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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2)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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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秀才所問 問擧子業之文이어늘 而歐陽公不屑論之하고 又恐悞樂秀才所以問擧業之意
故挈出順時兩字告之
脩頓首白秀才足下하노이다
前者 舟行往來하야 屢辱見過하고 又辱以所業一으로 先之하야 及門而贄하고 田秀才西來 辱書하고 其後予家奴自府還縣 比又辱書하니
이라 人所共棄어늘 而足下見禮如此하니 何以當之리오
當之라도 未暇答하니 宜遂絶이어늘 而再辱書하고 再而未答하니 宜絶이어늘 而又辱之하니 何其勤之甚也
如脩者 天下窮賤之人爾 安能使足下之切切如是邪
蓋足下力學好問하야 急於自爲謀而然也
然蒙索僕所爲文字者하니 此似有所過聽也
하고 學爲詩賦하야 以備하야하야 與士君子相識者多
故往往能道僕名字하고 而又以游從相愛之私 或過稱其文字
故使足下聞僕虛名而欲見其所爲者由此也
僕少孤貧하야以養親하야 不暇就師窮經하야 以學聖人之遺業하고 而涉獵書史하야 姑隨世俗하야 作所謂하니 皆穿蠹經傳하야 移此儷彼하야 以爲浮薄하야 惟恐不悅于時人이요 非有卓然自立之言 如古人者然이어늘
有司過採하야 屢以先多士
及得第已來 自以前所爲不足以稱有司之擧而當長者之知하야 始大改其爲하야 庶幾有立이라
然言出而罪至하고 學成而身辱하야 爲彼則獲譽하고 爲此則受禍하니 此明效也
夫時文 雖曰浮巧 然其爲功亦不易也
僕天資不好而彊爲之
故比時人之爲者 尤不工이나
然已足以取祿仕而竊名譽者 順時故也
少年志盛 方欲取榮譽於世하니 則莫若順時
러니 其後風俗大變하야 今時之士大夫所爲 彬彬有兩漢之風矣
先輩往學之 非徒足以順時取譽而已 如其至之 是直齊肩於兩漢之士也
若僕者 其前所爲 旣不足學하고 其後所爲 愼不可學이라
是以 徘徊不敢出其所爲者 爲此也
이라하니 謂夫人方困時하야 其言不爲人所信也
今可謂困矣 安足爲足下所取信哉
辱書旣多且切일새 不敢不答하노니 幸察하라


05. 형남荊南악수재樂秀才에게 보낸 편지
악수재樂秀才가 물은 것은 과거 공부하는 글을 물었거늘 구양공歐陽公은 이를 논하기를 탐탁찮게 여겼고, 또 한편으로는 악수재가 과거 공부를 물은 뜻을 그르칠까 염려하였다.
그래서 ‘순시順時’ 두 글자를 제기提起하여 말해주었다.
는 머리를 조아려 수재秀才 족하께 말씀드립니다.
전자에 뱃길로 왕래하면서 누차 나의 집에 들러주셨고, 또 지으신 글 한 을 가지고 계사啓事에 앞서 나의 집에 직접 와서 예물로 주셨으며, 전수재田秀才가 서쪽에서 오는 편에 편지를 보내주셨고, 그 후에 나의 가노家奴에서 으로 돌아오는 편에 근래 또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나는 죄가 있는 사람이라 사람들이 다들 멀리하거늘 족하는 예대禮待해주심이 이와 같으니, 내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감당한다 하더라도 겨를이 없어 미처 답장도 보내지 못했으니 마땅히 친교親交를 끊어야 할 터이거늘 다시 편지를 보내주셨고, 다시 또 답장을 보내지 못했으니 친교를 끊어야 할 터이거늘 또 편지를 보내주셨으니, 어쩌면 그리도 지성스럽습니까.
나 같은 자는 천하의 곤궁하고 미천한 사람이니, 어찌 족하로 하여금 나를 이토록 절절하게 대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족하가 힘써 배우고 묻기를 좋아하여 스스로 자신의 발전을 도모하여 이렇게 한 것일 터입니다.
그러나 내가 지은 글을 보여달라고 하시니, 나에 대한 평판을 너무 좋게 들으신 듯합니다.
나는 젊어서 진사進士를 통하여 유사有司에게 뽑혔고, 시부詩賦를 짓는 것을 공부하여 정시程試에 대비하여 무릇 세 차례 응시한 끝에 급제하여, 사군자士君子들과 서로 면식이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왕왕 나의 성명을 말하고 또 서로 교유하여 좋아하는 마음으로 혹 나의 글을 지나치게 칭찬하였습니다.
따라서 족하로 하여금 나의 허명虛名을 듣고 내가 지은 글을 보고싶어 하게 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나는 어려서 아버님을 잃고 집이 가난하여 녹사祿仕를 탐내어 어머님을 봉양하느라, 스승을 찾아가 경전을 깊이 공부하여 성인의 유업遺業을 배울 겨를이 없었고, 서사書史를 대충 섭렵하여 우선 세상 사람들을 따라 이른바 시문時文이란 것을 지었으니, 모두 경전經傳을 천착하여 여기의 것을 옮겨 저기에 대우對偶를 맞추어 부박浮薄한 문장을 지으면서 오직 당시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까 염려할 뿐이었고, 고인古人들처럼 우뚝이 자립自立하는 글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유사有司가 잘못 채택하여 누차 과장科場에서 많은 선비들 앞에 뽑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급제한 이래로 스스로 종전에 지은 글들은, 유사에게 뽑히고 장자長者의 인정을 받기에 부족하다고 여겨, 비로소 문장 짓는 것을 크게 바꾸어 거의 수립한 바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말이 나가면 죄가 따라 이르고 학문이 이루어지면 몸은 욕을 당하여, 저것을 해서는 명예名譽를 얻고 이것을 해서는 화환禍患을 받았으니, 이는 분명한 징험徵驗입니다.
