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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2)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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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此一段議論 史漢以來所不到者
嗚呼
五代之亂 極矣 傳所謂之時歟인저
當此之時하야 臣弑其君하고 子弑其父어늘 而搢紳之士 安其祿而立其朝하야 充然無復廉恥之色者皆是也
吾以謂自古忠臣義士 多出於亂世어늘
而怪當時可道者何少也하노니 豈果無其人哉
雖曰干戈興하고 學校廢하야 而禮義衰하고 風俗隳壞 至於如此 然自古天下 未嘗無人也
吾意必有潔身自負之士 嫉世遠去而不可見者로라
自古材賢於中而不見於外하야 或窮居陋巷하야 委身草莽하니 이어든
況世變多故而之時乎
吾又以謂必有負材能修節義而沈淪於下泯沒而無聞者라하야
求之傳記호되 而亂世崩離하고 文字殘缺하야 不可復得이라
然僅得者四五人而已
然與其食人之祿하야 俛首而包羞 孰若無媿於心하야 放身而自得
吾得二人焉하니이라
勢利不屈其心하고 去就不違其義 吾得一人焉하니이라
苟利於君이면 以忠獲罪하니 何必自明이리오
有至死而不言者하니 此古之義士也
吾得一人焉하니이라
五代之亂 君不君하며 臣不臣하며 父不父하며 子不子하고 至於兄弟夫婦人倫之際하야도 無不大壞而天理幾乎其滅하니
於此之時 能以孝悌自修於一鄕而風行於天下者 猶或有之
然其事迹不著而無可紀次하니 獨其名氏或因見於書者 吾亦不敢沒이라
而其略可錄者 吾得一人焉하니이라
作一行傳하노라


09. 《오대사五代史》 〈일행전一行傳〉에 대한
이 일단의 의론은 《사기史記》‧《한서漢書》 이래 누구도 이르지 못한 것이다.
아아!
오대五代의 혼란이 극도에 이르렀으니, 옛글에 이른바 “천지天地가 닫히면 현인賢人이 숨는다.”는 때일 것이다.
이 당시에 신하는 자기 임금을 시해하고 자식은 자기 아버지를 시해하거늘, 사대부들은 모두 녹봉을 편안히 받으며 조정에 서서 만족스러워할 뿐 더 이상 염치廉恥의 기색도 없는 자들이었다.
나는 생각비대 예로부터 충신忠臣의사義士들은 혼란한 세상에서 많이 나오는 법이다.
그런데 당시에는 말할 만한 이들이 어찌하여 적은지 괴이하게 여기노니, 어찌 그러한 사람이 없었으리오.
비록 전란이 일어나고 학교가 없어져 예의禮義가 쇠퇴하고 풍속風俗이 파괴된 것이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으나 예로부터 천하에 훌륭한 사람이 없었던 적은 없었다.
나는 생각건대 자신을 깨끗이 하여 자부심을 가진 선비로서 세상을 미워하여 멀리 떠나 볼 수 없는 이들이 반드시 있었을 것이다.
예로부터 재주 있고 어진 인재로서 내면에 재능을 온축하고 밖으로 드러내지 않은 채, 혹 누추한 거리에 곤궁히 살면서 산야山野에 몸을 의탁한 이들이 있었으니, 비록 안자顔子의 행실이라도 중니仲尼를 만나지 못했다면 이름이 드러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세상에 변고變故가 많아 군자의 도가 사라질 때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나는 또 생각건대 재능을 자부하고 절의節義를 지키면서 아래에 침체한 채 민몰泯沒되어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이들이 반드시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전기傳記에서 찾아보았지만, 난세의 북새통에 문헌이 잔결殘缺하여 찾아낼 수 없었다.
그런데도 겨우 찾아낸 자가 4, 5명이다.
산림山林에 살면서 고라니‧사슴과 어울리는 것은 비록 중도中道라 할 수는 없지만, 남의 녹봉을 먹으면서 머리를 숙인 채 수치심을 품기보다는 차라리 마음에 부끄러움 없이 몸을 한가히 풀어놓은 채 유유자적하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나는 이러한 이를 두 사람 찾았으니, 정오鄭遨장천명張薦明이다.
