졌다. 정치에 종사하는 여가에 35년에 걸쳐 《通典》 200권을 저술하였는데 이 책은 중국 최초의 典章制度史 저작이다.
역주8 其吉凶祭祀齋戒日時幣祝從事 一用其家書 : 집안의 대소사에 대해 모두 따를 수 있는 법도가 있었음을 말한다. 幣는 옛사람이 제사 지낼 때의 禮物을 가리키고, 祝은 신에게 고하며 비는 것을 말한다. 家書는 바로 《杜氏四時祭享禮》 1권이다. 陳振孫의 《直齋書錄解題》에는 “丞相 山陰 杜衍 世昌이 편찬하다.”라고 되어 있고, 馬端臨의 《文獻通考》 〈經籍考〉 권15에도 著錄되어 있다.
역주9 至公 爲人尤潔廉自刻 : 宋나라 孫升의 《孫公談圃》에 “杜祁公은 사람됨이 淸廉하고 簡約하여 평소 빈객이 찾아오는 일이 아니면 양고기를 먹지 않았다. 이때 조정에서 은택을 많이 하사하여 요청하면 들어주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나 두기공은 더욱 요행심을 억눌러 하사받은 것을 즉시 봉하여 돌려보냈다. 상을 사석에서 배알했을 적에 상이 말하기를 ‘짐은 안 되는 일이 없는데 오직 이 백발의 老父는 기꺼워하지 않는구려.’라고 하였다.” 하였다.
역주10 事其上……以行己取信 : 구양수가 지은 〈祭杜祁公文〉에 “몸소 실천하는 것은 늙을수록 더욱 독실하였고 남에게 신뢰받는 것은 오래될수록 더욱 깊어졌다.”라고 하였다.
역주11 公少擧進士高第……知乾州 : 《宋史》 本傳에 “杜衍은 어린 시절 지조를 가다듬었고 학문에 몹시 독실하여 進士에 甲科로 급제하였다.”라고 하였다. 推官은 幕府의 직책이다. 通判은 知州를 보좌하여 州의 정사를 다스리는 직책이다. 晉州는 지금의 山西省 臨汾이다. 乾州는 치소가 奉天에 있는데 지금의 陝西省 乾縣, 武功, 周至, 禮泉 등지를 관할하였다.
역주12 遷河東京西路提點刑獄……入爲三司戶部副使 : 河東은 河東路이고 京西는 京西路이다. 提點刑獄은 宋代에 路라는 행정구역에 설립한 執法官으로, 刑獄과 訴訟에 관한 일을 관장하였다. 轉運使는 宋初에 財權을 집중시키기 위해 이를 전담하는 都轉運使, 轉運使를 두어 한 路 혹은 여러 路의 財賦를 맡아 지방 관리의 권력을 감시하게 하였는데 뒤에 권한이 확대되어 변방, 치안, 錢糧, 순찰 등의 일을 겸하여 路의 행정장관이 되었다. 三司는 鹽鐵, 度支, 戶部 이 3部를 합하여 일컫는 명칭으로 최고의 재정기구이다. 三司戶部는 천하의 戶口, 賦稅, 上供, 榷酒 등을 관장하였는데 각각 使와 副使가 있었다.
역주13 拜天章閣待制 知荊南府 : 天章閣은 宋代 宮中에 있던 閣의 명칭이다. 송대에는 여러 각마다 學士, 直學士, 待制를 두었다. 天章閣待制는 寄祿官으로 實職은 없었다. 荊南府는 完稱이 荊湖北路馬步軍都摠管知荊南軍府이다. 宋代에는 각 路의 장관이 軍職을 겸하였다. 荊湖北路는 치소가 江陵에 있었다.
역주14 天雄軍 : 天雄軍路로, 뒤에 大名府路로 개명하였다. 치소가 지금의 河北省 大名에 있었다.
역주15 召爲御史中丞……知審官院 : 御史中丞은 御史臺의 副長官으로 御史大夫의 아래이지만 어사대부는 제수하는 일이 드물기 때문에 중승이 실제로는 어사대의 장관 역할을 하였다. 관리들의 비행을 糾察하여 기강을 바로잡는 일을 담당하였다. 역시 寄祿官이다.
流內銓은 流內할 관리들의 선발을 관장하였다. 송나라 제도에서 9품 이하의 관리들이 9품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流內라고 하였다.
審官院은 淳化 연간(990~994)에 太宗이 中書省의 권한이 너무 과중하다고 하여 諫官 向敏中의 건의를 받아들여 中書吏房을 나누어 심관원을 설치하여 문무관원의 발탁, 勳封, 考課에 관련한 정령을 맡게 하였다. 熙寧 3년(1070)에는 審官西院을 따로 설치하여 본원을 東院이라고 불렀는데 東院은 문관의 선발을 관장하고 西院은 무관의 선발을 관장하였다.
元豐 연간의 제도 개혁 이후에 流內銓과 審官院은 모두 吏部에 소속되었다. 송나라 제도에 品級이 높은데 관직이 낮은 경우 ‘判’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어사중승은 寄祿官이고 流內銓은 御史知雜事 이하의 관리가 담당하는 것인데 두연이 이때 이미 어사중승이므로 어사지잡사보다 높기 때문에 判流內銓이라고 한 것이다.
