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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1)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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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指言利害明切이라
臣伏見 集兩省臺諫官하야 議修河事하야 未有一定之論하니
蓋由하고 하야 互執一說하야 莫知孰是하니 以臣愚見으론 皆謂不然이라
言故道者 未詳利害之原하고 述六塔者 近乎欺罔之繆하니
何以言之
今謂故道可復者 但見河北水患하야 而欲還之京東이라
然不思之因이라
所以未知故道有不可復之勢 此臣故謂未詳利害之原也
若言六塔之利者 則不攻而自破矣
且開六塔 旣云減得大河水勢
然今之患 何緣尙告危急
此則減水之利 虛妄可知
開六塔者又云可以全回大河하야 使復橫壟故道라하되
見今로되 下流無歸하야 已爲之患이니
若全回大河하야 以入六塔이면 則其害如何리오
此臣故謂近乎欺罔之繆也
臣聞河本泥沙 無不淤之理하니 淤澱之勢 常先下流
下流淤高 水行不快하니 乃自上流低下處決 此其常勢也
然避高就下 水之本性이라
故河流已棄之道 自是難復이라
臣不敢遠引書史하야 廣述河源이요 只以今所欲復之故道하야 言天禧以來屢決之因하리이다
初天禧中 河出京東하야 水行於今所謂故道者러니 水旣淤澁이라 乃於滑州天臺埽決하고 尋而修塞 水復故道라가 未幾 又於滑州南하니 今所謂者也
其後數年 又議修塞하야 水令復故道러니 已而又於埽決하니
所決差小하고 與故道分流
然而故道之水 終以壅淤 故又於橫壟大決하니
是則決河非不能力塞이요 故道非不能力復이나 不久終必決於上流者 由故道淤高하야 水不能行故也
及橫壟旣決하얀 水流就下하니 所以十餘年間河未爲患이라가
至慶曆三四年하야 橫壟之水 又自下流先淤
是時 臣爲河北轉運使러니 海口已淤一百四十餘里
其後 相次又淤하니 下流旣梗 乃又於上流商胡口決이라
然則京東橫壟兩河故道 皆是下流淤塞河水已棄之高地
京東故道 屢復屢決하니 理不可復 其驗甚明하니
則六塔所開故道之不可復 不待言而易知
臣聞議者計度京東故道功料 止云銅城已上地高라하니
不知大抵東去皆高而已上乃特高耳 其東比銅城已上則似低하고 比商胡已上則實高也
若云銅城已東地勢阧下라하면 則當日水流宜決銅城已上이니 何緣而頓淤橫壟之口 亦何緣而大決也
然則兩河故道 旣皆不可爲하니 則河北水患 何爲而可去리오
臣聞智者之於事 有不能必이어든 則較其利害之輕重하야 擇其害少者而爲之 猶勝害多而利少어든
何況有害而無利리오
此三者 可較而擇也
臣見往年商胡初決之時 議欲修塞하니 計用一千八百萬稍芟일새 科配六路一百有餘州軍이라
今欲塞者 乃往年之商胡 必須用往年之物數 至於開鑿故道하얀 張奎元計功料極大하야 後來李參等減得全少로되 猶用三十萬人이라
然欲以五十步之狹으로 容大河之水 此可笑也
又欲增一夫所開三尺之方하야 倍爲六尺하니
且闊厚三尺而長六尺 已是一倍之功이니 在於人力 已爲勞苦
若云六尺之方筭之 乃八倍之功이니 此豈人力之所勝이리오하니
是則前功浩大而難興하고 後功雖小而不實이라
大抵塞商胡開故道凡二大役 皆困國而勞人이니
所擧如此어늘 而欲開難復屢決已驗之故道하야 使其虛費而商胡不可塞하고 故道不可復하니 此所謂有害而無利者也
就使幸而暫塞暫復하야 以紓目前之患이라도 而終於上流必決 如龍門橫壟之比하야 重以困國勞人이리니 此所謂利少而害多也
若六塔者 於大河有減水之名하고 而無減水之實이라
今下流所散 爲患已多하니 若全回大河以注之 則濱棣德博河北所仰之州 不勝其患이요
而又故道淤澁이면 上流必有他洪之虞 此直有害而無利耳
是智者之不爲也
今若因水所注하야 增治隄防하고 疏其不流하야 浚以入海 則可無決溢散漫之虞
今河所歷數州之地 誠爲患矣 隄防歲用之夫 誠爲勞矣
與其虛費天下之財하고 虛擧大衆之役하되 而不能成功하야 終不免爲數州之患하고 勞歲用之夫
則此所謂害少者 乃智者之所擇也
大抵今河之勢 負三決之虞하니 復故道 上流必決이요 開六塔이면 上流亦洪이요 今河下流 若不浚使入海 則上流亦決이라
臣請選知水利之臣하야 就其下流하야 求其入海之路而浚之 不然하야 下流梗澁이면 則終虞上決 爲患無涯
臣非知水者 但以今事目可驗者而較之耳
言狂計愚하야 不足以備聖君博訪之求로소이다
此大事也 伏乞下臣之議하야 廣謀於衆而裁擇之하소서
謹具狀奏聞하고 伏候勅旨하노이다


02. 황하黃河를 수리하는 문제를 논한 둘째
이해利害를 가리켜 말한 것이 분명하고 절실하다.