권세와 이익이 그 마음을 굽히지 못하고 벼슬에 나아가고 떠남에 의리를 어기지 않는 이를 나는 한 사람 찾았으니, 석앙石昻이다.
진실로 임금에게 이로우면 충성을 다하다 죄를 얻었으니 무엇하러 굳이 자신을 변명하리오.
죽음에 이르러도 말하지 않는 이가 있으니, 이는 옛날의 의사義士이다.
내 그러한 이를 한 사람 찾았으니, 정복빈鄭福贇이다.
오대五代난세亂世에는 임금은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는 신하답지 못하고 아버지는 아버지답지 못하고 자식은 자식답지 못하였으며, 형제‧부부의 인륜人倫에 이르러서도 크게 무너져 천리天理가 거의 소멸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러한 때에 효제孝悌로 한 고을에서 그 행실을 스스로 닦아서 그 풍범風範이 천하에 널리 알려진 이는 그래도 혹 있었다.
그러나 그 사적이 드러나지 않아 기술할 수 없으니, 오직 그 이름과 성씨만이라도 혹 서적에 드러난 이들을 내가 감히 민몰泯沒시킬 수 없다.
그 대략 기록할 만한 이를 내 한 사람 찾았으니, 이자륜李自倫이다.
일행전一行傳〉을 짓노라.


역주
역주1 五代史一行傳論 : 이 글은 《新五代史》 〈一行傳〉의 서문이다. 一行은 한 가지 德行 또는 한 가지 특출한 행실을 뜻한다. 〈一行傳〉에 실린 인물들은 모두 한 가지씩 특출한 節操가 있는 이들이다. 《後漢書》에 〈獨行傳〉에 있고, 唐나라 李吉甫가 〈一行傳〉을 지었는데, 歐陽脩의 〈일행전〉은 이러한 저술들을 본뜬 것이다.
역주2 天地閉賢人隱 : 《周易》 坤卦 〈文言〉에 “天地가 변화하면 草木이 무성하고 천지가 닫히면 賢人이 은둔하나니, 《易》에 이르기를 ‘주머니 끈을 묶듯이 하면 허물도 없고 칭찬도 없다.’ 하였으니, 삼가야 함을 말한 것이다.[天地變化 草木蕃 天地閉 賢人隱 易曰 括囊无咎无譽 蓋言謹也]”라고 하였다.
역주3 : 온
역주4 雖顔子之行……而名不彰 : 顔子는 孔子의 제자인 顔回를 가리키는데, 자가 子淵이라 顔淵이라고도 부른다. 그는 공자의 제자들 중에서 德行으로 가장 이름이 알려진 수제자로, 陋巷, 즉 누추한 거리에서 安貧樂道의 삶을 살았다고 한다. 《史記》 권61 〈伯夷列傳〉에 “伯夷와 叔齊는 비록 어질었지만 孔子의 말씀을 통해 이름이 더욱 드러났고, 顔淵은 비록 학문이 독실했지만 천리마의 꼬리에 붙어서 그 행실이 더욱 드러나게 되었다.[伯夷叔齊雖賢 得夫子而名益彰 顔淵雖篤學 附驥尾而行益顯]”라고 하였다. 여기서 천리마는 孔子를 비유한 것이다.
역주5 君子道消 : 세상이 혼란하여 小人은 세력을 얻고 君子는 위축되는 것을 뜻한다. 《周易》 否卦 〈彖傳〉에 “‘否는 人道가 아니니 군자의 바름을 지킴에 이롭지 않으니, 大가 가고 小가 온다.’는 것은 天‧地가 사귀지 않아 만물이 통하지 못하고, 上‧下가 사귀지 않아 천하에 나라가 없는 것이다. 陰이 안에 있고 陽이 밖에 있으며, 柔가 안에 있고 剛이 밖에 있으며, 小人이 안에 있고 君子가 밖에 있으니, 小人의 도는 자라나고 군자의 도는 사라지는 것이다.[否之匪人 不利君子貞 大往小來 則是天地不交而萬物不通也 上下不交而天下无邦也 內陰而外陽 內柔而外剛 內小人而外君子 小人道長 君子道消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역주6 處乎山林而群麋鹿 雖不足以爲中道 : 隱者 桀溺이 혼란한 세상을 피해 숨어 살지 않는다고 비판한 데 대해, 孔子가 “鳥獸와 더불어서 어울려 함께 살 수는 없으니 내가 사람과 함께 살지 않고 누구와 더불어 살겠는가.[鳥獸不可與同群 吾非斯人之徒與而誰與]”라고 하였다. 《論語 微子》
梁나라 때의 高士인 劉峻의 〈廣絶交論〉에서 산림에 은둔하는 삶을 묘사하면서 “홀로 높은 산 정상에 서서 즐겁게 고라니, 사슴과 어울려 함께 산다.[獨立高山之頂 驩與麋鹿同群]”라고 하였다.