역주16 拜樞密直學士……權知開封府 : 樞密直學士는 樞密院의 속관으로 여기서는 寄祿官이다. 永興軍은 永興軍路로, 치소가 지금의 陝西省 西安에 있었다. 龍圖閣學士는 職名으로 문신의 직위 가운데 淸貴한 자리이다. 開封府는 宋나라 도읍 汴京의 소재지이다.
역주17 (復)[兼] : 저본에는 ‘復’로 되어 있으나, 四庫全書本 《唐宋八大家文抄》에 의거하여 ‘兼’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8 侵漁 : 남의 재물을 약탈하는 것을 가리킨다. 《韓非子》 〈孤憤〉에 “大臣은 우매하고 천박한 사람을 끼고 위로는 군주를 속이고 아래로는 재물을 거두고 수탈하여[收利侵漁] 붕당을 이루어 서로 더불어 한 목소리를 낸다.”라고 하였다.
역주19 車牛芻秣 宿食來往 : 糧食과 草料를 운반하는 車馬의 隊伍와 宿食, 行進을 가리킨다.
역주20 畿赤諸縣之民 : 畿赤은 京城 지역을 가리킨다. 唐代에 京城에서 다스리는 縣을 赤縣이라 하고 경성의 주변에 있는 邑을 畿縣이라 하였는데, 이 둘을 ‘畿赤’이라 합칭하였고 宋代에는 이를 습용하였다.
역주21 慶曆之初……獨公爲相佐佑 : 慶曆 3년(1043)에 富弼, 韓琦, 范仲淹, 杜衍 등이 시도한 慶曆新政을 가리킨다. 이러한 혁신은 권세가들의 격렬한 저항을 받았다. 西兵은 宋王朝가 西夏를 정벌하기 위해 출정한 군대를 가리킨다.
역주22 凡內降與恩澤者 : 內降은 常規에 따라 中書省 등의 의사기구를 통해 논의하지 않고 宮內에서 직접 황제가 詔令으로 상을 내리는 일을 가리킨다. 恩澤은 恩蔭으로, 高官의 자제들에게 관직을 내리는 일을 말한다.
역주23 契丹與夏人……後契丹卒不來 : 《宋史》 〈杜衍傳〉에 “거란이 趙元昊와 黃河 밖에서 전쟁을 벌이자 參知政事 范仲淹이 河東을 안무하고 있으면서 군대로 대응하려고 하였다. 두연이 말하기를 ‘두 나라가 막 교전을 벌이고 있으니 형세상 반드시 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군대는 함부로 출동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범중엄이 황제 앞에서 논변하여 두연을 비판하였는데 그 말이 매우 격렬하였다. 그렇지만 두연은 서운하게 여기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銀甕族은 중국의 북방에 있는 소수민족이다.
역주24 至其歸老……寓於南京驛舍者久之 : 《宋史》 〈杜衍傳〉에 “두연은 청렴하고 꼿꼿하여 私財를 불리지 않았는데 물러난 뒤에는 南都에 세 들어 살던 10년 동안 집이 누추하여 겨우 수십 칸이었는데 넉넉하게 여기며 지냈다.”라고 하였다.
역주25 工書畫 : 宋代 蔡寬夫의 《詩史》에서 杜衍을 일러 “일흔이 넘은 나이에 모든 일을 사절하고 처음 草書를 배워서 마침내 그 오묘한 경지에 이르렀다. 오늘날 공의 글씨를 보게 되면 그 걸출하고 빼어나서 굽히는 바가 없는 기세를 여전히 상상해볼 수가 있다.”라고 하였다.
陶宗儀의 《書史會要》 권6에 공을 일러 “翰墨을 좋아하여 노년에 이르러서 草書로 득의하였다고 여겼다. 사위 蘇舜欽과 서법을 담론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韓琦가 詩를 보내 그의 글씨에 사례하기를 ‘편지 통해 글자 몇 폭을 구해 얻으니 張伯英의 筋骨이요 王羲之의 살집이구려.[因書乞得字數幅 伯英筋骨羲之膚]’라고 하였으니 당시에 이처럼 추중되었다.”라고 하였다.
역주26 豈所謂任重道遠而爲善惟日不足者歟 : ‘任重道遠’은 《論語》 〈泰伯〉에 “증자가 ‘선비는 도량이 넓고 뜻이 굳세지 않으면 안 된다. 임무는 무겁고 갈 길은 멀기 때문이다. 인을 자신의 임무로 여기니 무겁지 않은가, 죽은 뒤에야 그만두니 멀지 않은가.[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 仁以爲己任 不亦重乎 死而後已 不亦遠乎]’ 하였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爲善惟日不足’은 《書經》 〈泰誓 中〉에 “길한 사람은 선행을 하면서 날마다 부족하게 여긴다.[吉人爲善 惟日不足]”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역주27 應天府宋城縣之仁孝原 : 應天府는 宋代에 宋州를 응천부로 삼고 南京을 건설하였는데 옛 치소는 지금 河南省 商丘縣 남쪽에 있다. 宋城縣은 응천부의 屬縣이다.
역주28 宮臣 : 宋代 제도에 功이 크고 德이 높으면서 나이가 많은 대신에게 宮觀使의 직함을 수여하여 ‘아무 宮使’라고 하였는데 이는 虛銜으로 實職은 없었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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