신은 삼가 보건대 학사원學士院양성兩省(문하성門下省중서성中書省)과 대간臺諫의 관원들을 모아서 황하黃河를 수리하는 일을 의논하여 아직도 합일된 견해를 도출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대개 가창조賈昌朝는 옛 물길을 회복시키고자 하고, 이중창李仲昌육탑하六塔河에 물길을 열자고 청하여 서로 자기 주장을 고집하여 어느 쪽이 옳은지 알 수 없기 때문인데,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모두 옳지 못합니다.
옛 물길을 말하는 사람은 이해利害의 근원을 자세히 알지 못하고, 육탑하를 말하는 사람은 기망欺罔하는 잘못에 가깝습니다.
어찌하여 그렇게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지금 옛 물길을 회복할 수 있다고 하는 자는 단지 하북로河北路의 수해의 근심을 보고서 물길을 경동로京東路로 돌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희天禧 연간(1017~1021) 이래 황하黃河가 누차 터진 원인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옛 물길을 회복할 수 없는 형세를 알지 못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신이 “이해利害의 원인을 자세히 알지 못한다.”고 한 것입니다.
육탑하六塔河에 물길을 여는 것이 이롭다고 말하는 사람의 경우는 공박하지 않아도 그 주장이 절로 깨질 것입니다.
게다가 육탑하에 물길을 여는 것에 대해 이미 “황하의 물이 흐르는 형세를 줄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은주恩州기주冀州수재水災에 대해 무슨 연유로 아직도 위급하다고 보고하는 것입니까.
이렇고 보면 황하의 물이 흐르는 형세를 줄일 수 있다고 하는 것이 허망한 주장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육탑하에 물길을 열자고 주장하는 자가 또 말하기를 “황하의 물줄기를 전부 다 돌려서 다시 횡롱橫壟의 옛 물길로 흘러가게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육탑하는 단지 황하의 물길을 나누어 흐르게 한 것일 뿐인데도 하류에서 물이 흘러갈 데가 없어서 이미 빈주濱州체주棣州덕주德州박주博州 지역에 홍수의 피해가 생기고 있습니다.
만약 황하의 물길을 전부 다 돌려서 육탑하로 들어가게 하면 그 환해患害가 어떠하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말하는 “기망欺罔하는 잘못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황하黃河는 본래 진흙과 모래로 되어 있어 진흙탕이 되지 않을 리가 없으니, 진흙이 퇴적되는 형세는 항상 하류에서 먼저 이루어집니다.
하류에 진흙이 높이 쌓이면 물의 흐름이 시원스럽지 못하게 되니, 이에 상류의 낮은 곳부터 둑이 터지는 것은 통상적인 형세입니다.
그러나 높은 곳을 피하여 아래로 흐르는 것이 물의 본성입니다.
그러므로 황하의 흐름이 이미 끊긴 물길은 본래 회복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신은 감히 멀리 서적과 사서史書를 끌어와서 황하의 근원에 대해 광범위하게 말하지 않고, 단지 지금 회복하고자 하는 옛 물길을 가지고서 천희 연간 이래로 황하가 자주 터졌던 원인을 말해보겠습니다.