역주7 鄭遨(오) : 字는 雲叟이고, 滑州 白馬 사람이다. 唐 昭宗 때 進士試에 낙방하자 少室山에 들어가 道士가 되었고, 후에 華陽에 살면서 도사 李道殷‧羅隱之 등과 어울렸다. 節度使 劉遂凝, 後唐 明宗, 後晉 高祖 등이 누차 벼슬을 주면서 불렀으나 모두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後晉 高祖가 逍遙先生이란 호를 내렸다. 《新五代史 권34 鄭遨傳》
역주8 張薦明 : 燕 땅 사람으로 젊어서는 儒學을 공부했고 후에는 道士가 되어 老莊의 학설에 정통하였다. 後晉 高祖가 그를 청하여 궁궐에 들어와 《道德經》을 강론하게 하고 玄通先生이란 호를 내렸다. 《新五代史 권34 張薦明傳》
역주9 石昻 : 靑州 臨淄 사람으로, 집안에 藏書가 많았고 학문이 깊었으며 사방의 인사들과 사귀기를 좋아하고 벼슬길에 나가려 하지 않았다. 후에 節度使 符習의 위임을 받아 臨淄令이 되었다. 부습의 監軍인 楊彦朗의 이름이 石이었는데 부습이 조정에 들어가고 양언량이 知留後事를 맡고 있었다. 석앙이 공무로 官府에 가서 배알하는데 인도하는 사람이 양언랑의 이름인 石자를 피휘하여 石昻의 성을 바꾸어 右昻이라 불렀다. 이에 석앙은 그 자리에서 나아가 양언량을 쳐다보면서 꾸짖으며 말하기를 “內侍는 어찌하여 사적인 일로 공적인 일을 해치시오. 나의 성은 石이지 右가 아니오.”라고 하니, 양언량이 몹시 노하여 옷깃을 떨치고 그 자리를 떠났고, 석앙은 즉시 관직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자식들에게 말하기를 “내 본래 벼슬하고 싶지 않았더니, 亂世에 과연 刑人에게 욕을 당하였구나. 자손들은 나를 경계로 삼아라.”라고 하였다. 《新五代史 권34 石昻傳》
역주10 程福贇(윤) : 家系는 알 수 없다. 젊을 때부터 軍卒이 되어 戰功으로 누차 승진하여 洛州 團練使가 되었다. 後晉 開運(944~946) 연간에 거란이 침공하여 出帝가 북쪽으로 出征하였다. 정복윤은 당시 奉國左廂都指揮使로 있었는데 휘하의 軍士 文榮 등 8명이 謀叛하여 本營에 불을 놓았다. 정복윤은 부하들과 불을 끄다가 큰 상처를 입었으나 출정 중인 황제를 동요시킬까 염려하여 그 사실을 보고하지 않았다. 그런데 同列이지만 정복윤보다 지위가 낮았던 軍將 李殷이 이 일을 기화로 삼아 자신이 정복윤의 자리를 차지하고자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정복윤이 군사들과 작당하여 모반하려고 불을 질렀기 때문에 보고하지 않았다고 모함하였다. 이에 出帝가 정복윤을 下獄시키고 鞫問하였으나 정복윤은 끝내 변명하지 않고 마침내 죽었다. 《舊五代史 권95 程福贇傳》
역주11 李自倫 : 지금의 河北省 深縣 지역에 해당하는 深州 사람인데 深州 司功參軍으로 있으면서 6世가 한집에 함께 산 일로 조정의 旌表를 받았다. 《新五代史 권34 李自倫傳》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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