대저 시문時文은 비록 부박浮薄하고 공교工巧하다고 하나 그 공부는 또한 쉽지 않습니다.
나는 천품이 좋지 못하여 억지로 공부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세상 사람들이 지은 것에 비하면 더욱 잘 지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녹사祿仕를 취하고 명예를 훔칠 수 있었던 것은 시속時俗을 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선배께서 나이 젊고 지기志氣가 왕성하여 세상에서 영예榮譽를 취하고 싶어 하시니, 그렇다면 시속을 따르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천성天聖 연간에 천자께서 조서詔書를 내려 학자들에게 부화浮華한 글을 짓지 못하도록 신칙申飭하시니, 그 후로 풍속이 크게 변하여 지금 사대부들이 지은 글은 찬연燦然하게 양한兩漢문풍文風이 있습니다.
선배께서 가서 이를 배우시면 시속을 따라 영예를 취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지극한 경지에 이르면 곧바로 양한兩漢의 선비들과 나란히 어깨를 겨룰 수 있을 것입니다.
나 같은 자는, 예전에 지은 글은 이미 배울 만한 것이 못 되고, 그 후에 지은 것은 조심하여 배우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머뭇거리며 감히 지은 글을 내놓지 못하는 것이 이 때문입니다.
주역周易곤괘困卦에 이르기를 “말을 하면 믿지 않으리라.”라고 하였으니, 사람이 바야흐로 곤궁할 때에는 그 말을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지금은 곤궁하다 할 만하니, 어찌 내 말을 족하가 믿어주시겠습니까.
편지를 이미 많이 보내주셨고 또 말씀이 간절하시기에 감히 답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양찰諒察해주시기 바랍니다.


역주
역주1 與荊南樂秀才書 : 이 편지는 仁宗 景祐 4년(1037)에 쓴 것이다. 景祐 3년에 썼다고 주장하는 설은 맞지 않다. 本集 권68의 樂秀才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에 〈與樂秀才第一書〉라는 제목이 붙어 있고 제목 아래 注에 ‘景祐三年’이라 하였다.
그 편지에서 “겨울부터 봄까지 陰雨가 그치지 않으니, 夷陵의 풍토가 맞지 않아 근래에 자주 질병을 앓고 게다가 일이 몹시 많았습니다. 이런 까닭에 지금까지 답서를 보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自冬涉春 陰洩不止 夷陵水土之氣 比頻作疾 又苦多事 是以闕然]”라고 하였다.
景祐 3년 5월에 歐陽脩가 夷陵縣令으로 좌천되어 10월에 任所에 이르렀고, 景祐 4년에 乾德縣令으로 자리를 옮겼다. 따라서 〈與樂秀才第一書〉는 경우 4년 봄에 쓴 것임이 틀림없으므로, 두 번째 편지인 이 글은 경우 4년 이릉현령으로 있을 때 쓴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荊南은 지명으로 江陵府를 가리킨다. 강릉부에 荊南節度使의 공관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 것이다. 秀才는 宋나라 때 과거에 응시한 사람의 통칭이다.
역주2 : 악
역주3 : 여러 편의 글을 묶어 책으로 만든 것이다.
역주4 啓事 : 사정을 陳達하는 글로, 편지를 뜻한다.
역주5 僕 有罪之人 : 夷陵縣令으로 좌천된 상태이기 때문에 죄인으로 자처한 것이다.
역주6 僕少從進士 擧於有司 : 歐陽脩가 19세 때 州에서 거행한 鄕試에 합격하여 貢士로 禮部試에 추천된 것을 말한다. 향시에 급제한 사람을 鄕進士라 한다.
역주7 程試 : 규정에 있는 程式 考試로 과거를 말한다. 여기서는 禮部試인 進士試를 가리킨다.
역주8 三擧而得第 : 구양수가 天聖 원년, 5년, 8년, 세 차례 과거에 응시했다. 天聖 원년(1023)에는 17세로 처음 隨州의 鄕試를 보았지만 그의 用韻이 官韻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낙방하였고, 天聖 5년(1027)에는 禮部試에 낙방하였다. 그리고 천성 8년(1030) 정월에 禮部에서 실시한 進士試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역주9 祿仕 : 祿俸을 받아 생계를 꾸리기 위해 벼슬하는 것이다.
역주10 時文 : 科文으로 쓰이는 四六騈儷文을 가리킨다.
역주11 先輩 : 唐나라 때 같은 시기에 進士試에 급제한 사람들끼리 서로 상대방을 부르는 호칭이었는데, 후대에는 文人을 부르는 敬稱으로 쓰였다. 여기서는 樂秀才를 가리킨다.
역주12 天聖中……勅學者去浮華 : 《宋史》 권9 〈仁宗紀〉 天聖 7년 5월 조에 “庚申日에 조서를 내려 文弊를 경계하였다.[庚申 詔戒文弊]”라 하였다.
역주13 在易之困曰 有言不信 : 《周易》 困卦 卦辭에 “困은 亨通하고 貞하니, 大人이라 吉하고 허물이 없으니, 말을 하면 믿지 않으리라.[困 亨貞 大人 吉 无咎 有言 不信]”라고 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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