당초 천희天禧 연간에 황하가 경동로京東路로 나와서 지금 말하는 옛 물길로 물이 흘러갔었는데, 강물 속에 진흙이 퇴적되어 흐름이 원활하지 못하자 이에 활주滑州 천대天臺의 제방이 터졌고, 얼마 뒤에는 제방을 보수해 터진 곳을 막자 물이 다시 옛 물길로 흘러가다가 오래지 않아 또 활주 남쪽 철구묘鐵狗廟 쪽의 제방이 터졌으니, 오늘날 말하는 용문소龍門埽라는 것입니다.
그 몇 해 뒤에 또 터진 제방을 보수해 막자고 의논하여 황하의 흐름을 옛 물길로 되돌아가게 했는데 이윽고 또 왕초소王楚埽가 터졌습니다.
터진 곳이 다소 작고 강물이 옛 물길과 나누어 흘렀습니다.
그런데도 옛 물길의 물이 마침내 이 때문에 진흙으로 막혔으니, 그래서 또 횡롱橫壟 쪽의 제방이 크게 터지고 말았습니다.
이렇고 보면 황하가 터지는 것은 힘으로 막을 수 없는 것은 아니고 옛 물길은 힘으로 회복할 수 없는 것은 아니나, 오래지 않아 마침내 상류에서 터지는 것은 옛 물길에 진흙이 높이 쌓여 물이 흘러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횡롱橫壟 쪽의 제방이 터지자 그제야 물이 아래로 흘러갔으니, 이런 까닭에 10여 년 동안 황하의 재앙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경력慶曆 3, 4년에 이르러 횡롱의 물이 또 하류부터 먼저 진흙으로 막혔습니다.
이때 신이 하북전운사河北轉運使로 있었는데 해구海口에 이미 진흙으로 막힌 것이 140리나 되었습니다.
그 뒤 유하遊河금하金河적하赤河 세 가닥 물줄기가 차례로 또 진흙이 쌓여 막히니, 하류가 이미 막히자 또 상류인 상호商胡 쪽 어귀가 터졌습니다.
이렇고 보면 경동京東횡롱橫壟 두 지역에 있는 황하黃河의 옛 물길은 모두 하류가 진흙으로 막혀 황하의 흐름이 이미 끊긴 높은 땅입니다.
경동로京東路에 있는 옛 물길은 누차 회복되었다가 누차 터졌으니, 이치상 회복시킬 수 없다는 것은 이미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육탑하六塔河에서 연다는 옛 물길을 회복시킬 수 없음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은 듣건대 의논하는 사람이 경동로京東路에 옛 물길을 여는 데 드는 힘과 물자를 말하면서 단지 “동성銅城 이상은 땅이 높다.” 하였다고 하니,
대저 동쪽으로 가면서는 모두 높고 동성 이상은 특히 높을 뿐이며 그 동쪽은 동성 이상에 비하면 낮은 듯하고 상호商胡 이상에 비하면 높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만약 동성 동쪽은 지세가 갑자기 낮아진다고 하면 당시 물의 흐름이 응당 동성 이상에서 터졌어야 하는데, 무슨 연유로 갑자기 횡롱橫壟 어귀에서 진흙이 쌓였으며, 또한 무슨 연유로 제방이 크게 터졌겠습니까.
그렇다면 황하의 옛 물길은 이미 모두 어떻게 해볼 수 없으니, 하북로河北路의 수해를 어떻게 하면 없앨 수 있겠습니까.
신은 듣건대 지혜로운 사람은 일에 있어서 기필할 수 없을 경우에는 그 이로움과 해로움의 경중을 비교하여 해로움이 적은 쪽을 선택해서 하면 그나마 해로움이 많고 이로움이 적은 것보다는 낫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해로움은 있고 이로움은 없음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이 세 가지를 비교하여 선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은 보건대 지난해 상호商胡 쪽 제방이 처음 터졌을 때 논의하여 보수해 막고자 했더니, 계산상 1천8백만 초삼稍芟이 필요하기에 6 1백여 에 분담시켰습니다.
지금 제방이 터진 곳을 막고자 하는 것이 바로 지난해 상호의 그곳이니 필시 지난해의 물량이 필요할 것이고, 옛 물길을 열고 뚫는 데 이르러서는 장규張奎가 원래 계산한 공정과 필요한 물자가 매우 많아서 그 후에 이참李參 등이 매우 적게 줄였는데도 오히려 30만 명의 인력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러나 50보 너비의 골짜기로 큰 황하의 물을 받아들이고자 하니, 이는 우스운 일입니다.
게다가 한 인부가 열어야 할 사방 3척의 수로를 넓혀 곱절인 6척으로 증가시키고자 합니다.
이제 너비와 두께가 3척이고 길이가 6척인 것이 이미 배의 공력이 드는 것이니, 사람의 힘에 있어 이것도 너무 수고롭습니다.
그런데 만약 사방 6척 땅을 개방법開方法으로 계산하면 여덟 배의 공력이 드니, 이 어찌 사람의 힘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앞의 공사는 매우 커져서 시작하기 어렵고 뒤의 공사는 비록 작으나 부실하게 될 것입니다.
대저 상호商胡에 터진 제방을 막고 옛 물길을 여는 이 두 가지 큰 역사는 모두 국가를 곤궁하게 하고 사람을 수고롭게 하는 것입니다.
거론한 바가 이와 같거늘 회복시키기 어렵고 자주 제방이 터진다는 사실이 이미 증명된 옛 물길을 열어서 비용만 허비할 뿐 상호의 제방이 터지는 것은 막지 못하고 옛 물길은 회복시키지도 못하게 만들고자 하니, 이것이 이른바 “해로움만 있고 이로움은 없다.”는 것입니다.
가사 요행으로 잠시 터진 제방을 막고 잠시 옛 물길을 회복하여 목전의 근심을 풀 수 있다손 치더라도, 마침내 용문龍門횡롱橫壟의 경우처럼 상류에서 반드시 터져서 거듭 국가를 곤궁하게 하고 사람을 수고롭게 하게 될 터이니, 이것이 이른바 “이로움은 적고 해로움은 많다.”는 것입니다.
육탑하六塔河와 같은 경우는 황하黃河에 있어 수량水量을 감소시켰다는 명목만 있고 수량을 감소시킨 실질이 없습니다.
지금 하류의 물이 흩어짐에 우환을 끼치는 것이 이미 많으니, 만약 황하의 물을 전부 다 돌려서 육탑하로 흘러들게 하면 빈주濱州체주棣州덕주德州박주博州하북河北 위쪽의 고을들은 그 우환을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 옛 물길이 잘 통하지 않으면 상류에 필시 홍수가 날 우려가 있으니, 이것은 단지 해로움만 있을 뿐 이로움은 없습니다.
이것은 지혜로운 사람이 하지 않는 일입니다.
그렇게 하면 지금 만약 강물이 흘러가는 곳에다 제방을 더 잘 쌓고 물이 흐르지 못하는 곳을 틔워주어서 물길을 준설하여 바다로 물이 흘러들게 하면 제방이 터져 물이 넘치고 사방으로 범람하는 우려가 없게 될 것입니다.
지금 황하黃河가 지나가는 몇 의 땅은 진실로 우환이 되고 해마다 제방을 쌓는 데 동원되는 인부는 참으로 수고로울 터이나,
천하의 재물을 헛되이 낭비하고 많은 인력이 드는 공사를 헛되이 일으켰는데도 성공을 거두지 못하여, 마침내 몇 의 환란이 되고 해마다 동원되는 인부를 수고롭게 함을 면치 못하는 것보다 나으니,
이것이 앞에서 말한 “해로움이 적다.”는 것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선택할 바입니다.
대저 지금 황하黃河의 형세는 세 곳이 터질 우려를 등에 지고 있으니, 옛 물길을 회복시키면 상류에 반드시 제방이 터질 것이고 육탑하六塔河에 물길을 열면 상류에 홍수가 생길 것이고, 지금 황하 하류를 만약 준설하여 바다로 물이 흘러들게 하지 않으면 상류에 제방이 터질 것입니다.
신은 청컨대 수리水利를 잘 아는 신하를 선발하여 황하의 하류에 나아가 바다로 물이 흘러드는 길을 찾아서 준설하게 해야 할 것이니, 그렇게 하지 않아 하류가 막히면 마침내 상류의 제방이 터짐에 그 우환이 한량없을 것입니다.
신은 수리를 아는 자가 아니고 단지 지금 사실을 가지고 알 수 있는 것들로 비교해보았을 뿐입니다.
말은 주제넘고 계책은 어리석어 성군께서 많은 사람들에게 두루 의견을 물어 대책을 강구하시는 뜻에 부응하지 못합니다.
이는 대사大事이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신의 의논을 하달하여 뭇사람들에게 두루 계책을 의논하여 헤아려 선택하소서.
삼가 을 갖추어 아뢰고 엎드려 칙지勅旨를 기다립니다.


역주
역주1 論修河 第二狀 : 이 글은 仁宗 至和 2년(1055) 9월에 지어졌다. 이때 歐陽脩가 임시로 右諫議大夫가 되어 거란의 국모 생신을 축하하는 사절단의 일원으로 가서 인종의 御眞을 가져오려 했었다. 그런데 마침 거란의 興宗이 죽어서 새 임금의 즉위를 축하하는 사절단인 登位國信使의 일원이 되었다. 사신으로 가기 전에 이 글을 올려서 황하의 제방이 터진 원인을 말하고 六塔河의 물길을 여는 것에 대한 문제점을 자세히 진달하였다.
역주2 學士院 : 翰林學士院의 준말로 임금의 명령인 制書를 작성하는 일을 관장한다.
역주3 賈昌朝欲復故道 : 賈昌朝(998~1065)는 宋나라 開封 사람으로 자는 子明이다. 慶曆 3년(1043)에 參知政事에 제수되었고 嘉祐 원년(1056)에 재차 樞密使에 제수되었는데 박학하고 논변을 잘하였다. 저서에 《群經音辨》과 문집이 있다. 이때 가창조가 商胡를 막아 큰 물길을 틔우자고 힘써 주장하였다.
역주4 李仲昌請開六塔 : 仁宗 때 황하를 수리하는 문제를 의논했는데 李仲昌의 주장을 따라서 북쪽으로 흐르는 물길을 막고 六塔河에 강물을 끌어들였다. 그런 뒤에 물길이 다시 터져서 익사한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이 일로 이중창을 파직하고 下獄하였다.
역주5 天禧以來河水屢決 : 天禧는 宋 眞宗의 연호이다. 천희 3년(1019)과 4년에 滑州에서 황하가 터져 강물이 몇 州를 덮었고, 仁宗 天聖 6년(1028)에는 澶州에서 황하가 터졌고, 景祐 3년(1036)에도 황하가 澶州에서 터졌고, 慶曆 8년(1048)에는 商胡에서 황하가 터졌다.
역주6 恩冀 : 恩州와 冀州의 합칭이다. 은주는 治所가 現 山東省 淸河에 있었고, 기주는 치소가 現 河北 冀縣에 해당하는 信都에 있었다.
역주7 六塔 只是分減之水 : 六塔河는 商胡 부근에 있는 강인데 橫壟에 물길을 뚫어 황하와 연결될 수 있었다. 지금은 진흙으로 메워져 물이 흐르지 않는다.
역주8 濱棣德博 : 당시 河北東路에 있던 4州로 모두 황하가 바다로 들어가는 지점에 있다.
역주9 鐵狗廟 : 滑州 남쪽에 있던 지역이다.
역주10 龍門埽 : 埽는 볏짚, 돌덩이, 나뭇가지 등을 한데 모아 묶어서 만든 제방이다. 용문은 지명으로 山西省 河津縣 서북쪽과 陝西省 韓城市 동북쪽에 있다. 황하가 이곳에 이르면 양쪽 언덕이 깎아지른 절벽처럼 마주 서 있어 그 형상이 闕門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書經》 〈夏書 禹貢〉에 “황하를 인도하되 적석으로부터 용문에 이른다.[導河積石 至于龍門]” 하였다.
역주11 王楚 : 澶州에 있던 지역이다.
역주12 遊金赤三河 : 遊河‧金河‧赤河로, 황하가 바다로 들어가는 어귀에 있는 세 가닥의 물줄기이다.
역주13 銅城 : 現 山東 東阿縣 북쪽 40리 거리에 있다.
역주14 開方法 : 수학 용어로서, 즉 平方根(제곱근)을 구하는 算法이다. 면적을 산출하는 방법이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1) 책은 2024.01.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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